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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雲兒 김옥균 日本 亡命 10年의 軌跡|新東亞

風雲兒 김옥균 日本 亡命 10年의 軌跡

絶海孤島 오가사와라에 남긴 두 글字, ‘精管(靜觀)’!

  • 김충식 동아일보 論說委員 skim@donga.com

    入力 2005-12-15 15: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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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風雲兒’는 金玉均을 위한 이름이다. 韓末, 開花 改革의 旗발을 치켜들고 救國을 외친 熱血 靑年. 外勢 日本의 힘을 빌려서라도 腐敗하고 無能한 政府를 무너뜨리고자 甲申政變을 일으킨 그는 過激한 ‘위로부터의 革命’을 試圖하지만, ‘三日天下’로 幕을 내리고 日本으로 亡命한다. 그리고 故國 革命에 재도전하기 위해 상하이로 向한다. 그곳에 명성황후 一派가 쳐놓은 陷穽이 있을 줄이야. 歷史를 뒤엎고자 했던 革命家의 亡命 10年, 그리고 돌아올 수 없는 最後.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日本, 中國의 힘을 빌려 腐敗한 政府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김옥균. 現實을 꿰뚫어보는 能力이 不足했지만 謀略이 없고 純眞했다.

    1894年 2月, 봄이라기엔 아직 陰散하고 찬 날씨였다. 김옥균(金玉均)은 도쿄에서 멀지 않은 有名한 溫泉地 하코네의 度老子와 溫泉에서 후쿠자와 유키치(게이오大 創立者. 日本 貨幣 1萬엔權에 얼굴이 실려 있다)를 만난다.

    “상하이에 가지 마시오, 絶對로. 危險하誤.”

    玉菌이 中國에 간다고 하자 후쿠자와는 挽留했다. 이날의 만남은 두 사람의 ‘永訣(永訣)’意識이 되고 만다. 奇異한 因緣이었다. 10年 前 玉菌이 甲申政變에 失敗해 仁川에서 齒도세마루를 타고 日本에 도망쳐 왔을 때, 처음 머문 곳이 바로 도쿄의 未妥(只今의 게이오大學 一帶)에 있는 후쿠자와의 집이었던 것이다. 첫 有宿志를 내준 사람과 最後의 作別人事. 運命의 首尾一貫이라고 할까.

    후쿠자와는 政治人 고토 조지로와 함께 獄菌의 人生을 바꿔놓은 人物이다. 玉菌이 그들을 만난 것은 1882年 生涯 처음으로 日本에 갔을 때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日本에 西洋 事情을 紹介하고 文明開花를 부르짖어, 先覺 知識人 中에서도 局社(國師)로 待接받고 있었다. 그가 金玉均의 가슴에 開化 쿠데타의 불을 붙였다.

    고토는 이타가키 다이조와 함께 朝鮮의 쿠데타를 支援해서 中國의 影響力을 누르고 日本 勢力圈을 넓히려는 野心을 품고 있었다. 고토는 玉菌에게 명성황후 政權을 뒤엎을 쿠데타에 必要한 資金을 대주겠다고 約束하기도 했다.



    고토와 이타가키는 베트남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中國이 戰爭을 벌이자 도쿄에 主宰하던 프랑스 公使 生퀴지를 만나 隱密히 ‘朝鮮의 쿠데타 資金 100萬달러’를 要求한 것이다. 두 日本 政客은 “朝鮮에서 쿠데타가 나면 아시아에서 中國勢力은 沒落한다. 바로 프랑스가 바라는 바 아닌가?”라며 미리 내는 ‘受益者 負擔金’條로 쿠데타 資金을 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안 日本 政府가 危險한 外交 賭博으로 여겨 妨害하는 바람에 故土의 公爵은 흐지부지됐다. 모두 甲申政變 以前의 飛火다.

    金玉均의 中國行을 挽留한 사람이 또 있다. 當時 外務次官 하야시다. 玉菌이 하야시를 만난 때는 中國과 朝鮮의 설날이던 2月9日. 하야시는 말했다.

    “가지 마시오. 中國은 朝鮮 政府의 歡心을 사려 애쓰고 있으니, 朝鮮 政府의 怨讐인 當身을 抑留하거나 붙잡아 넘기려 할지도 모르오. 中國이 朝鮮에 줄 膳物로 當身만한 것이 또 있겠소?”

    玉菌은 10年 流浪 끝에 이판사판이 되어 있었다. 돈도 健康도 동나고, 너구리 같은 日本 政客의 支援도 더는 期待할 수 없었다. 中國에 가서 세 치 혀로 마지막 談判을 벌이면 勝算이 있을 듯싶었다. 說得 手腕이라면 自身이 있었다. 中國의 이경방과 그의 養父 李鴻章(李鴻章)을 協力者로 돌려 세울 수 있다고 過信했다. 玉菌이 말했다.

    “中國이라도 상하이의 阼階(租界)는 中立地域이므로 危險하지 않습니다.”

    하야시는 反駁한다.

    “中立地라는 것은 外國人이 自國의 法律로 保護받는 땅을 말하오. 그러나 當身이 거기에 가면 日本의 保護도 못 받고, 오직 中國과 朝鮮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소. 危險千萬이오.”

    그래도 玉菌은 莫無可奈였다. 하야시는 玉菌의 主張과 表情을 나중에 이렇게 傳했다.

    ‘金玉均은 나가사키를 거쳐 상하이로 갈 模樣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이일직(李逸稙·明成皇后 一派가 金玉均 暗殺을 위해 派遣한 刺客. 아직 正體가 드러나지 않은 狀態)의 사람(暗殺犯 홍종우(洪鍾宇)를 指稱하는 듯)을 만날 것이라고 했다. 받을 돈이라도 있어서 만나려는 듯한 印象을 받았다. 그러나 實은 이일직이 노리는 바가 있어서, 金이 中國에 가니까 거기 便乘해 무언가 일을 꾸미는 성싶었다.’ (古筠 김옥균 停戰)

    ‘三火注意’의 바랜 꿈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1894年 中國에서 朝鮮으로 送還돼 陵遲處斬된 金玉均의 屍體. 楊花津 處刑場에 梟首해놓은 것을 찍은 것이다.

    朴泳孝도 玉菌을 말렸다. 상하이에 가지 말라고. 朴은 10年 前 甲申政變의 同志로 한배를 타고 도망쳐 온 亡命客이다. 두 사람은 性格과 스타일이 다르고, 開化革命을 위해 손잡은 것말고는 어딘지 잘 맞지 않는 對照的인 人間型이었다. 그래서 같은 도쿄 하늘 아래서도 남처럼 지냈다. 朝鮮 政治人들의 不和와 分裂은 예나 只今이나 ‘죽음에 이르는 病’일까. 시리도록 외로운 亡命客의 處地에도, 서로 손잡고 기대지 않고 各個躍進으로 一貫했다. 朴泳孝는 玉菌이 죽은 뒤 春園(春園) 李光洙에게 이렇게 말했다.

    “金玉均의 長點은 社交術이다. 실로 外交에는 能했다. 文章力, 話術, 詩, 글, 그림,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短點이라면, 德(德)李 모자라고 謀略이 없다는 것이었다.”

    謀略이 없다는 것은 純眞하다는 意味다. 朴泳孝의 人物評을 뒷받침하는 事件도 있었다. 1882年 1月8日子 日本 ‘草野(朝野)新聞’에 난 記事를 보자. 서울의 大院君이 며느리 明成皇后의 政權과 暗鬪를 벌일 때 日本 亡命客 옥균과 朴泳孝에게 사람을 넣어 提携의 손길을 내민 적이 있었다.

    ‘朝鮮에 사는 오가와라는 日本人이 國王의 아버지 大院君을 찾아갔더니 大院君이 朝鮮 政府의 改革에 對해 말했다. 오가와는 大院君의 祕密 指令을 받아 朴泳孝와 金玉均에게 各各 傳達했다. 金玉均은 이를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今方이라도 사람을 데리고 서울에 달려가 大院君의 뜻에 報答할 計劃을 세웠다. 그러나 朴泳孝는 謹直(謹直) 溫厚하고 平素 世上일에 손을 뗀 채 禪學(禪學)에 빠져온 사람답게 이를 反對하고, 오히려 金玉均의 輕車(輕擧)로 朝鮮에 大患(大患)이 일어날 것을 憂慮하면서 金玉均을 挽留했다. 그래도 金玉均은 그 忠告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歸國을 서둘렀다.’

    朴泳孝는 哲宗의 사위로 金陵위라 불렸다. 權力鬪爭의 脈絡을 꿰뚫어보는 眼目에서 確實히 玉菌보다는 한 手 위였다. 複合的으로 보고 問題의 核心을 짚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朴은 玉菌에게 상하이에 가서는 안 되는 理由를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亡命客이 李鴻章을 說得하고 그의 힘을 빌린다는 것은 到底히 不可能한 일이야. 꿈도 꾸지 말아야 해.”

    玉菌은 反駁한다.

    “李鴻章을 만나 中國과 日本이 提携해서 朝鮮의 內政(內政)을 改革해야 한다고 主張하면 李鴻章도 理解할 거야. 세 나라가 利害關係를 평화롭게 調節하면 朝鮮의 獨立이 成就되고 朝鮮 中國 日本의 同盟, 卽 三火(三和)가 이루어질 거라 믿네.”

    “李鴻章이 우릴 알아주지도 않거니와, 設令 中國의 힘을 빌려 명성황후 政權을 몰아낸다 해도 中國에 從屬하는 結果가 되고 말 것이야.”

    朴泳孝의 反駁이 이어지지만 結局 玉菌을 말리지 못한다. 結果를 놓고 보면, 金玉均은 流浪에 지친 탓인지 現實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理想鄕을 그려놓고 現實을 꿰어 맞추는 어리석음이라고 할까. 亦是 朴泳孝의 判斷이 正確했던 것이다.

    이 무렵 玉菌은 부쩍 ‘三火注意’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았다. 이것은 元來 후쿠자와의 發想이었다. 日本 朝鮮 中國 三國이 손잡고 和睦과 發展을 圖謀하면 아시아에 平和가 자리잡고 繁榮을 누릴 수 있다는 비전이다. 그러나 金玉均이 三火主義에 關心을 둔 때는 후쿠자와가 그 構想을 버린 지 한참 뒤였다.

    후쿠자와는 이미 朝鮮과 中國을 나쁜 親舊, 卽 ‘惡友(惡友)’로 規定하고, 악우와 놀다 損害 보느니 西洋과 손잡고 악우에게 칼을 들이대 西洋 帝國主義의 論理로 나아가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論에 기울어 있었다. 그야말로 ‘謀略이 없고’ 純眞한 玉菌이었다.

    王命勅書를 지닌 刺客

    使臣(死神)에 홀리기라도 한 걸까. 玉菌은 무엇인가에 쫓기듯 상하이 旅行을 强行했다. 總理와 大臣을 지낸 오쿠마 이누카이나 故土 같은 巨物 政客에게도 찾아가 中國 旅行을 떠난다면서 作別人事를 했다. 그러고는 도쿄 柳라쿠初 집에서 짐을 싸갖고 나와 海邊의 시바우라(芝浦)에 있는 ‘海水浴’이라는 旅館 兼 料理집에 며칠을 묵었다.

    1894年 3月9日 저녁 9時58分, 玉菌은 시나가와(品川)驛에서 夜間列車를 타고 오사카로 向했다. 隨行員은 駐日 中國公使館 通譯 誤報인(吳?仁), 隨行 보디가드 格의 靑年 와다(和田延次郞)와 寫眞師 兼 隨行員 가이(甲裴軍治) 單 3名이었다.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甲申政變 失敗 後 日本 亡命 時節의 朴泳孝, 徐光範, 서재필, 김옥균(왼쪽부터).

    列車에서 기다리던 日本의 極右 국수主義者 도야마(頭山滿)도 合席했다. 도야마는 中國의 쑨원(孫文), 朝鮮의 金玉均 같은 亡命客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勿論 義俠心이 아니라 日本의 國益을 위해서였다.

    보디가드 와다는 도쿄에서 南쪽으로 1000㎞나 떨어진 太平洋上의 오가사와라(小笠原) 出身이다. 그가 金玉均을 처음 만난 것은 8年 前인 1886年. 玉菌은 亡命 2年次이던 그해에 日本 政府에 依해 오가사와라에 流配됐다. 요코하마를 오가는 定期 배便이 1年에 네 次例밖에 없는 落島 中의 落島였다. 요코하마 港口에서 슈고마루(秀鄕丸)에 强制로 실려 21日 만에 到着했다. 거기서 알게 된 少年 와다는 玉菌을 韓國말 그대로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 時節 以來 바늘 가는 데 실 가듯 玉菌을 좇아 아들처럼 따라다녔다.

    오가사와라 制度는 海底 火山의 隆起로 생긴 섬, 卽 치치시마(父島) 下하시마(母島)等 30餘 個의 섬으로 이뤄져 있다. 玉菌은 亞熱帶의 原始林이 우거진 陰濕한 치치緦麻와 하하시마에서 2年 동안 病苦에 시달리며 流配生活을 한다. 絶海孤島(絶海孤島)의 외로운 삶에 지쳐 그는 美國으로 보내달라는 歎願書를 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精管(靜觀).’

    그가 오가사와라 時節에 남긴 揮毫다. 견디기 힘든 몸과 마음의 病을 다스리고자 몸부림친 亡命 政客의 苦惱가 잡힐 듯 와 닿는다. 딱 한 가지 慰安거리라면 日本 바둑의 代가 혼인보 슈에이가 다녀간 것이다. 그 머나먼 뱃길, 스무 날을 견디며 찾아와주었다. 슈에이는 無慮 석 달이나 머물며 玉菌의 바둑親舊가 돼줬다. 슈에이는 玉菌의 流配地가 홋카이도로 바뀌자 다시 삿포로까지 찾아와 慰勞하고 大國(對局) 相對가 돼줬다. 도쿄 亡命 直後 바둑으로 사귄 以來, 둘의 友情은 참으로 두터웠다.

    金玉均과 슈에이가 남긴 技保(棋譜)가 1992年 日本 國會圖書館에서 發見됐다. 1886年 2月20日의 이 對局에서 玉菌은 6點을 놓고 日本 最高數 슈에이에게 230修 만에 不計勝을 거뒀다.

    오가사와라 流配는 玉菌이 잘못을 저질러서 處해진 것이 아니었다. 故國에서 명성황후 一派가 玉菌을 죽이려고 보낸 刺客 池運永(池雲英·種痘法을 傳播한 池錫永의 兄弟)李 發覺된 事件 때문이었다. 池運永은 武器와 毒藥 따위를 갖고 金玉均에 接近하다 도쿄 긴자 隣近 校바시 警察署에 逮捕됐다.

    ‘명여特次도해포적사(命汝特差渡海捕賊使).’

    ‘바다 건너 逆賊 逮捕의 特命을 附與하노라’는, 池運永이 지니고 있던 王命勅書였다.

    當時 獄菌은 도쿄 쓰키지(現在 水産物市場과 아사히新聞社 一帶)의 外國人 居留地에 살고 있었다. 1991年 朝鮮의 첫 紳士遊覽團이 쓰키지 海邊의 하마리큐(긴자에서 徒步로 10分 程度 걸리는 海邊庭園)에서 迎接을 받고 外國人 居留地에 묵은 以來, 조선영史觀이 거기 들어서는 等 이 一帶는 도쿄 進出 韓人들의 橋頭堡 구실을 했다.

    日本에 있어 金玉均은 귀찮고 번거로운 存在였다. 朝鮮 政府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反政府 亡命客 玉菌을 껴안는 것이 外交的으로 得(得)이 없다고 判斷했다. 玉菌에게는 苛酷하더라도 日本의 國益을 위해 외딴 섬에 隔離하기로 했다. 그리고 刺客 池運永을 명성황후 一派에 되돌려 보냈다.

    繼續된 顚覆 謀議

    刺客 密派의 原因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玉菌에게도 歸責事由가 있다. 性格이 急한 玉菌은 日本에 와서도 명성황후 政權을 顚覆하려 切齒腐心했다. 후쿠자와의 도쿄 집에서 두어 달 머물다 요코하마의 外國人 居留地 야마테초로 집을 얻어 나갔다. 이 地域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 公園’으로 이름지어진 데서 알 수 있듯 港口가 내려다보이는 景觀 좋은 곳. 開港 以來 外國人들이 모여 살았고 只今도 外國人 墓地가 남아 있다. 現在 韓國의 요코하마 總領事館이 야마테초에 멋들어진 韓國式 建物로 들어서 있으니 金玉均의 先見之明이 엿보인다.

    야마테초에서 玉菌은 겐요샤(玄洋社)라는 右翼 集團의 壯士들과 接觸했다. 겐요샤는 시나가와驛에서 合流해 오사카行 列車에 同乘해 金玉均의 옆자리에 앉은 바로 그 人物, 도야마 미치壘가 만든 組織이다.

    도야마는 日本 暗黑街와 政界에 傳說로 남아 있다. 규슈 후쿠오카 胎生인 그는 靑年期에 사이고 다카모리의 征韓論(征韓論)을 支持하다 사이고가 逆賊으로 몰리는 바람에 投獄된다. 24歲 때 右翼團體인 고요샤(向陽社)를 組織해 國會 開設 運動을 벌이고 그 組織을 발전시켜 겐요샤로 키운다. 그의 이름과 겐요샤는 日本 國家主義 運動의 源流로, 右翼의 原形으로 남아 있다.

    그는 테러도 서슴지 않는 怪物이었다. 政府의 外交 交涉이 脾胃에 맞지 않자 外務大臣 오쿠마를 없애버리려 했다. 겐요샤 部下인 국수主義者 구루詩魔를 시켜 爆彈을 던지게 했는데, 多幸히 오쿠마는 한쪽 다리만 날리고 살아남았다. 테러로 問題의 外交 交涉이 中止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時·西·化에 能했던 金玉均은 日本 亡命 生活을 하며 글씨를 팔고, 서도 展示會를 열어 푼돈을 마련했다.

    도야마는 炭鑛을 經營해서 얻은 돈으로 겐요샤를 움직이며 情·財界의 背後에서 實力을 行使했다. 1944年 89歲를 一期로 죽을 때까지 官職을 맡은 적 없는 浪人(浪人)으로 一貫했으나, 政府나 檢警度 손을 댈 수 없는 特異한 ‘治外法權’的 存在였다.

    玉菌은 도야마와 겐요샤의 힘을 利用하고자 했다. 朴泳孝는 이런 點을 못마땅해했지만 玉菌은 莫無可奈였다. 玉菌은 멀리 고베까지 가서 다루이라는 政治人을 有名한 아리마 溫泉(日本의 3代 溫泉 中 하나)에 불러내 朝鮮 政府 顚覆을 論議했다.

    玉菌의 極祕 謀議가 고스란히 維持될 理 없었다. 다시 ‘草野新聞’ 1886年 1月21日子 記事.

    ‘金玉均이 日本의 無賴輩 數百名을 雇用해 爆藥을 携帶케 하고 朝鮮에 進擊할 것이라는 所聞이 報道된 바 있다. 몇 달 前, 日本 배 미노마루가 仁川에 到着하자 日本 警察官이 그 배의 乘客과 짐을 샅샅이 調査했다. ‘金玉均이 日本에서 無賴漢들을 朝鮮에 보내 毒을 뿌리겠다고 해서 事前 點檢하는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것을 朝鮮의 警察官 김굉神이 朝鮮 政府에 報告해 발칵 뒤집혔고, 捕盜廳이 나서서 變亂(甲申政變)의 殘黨을 嚴重히 搜索하는 騷動이 일어났다.’

    玉菌을 處置하고자 朝鮮 政府가 刺客 池運永을 密派한 데는 이런 背景이 있었던 것이다.

    오가사와라의 痛歎

    그러나 玉菌으로서는 亡命生活度 서러운데 오가사와라로 쫓아내는 日本 政府가 더없이 野俗했다. 日本의 非情함에 齒를 떨었다. 그날, 政變이 失敗하고 仁川으로 달아나 日本 亡命을 위해 齒도세마루에 올라탔을 때도 그랬다.

    서울에서 명성황후 政權의 守舊派 代身 조병호가 묄렌도르프(獨逸人으로 當時 職責은 統理機務衙門 協辦)를 仁川에 急派, 日本 公使 다케조에에게 金玉均 等의 身柄을 내놓으라고 要求했다. 이 絶體絶命의 瞬間 甲申政變을 함께 謀議한 다케조에는 突然 顔面을 바꾸고는 金玉均 一行을 向해 배에서 내리라고 했던 것이다. 죽으라는 말이었다.

    危機에 몰린 그를 救해준 것은 船長 쓰지였다. 義俠心으로 배 밑창의 貨物倉庫에 玉菌 一行을 숨겨줬던 것이다. 쓰지는 獄菌에게 ‘이와타 슈社큐(岩田周作)’라는 日本式 假名을 붙여주기도 했다. 이와타는 玉菌이 日本 滯留 10年 동안 즐겨 쓴 通名(通名)이다.

    오가사와라 流配 措處에 玉菌은 너무도 抑鬱하다며 反撥했다.

    “무릇 섬으로 보낸다는 것은 類型(流刑)으로서 重罪人에게 내리는 刑罰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 보낸 流配 命令書에 罪名을 明示해야 할 일 아닌가. 나의 罪를 말해다오.”

    그는 1886年 6月12日 主日러시아 公使에게 歎願書를 쓰기도 했다.

    “日本 政府는 나를 日本에 오도록 許容했고, 그들의 保護 아래 平穩하게 살게 해준 뒤, 갑자기 오가사와라에 보내 죽을 危險에 處하게 했습니다. 이는 理解가 가지 않고 國際法 原理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保護받을 수 있도록, 日本에 影響力을 行使해주실 것을 바랍니다.”

    暗殺未遂犯 池運永을 朝鮮에 돌려보낸 것도 통탄스러웠다. 玉菌은 英國人 辯護士를 내세워 司法 當局에 告訴했으나 檢察은 理由 없다며 뿌리치고 말았다. 玉菌 自身은 유배당하는 身世가 됐다. 日本의 新聞들이 玉菌을 同情的으로 報道한 것이 그나마 慰安거리였다고 할까.

    運命의 遭遇

    金玉均 一行이 탄 列車는 밤새 달려 다음날 午後 1時 무렵에 오사카驛에 닿았다. 이일직 等이 마중 나와 반갑게 맞아줬다.

    이일직. 명성황후 政權의 巨物 민영소의 祕密指令을 받고 2年 前인 1892年 5月 도쿄에 온 以來, 金玉均과 朴泳孝를 暗殺하기 위해 暗躍해온 人物이다. 그는 쌀 貿易業者로 僞裝해 活動하면서, 麾下에 권동수·再修 兄弟와 金兌原, 日本人 가와쿠보를 雇用해 옥균과 朴泳孝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金玉均을 處置하려 해도, 日本 警察의 눈을 避하기 어려운 데다 周邊에 亡命 同志인 이윤고, 유혁로, 신응희 等이 감싸고 있어서 實行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박영효 또한 도쿄에 ‘친린義塾’이라는 學校를 세워 朝鮮 靑年 學生 30餘 名을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暗殺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일직은 벌써부터 獄菌 周邊 亡命 同志들의 疑心을 샀으나 獄菌은 그를 警戒하라는 忠告를 外面했다. 玉菌은 “그 者를 믿지는 않지만 멀리할 必要야 있겠느냐”는 反應을 보였다. 그는 刺客이라도 오히려 ‘轉向’해서 亡命客人 自身을 도울 수 있으리라고 樂觀하고 있었다.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日本 亡命 當時의 김옥균(왼쪽).

    이일직이 暗殺을 決行하지 못한 채 歲月을 虛送하는 동안 洪鍾宇가 나타난다. 그는 프랑스에서 留學하고 歸國하는 車에 日本에 들러, 고베와 도쿄를 旅行 中이던 金玉均에게 接近했다. 그는 歸國해서 出世하고 싶었다. 一旦 金玉均을 만나보고 그가 再起해 權力을 다시 掌握할 것 같으면 그에게 달라붙고, 아니면 處置해서 명성황후 政權에 功을 세우면 될 게 아니냐는 計算이었다.

    刺客은 刺客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洪鍾宇가 이일직의 눈에 띄었다. 이일직은 홍종우를 불러내서 손을 잡자고 提議했다. 두 사람은 暗殺計劃을 세웠다. 언젠가 金玉均은 이일직에게 말했다.

    “亡命生活度 벌써 10年이 되어가오. 資金이 不足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形便이오. 좋은 計策이 있으면 말해주시오.”

    그동안 글씨를 팔고 西道展示會를 열어 僅僅이 푼돈을 마련해왔으나 이제 그것조차 限界에 達해 있었다. 붓글씨도 팔리지 않아 困窮은 더해갔다.

    이일직과 洪鍾宇는 金玉均에게 中國에 가서 財源을 모으라고 勸하고 상하이로 誘引해서 處置하는 方案을 세웠다. 後날 이일직이 日本 警察에 逮捕되어 陳述한 內容에도 그 凶計가 드러나 있다.

    “金玉均은 曺國革命을 위해 무슨 方道가 있느냐고 나 이일직에게 물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프랑스에 依支하는 方法이 있고, 먼저 러시아에 가서 때를 살피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洪鍾宇도 좋은 方道라고 맞장구를 쳤다.

    金玉均의 마음이 크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때 러시아에 가면 프랑스語가 必要할 것이고 通譯으로 홍종우를 데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金玉均이 ‘實은 李鴻章의 兩者 이경방을 도쿄에서 사귀어 잘 아는 處地이니 中國에 가면 便利할 것 같다. 李鴻章이 힘써준다면 대충 일이 될 것이다’고 했다. 그리하여 中國行이 定해진 것이다.”(훗날 도쿄地方裁判所의 檢事訊問에서 이일직이 한 答辯)

    야마토의 女人

    3月10日 오사카驛에서 헤어진 도야마 미치루와는 14日과 16日 두 次例 다시 만난다. 玉菌은 도야마와 바둑을 두며 時間을 보내면서 中國行을 걱정하는 도야마에게 “虎狼이 窟에 들어가지 않고는 虎狼이를 잡을 수 없다”고 豪言했다.

    도야마는 挽留를 斷念한 듯, 玉菌에게 ‘李鴻章에게 膳物로 갖다주라’며 뭔가를 내밀었다. 最高의 日本刀로 치는 교토의 散調(三條)칼 한 자루였다. 이 日本刀는 상하이에서 玉菌이 살해당하자 임자를 잃고 말았다. 그래서 보디가드 와다가 所重하게 챙겨 도야마에게 鄭重히 돌려줬다.

    玉菌은 오사카에서 가까운 야마토에 들렀다. 거기에는 玉菌의 私生兒가 자라고 있었다. 玉菌의 女子關係는 亂雜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8年 前 亡命 直後, 야마토의 히가시 히라노初 1465番地에 있는 야마구치의 집에 暫時 寄食하는 동안, 야마구치의 어머니 糯米와 깊은 關係를 맺었다. 이듬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紊亂한 性生活은 暗黑街 보스 도야마의 勸誘에 刺戟받은 것일 수도 있다. 도야마의 얘기다.

    “朝鮮에서 김을 죽이려 刺客을 보내자 그의 身邊이 걱정된 나는 그에게 忠告했다. 日本 枯死(古事) 中 오이시憂恥가 교토에서 기라의 諜者를 放心시킨 內容을 引用하면서, 憂國的 行爲를 버리고 酒色에 빠진 바보 시늉을 해보라고 勸했다. 그랬더니 그가 每日같이 도쿄 柳라쿠初의 旅館에서 시바우라의 溫泉場까지 들락거리며 紅燈街를 彷徨했다.”

    半쯤은 刺客의 칼끝을 무디게 하기 위해 일부러, 半쯤은 亡命流浪에 지치고 지쳐 自暴自棄의 心情으로 도쿄의 淪落街를 徘徊한 玉菌. 朴泳孝는 이런 玉菌을 싫어하고 지겨워했다. 亡命 同志들의 名譽를 떨어뜨리는 짓이라고 批判도 했다. 美國으로 亡命한 尹致昊가 도쿄에 들렀을 때도 朴泳孝는 金玉均을 激하게 非難했다.

    “玉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해대는 無能한 자야. 제멋대로 行動하는 放蕩兒地. 도쿄에서 朝鮮 사람, 日本 사람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돈을 빌려 물쓰듯하고 말이지. 結局 甲申革命이 失敗한 것도 그런 엉터리 指導者 때문일세. 그를 믿고 설익은 靑年들이 性急하게 일을 저질러서 그 꼴이 난 걸세. 그렇다고 玉菌이 眞짜 리더였나? 나와 洪英植이 다 했지.”

    혼인보와의 追憶

    玉菌의 酒色(酒色) 放縱은 홋카이도 流配時節에도 例外가 아니었다. 그가 오타루에서 사귄 妓生도 玉菌의 아이를 낳았다. 그女는 自己가 낳은 아이는 勿論 다른 女子의 蘇生까지 거두어 玉菌의 도쿄 쓰키지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事實 1888年부터 2年間 繼續된 홋카이도 流配는 오가사와라 流配의 연장이었다. 玉菌은 오가사와라에서 胃臟病을 甚하게 앓아 몇 次例나 日本 政府에 呼訴한다. 그러자 日本 政府는 마침내 삿포로 滯留를 許可했다. 그해 4月30日 日本의 內務大臣 야마가타가 外務大臣 오쿠마에게 보낸 文書에 그 經緯가 나타나 있다.

    풍운아 김옥균 일본 망명 10년의 궤적

    도쿄 아오야마 公園墓地의 外國人 墓域에 있는 金玉均의 무덤과 碑石.

    “金玉均은 오가사와라에서 胃腸炎으로 苦生하고 醫藥品도 적어 困難을 當하고 있다. 可憐한 處地이나 그를 乃至(本土)로 옮기기는 것은 外交 政略上 번거로운 누를 일으킬 可能性이 있다. 우리 治安의 조용함을 害치는 事件(暗殺)이 다시 날지도 모른다. 要컨대 그를 抑留할 땅은 오가사와라가 아니라면 홋카이도가 있을 뿐이다. 홋카이도는 그가 자란 朝鮮과 비슷한 寒冷한 氣候여서 健康에도 이로울 것이다. 그래서 그 者를 홋카이도로 移送하고자 한다.”

    玉菌이 홋카이도에 到着해 하코다테의 街쓰다 溫泉, 日本 映畫 ‘러브레터’의 撮影地로 韓國에도 널리 알려진 오타루를 다니며 몸을 추스르고 心身을 달래는 동안, 바둑의 名人 혼인보 슈에이가 다시 찾아왔다. 果然 義理와 人情이 있는 日本人이었다. 삿포로의 요류테이(楊柳亭)와 하코다테의 街쓰다 溫泉旅館이 바둑모임의 根據地가 됐다.

    혼인보가 왔다는 所聞에 홋카이도의 維持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바둑을 두며 交遊했다. 혼인보 슈에이와 玉菌의 바둑모임에 關한 新聞記事는 半年이나 이어진다. 슈에이는 홋카이도에 그처럼 長期 居住하며 玉菌을 돌보고 慰勞했다.

    玉菌은 2年 半 동안 그렇게 눈 많고 싸늘한 홋카이도 流配生活을 견뎌야 했다. 1890年 11月이 되어서야 流配抑留가 解除됐다. 그해 7月 總選거 結果, 金玉均과 가까운 이타가키가 總理가 되고 玉菌의 後見 政治人이던 고토 조지로가 遞信大臣에 올라 힘을 써준 것이었다.

    自身만 모르는 運命

    3月16日, 玉菌의 오사카 滯留 7日째.

    그는 교토에 가서 긴가쿠지(金閣寺·미시마 유키오의 小說 題目으로 有名한 査察. 日本의 國寶)를 둘러본다. 12年 前 視察次 日本에 처음 왔을 때도 긴가쿠지를 둘러본 적이 있다. 世上을 곧 下直할 것이라는 어떤 豫感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다음날, 그는 이일직 一行을 만난다. 밤낮으로 玉菌을 죽일 窮理에 沒頭해온 一行, 그 가운데는 권동수와 再修 兄弟도 있었다. 그러나 玉菌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일직은 玉菌에게 돈을 내놓았다. 오사카와 來日 訪問할 고베, 經由地 나가사키에서도 用돈이 必要할 것 아니냐고 했다. 玉菌은 그 돈으로 撞球도 치고, 洋服도 맞추고, 骨董品店과 土産品店을 기웃거리며 中國에 가지고 갈 膳物도 샀다.

    玉菌이 쇼핑과 消風으로 나돌아 다닐 때, 이일직은 홍종우를 불렀다. 마지막 點檢이었다. 이는 洪에게 拳銃과 短刀를 주면서 말했다.

    “中國 상하이에 到着하면 반드시 日本 사람이 運營하는 童話洋行에 묵도록 해. 배가 밤中에 到着하면 어둠을 틈타서 旅館에 가는 途中에 뒤에서 銃을 쏘아 죽이게.”

    弘恩 고개를 저었다.

    “大路에서 處置하는 것은 危險합니다. 代身 童話洋行에 들어가서 3層 客室이 配定되면 소리가 나더라도 拳銃을 써서 處置하고, 2層이나 1層 客室에 配定되면 投宿客이 놀라 뛰쳐나오지 않도록 短刀로 찔러서 없애는 게 좋겠어요.”

    이일직이 말했다.

    “아무튼 상하이에 上陸할 때는 拳銃이 드러나지 않도록 헐렁한 韓服 한 벌이 必要할 거야. 準備해서 그 안에 감추고 다니도록.”

    金玉均이 고베에 到着해 니시무라 旅館에 旅裝을 풀자, 洪鍾宇도 오사카에서 고베로 찾아왔다. 이 旅館은 玉菌이 亡命하던 해, 그의 身柄引渡를 要求하러 日本에 온 명성황후 政權의 謝絶 서상우 一行이 머물던 곳이었다. 玉菌을 暗殺하려다 朝鮮에 送還된 池運永度 여기 묵었다. 洪鍾宇가 프랑스 留學을 마치고 고베에 到着해 처음 머문 곳도 이 旅館이다.

    玉菌이 宿泊屆에 적어넣은 이름은 이와타 賞와(岩田三和)라는 假名이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朝鮮·中國·日本의 三火注意, 그 念願을 담은 것일 터이다.

    弘恩 旅館 主人에게 銀貨 300個를 내밀며 金貨 150엔으로 바꿔달라고 했다. 다시 紙幣뭉치를 꺼내더니 “旅客船 會社인 日本 于先(郵船) 고베地點에 가서 상하이까지 가는 乘船票를 사되, 김옥균, 誤報因果 내 票는 賞等(上等)으로 往復票를, 와다와 가이의 票는 中等(中等)으로 사달라”고 注文했다. 玉菌은 고베 市內를 散步하며 담배 주머니와 卷煙, 西洋式 中折帽를 샀다.

    3月23日 사이쿄마루를 타고 고베港을 떠났다. 旅館費 一切는 洪鍾宇가 支給했다. 玉菌, 와다, 寫眞師 가이는 日本 服裝이었고, 洪鍾宇는 洋服, 誤報인은 中國옷 차림이었다. 배는 24日 午後 나가사키에 닿았다. 一旦 乘客을 내리게 하고 萬 하루를 쉬었다. 玉菌 一行은 오무라秒에 있는 후쿠시마野 旅館에 묵었다. 日本 政府도 機敏하게 움직였다. 朝鮮 政府에 金玉均의 中國行을 서둘러 알렸다. 立 서비스였다. 當時 서울 駐在 日本公使 오토里가 外務大臣 무쓰에게 보낸 緊急報告書.

    “朝鮮 朝廷이 金의 中國 訪問에 動搖하고 있습니다. 제가 ‘金玉均이 사이쿄마루를 타고 상하이에 간다’고 알려줬기 때문에 宮中에서 그에 關한 對策을 놓고 會議를 열고 中國의 위안스카이(袁世凱·當時 서울 駐在 中國 代表)까지 부르는 等 법석을 떨고 있습니다. 情報를 준 내게도 感謝를 표했습니다.”

    김옥균만이 自身의 運命을 모르고 있었다.

    最後, 그리고 陵遲處斬

    3月27日 午後, 玉菌을 태운 배는 상하이에 到着했다. 玉菌 一行은 洪鍾宇의 案內對로 童話洋行에 체크인했다. 玉菌은 通譯 誤報인에게 開化 쿠데타 同志인 尹致昊를 부르게 했다. 尹은 日本 亡命 後 얼마 지나지 않아 美國으로 갔다. 거기서 英語를 익힌 뒤 그동안 상하이에 머물며 重서학원(中西學院·The Anglo-Chinese College)에서 敎鞭을 잡고 있었다.

    玉菌은 尹致昊에게 “李鴻章의 養아들 이경방의 招請으로 오게 됐다. 經費는 이일직이라는 者가 대고 있다”고 말했다. 尹致昊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홍종우라는 隨行員은 殊常해 보입니다. 操心해야겠습니다. 스파이 같아요.”

    그러나 玉菌은 “스파이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信任하는 건 아니야”라고 答했다. 玉菌은 往復 배票가 석 달 有效라는 얘기도 하면서 當分間 中國에 머물 것이라고 했다.

    運命의 3月28日이 밝아왔다. 洪鍾宇는 手票를 現金으로 바꾼다는 핑계로 外出했다가 곧 되돌아왔다. 誤報인은 點心을 먹으러 나간다며 外出하고 없었다. 보디가드 와다度 심부름으로 暫時 아래層에 내려간 사이, 玉菌은 洋服 저고리를 벗고 椅子에 半쯤 드러누워 冊을 펼쳐들었다. ‘資治通鑑(資治通鑑)’이었다. 日本 政客 이누카이(後날 總理가 됨)가 餞別 會食 때 빌려준 것이다.

    洪鍾宇는 서둘렀다. 拳銃을 꺼내 玉菌의 머리를 겨누어 한 발을 당겼다. 玉菌이 흠칫 놀라 쳐다보는 사이 또 한 發. 비칠거리며 일어서는 그에게 다시 한 發. 모두 세 발이었다. 玉菌은 홍종우를 붙잡을 心算이었는지, 避할 생각이었는지, 몸부림치면서 20m 떨어진 複道에 쓰러졌다.

    와다가 銃聲에 놀라 돌아왔을 때, 獄菌은 絶命해 있었다. 같은 層에 묵고 있던 시마자키라는 海軍大領이 銃聲에 뛰쳐나왔으나, 洪鍾宇는 달아나고 流血이 狼藉한 玉菌의 屍身만 뒹굴고 있었다. 洪鍾宇는 다음날인 3月29日 午後 警察에 逮捕됐다.

    金玉均의 屍身은 中國 軍艦 위정호에 실려 4月12日 仁川에 닿았다. 王命에 따라 屍身은 陵遲處斬됐다. 日本 ‘支持(時事)信保’ 1894年 4月28日子는 그 現場을 다음과 같이 報道했다.

    “金의 屍身을 棺에서 끄집어내 땅 위에 놓고, 切斷하기 쉽게 목과 손, 발 밑에 나무板子를 깔았다. 목을 자르고 난 다음에 오른쪽 손목, 그 다음 왼쪽 팔목을 잘랐다. 이어 兩 발목을 자르고 몸통의 등쪽에서 칼을 넣어 깊이 한 치, 길이 여섯 치씩 劣勢 곳을 잘라 刑罰을 마쳤다.”

    끝나지 않은 祈福(起伏)

    도쿄 아오야마 公園墓地의 外國人 墓域 한가운데 金玉均의 무덤이 있다. 1904年 3月 그의 誘發(遺髮))과 衣服 一部를 묻고 3m 높이의 碑石을 세운 것이다.

    金玉均이 죽고 陵遲處斬당한 以後에도 그 波瀾萬丈한 祈福(起伏)은 끝나지 않는다. 죽은 지 8個月이 지난 1894年 12月. 甲午更張에 따라 總理大臣 金弘集과 內務代身 朴泳孝의 聯立內閣이 들어서면서, 그는 王命에 依해 完全히 復官(復官)된다. 玉菌의 夫人 柳氏도 奴婢로 轉落했다가 復權됐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俄館播遷으로 情勢가 뒤집히고 朴泳孝가 다시 日本으로 달아나는 身世가 되자, 復權措置는 取消된다. 1910年 韓日强制合邦 以後에 金玉均은 ‘奎章閣 大提學’으로 復權됐다.

    도쿄 아오야마 墓地의 外國人 墓域 한가운데 자리잡은 碑石, 開化黨 兪吉濬이 쓴 悲鳴(碑銘)의 첫 句節이 바로 그의 삶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非常한 재주를 갖고, 飛上한 時代를 만나, 飛上한 功(功)도 세우지 못하고, 非常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公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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