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아프리카 드림' 이룬 崔君 "이젠 朴明洙 드림!"(인터뷰) - 스타뉴스

'아프리카 드림' 이룬 崔君 "이젠 朴明洙 드림!"(인터뷰)

MBC 개그맨 兼 인터넷放送 '崔君TV' 進行者 崔君 인터뷰

문완식 記者 / 入力 : 2012.11.12 12:09
  • 글字크기調節
image
개그맨 崔君 ⓒ寫眞=임성균 記者


"예, 使道!"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崔君(25, 本名 최우람)은 자리에 앉자마자 온 電話에 "이 電話는 꼭 받아야 한다"며 諒解를 求하고 이내 '緊張모드'로 突入했다. 崔君은 "예, 使道!"를 연신 말하며 몸까지 굽실거렸다. 使道? 電話機 너머 목소리 거칠다.


"朴明洙氏니다." 所屬社 巨星엔터테인먼트 社長인 개그맨 朴明洙의 電話였다. 그러고 보니 "너 어디야?" 라고 소리 지르는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았던 터였다. 그런데 웬 使道?

"社長님이 '社長'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해요. 放送뿐만 아니라 日常生活에서도 모든 것에 코믹的인 要素가 들어가는 걸 좋아하는 분이거든요. 使道도 그렇고 때로는 '朴氏'라고 부르기도 해요. '朴CEO'요. 하하. 제가 아는 개그맨 先輩들은 普通 카메라가 꺼지면 조용해지거나 寡默하거든요. 그런데 우리 使道는 카메라가 꺼지면 오히려 더욱 개그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 같아요. 生活 속 개그 感覺을 維持하라고 하니까 이젠 便宜店을 가도 店員한테 개그를 한다니까요."

그런데 왜 싸또냐고 물으니까. 별다른 뜻이 없단다. 그냥 朴明洙가 使道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崔君은 特異한 藝名에 對해서도 "金C, 鄭孃은 있는데 '軍'을 붙인 演藝人이 없어서 그냥 城에 君을 붙여 崔君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亦是 別 뜻은 없었다.


崔君은 'MBC 개그맨'으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터넷放送 '아프리카TV'의 '崔君TV' 進行者로 잘 알려져 있다. KBS개그맨을 꿈꿨던 그가 MBC 개그맨이 되고, 또 인터넷放送 進行者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배고픈 얘기', '거성' 朴明洙와의 만남에 對해 들어봤다.

◆19살에 MBC 개그맨 拔擢..미니홈피 住所는 如前히 'KBS개그맨'

全南 順天에서 태어난 그에게는 위로 누나가 3名이었다. 어머니는 家事도우미였고 아버지는 職業이 없었다.

"初等學校 5學年 때 隣近 都市로 轉學을 가서는 자취, 親舊집, 下宿집을 轉轉했어요. 月貰 7萬 원짜리 작은 房이 제 집이었습니다. 現實은 힘들고 鄙陋했지만 혼자 이런 저런 窮理하면서 개그맨의 꿈이 더 커졌어요. 中學校 때는 放學 때마다 서울로 올라와 大學路에서 개그맨들을 봤어요. 親해주면 뽑아주지 않을까하고요. 하도 자주 오니까 너 뭐냐고 묻더라고요. 개그맨 志望生이라고 했죠. 中學生이요. 하하. 會食 자리도 따라가고, 未成年者라서 안된다고 하면 사이다도 좋으니 같이 있게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高等學校 때 模擬考査 '全國꼴等'을 하기도 했지만 꿈에 對한 挑戰은 멈추지 않았다. '特異한 履歷'을 쌓기 위해 힙합大會에 나가 첫 挑戰에서 音樂部門 銀賞을 받기도 했다.

"高等學生 身分에 高3 때 '뻥'을 치고 大學祝祭에서 公演도 했어요. '데이플라이'(하루살이)라는 팀으로요. 돈도 必要 없으니 公演만 해드리겠다고 했죠. 그때 待機室에서 SG워너비랑 같이 있는데 實感이 안 났어요. 그렇게 公演 많이 다녔죠. 대단하기보다는 '돌아이'였죠. 하하."

崔君은 지난 2007年 MBC 개그맨 公採 16로 選拔, '꿈'이었던 개그맨이 됐다. 그의 나이 滿으로 19살 때였다. 當時는 MBC 개그프로의 '黃金期'였다. '師母님'이나 '罪悶수'가 人氣를 끌 때였다.

image
개그맨 崔君 ⓒ寫眞=임성균 記者


"事實 제 미니홈피 住所가 'kbsgagman'이에요. 개그맨 되고 先輩들이 알고는 많이 혼냈어요(웃음). 그 程度로 어렸을 때부터 KBS 개그맨에 對한 羨望이 있었어요. 집이 시골이었는데 집에 KBS와 EBS 밖에 안 나왔거든요. 제가 아는 唯一한 개그프로가 '개그콘서트'였죠. 事實 김국진, 朴明洙 이런 분들 모르고 자랐어요. 中學校 때 都市로 轉學 갔는데 그때서야 KBS 말고 다른 放送도 있다는 걸 알았죠."

崔君은 "2007年 MBC 개그맨 試驗 볼 때 엄청 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렸었다"라며 "當時 MBC 개그맨 試驗은 2月에 合格者 發表를 했고 KBS는 3月에 試驗이 있어서 MBC에 合格한 狀況에서 KBS 개그맨 試驗을 볼 必要가 없었다"고 말했다.

崔君이 데뷔하고 2年 程度 있다 '개그野'가 廢止됐다. MBC 公採 개그맨이 설 수 있는 舞臺가 없어진 것이다.

"제가 들어가자마자 '개그野' 視聽率이 下落勢를 보이기 始作했어요. '난 詛呪 받은 놈인가' 생각했죠. 거기에 一助한 게 저라고 생각했거든요. 事實 新人들이 舞臺가 없어졌다고 不滿만 나타낼 건 없다고 봐요. 저 같은 新人들이 新鮮한 개그 아이디어를 내고 熱心히 해야 했는데 그게 안된 거죠."

'舞臺'를 잃은 崔君은 以後 國內 演藝企劃社를 돌아다니며 自身과 契約해줄 곳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그는 "準備되지 않고 有名하지 않은 藝能人을 契約하자고 할리가 없었다"고 淡淡히 말했다.

◆'개그野' 廢止 後 배고픔의 連續..'아프리카 드림'을 꿈꾸다

시골집에는 거짓말을 했다. 第2의 '개그野' 같은 프로그램이 準備 中이라고. 위로 누나 3名에 中學校 時節부터 홀로 외로이 自炊生活을 했던 崔君에게 또 '배고픔'李 찾아왔다.

"일이 없으니 '버티기'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自然스레 빚이 생기기 始作했죠. 돈이 없으니 第一 먼저 携帶電話 發信이 안되더라고요. 그리고 受信이 끊겼죠. 일이 생겨도 連絡 받을 수 없는 處地가 됐어요. 父母님께는 걱정하실까봐 携帶電話가 故障 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最惡의 瞬間은, 집에 電氣가 끊긴 거예요. 電氣가 끊기면 不滿 안 들어 올 거라고 생각하시죠? 冷藏庫, 電氣밥솥이 안되니 밥을 못 먹고, 洗濯機를 못 움직이니 옷도 빨 수 없었어요. 悲慘했습니다."

하릴 없이 굶던 崔君은 할 수 있는 모든 걸 찾아 헤맸다. 그러다 인터넷放送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개그맨인데 '말'로 하는 거면 自身이 있었다. 崔君은 2009年 末 인터넷放送 '아프리카TV'에서 새 둥지를 틀었다.

"自信感 있게 始作했죠. 개그맨인데 인터넷放送 程度 못할까하고 말이죠. 安逸하게 생각했어요. 많이 힘들었습니다. 3日 동안 제 放送에 10名도 안 들어오는 거예요. 그 3日 동안 제가 말한 게 똑같았습니다. '安寧하세요. MBC 개그맨 崔君입니다'. 이러고 있다 1名이 나가고, 또 1名이 들어와서 '누구에요?' 물어보면 '安寧하세요. MBC 개그맨 崔君입니다'라고 또 始作하고요."

그대로 '뻔한' 放送만을 하다가는 배고픔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며칠을 苦心 끝에 다른 인터넷放送과 다른 放送을 해야 自身이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放送을 視聽하는 사람들이 漸漸 많아지던 時期였다.

"'野外로 나가자'고 決心했어요. 그때 인터넷放送이 다들 뻔했거든요. 하나같이 房에 틀어 박혀서 PC카메라로 放送했어요. 스마트폰이 普及되면서 PC가 아닌 스마트폰 어플로 視聽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에 着眼했죠. 노트북을 들고 無條件 홍대로 나갔습니다."

崔君은 젊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홍대 距離에 노트북과 웹캠, 와이브로만 들고 나섰다. 눈에 띄게 粉紅色 노트북에 마이크에도 '崔君TV'라고 적었다. 막걸리 醉한 아저씨부터 別의別 사람들을 만나 그냥 말을 걸었다. 自信感도 붙었다. 남들과 또 다른 것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生放送'이다.

image
개그맨 崔君 ⓒ寫眞=임성균 記者


"已往 인터넷放送을 한 거 기네스북에 挑戰해보자고 생각했어요. 映畫 '트루먼쇼'처럼 一週日 내내 生放送으로 해보자 생각한 거죠. 一週日, 168時間을 제가 먹고 자는 것부터 해서 제가 움직이는 곳 全部를 담았어요. YG엔터테인먼트 앞에 찾아가서 '私生팬'들 하고 함께 기다리다 매니저한테 혼나고 쫓겨나기도 했고요. 처음 計劃 一週日에 3日을 더해서 10日을 生放送을 했습니다. 제가 밥을 먹는 場面을 無慮 4000名 以上이 放送으로 봤을 程度였어요. 기네스 記錄은 韓國記錄院에 問議했더니 英國에서 記錄員들이 와야 하고 제가 宿食을 다 提供해야한다고 하더라고요. 額數가, 제가 堪當하기는 힘들었어요."

그의 弘大 '生放送'은 同時接續 9000餘 名에 이를 程度로 '히트'를 쳤다. 10日間 累積 接續者는 10萬 名을 肉薄했다. '빛'李 보이기 始作했다. '개그맨 崔君'이 아닌 '崔君TV의 崔君'을 알아보는 이들도 많아지기 始作했다.

"한番은 生放送을 하다 비가 오는 거예요. 裝備가 젖을까봐 隣近 가게 처마 밑에서 비를 避하고 있었는데 검은色 세단이 제 앞으로 슥 오는 거예요. '빵빵' 클랙슨을 울리더니 '崔君님, 어서 타세요' 이러는 거예요. 放送 보시다가 오신 거죠. 비를 避해 내려주시고는 말없이 가시더라고요. 또 한 番은 밥을 먹으며 放送을 하고 있는데 제 뒤로 가게 看板이 보였나 봐요. 計算을 하려는데 主人이 어떤 분이 電話로 計座番號 묻고는 제 밥값을 計座移替로 計算하셨다고 하더라고요. 感動이었죠."

'反響'도 있었지만 '反撥'도 있었다. '인터넷放送에 出演해서 MBC 公採 개그맨 辱 보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崔君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自尊心이고 뭐고 없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인터넷 放送人으로 轉落하는 게 아니라 뭔가 보여주자고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崔君은 當時 洪水를 이루던 '아이돌'에 注目했다. "新人 아이돌들이 많이 나올 때였는데 一部를 除外하고는 自身들을 알릴 수 있는 舞臺가 많이 없었어요. 그 親舊들을 찾아가보자 생각했습니다."

勿論 이 亦是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崔君은 無條件 아이돌 奇劃社를 찾아갔다.

"奇劃社를 찾아가서 제 紹介부터 하는 거죠. '安寧하세요. '崔君TV'라는 스마트 放送인데요. 제가 개그맨 崔君이고요' 式으로요. 10個 中에 9個는 時體말로 까였습니다. 그러다 브이엔티(VNT, 티나·柳眉·릴制이)라는 걸그룹과 因緣이 닿아 처음 제 放送에 紹介했어요. 그렇게 始作한 게 나중에는 댄스팀, 걸그룹 합쳐서 100個 팀이 넘었죠."

'崔君TV'는 以後 乘勝長驅, 歌手 歡喜가 이를 통해 컴백했고, M4(金元俊, 李世俊, 배기성, 최재훈), 비스트 윤두준, 박재범, 孫昊永, 共有, 이나영, 안성기 等이 出演했다. 인터넷放送에서 以前에는 '敢히' 想像도 할 수 없는 이들을 崔君이 해낸 것이다. 崔君은 2011年 末 '아프리카TV' 放送大賞에서 大賞을 받았다.

崔君은 以後 映畫 쇼케이스 現場을 注目. 아이패드를 가슴에 안은 채 無酌定 現場으로 달려갔다. 質問 時間, 記者들이 默默히 記事 作成에 熱心일 때 그는 第一 먼저 손을 들고 質問하는 戰略을 썼다.

"現場에서 아이패드를 가슴 쪽으로 해서 들고 다녔어요. 제가 放送하는 畵面과 함께 視聽者들의 댓글이 쭉쭉 올라오는 걸 보고 되게 神奇하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제가 視聽者 분들께 '者, 누구를 檢索해주세요'라고 付託하면 포털 實時間 檢索語에 그 분이 檢索語 上位圈에 올라가는 거예요. 나중에는 쇼케이스 主催 側이 먼저 와 달라고 付託할 程度가 됐습니다."

'잘 나가게 된' 崔君은 職員도 3名이나 뽑고 '崔君'에서 따와 '쿤(KOON)TV'라는 會社도 設立했다.

"저희는 카메라만 들고 現場으로 가면 그게 스케줄이니까 스케줄이 없는 날이 없었죠. 장난 아니었어요. 하루에 많이 찍을 때는 累積 視聽者가 30萬 名에 肉薄할 때도 있었어요."

◆'거성'을 만나다

인터넷放送에서 絶頂期를 謳歌하던 崔君은 그즈음 '거성'을 만나게 된다. 개그맨 朴明洙다.

"아직도 그 날을 생생하게 記憶해요. 2011年 12月 첫째 週 火曜日이었습니다. 박명수氏를 만나게 되죠. 當時 '손바닥TV'에서 涉外가 와서 出演하게 됐는데, 朴明洙氏도 나왔거든요. 勿論 제가 누군지도 몰랐죠. 처음에 '너 누구야?'라고 시큰둥하셨는데, 放送에서 제가 좀 잘했는지 相當히 재밌어 하시더라고요. 錄畫 끝나고 바로 '너 끝나고 뭐있니, 밥 사줄게'라고 말하셔서 만났습니다. '넌 어떻게 살아왔냐'고 물어서 얘기를 쭉 했더니 '오케이, 알았다'고는 바로 저를 거두셨어요."

崔君은 朴明洙를 만나 空中波로 復歸했다. 同時에 6個 프로그램에 出演하게 된 것. 自然스레 自身의 '쿤TV'에 疏忽하게 됐고, 視聽者들도 떨어져 나가기 始作했다.

"苦悶이 컸습니다. 그런데 正말 多幸이게도 視聽者들은 저를 理解해 줬어요. '崔君, 機會가 왔을 때 잡아. 우리는 그걸 願해'라고요. 고마운 분들이죠."

崔君은 願해 올해 8月 런던올림픽 期間 中 現地로 날아가 올림픽 生中繼 인터넷放送을 하려는 遠大한 計劃을 갖고 있었지만 朴明洙를 만나면서 抛棄했다.

"박명수氏를 만나자마자 '세바퀴'에 나갈 수 있는 機會가 생겼어요. 런던이냐 '세바퀴'냐 苦悶하다 런던을 抛棄했습니다."

本格 空中波에 復歸한 崔君의 꿈은 무엇일까. 말 잘하는 그에게 '第2의 劉在錫'李 꿈이냐 물으니 意外로 "朴明洙 社長님처럼 音樂을 하고 싶은 게 꿈"이라고 했다.

"예전에 自轉車 타고 인터넷 生放送하면서 막 달리면서 '난 第2의 유재석이 될 거다'라고 소리치며 달린 적이 있을 程度로 저뿐만 아니라 모든 개그맨들에게 劉在錫 先輩님은 羨望의 對象이죠. 하지만 여러 經驗을 하다 보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느껴지더라고요.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나는 잘하지 못해. 나만이 할 수 있는 게 있겠지'란 생각이 連續的으로 들면서 只今 스마트 放送을 하고 있으니, '疏通하는 개그맨'李 되자는 꿈을 세웠죠. 나중에는 朴明洙 社長님처럼 音樂을 하고 싶어요. 노래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 正말 즐거워 보여요. 제 人生이 音樂을 하면서 바치길 바라는 거죠. 컬투 先輩님들처럼 저도 '쿤 콘서트' 같은 것을 해보고 싶어요."

'두 마리 토끼'를 쫓게 된 崔君은 꿈에 그리던 空中波 復歸의 念願을 이뤘지만, 그 '토끼'를 위해 또 다른 '토끼' 쫓는 걸 抛棄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먹고 살기 위해 始作한 인터넷放送이 이제 그에게는 宿命처럼 됐다.

"空中波로 復歸했지만 전 '쿤TV'를 抛棄하지는 않을 거예요. 單純한 인터넷放送이 아니라 平生 갈 제 '업'(業)으로 생각합니다. 結婚式도 生放送으로 하고, 勿論 重要한 時期에는 暫時 끌 수도 있습니다(웃음). 第 葬禮式도 인터넷 生放送으로 하고 싶어요. 60年이 넘는 제 人生 自體를 生放送을 하고 싶습니다."

image
개그맨 崔君 ⓒ寫眞=임성균 記者

最新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