-
[김건수의 只今 여기] 홍세화, 그리고 進步政黨의 길
지난 釜山 總選 現場에서 强烈한 印象을 남긴 地域을 꼽을 때 연제구를 빼놓기 힘들다. 노정현 候補의 善戰은 少數政黨人 進步黨의 旗幟 아래 거둔 結實이라는 點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盧 候補는 輿論調査 때마다 誤差範圍 밖 優勢로 1位를 달리면서 한때 2位 國民의힘 候補와의 隔差를 20%P 가까이 벌리기도 했는데, 釜山에서는 말 그대로 前代未聞의 異變이라 할 만했다. 野圈 單一化 競選 勝利가 奏效했다는 分析, 結局 個人의 力量이 일궈낸 成果라는 診斷 等이 나왔다. 어쨌든 盧 候補는 이를 動力 삼아 내처 當選의 門턱까지 내달렸던 것이다.
勿論 總選 結果는 豫想과 달랐다. 保守 票心의 막판 結集 때문인지 盧 候補는 8.83%P(1萬 1109票) 差異로 落選했다. 釜山에서 進步政黨의 첫 國會 進出을 期待했던 사람들도 落膽했다. 行政·司法 機關이 몰려 있고 中産層이 많이 居住하는 蓮堤區는 1996年부터 2012年까지 保守政黨이 勝利한 地域이다. 旣存 進步政黨들이 基盤으로 삼았던 곳과 政治 地形이 사뭇 다르다. 여기서 進步政黨의 이름으로 折半 가까운 票를 얻었으니 當落을 떠나 歷史的 事件임에 分明하다.
이 場面은 이番 總選의 또 다른 안타까운 場面과 交叉하면서 부딪친다. 進步政黨 最初로 5線에 挑戰했던 심상정 議員의 總選 敗北와 政界 隱退 宣言. 正義黨은 녹색당과 合當해 새로운 길을 摸索했으나 單 1席도 얻지 못한 채 20年 만에 制度圈 바깥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巨大 兩黨의 거센 對立 構圖를 勘案한다 해도 衝擊的인 成績表가 아닐 수 없다. 綠色正義黨만의 問題가 아니다. 進步政黨의 沒落은 이番 總選 結果가 만든 否定할 수 없는 現實이다. 進步黨이 地域區 1席을 獲得한 것이 全部다.
얼마 前 他界한 홍세화 先生을 떠올리는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理念과 陣營의 오른쪽은 勿論이고 民主 勢力 나아가 進步 左派에 對해서도 嚴正한 批判을 아끼지 않았던 故人의 生涯가 겹치기 때문이다. 韓國 社會에 ‘똘레랑스’(寬容) 槪念을 傳했던 作家이자 言論人·社會運動家로서의 삶 自體가 自由와 平等을 向한 旅程이었다. 그는 나이·經歷·權威 따위를 내세우지 않았고 學緣·地緣에서 자유로웠다. 2011年 進步新黨 黨代表에 出馬할 때 進步政黨을 象徵하는 盧會燦 議員 等 核心 人物들의 脫黨을 매섭게 叱咤한 逸話는 有名하다. 그에게 똘레랑스는 無條件的 寬容을 뜻하지 않는다. 똘레랑스 안에 基本的으로 批判的 精神이 內在돼 있다는 意味다.
살아生前 그가 貴히 여긴 또 하나의 德目은 ‘實踐’이다. 無數한 講演과 對話에서 그는 說破했다. “行動으로 證明되지 못한 道德的 優越感은 僞善이자 道德의 槪念을 타락시키는 罪惡이다.” 입으로는 進步를 말하면서 所有와 權力의 欲望에 사로잡힌 ‘586 世代’의 墮落을 아프게 꼬집은 것도 그런 緣由에서다. 理性과 啓蒙의 힘을 信賴하면서도 理論的 思惟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몸으로 直接 實行에 옮기는 實踐家. 이게 그의 眞面目이었다.
生의 끝자락에 이르러 마지막 남긴 한 마디는 ‘謙虛함’이었다고 한다. 冷徹한 批判도 重要하고 徹底한 實踐도 所重하지만, 人間이 世上을 對하는 態度의 核心은 謙遜이어야 한다는 것. 自身을 낮추고 스스로를 省察하면서 世上을 헤아렸던 故人의 삶이 바로 그랬다. ‘오늘날 左右 陣營이 共히 謙遜을 모르는 傲慢함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돌아보면 그의 삶과 죽음이 온통 그런 警鐘으로 들린다.
大韓民國의 進步政治가 消滅의 危機에 내몰렸다는 憂慮 섞인 展望이 播多하다. 巨大 兩黨의 頑固한 對立 構圖라는 外的 要因의 影響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自己 正體性을 제대로 세우지 않고 具現해 내지 못한 內部的 要因도 크다. 삶의 現場에서 다양한 價値를 議題로 만들어내야 하는 進步政治의 所任은 如前히 莫重하다. 勞組 바깥의 零細 企業 勞動者들이 있고, 深化하는 社會 兩極化로 疏外되고 差別받는 階層이 存在한다. 進步政黨이 있어야 할 곳은 이런 자리다. 보다 낮은 곳에서 共同體의 그늘과 弱者들의 아픔을 챙겨야 한다. 國會 議席을 못 얻었다고 해서 進步政黨이 설 자리를 잃었다는 건 잘못된 視角이다. 特定 階層과 이슈를 代辯하는 政策 政黨으로서의 可能性은 흔들림 없이 打診돼야 한다.
只今 巨大 兩黨의 極端的 對立으로 인한 弊害는 實로 深刻하다. 固着化하는 兩黨 獨占 構圖를 깨고 多樣性이 代辯되는 社會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進步政黨의 길은 다시 열려야 한다. 이 時點에서 이탈리아 哲學者 안토니오 그람시의 洞察을 되새길 必要가 있겠다. 生前에 홍세화 先生도 곧잘 言及했던 말이다. ‘理性으로 悲觀하더라도 意志로 樂觀하라.’
2024-05-02 [17:58]
-
[김건수의 只今 여기] 謙遜과 反省 vs 我執과 驕慢
쉬이 제 몸을 드러내지 않는 봄이다. 터지지 않는 꽃망울, 그 망설임의 緣由를 한낱 人間이 알 길은 없다. 꽃 祝祭를 延期해야 한다는 傳喝, 그래서 全國의 地自體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뉴스가 봄消息을 앞지를 뿐이다.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봄의 더딘 걸음은 어쩌면 人間의 躁急함을 試驗하기 위한 건 아닐까. 지긋이 기다리면 될 일, 어찌 그리 안절부절못하느냐는 大自然의 귀띔 아닐까.
造給과 미숙의 亂場으로 치자면, 只今의 大韓民國 總選 現場만 한 곳을 찾기 힘들다. 選擧가 不過 一週日 앞인데, 제대로 된 政策 競爭은 失踪 狀態다. 代身 無分別한 善心性 公約과 허술하고 어설픈 政策, 相對를 낮추보는 막말·辱說이 亂舞한다. 實力으로 딱히 내세울 게 없으니 네거티브로 反射利益을 取하겠다는 嫌疑가 짙다. 民生을 말하지 않는 歷代 最惡의 空虛한 選擧라는 診斷까지 나오는 마당이다.
이番 總選 構圖는 ‘政權 審判論’과 ‘政權 支持論’의 對決이라고 한다. 不過 한 달 前만 해도, 總選 版圖는 野圈의 大體的인 劣勢로 分析됐다. 앞서 親命(親李在明系) 爲主로 이뤄진 더불어民主黨의 公薦 不條理가 國民들의 公憤을 부른 터였다. 그런데 雰圍氣가 瞬息間에 바뀌었다. 그 짧은 時間 野黨이 特別히 잘한 게 없는데도 野圈의 相當한 優勢로 版圖가 기울었다. 여기에는 釜山·慶南의 요동치는 民心도 包含된다. 大體 어찌 된 영문인가.
그 原因을 尹錫悅 大統領의 고집스러운 國政運營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李鐘燮·황상무 論難’이 代表的이다. 特히 李鐘燮 濠洲大使 事態는 모든 게 疑問투성이다. 被疑者 身分, 出國禁止 狀態에서 任命돼 論難을 빚은 지 25日이나 흐른 뒤에야 辭退가 決定됐다.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서둘러 바로잡지 않고 固執을 부리다 수렁에 빠진 케이스다. 國民 눈높이에서 한참을 벗어난 ‘側近 감싸기’였음은 勿論이다.
돌아보면 類似한 事例가 한둘이 아니었다. 김건희 女史 名品 가방 疑惑, 硏究·開發(R&D) 豫算 削減과 ‘입틀幕’ 事件, 菜某 上兵 死亡 搜査 外壓 疑惑, 最近의 의·정 葛藤까지. 한때는 支持率에 戀戀하지 않는 大統領의 모습이 우직, 大凡, 뚝심으로 비치기도 했다. 只今은 獨善과 不通의 産物이라는 評價가 支配的이다. 最近의 醫療 事態를 對하는 態度도 그렇다. 미리 正答을 定해놓고 밀어붙이니 反撥을 부를 수밖에 없다. 方向이 틀렸다는 게 아니다. 섬세한 디테일과 柔軟한 리더십으로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政治的 調整 能力이 必要하다는 뜻이다. ‘大파 한 段 값 875원’은 24次例의 民生討論會가 얼마나 虛妄한 자리였는지 如實히 보여준 事件이다. 政治 指導者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助言 듣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外面하는 것을 오만이라 한다.
大統領의 行步를 制御해 바른길로 이끌지 못한 執權與黨도 問題다. 줄곧 論難이 됐던 黨政 關係의 回復이 成功한 것 같지도 않고, 選擧 局面에서의 리더십도 別 成果를 내지 못하는 듯하다. 게다가 選擧가 막판으로 치닫자 欠집내기식 막말이 늘어나는 形局이다. “쓰레기” “개 같은”을 내뱉는 한동훈 國民의힘 非對委員長의 險한 입은 自充手에 가깝다. 早急함 속에서는 좋은 政策이 나오기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公約 中에는 財源 마련 方案이 없거나 稅收 펑크가 憂慮되는 것들이 많다. 善心性 포퓰리즘 公約으로 票心을 노리는 건 有權者에 對한 欺瞞이다.
그렇다면 野黨은 잘해서 支持率 反戰의 德을 본 걸까. 決코 그렇지 않다. 大統領과 與黨의 헛발질이 甚하다 보니 나라의 將來를 걱정한 國民들의 어쩔 수 없는 選擇肢가 됐다는 分析이 衆論을 이룬다.
李在明 더불어民主黨 代表의 言說과 行動은 이미 驕慢의 溫床, 막말의 發源地라는 批判을 받은 지 오래다. ‘大庄洞 裁判’이나 ‘非命橫死’ 公薦 等 黨 안팎의 尖銳한 事案에 對해 個人 或은 黨 代表로서 이렇다 할 反省과 謝過의 메시지를 내놓은 적이 없다. ‘2찍’이나 ‘江原道 貶下’ 發言은 特히 失望스럽다. 地域感情 打破는 民主黨 正體性의 뿌리를 이루는 象徵과도 같다. 國民과 特定 地域을 우습게 보는 態度는 絶對 容納될 수 없다.
民心 離叛은 그 어떤 특별하고 巨大한 事案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람 마음 밑바닥의 이런 傲慢과 不遜에서 비롯한다. 大統領이든 與黨 代表든 野黨 代表든 只今까지 ‘未安하다’거나 ‘反省한다’고 眞心 어린 말을 하는 걸 보지 못했다. 國民으로부터 委任받은 權限을 낮은 姿勢로 民意에 따라 받들어 遂行하는 것. 여기에 國民의 마음을 얻는 길이 있다. 이番 總選 構圖는 ‘政權 審判’ 代 ‘政權 支持’라기보다는 ‘謙遜·反省’ 代 ‘我執·驕慢’으로 보는 게 옳다. 最終 판勢는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2024-04-02 [18:14]
-
[김건수의 只今 여기] 生命 다루는 醫師들이 그럴 理 없다
大同江물이 풀린다는 憂愁가 한참 지났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天地萬物이 氣韻生動하는 節氣. 凍土를 견딘 풀과 나무들이 볕 좋은 뒷山 언덕에서 싹 틔우는 소리 들리는 듯하다. 봄이 한창 몸 풀 채비에 분주하니, 온 世上은 이내 울긋불긋 꽃 天地로 흐드러질 테다.
봄 기지개가 이리 반가운 이들이 한둘이겠냐만, 겨우내 病을 앓은 사람들만 할까. 萬物이 깨어나는 이즈음은 肉身의 苦痛으로 서러웠던 患者들이 回復과 治癒의 懇切한 祈禱를 올리는 시즌이다. 그런데 只今 우리나라 醫療 現場은 꽁꽁 얼어붙어 아직도 차갑고 酷毒한 겨울이다. 醫師들의 集團行動으로 醫療 空白이 長期化할 憂慮가 커지면서 國民의 健康權이 危機에 處했다는 답답한 消息이 봄의 길목을 가로막는다.
안타까운 마음에 히포크라테스 宣誓를 찾아본다. 醫療人이 지켜야 할 이 倫理綱領은 古代로부터 傳承돼 오다 1948年 世界意思協會의 ‘제네바 宣言’으로 確立된 以來 여러 次例 修正돼 只今에 이른다. 그中 가장 눈길 끄는 대목. ‘나는 患者의 健康과 生命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이런 內容도 있다. ‘나는 人種·宗敎·國籍·政黨·社會的 地位 如何를 超越해 오직 患者에 對한 義務를 지키겠노라.’ 醫師의 本分은 生命을 最優先視하는 高貴한 뜻에 있다는 것. 이는 醫療가 돈이나 名譽를 넘어선 超越的 崇古함의 領域임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醫師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醫療 現場을 떠나는 集團行動에는 그럴 만한 뜻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歷史的 事例로부터 그것을 살필 수 있다. 醫藥分業 政策에 맞선 2000年, 遠隔 醫療에 反對한 2014年, 코로나19 事態 때 醫大 定員 擴大를 막은 2020年. 그때마다 醫療界는 團體的으로 抵抗했는데, 國民들은 그 緣由를 따져 묻는 機會를 가질 수 있었다. ‘大韓民國에서 醫師란 果然 무엇인가’라는 根本的 質問이 그것이다. 醫師들은 그렇게 醫療界 內部 矛盾을 加減 없이 드러내고 國民들에게 覺醒의 契機를 提供했다. 所重한 功勞다.
現在 全國에 번진 醫療 空白 事態는 專攻醫들이 앞장선 4年 前과 많이 닮았다. 當場 3月에는 專任醫와 敎授들마저 病院을 떠날 可能性이 점쳐진다. 患者들의 被害 擴散과 醫療 大亂의 激化는 豫定된 手順이다. 하지만 醫師들은 이番 事態 속에서도 逆說의 眞理를 드러내는 데 寄與한다. 2024年 醫大 庭園은 35年 前과 비슷한 規模인데 그 期間 韓國의 人口는 21.9% 增加했다는 點, 老人 人口가 5倍 늘어나는 동안 醫師 人力은 凍結됐다는 點, 人口 1000名當 醫師 數가 韓國은 2.6名으로 日本(2.6名)이나 美國(2.7名)과 비슷하다는 醫師團體의 說明은 알고 보면 韓醫師까지 包含한 것으로, 韓醫師를 除外하면 醫師 數는 2.18名으로 經濟協力開發機構(OECD) 國家 中 第一 적다는 點 等等. 醫師들이 集團行動으로 强勁하게 이슈化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事實들이다.
時間이 지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는데, 그걸 깨닫게 해 준 寄與度 있다. 우리나라 應急·必修 醫療體系를 떠받치는 專攻醫 體制가 그것이다. 專攻醫는 集團行動 때마다 反復되는 醫療 空白의 張本人이다. 極甚한 勞動 强度에 시달리면서도 醫大 定員 擴大에 앞장서서 反對하는 矛盾的 行動을 보이는 理由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중에 專門醫가 돼 開院하면 高所得을 保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畸形的 醫療 構造를 바꾸지 않는 限 事態의 根本的 解決은 難望하다. 이렇게 韓國 醫療의 민낯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것은 專攻醫들이 勤務地 離脫을 통해 直接 몸으로 證明한 德分이다.
醫師는 우리 社會의 엘리트다. 생각 없이 集團行動에 나설 理가 없다. 끝내 破局의 길을 걷고자 願할 理도 없다. 不條理한 現實을 보여줌으로써 스스로 反面敎師의 事例가 되고, 國民들에게 그 深刻性을 刻印하려는 큰 뜻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一部는 所重한 일터까지 果敢히 抛棄했으니 그야말로 ‘殺身成仁’이다. 醫療人들의 崇高한 意志, 獻身과 功勞를 잊어선 안 되겠다.
한 가지 敷衍하고자 한다. 集團行動 같은 極端的 手段을 통해 自身의 意志를 實現하려는 醫師들이 있는 反面, 어떤 일이 있어도 醫療 現場을 떠나지 않는 醫師들도 있다는 事實이다. 사람의 生命과 목숨을 最優先 價値로 받들라는 히포크라테스 宣誓를 默默히 實踐하는 醫師들. 이들이 醫師의 大多數를 차지한다고 믿어 疑心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大韓民國 醫師들의 意中을 代表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對話를 통해 共感帶를 넓히는 方向으로 事態 解決의 실마리를 풀어야 할 때다. 現場을 떠난 醫師들은 더 늦기 前에 復歸하는 게 옳다. 集團行動으로 보여준 醫師들의 참뜻은 이미 國民에게 다 傳達됐다. 이 程度면 充分하다.
2024-02-27 [18:08]
-
[김건수의 只今 여기] 幸福한 大統領의 길
2020年 出刊된 〈韓國의 不幸한 大統領들〉은 우리나라에서 拍手받고 退任하는 大統領이 드문 理由를 살핀 冊이다. 歷代 大統領들을 國內 政策·外交·言論·리더십 같은 다양한 側面에서 分析한 結果가 그 根據다. ‘大權’이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韓國의 大統領制는 ‘帝王的’인데, 最高 統治權者가 無所不爲의 힘으로 自己 생각을 밀어붙이는 行態야말로 不幸의 주된 原因이라는 게 冊의 要旨다.
이 冊의 話頭가 只今 눈길을 끄는 理由는 22代 總選이 不過 두 달 半 앞으로 바싹 다가와서다. 韓國의 政治 構造上 大統領과 總選의 力學關係는 政權의 命運을 左右하는 重大 要素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現在 大統領室과 政府·與黨의 움직임이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것도 그런 理由다.
이즈음 尹錫悅 大統領의 行步는 두 個의 키워드로 要約된다. ‘法律案 拒否權’과 ‘善心性 政策’이 그것이다. 그런데 拒否權은 政治 攻勢에 對한 正當한 行事로 認識되고, 善心性 政策은 ‘民生’을 위한 것으로 包裝된다. 여기에 問題의 深刻性이 있다.
尹 大統領의 拒否權 行事는 只今까지 여덟 次例를 記錄 中이다. 糧穀法, 看護法, 노란봉투법, 放送3法(放送法·방송문화진흥회法·韓國敎育放送公社法)과 이른바 ‘雙特檢法’(김건희 女史 도이치모터스 株價 造作 疑惑 特檢法·大壯洞 50億 클럽 特檢法)이 그 目錄이다. 現在 苦心 中인 梨泰院 慘事 特別法에 對한 拒否까지 더해지면 9回가 된다.
尹 大統領의 拒否權 行事는 歷代 大統領(李承晩 43回, 朴正熙 7回, 盧泰愚 7回, 盧武鉉 6回, 李明博·朴槿惠 各 1回)의 事例와 比較해도 한참 過하다. 李承晩 前 大統領을 除外하면 尹 大統領의 拒否權 行事가 斷然 最多다. 아직 大統領 任期가 折半 以上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拒否權은 憲法에 規定된 大統領 固有 權限이지만 違憲 或은 國益 侵害 等 憲法的으로 正當한 事由가 있어야 한다. 拒否權이 ‘轉嫁의 報道’가 된 이 狀況이 果然 正常的인지 疑問이다.
特히 ‘김건희 特檢法’ 反對는 拒否權 論難의 核心을 이룬다. 모든 疑惑을 털어낼 機會를 大統領 스스로 저버렸다는 點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國民 70% 以上이 이 法案을 贊成하고 65% 以上이 大統領의 拒否權 行事를 反對한다. ‘김건희 리스크’는 最近 名品 가방 收受 疑惑까지 겹쳐 尹 大統領과 한동훈 國民의힘 非對委員長의 正面衝突로 번진 狀況이다.
結局 拒否權 濫用은 自身과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獨斷’의 意味로 읽힐 수밖에 없다. 大統領이 國民 輿論이나 民心의 磁場으로부터 漸漸 멀어져가고 있다는 意味다.
拒否權 行使의 反對쪽에 ‘善心性 政策’이 있다. 이 둘은 銅錢의 兩面처럼 보인다. 지난 한 달餘 사이 쏟아진 減稅·現金性 支援 關聯 政策이 20餘 件에 이른다. 金融投資所得稅 廢止, 證券去來稅 引下, 個人綜合資産管理計座 非課稅 限度 大幅 上向, 上場企業의 企業 承繼를 돕는 相續稅 緩和 示唆 等等. 以前에 隨時로 發表한 稅金·電氣料金·銀行 利子 引下 等 對策까지 合치면 單純 羅列하기에도 숨이 벅차다.
問題는 ‘民生 安定’이라는 當爲만 있지 緻密한 準備 끝에 나온 政策이 아니라는 點이다. 體系的이고 一貫된 政策 決定 過程보다는 一時的 性格의 行事에서 卽興的으로 發表되는 일이 잦다. 大統領室에서 모든 政策을 決定하고 總理를 비롯한 各 部處 長官은 下達된 政策의 執行 機構에 不過하다는 疑惑이 여기서 나온다. 그렇지 않다면 主務 部處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政策 或은 갑자기 基調가 바뀌는 政策이 나오는 理由를 說明할 길 없다. 더 큰 問題는 이런 善心性 政策 안에 아무런 財源 對策이 없다는 데 있다. 稅收 規模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대목에 對해서도 별다른 說明이 없다. 大部分 法 改正이 必要한 事案이라 實現 可能性에 對한 疑問도 提起된다. 結局 總選을 앞둔 ‘포퓰리즘’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앞서 言及한 冊 〈韓國의 不幸한 大統領들〉에 이런 句節이 나온다. ‘規定된 任期 안에서 限時的 權限을 委任받은 大統領이 해야 할 일은 過去의 業績을 이어받아 좋은 點은 더욱 발전시키고, 다른 한便 잘못된 點은 是正하는 것이 原則이어야 한다.’ 그동안 韓國 大統領의 末路가 不幸했던 건 저 原則을 度外視했기 때문이다. 大槪 自己便 잘못은 감싸고 相對便은 惡(惡)으로 여겨 打擊했다. 그 틈새로 側近들의 狐假虎威, 系派 政治, 軟膏·學閥主義가 판을 쳤다. 尹 大統領과 現 政府의 잦은 拒否權 行使와 설익은 善心性 政策이 이런 弊害를 가리기 위한 方便이 아니길 바란다. 大統領의 不幸은 나라와 國民의 不幸이다. 不幸은 겪을 만큼 겪었다. 民心과 國政을 外面한 채 不幸의 길로 들어서는 大統領은 더 異常 없어야 한다.
김건수 論說委員 kswoo333@busan.com
2024-01-23 [18:06]
-
[김건수의 只今 여기] 子息을 먼저 보내는 슬픔
한 해를 돌아보는 癸卯年의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 滿足과 成就感보다는 反省과 後悔가 더 수북한 높이로 쌓이는 時間이다. 密室(個人)에서도 그렇고, 廣場(社會)에서도 그렇다. 올해도 이 땅에는 無數한 죽음이 있었다. 죽음은,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일은 極限의 苦痛이다. 왜 그런가. 亡者는 우리의 一部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一面識도 없는 이의 죽음 앞에서 喪失感 或은 痛症을 느끼는 건 그런 理由다.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日本 小說家는 말했다. 人間에게는 여러 種類의 ‘나’가 있다고. ‘나’란 나눌 수 없는 ‘個人(individual)’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나’, 卽 ‘분인(分人·dividual)’들로 存在한다고. 분인은 수많은 社會的 關係 속에서 各各 特別하게 作動하는 ‘나’ 中의 하나다. ‘나’는 그런 분인의 集合體인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單純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과의 關係로 誕生한 나의 분인을 사랑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분인이란 말이 語塞하다면 分身으로 읽어도 된다.
사람을 잃는 일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만 可能했던 關係는 사라진다. 나의 分身, 곧 나의 一部를 잃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 삶에 가장 重要했던 사람이 죽는 境遇라면, 나 中 가장 重要한 나도 죽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토록 苦痛스럽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가운데 가장 큰 苦痛은 子息의 죽음일 것이다. ‘天崩之痛(天崩之痛)’으로 불리는 父母의 죽음이 있고, 가깝게 지내던 親舊와 同僚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이 슬픔이 第一 크다. ‘참척(慘慽)’이라 했다. 죽음을 어찌 等級 지을 수 있으랴만, 子息을 먼저 보낸 父母의 ‘慘酷한 슬픔’보다 큰 것은 없다.
일찍이 忠武公 李舜臣은 아들 面의 戰死 消息에 “온 世上이 깜깜하고 해조차 色이 바래 보인다”고 했다. 精神分析學의 大家 프로이트도, 韓國 現代詩의 先驅者 鄭芝溶도, 世界的인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턴度, 現代文學의 巨木 박완서 小說家도 慘慽의 苦痛으로 痛哭했다. 그런 父母는 죽지 못해 산다. 周邊을 둘러보면 子息을 앞세운 父母들이 意外로 많다.
다시 돌아본 올해 韓國 社會는 慘慽의 아픔으로 그늘졌다. 생때같은 젊은이들의 죽음이 如前했다. 지난 7月 서울의 한 初等學校 20代 敎師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敎權 墜落이라는 現實에 더해 過重한 業務, 學校의 無關心, 學父母의 暴言이 뒤섞여 젊은 敎師를 死地로 내몰았다. “우리는 國家에 對한 義務를 다했는데, 왜 國家는 우리 家族을 지켜주지 못하나.” 遺家族은 嗚咽했다. 지난 9月 大田에서도 初等學校 敎師가 數年間 學父母 民願과 괴롭힘에 시달리다 幽明을 달리했다.
軍隊가 젊은이들의 무덤인 것도 如前했다. 只今은 軍事政權 時節이 아닌데도 疑問死나 事故死 或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事例가 늘고 있다. 最近 5年間 軍人 自殺 事故만 320件에 達한다. 不過 얼마 前에도 最前方 部隊 所屬 陸軍 小隊長의 自殺 情況이 뉴스에 報道됐다. 지난 7月에는 菜 某 上兵이 集中豪雨 失踪者 搜索 中 殉職했다. 發生해서는 안 될 이른바 ‘人材(人災)’였으나 責任지는 사람은 없었다. 後進的 軍隊 文化, 只今도 別般 나아진 게 없는 것이다.
젊은 勞動者들의 일터인 産業 現場도 다르지 않았다. 2018年 泰安火力發電所에서 일하다 死亡한 김용균 勞動者의 죽음 以後 重大災害處罰法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經營者의 責任을 末端 實務者에게 轉嫁하는 慣行과 惡習은 反復되고 있다. 勞動者 50인 未滿 事業場에 對한 法律 適用은 또다시 미뤄질 兆朕이다.
梨泰院 慘事가 不過 1年 2個月 前이었다. 이런 社會的 慘慽 以後에도 이 땅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軍部隊와 産業 現場, 學校 一線 等 到處에서. 이뿐만 아니다. 精神健康은 우리 社會의 潛在的 不安 要素다. 特히 10·20代 靑少年·靑年들이 마음의 病이 깊어간다. 憂鬱症·躁鬱症·강박증 같은 精神疾患 患者群에서 靑年層 比重이 커지고 있음을 統計 資料는 가리킨다.
人口絶壁 時代를 맞아 低出産 對策이 悲鳴처럼 쏟아지고 있다. 暗鬱한 現實과 否定的 展望을 否認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우리 옆에 있는 젊은이들부터 지키는 것이 먼저다. 저 모든 ‘社會的 他殺’로부터 只今 當場 그들을 保護해야 한다. 우리 곁의 젊은 生命들이 꺼지지 않도록 손을 내미는 게 急先務다.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의 周邊으로 無數히 뻗은 分身 사이의 連結을 破壞한다. 젊은이의 죽음이라면 ‘나’가 또 다른 ‘나’와 만날 그 無限한 可能性까지 없앤다는 걸 의미한다. 젊은이의 죽음은 그래서 막아야만 하는 것이다. 結局, 이것이, 人間이 人間인 理由다.
2023-12-21 [18:29]
-
[김건수의 只今 여기] 統合의 政策? 分裂의 政治!
波長이 거세다. 與黨發 ‘金浦市 서울 編入’ 이슈를 말하는 것이다.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 시끄럽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저 論議가 겉으론 統合의 言語지만 事實은 分裂의 言語라는 걸.
政府와 與黨의 엇拍子가 于先 理解 안 된다. ‘金浦 서울 編入론’이 提起된 時期는 政府가 第1次 地方時代 綜合計劃을 發表한 때와 겹친다. ‘地方自治 및 均衡發展의 날 記念式’을 열어 地方政策의 方向을 밝히고 重要性을 强調한 게 그 다음날이다. 한쪽에서는 眞正한 地方時代를 열겠다는데, 한쪽에선 首都圈을 더 擴張하겠다 한다. 兩쪽의 交感이 있었다면 國民에 對한 欺瞞, 疏通이 없었다면 黨政의 깊은 分裂을 의미한다. 이 重且大한 事案을 두고 黨政이 따로 놀다니 무슨 영문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설익은 아마추어的 發想이라는 事實이다. 金浦 市民의 61.9%가 서울 編入을 反對하고 있다. 黨內에서조차 意見이 衝突한다. 反撥하는 與黨 所屬 首都圈 地自體長들이 적지 않다. 그렇거나 말거나, 金浦 서울 編入論은 한술 더 떠 ‘메가시티 서울’로 擴張할 態勢다. 서울은 이미 世界的 메트로폴리스이고 巨大都市인데 또 ‘메가 서울’이라니! 反對 輿論을 의식한 與黨 代表는 ‘당근’ 政策까지 흘렸다. 非首都圈에도 메가시티 造成을 推進하겠다는 것이다.
釜蔚慶 地域의 아픈 過去를 돌이켜본다. 메가시티 論議가 한창일 때, 首都圈과 政治權은 아무런 反應도 없었다. 消滅 危機에 빠진 地方 處地에서 메가시티는 生死의 問題였다. 힘을 합쳐서 難關을 克服해 보려는 地域의 발버둥이었다. 釜蔚慶 메가시티 論議는 그 重要性에 비해 注目받지 못했다. 當時 首都圈 言論은 大部分 單身으로 處理했다. 그렇게 忽待받았고 曲折 끝에 坐礁한 釜蔚慶 메가시티가 9個月 만에 다시 擧論된다. 기쁜 일인가? 그럴 理가 없다. 脂肪이 죽고 사는 問題마저 首都圈 議題를 起爆劑 삼아야 겨우 關心을 끌 수 있다는 것, 地域으로서는 實로 서글픈 일이다.
이것만 봐도 金浦 서울 編入論은 참 나쁜 政策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 論理는 無數히 많다. 가장 深刻한 害惡을 꼽으라면, 分裂과 葛藤의 助長이다. 金浦가 서울과 맞닿은 곳은 아주 一部다. 生活圈域을 따져 서울 編入이 必要하다면 九里·河南·光明·果川 等이 더 急하다. 結局 다른 都市들을 刺戟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意圖가 不順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全體 都市計劃이나 住民 意見收斂 等의 節次는 뒷전으로 밀리고, 政治的 觀點에서 事案이 決定되는 이것이 正常인가.
首都圈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全國의 都市들이 덩달아 들썩이고 있다. 釜蔚慶 메가시티는 只今 坐礁 責任을 놓고 甲論乙駁 中이다. 責任을 따지는 일이 無意味하다는 뜻이 아니다. 首都圈 擴張論이 쳐놓은 分裂의 그물網에 地域이 걸려드는 게 두려운 것이다. 이 亦是 釜蔚慶만의 일은 아닐 테다. 分裂의 불꽃이 他 地域으로 옮겨붙을 수 있다. 地域 葛藤의 또 다른 불씨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이番 이슈의 두 番째 弊害는 首都圈 擴張 論理를 正當化하려는 노림數다. 나라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亡國的 首都圈 一極主義는 地域에서 줄기차게 批判해 온 타깃이다. 이番 이슈가 全國에 메가시티를 던져주고 더 큰 ‘메가 서울’이라는 큰 그림을 念頭에 둔 것이라면 事態는 深刻해진다. 메가 서울과 全國의 메가시티가 같이 간다는 게 果然 可能한 일인지는 一旦 且置瑕疵. 問題는 首都圈 擴張에 對한 批判 論理가 武火되거나 最小限 暗默的 同調로 흐를 可能性이 높다는 點이다. 一部 言論들은 ‘메가 서울을 오히려 地域에서 더 歡迎한다’는 式으로 報道한다. 數도 없이 强調해 왔듯이, 地域 메가시티의 核心은 首都圈 擴張을 抑制하고 國土를 均衡 開發하는 데 있다. 이런 本質을 놓친다면 그것은 首都圈 擴張의 ‘들러리’일 뿐이다.
이番 이슈의 또 다른 나쁜 點은 地域 利己主義를 부추긴다는 데 있다. “已往 이렇게 된 거 우리도…” “地域에 ‘특별한’ 惠澤이 주어진다는데…” 같은 말들이 자꾸 들린다. ‘우리만 살면 된다’는 式의 利己的 欲望을 利用하는 政策은 決코 바람직하지 않다. 地域으로서는 首都圈 中心主義를 批判하는 論理가 또 다른 地域 霸權主義로 빠지는 걸 警戒해야 한다. 地域 均衡發展의 眞正한 意味는 다 함께 잘살자는 것이다. 首都圈 一極主義를 解體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未來는 없다는 事實. 이는 均衡發展의 基本 原則과 銅錢의 兩面을 이룬다.
執權 勢力은 우리 國民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國民들은 執權 勢力이 내놓은 政策들을 또 어떻게 보고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과 質問이 交叉하는 요즘이다. 總選에서 市民들이, 國民들이 智慧롭게 應答하리라 믿는다.
김건수 論說委員 kswoo333@busan.com
2023-11-14 [18:05]
-
[김건수의 只今 여기] 이·팔 紛爭, 멀고 먼 平和의 길
中東이 다시 거센 불길에 휩싸였다. 지난 7日(現地時間) 팔레스타인 가자 地球를 統治하는 武裝 政派 하마스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數千 발의 로켓에 被爆된 이스라엘은 卽刻 大規模 報復 攻擊에 나섰다. 여기에 이란의 支援을 받는 레바논의 武裝 勢力 헤즈볼라가 加勢했다. 이스라엘은 地上軍 投入을 準備 中이고, 美國은 航母戰團을 前進 配置해 軍事 支援에 뛰어들었다. 兩쪽 死亡者 數가 벌써 2500名을 넘었다는 消息. 一觸卽發의 狀況이다.
이·팔 紛爭은 80年 가까운 歲月 이어지고 있는 中東의 눈물이다. 原罪는 西歐 列强에 있다고 해도 過言이 아니다. 1914年 일어난 第1次 世界大戰 때 悲劇의 씨앗이 孕胎됐다. 當時 中東 地域 大部分은 오스만 帝國 땅이었다. 帝國을 瓦解시켜 領土를 차지하려고 애쓴 나라가 英國이다. 當時 戰爭 內閣의 外務長官이던 아서 밸푸어는 시온주의 指導者 월터 로스차일드 家門을 筆頭로 한 유대系 金融圈에 接近해 戰爭 資金을 支援해 주면 유대人의 獨立國 建立을 돕겠다고 約束했다(밸푸어 宣言). 유대人이 유럽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시온 民族主義 運動을 利用한 것이다.
그런데 英國은 아랍 民族主義者들에게도 똑같은 約條를 했다. 오스만 帝國을 무너뜨리게 도와주면 아랍 民族의 統一 國家를 세우도록 해주겠다는 것(후사인·맥마흔 協定). 또 한 篇에는 英國과 프랑스가 中東 地域을 分割 占領하기로 한 密約(사이크스·피코 協定)이 따로 있었다. 거짓 約束, 이中·三重 契約이었던 셈인데, 유대系·아랍系에 對한 獨立 約束은 그렇게 無視됐다.
2次 大戰 以後 이 問題는 유엔 所管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이·팔 領土 分離案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유대人들은 팔레스타인으로 移住해 예루살렘을 首都로 建設해 나갔다. 結局 1948年 第1次 中東戰爭이 터지고 아랍 聯盟에 勝利한 이스라엘이 建國을 宣布한다. 그때 팔레스타인은 領土의 78%를 잃었다.
以後로도 팔레스타인은 西方의 支援을 받는 이스라엘과의 戰鬪에서 連戰連敗했다. 팔레스타인 땅은 只今 요르단江 西安과 가자 地球로 크게 縮小된 狀態다. 1993年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總理와 팔레스타인 指導者 아라파트가 美國 白堊館에서 平和協定을 締結하기도 했다. 計劃대로 實踐되면 좋았겠으나 歷史의 女神은 中東 平和를 拒否했다. 라빈이 群衆集會에서 極右派에 殺害됐기 때문이다.
紛爭의 속을 들여다보면 대단히 複雜한 실타래로 얽혀 있다. 西安 地球는 팔레스타인의 執權 勢力인 파타가, 가자 地區는 하마스가 統治 實權을 쥐고 있는데 武裝 鬪爭에 對해 見解가 서로 달라 葛藤을 빚었다. 이番 衝突을 主導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修交 움직임에 反撥해 온 强勁派다. 中東 全體로는 이란·이라크를 비롯한 시아派, 美國 等 西方의 支援을 받는 사우디 中心의 수니派가 對決하는 構圖가 엮여 있다. 最近 中東에서 影響力 擴大를 꾀하는 中國과 러시아의 움직임도 變數다.
國際 秩序는 如前히 冷酷한 힘의 論理가 左右하는 國益의 角逐場이다. 우리는 植民 支配의 설움을 겪은 바 있고 韓半島의 허리를 分割 當한 뼈아픈 記憶이 있다. 먼 異國땅에서 벌어지는 이·팔 紛爭을 注視하는 理由는 이런 國際 政治 力學의 重要性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어쩔 수 없이 南北·北美 關係가 오버랩될 수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2000年, 2007年, 2018年 南北頂上會談 때처럼 關係 改善과 平和 定着을 위한 努力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不信과 敵對를 키우는 政治 力學이 늘 발목을 잡았다. 緊張과 危機의 反復 끝에 只今은 對話 通路가 끊겨 武力 對決로 치닫고 있다.
이番 이·하마스 衝突 때 一部 國內 言論은 韓半島 戰爭 狀況을 代入해 緊張을 造成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스라엘의 아이언돔이 初期 對應에 失敗한 걸 보건대 北韓 長射程砲 같은 在來式 武器에 우리 防禦 體系는 더 脆弱할 수 있다는 論理였다. 平和를 摸索하기에도 不足할 時間에 대놓고 韓半島 危機를 强調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疑問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莫論하고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있다. 苦痛과 悲劇 앞에서 人間이 해야 할 道理는 平和를 찾고 生命을 지키기 위해 微弱한 힘이나마 모으는 것이다.
惡化一路인 北美 關係는 國際 政治의 力學 關係에 따라 언제 破局으로 치달을지 모른다. 그때 平和는 길을 잃고 韓半島는 다시 눈물의 땅으로 變할 것이다. 南北이 이番 機會에 不信과 敵對를 解消하기 위한 깨달음의 智慧를 모아야 한다. 對話의 通路를 여는 것이 무엇보다 急하다. 힘들고 複雜한 過程을 하나씩 되밟아야 하겠으나 다른 길이 없다. 平和와 人權의 感受性을 回復해 무너진 信賴, 막힌 疏通의 물길을 다시 뚫어야 할 때다.
김건수 論說委員 kswoo333@busan.com
2023-10-12 [18:15]
-
[김건수의 只今 여기] 1埠頭 圖書館 ‘꼼수 行政’ 뭘 노리나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는 말이 딱 맞다. 日本의 原電 汚染水 本格 放流에 이어 最近에는 歷史 論爭, 理念 攻防으로 온 世上이 떠들썩하다. 이 나라 國政에 어이없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는데, 많은 國民이 여기서 ‘獨斷’과 ‘偏見’의 냄새를 맡는다.
地域으로 눈을 돌려도 다르지 않다. 最近 釜山市가 釜山港 1埠頭에 한 財力家의 이름을 단 圖書館 建立을 推進한다는 報道가 一波萬波다. 1埠頭는 유네스코 世界遺産 登載를 위한 ‘避亂首都 釜山 遺産’의 核心 場所다. 釜山의 歷史性과 韓國 近現代의 象徵性을 認定받아 現在 文化財 登錄이 推進 中인 곳이다.
여기에 한 財力家가 圖書館을 寄附하겠다고 한다. 그는 올해 4月 美國 經濟媒體 포브스 發表 基準으로 個人 資産이 國內 50代 富豪 中 1位를 차지한 資産家다. 200億 원을 줄 테니 1埠頭에 建物을 짓고 自身의 이름을 달아 달라는 게 寄附 條件이다. 私的 場所가 아닌 公的 空間에 이름을 세운다는 것은 대단히 重大한 意味를 지닌다. 버스停留場 이름 하나, 道路 名稱 하나 定하는 데에도 숱한 意見收斂 節次를 거친다. 그렇게 힘을 모아도 最終 合意에 到達하기 힘든 것이 公共場所의 名稱이다. 아무리 偉大한 公認이라도 그 이름을 公的 場所에 쓸 때는 徹底한 檢證 過程이 必要하다. 이름을 돈으로 살 수는 없는 法. 이게 人類 歷史의 오랜 가르침이다.
1埠頭 내 寄附 圖書館 建立案은 釋然찮은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地自體의 寄附金品 接受 與否에 對해서는 寄附審査委員會의 審議를 받도록 돼 있다. ‘寄附金品의 募集 및 使用에 關한 法律’ 第5條가 그 根據다. 그런데 이番 寄附 金額 200億 원에 對한 寄附審査 結果는 全혀 公開돼 있지 않다. 釜山市가 寄附者 側과 寄附金 約定式을 締結하기로 計劃한 時期는 9月 10日께로 알려졌다. 約定式이 바로 코앞인데 寄附審査조차 없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事實이라면 明白한 節次上의 瑕疵다.
그런데 寄附審査委員會는 6月에 열려 이미 可決이 이뤄진 狀態라고 한다. 寄附審査에 關聯된 이들의 傳言에 따르면, 寄附者가 提出한 指定寄託서 樣式에는 애初 圖書館 位置가 ‘1埠頭’가 아니라 ‘北港’으로만 記載돼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審議가 通過됐다면 이는 한참 더 深刻한 問題다. 釜山市가 이를 숨기고 모두를 속인 것이기 때문이다. 市價 1埠頭를 包含한 圖書館 建立 候補地 3곳을 추려 寄附者 側에 提案한 때가 올해 3月이었고, 寄附者 側이 1埠頭를 最終 落點한 것은 5月이었다. 萬若 寄附審査 때 圖書館 位置가 ‘1埠頭’ 아닌 ‘北港’으로 하는 內容으로 可決된 것이라면, 이는 反對 輿論을 의식한 ‘꼼수 行政’이라는 批判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釜山市는 이와 關聯된 事實 與否를 明確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釜山市議會의 役割에도 아쉬운 데가 없지 않다. 寄附 圖書館이라고 하지만 建物 짓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建立費用 말고도 以後의 圖書館 運營費는 누가 負擔하는가. 釜山市 條例에 따르면, 市長은 業務協約 締結 때 市議會에 報告해야 하는데 詩의 財政的 負擔이 發生할 境遇엔 特히 市議會의 事前 議決을 받도록 돼 있다. 寄附金 200億 원을 圖書館 建立費用으로 본다면 向後 運營費는 釜山市 財政 負擔으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事前 議決이 必要하다는 뜻이다.
釜山市議會는 市民의 意思를 代表하면서 釜山是正을 牽制하는 機關이다. 適法한 節次 履行 없이 協約 締結이 可視化되고 있는데 손을 놓고 있는 理由를 모르겠다. 市議會를 거치지 않는 市의 獨斷的 行政에 對해서는 制動을 걸고 잘못된 行政을 바로잡아야 한다.
무엇보다 納得하기 힘든 건 釜山市의 早急함이다. 애初 釜山市·釜山港灣公社(BPA)·海洋水産部가 合意했던 것처럼 ‘1埠頭 保存’이라는 原則대로 가는 게 順理다. 한때 複合文化空間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지만 이는 北抗議 다른 곳에 짓는 것으로 結論이 난 狀態다. 1埠頭를 유네스코 世界遺産 登載 推進 對象으로 삼고 그 一帶를 登錄文化財로 保存하기로 決定하면서다. 이는 2021年 12月 締結된 ‘釜山港 北港 1段階 再開發事業 業務協約서’에 다 나와 있다. 釜山市가 所有權者인 BPA를 說得한 것도, 所有·管理權을 移讓받기로 한 것도 이런 條件에서다.
寄附審査 때 提出된 圖書館 位置가 1埠頭가 아닌 北港이었다는 點은 意味深長하다. 圖書館이 必要하면 北抗議 1埠頭가 아닌 適當한 곳에 지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世界遺産 毁損 論難이 불거질 何等의 理由가 없다. 이제 와서 釜山市가 約束을 어기는 것은 結局 釜山市長과 是正 業務 首長들의 一方的, 獨斷的 行態로 볼 수밖에 없다. 이렇게 無理를 하면서까지 얻고자 하는 것이 果然 무엇인가.
김건수 論說委員 kswoo333@busan.com
2023-09-05 [18:23]
-
[김건수의 只今 여기] 治水(治水)의 智慧를 다하라
요순時節 中國은 7年 가뭄이 들고 9年 洪水가 地는 땅이었다. 黃河를 막고 있는 허난省(河南省) 龍門山(龍門山)을 도끼로 갈라 물길을 낸 이가 禹(禹)다. 洪水를 다스린 功으로 나라(夏)를 물려받았다. 只今으로부터 4000餘 年 前, 神話의 時代라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사람들 뭇 목숨이 걸린 ‘治水(治水)’보다 重要한 건 없으니, 그 象徵으로 不足함이 없는 場面이기 때문이다. 于 賃金이 堯舜을 잇는 聖君으로 推仰받는 것도 그런 理由다.
中國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나라 임금들도 물을 다스리는 데 知性을 다했다. 물은 너무 많아도, 너무 적어도 問題다. 古代로부터 가뭄과 洪水는 하늘의 警告로 여겨졌다. 이로부터 百姓을 지키는 것이 곧 治世(治世)의 核心이었다.
科學技術과 文明이 發達한 現代라고 해서 다른가. 그렇지 않다. 自然災害는 如前히 不可抗力이고, 只今도 물亂離는 繼續되고 있으며, 사람은 속절없이 죽어 나가는 中이다. 慘澹한 災難 앞에서 人間은 微微하고 無力한 存在임을 깨닫는 요즘이다.
눈에 보이는 水害만 물亂離가 아니다. 日本 후쿠시마 汚染數는 더 큰 물亂離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點에서 恒時 注視해야 할 對象이다. 電子가 ‘水面 위’로 드러난 물亂離라면, 後者는 ‘水面 아래’의 물 問題랄까. 汚染水 問題는 눈에 보이지 않다 보니 ‘科學’이냐 아니냐, 甲論乙駁과 說往說來가 滿發한다.
科學은 흔히 人間의 認識과 精神으로부터 獨立的으로 實在하는 事實이나 眞理를 얻어 내는 學問으로 定義된다. 다른 視角도 있다. 科學의 目標는 眞理를 얻는 게 아니라 그저 實驗과 觀察의 結果를 통해 現 段階에서의 有用한 知識을 取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科學界 內部의 이런 哲學的 見解 差異는 어쩌면 科學이 追求하는 價値中立 自體가 不可能한 일임을 傍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價値中立을 標榜한 硏究라 하더라도 그 結果物이 向後 어떤 用途로 쓰이느냐는 것은 또 다른 問題다. 여기에서 自由로울 學問은 없는 것이다.
후쿠시마 汚染水 問題 亦是 純粹한 科學의 領域이 될 수 없다는 點은 明白하다. 참과 거짓을 檢證할 만한 蓄積된 實驗 資料 없이, 取捨 選擇된 몇몇 데이터에만 依存하고 있어서다. 科學的 嚴密性을 뒷받침할 根據가 없다는 얘기다. 原電 爆發로 發生한 汚染水의 海洋 投棄는 人類가 한 番도 經驗하지 못하는 일이다. 여기서 科學이 取해야 할 姿勢는 者만이 아니라 謙遜이다.
汚染水 問題가 ‘科學’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過去 事例에서 잘 드러난다. 2021年 6月 野黨이었던 國民의힘은 國會에서 日本의 후쿠시마 汚染水 放出 決定을 糾彈하면서 汚染水 安全性 確保를 위한 政府 對策을 促求하는 決議案을 통과시킨 바 있다. 國民의힘은 與黨이 되면서 只今 正反對 立場으로 바뀐 것이다. 當時 文在寅 政府를 擁護하려는 게 아니다. 文 政府 亦是 日本의 汚染水 放流를 暗默的으로 同調했기 때문에 批判받아 마땅하다. 어쨌든 汚染水 問題는 처음부터 科學이 아니라 政治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現 政府와 與黨이 더 큰 指彈을 받는 건 當然하다. 當場 國情과 民生을 책임지고 있는 執權 勢力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國民의 安危와 生命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尹錫悅 大統領의 行步는 國民 80% 以上이 汚染水 放流를 反對하는 民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다. 尹 大統領은 12日 리투아니아에서 가진 韓日 頂上會談에서 日本의 汚染水 放流 計劃을 事實上 承認했다.
只今 政府는 왜 이렇게 日本 政府에 善意를 베푸는 것도 모자라 날개까지 달아 주려 애쓰는 걸까. 斟酌되는 바가 없지 않다. 總選 勝利와 執權 延長이라는 壯大한 目標價 먼저 떠오른다. 韓美日을 묶어 外交·安保 協力의 堅固한 울타리를 치고 代身 中國·러시아는 對立의 對象으로 떠미는 이른바 ‘新冷戰’ 構圖에 올라타는 것이 保守層을 結集하고 票를 얻는 데 유리하다고 보는 模樣이다. 그러려면 日本과의 關係 改善을 서둘러 매조지는 게 急先務다.
政治勢力이 執權을 꿈꾸는 것은 너무나 當然한 目標로 決코 批判할 일이 아니다. 問題는 主客의 顚倒다. 政治는 國民을 위한 것이고 國政 運營은 國民을 위해 일하는 데 그 意味가 있다. 國政을 맡은 勢力이 이를 忘却하고 民生은 外面한 채 눈앞의 사사로운 利益에만 埋沒돼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國民이 스스로를 救濟해야 하는 各自圖生의 原始的 社會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눈에 보이는 물亂離(水害)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물亂離(汚染水 放流)이든 이를 바라보는 國政 責任者의 눈은 徹底히 國民의 生命과 安全에 맞춰져야 한다. 치수는 예나 只今이나 重要한 指導者의 德目이다. 眞正한 權力은 거기서 나온다.
2023-07-18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