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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州民主化運動 勃發과 美國의 誤判|新東亞

光州民主化運動 勃發과 美國의 誤判

글라이스틴 “‘2等 市民’ 全羅 道民의 地域主義가 暴動 불렀다 ”

  • 글: 이흥환 美 KISON 硏究員 hhlee0317@yahoo.co.kr

    入力 2004-04-28 13: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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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國 現代史의 어느 구석을 들춰봐도 美國의 痕跡은 또렷하다. 5·18의 光州도 例外가 아니다. 1989年 6月 美 國務部는 ‘光州에서 일어난 事件에 關한 美國 政府 聲明書’를 내놓았다. 1988年 國會 光州特委의 質問에 對한 答辯 形式이었다. 韓國에서 光州를 直接 겪은 美 行政府의 두 高位 官吏인 글라이스틴 駐韓 美 大使와 위컴 駐韓美軍司令官度 各各 備忘錄 形式의 著書를 통해 나름대로 光州에 對해 이야기했다. 이는 貴한 資料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光州가 흘린 피의 眞實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不足하다.1980년 5月 駐韓 美 大使館은 한 달 동안 每日 平均 3∼4件의 祕密 專門(電文)을 워싱턴으로 打電했다. 글라이스틴 大使의 이 ‘光州 보고’ 專門 가운데 一部는 그의 著書에도 실려 있고, 韓國 學界나 言論界에 一部 內容이 紹介되기도 했다. 하지만 12·12 쿠데타에서부터 5·18의 發端과 展開, 그 以後 狀況을 美 行政府의 祕密文書만을 통해 時間帶와 날짜順으로 把握할 수 있는 機會는 없었다. ‘신동아’는 이番 號부터 美 行政府의 祕密文書 發掘과 分析 作業을 하고 있는 KISON(Korea Information Service on Net : 韓半島 情報서비스넷)과 共同 作業으로 5·18 關聯 美 祕密文書를 통해 1980年 5月을 再構成하는 特輯 連載物을 싣는다. 새로 發掘된 800枚 假量의 光州 關聯 美 祕密文書 가운데 가려 뽑은 1次 資料를 통해 光州事態 初期 글라이스틴 駐韓 美 大使의 誤判, 5·18을 전후한 美國의 沈默과 憤怒, 鎭壓軍 特戰司 兵力의 移動 狀況, 12·12로 새롭게 登場한 政治勢力 新軍部와의 세(勢) 겨루기, 情報 空白 狀態에서 判斷마저 留保할 수밖에 없었던 글라이스틴 大使가 ‘가장 均衡 잡힌 鑛主 보고’라고 評價한 光州 滯留 美 宣敎師의 現場報告 等이 集中的으로 照明된다. 첫 回는 ‘글라이스틴의 誤判’ 便이다. 執筆을 맡은 KISON의 이흥환 編輯委員은 ‘美 祕密文書로 본 韓國 現代史 35場面’(2002年)을 發刊한 바 있다(편집자).》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24年이 지난 1980年 5月 光州의 慘劇을 되짚어본다. 1980年 봄, 美國의 役割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美國이 韓國 國內問題라는 理由로 아무리 距離를 두려고 해도 美國과 光州의 距離는 좁혀지지 않는다. 좁혀질 수 없다. 오히려 이 거리를 제대로 測定하지 않고서는 1980年 봄은 勿論 光州 悲劇의 眞實을 穩全히 드러내기 어렵다.

    5月18日 光州에서 始作된 평화로운 示威가 流血 慘劇으로 幕을 내리는 過程에서 美國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었는가? 美國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하지 않았나? 이는 美國이 狀況을 어떻게 認識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어떻게 對處했는지에 對한 물음일 뿐이다. 美國이 마땅히 取했어야 할 行動이나 取하지 말았어야 할 態度에 對해 묻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1988年 여름 韓國 國會는 5·18 光州 民主化運動 眞相調査 特別委員會를 構成하고 그해 겨울 外務部를 통해 윌리엄 글라이스틴 前 駐韓 美 大使와 존 위컴 前 美 8軍司令官에게 光州特委 出席 證言을 要請했다. 그러나 그해 12月2日 美 國務部는 이들의 特委 出席 證言을 拒否하고 聲明書로 答辯을 代替했다. 國務部가 ‘背景 說明(Background er)’이라는 題目으로 내놓은 이 聲明書와 이를 補充해 發刊한 ‘光州 白書’가 只今까지 美 行政府가 보여준 公式 立場의 全部다.

    글라이스틴 大使와 위컴 將軍이 各各 自身들의 著書에서 光州事態(光州民主化運動이라는 用語가 通用되고 있고 ‘光州事態’라는 用語 使用이 新軍部 立場을 代辯하는 것이라는 主張이 있긴 하지만, 이 글에서는 1980年 5月 當時 狀況에 焦點을 맞추고 있고 ‘光州事態’라는 表現을 쓴다 해서 過去事를 잘못 認識할 可能性은 없다고 判斷해 ‘光州事態’로 表記함 : 筆者)에 對해 言及하고 있지만, 國務部의 公式 文件인 ‘背景 說明’ 및 ‘光州 白書’의 內容과 큰 差異가 없다. 一部 敏感한 部分은 使用한 語彙까지 똑같다.



    美 政府 立場에서는 一貫性을 維持했다는 點에서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貴한 記錄을 남긴 글라이스틴 大使나 위컴 將軍도 하고 싶었던 말은 하되 不必要한 ‘雜音’을 일으킬 만한 구석은 避해갔다. 그들의 글은 國務部의 ‘背景 說明’이나 ‘光州 白書’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

    個人의 利害關係가 얽혀 있게 마련인 關聯 當事者들의 證言만으로는 光州의 眞實을 드러내기에 限界가 많다. 當時 狀況을 記錄해놓은 美 祕密文書들은 왜 이런 限界가 있을 수밖에 없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 않은 手段들 가운데 하나다. 駐韓 美 大使館과 워싱턴의 國務部 사이에 오간 祕密 專門, 國防情報局(DIA) 報告書 및 白堊館 狀況室의 會議錄 等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韓國 現代史에 韓美關係가 어떤 모습으로 揷入되어 있는지 들추어본다.

    글라이스틴 大使는 1999年에 發刊된 ‘뒤얽힌 關係, 影響力의 限界(Massive Entanglement, Marginal Influence)’라는 著書에서 光州事態를 ‘韓國에 永遠한 傷處를 남긴 事件으로, 韓國戰 以後 韓國史에서 평화로운 時期에 發生한 가장 深刻했던 危機’라고 規定하고 있다. 相當히 조심스럽고 신중한 表現이다. 事態 發生의 主體, 加害者와 被害者에 對한 言及은 모두 避했다.

    自身의 表現대로 글라이스틴은 ‘韓國戰 以後 가장 深刻했던 平和時 危機’ 狀況을 美國을 代表하는 大使 자리에 있을 때 맞았다. 공교롭게도 이 時期는 1979年 10月 朴正熙 大統領 弑害事件이 發生한 지 半 年 뒤로, 연이어 터진 12·12 軍部 쿠데타의 餘波로 緊張 狀態였으며, 戒嚴令 下에서 ‘1980年 봄’의 事態 推移에 온 神經을 곤두세우고 있던 때였다.

    祕密文書에 따르면, 19年 後에 發刊한 著書에서 光州事態를 10·26이나 12·12보다 더 深刻한 危機라고 評價했던 글라이스틴은 事態 初期에는 그 深刻性을 全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國務部에 打電한 大使館 祕密 前文에는 5月18日 流血 鎭壓이 始作된 지 사흘이 지난 5月21日까지도 光州 狀況과 關聯해 具體的으로 言及한 部分이 全혀 보이지 않는다.

    非常戒嚴이 全國으로 擴大 實施된 첫날인 5月18日 午前 9時, 駐韓 美 大使館이 워싱턴의 國務部로 打電한 3級 祕密 專門(題目 : 5月18日 午前 9時 現在 韓國 狀況)은 ‘午前 4時 通行禁止가 解除된 後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하다’라는 文句로 始作된다.

    「午前 4時 通行 禁止가 解除된 後 서울은 예전처럼 조용함. 着劍한 小銃으로 武裝한 軍 兵力이 境界를 서고 있는 政府 主要 建物에 武裝 兵力 輸送 車輛이 駐屯. 午前 2時, 軍 兵力에 大學 構內 進入 指示 下達됨. 一部 人士가 逮捕되었다는 보고 들어옴. 김대중氏 婦人과 接觸했던 西方 記者들에 따르면, 多數 軍人이 김대중氏 집을 샅샅이 搜索한 後 김대중氏를 連行해 갔음.」

    이 文書는 김대중氏 外에 김종필 공화당 總裁, 이후락 前 中央情報部長, 문익환 牧師 等 主要 人士들의 連行 事實도 傳하면서, 專門 마지막 部分에 光州를 言及하고 있다.

    「5月18日 午前 4時 以後 AFKN 放送을 통해 韓國 內 美國 市民들에게 活動 自制와 戒嚴令 遵守를 注意시키는 大使 名義의 聲明이 放送되고 있음. 光州, 釜山, 大邱 所在 美 文化院 報告에 따르면 모든 것이 平穩함.」

    所聞 所聞 所聞…

    5月18日 子正이 조금 지난 時刻에 國務部로 打電된 또 하나의 專門 亦是 光州에 對해서는 言及이 없다. ‘5月18日 서울, 學生/大學 狀況’이라는 題目의 이 前文에는 ‘5月18日 子正 直後 서울의 모든 大學이 軍 兵力의 統制下에 들어갔다’는 內容만이 들어 있을 뿐이다. 이 時間 光州에서는 이미 示威 群衆에 對한 武力 鎭壓이 恣行되고 있었다.

    光州에서 示威 群衆을 相對로 特戰司 兵力의 鎭壓作戰이 實施된 時間은 5月18日 午後 3時였다.

    이날 午前 10時 전남대 正門 앞에서 學生 50餘名이 特戰司 部隊員과 對峙하던 中 投石戰이 벌어졌으며, 午前 11時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서 始作된 示威隊의 連坐示威는 午後 2時가 넘어서면서 示威 群衆이 1600餘名으로 불어났다. 警察이 鎭壓에 失敗하자 特戰司가 投入됐다.

    駐韓 美 大使館이 國務部로 發送한 電文에서 光州事態가 처음으로 言及되기 始作한 것은 5月19日 午後 5時부터다. 다음은 ‘5月19日 午後 5時 韓國 狀況’이라는 題目의 專門 가운데 主要 部分이다. 이 前文은 光州事態 初期 狀況에 對한 美國의 認識을 엿볼 수 있는 資料로, 美國의 이런 視角은 以後에 展開된 光州事態 全般에 對한 認識의 바탕이 되고 있다.

    「報道된 바에 따르면 5月19日 하루 終日 光州를 除外하고 서울과 韓國 全域이 조용함. 서울의 公共建物과 言論社에는 兵力이 警戒勤務를 서고 있음. 신민당과 공화당 中央黨舍에도 軍 兵力이 配置되어 있음. 서울에서 學生 示威가 있으리라는 所聞이 있으나 午後 5時 現在 아무 徵候 없음.

    5月18日 廣州에서 發生한 暴動(riots)은 오늘도 繼續되고 있으며, 午後 3時 現在 數千 名의 群衆이 길거리에서 示威中인 것으로 알려짐. 로이터 通信에 따르면 學生 한 名이 武裝兵力 輸送 車輛에 깔려 죽음.

    光州 暴動과 關聯해 서울에까지 들리는 所聞에 따르면, 特戰司 兵力이 着劍한 小銃을 使用했으며, 이로 인해 學生 犧牲者가 多數 發生했음. 一部 光州 市民은 只今까지 겪었던 그 어떤 北韓人보다 鎭壓軍이 더 無慈悲하다(ruthless)고 말한 것으로 알려짐.

    교토通信 報道와 光州 美文化院 報告에 따르면, 相當數의 一般 市民이 學生과 함께 示威에 加擔하고 있음. 午後 5時 現在, 3000名 假量의 示威隊가 軍人 한 名을 人質로 잡았다는 警察 報告가 있음. 殘忍한 鎭壓 所聞에 對해 警察은 確認도 否認도 하지 않음. 이런 所聞들은 서울 및 其他 地域의 學生 및 一般 市民들에게 影響을 끼칠 수도 있음.

    見解 : 서울에서 우리가 만나본 사람들 大部分은 戒嚴令 擴大 措置에 失望하고 있음. 在野人士들도 失望感을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며 軍部를 그대로 放置할 수는 없다는 立場임.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에는 이미 時期를 놓쳤으며, 一部 少數 人士들은 政治人들이 政府 政策에 影響을 끼칠 수 있기를 期待하고 있음.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美國이 軍人들을 兵營으로 復歸하도록 만들 수 있으리라고 期待하고 있으며, 學生들이 再結集해 軍部 統制를 흔들 수도 있으리라고 보고 있음. 光州 暴動은 光州가 김대중氏의 出身地라는 點에서 더 큰 問題가 되고 있음.

    保安司令部의 나중 報告에 따르면, 光州 暴動에 關聯된 數字는 所聞보다 훨씬 적으며, 事實은 犧牲者가 發生하지 않았다고 函. 」

    이 文書는 光州事態에 對한 글라이스틴 大使의 初期 狀況 把握과 關聯해 重要한 點 세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글라이스틴 報告가 事實이라면, 그는 光州事態 첫날에 發生한 特戰司 部隊의 武力 鎭壓 事實을 하루가 지난 뒤에야 所聞 次元에서만 알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自身의 冊에서 ‘光州 美 文化院 報告를 통해 駐韓 美 大使館이 光州에서 일이 터졌다는 事實을 알게 된 時間은 5月18日 밤’이라고 적고 있다. 18日 밤에 첫 報告를 받았고, 이튿날 所聞을 듣기 始作한 셈이다. 光州 美 文化院의 첫 報告가 글라이스틴에게 事態의 深刻性을 인식시킬 만한 水準이 아니었다는 것은 앞으로 더 살펴볼 文書 內容에서도 드러난다.

    광주민주화운동 발발과 미국의 오판

    5·18 初期 駐韓 美 大使館은 光州民主化運動을 地域感情이 빚은 ‘暴動’으로만 認識하고 安易하게 對應했다. 寫眞은 當時 버스示威 場面.

    둘째, 新軍部 統制下에 있는 韓國 政府와 마찬가지로 光州事態를 ‘暴動’으로 認識했다. 暴動은 示威 群衆이 一方的으로 無秩序하게 ‘暴力을 行事(violent)’했을 때 붙일 수 있는 말이다. 戒嚴下의 韓國 政府나 美 大使館의 光州에 對한 視角은 別般 다르지 않았던 셈이다. 5月27日 鎭壓軍 再投入에 對한 新軍部와 美 大使館, 위컴 將軍의 論議에서도 美國은 新軍部에게 ‘最小限’이라는 但書를 붙이긴 했지만 ‘鎭壓 兵力 動員’에 同意했다.

    셋째, 事態의 原因, 動機 等 本質的인 問題가 把握되기 前에 光州가 김대중의 出身地라는 點과 全羅道라는 地域 特性을 事態를 바라보는 重要한 틀로 認識했다. 이런 偏向된 認識은 以後에도 그의 事態 判斷에 크게 作用한다. 光州事態가 鎭壓軍 再投入으로 또 한番 피를 뿌리며 마무리되는 5月27日까지 國務部로 打電된 文書는 勿論 以後의 事態 評價報告書에서도 全羅道의 地域 要因은 자주 强調되고 있다. 글라이스틴의 冊에서도 亦是 이 點을 强調해놓았다.

    넷째, 事態 發生 이틀째까지도 光州보다는 서울 狀況에 더 比重을 두고 있었다. 글라이스틴은 自身의 冊에서도 ‘서울 狀況에 沒頭해 있었다’고 쓰고 있다. 5月20日 하루 사이 國務部로 打電한 6件의 文件에서도 光州事態는 重要한 比重을 차지하지 않는다. ‘5月19日 박동진 前 外務長官과의 韓國 國內 政治 討論’ ‘逮捕된 政治人 名單’ ‘5月20日 內閣 辭退’ ‘5月20日 韓國 狀況 보고’ 等의 題目이 달린 文書가 光州의 자리를 代身하고 있다.

    3張짜리로 된 ‘5月20日 午後 2時 韓國 狀況’ 文書 끄트머리에는 光州 狀況이 이렇게 描寫되어 있다.

    「光州를 除外한 서울 外郭 地域은 조용함. 光州에서는 秩序 維持를 위한 軍 兵力의 强壓的인 鎭壓으로 相當한 憤怒心이 誘發된 것이 틀림없음. 光州 鎭壓軍의 殘惡性에 對한 所聞이 繼續 서울에 流布되고 있음. 警察 報告에 따르면, 民間人과 軍의 衝突로 (聾啞者라고만 身元이 確認된) 民間人 死亡者 1名이 發生했음. 大部分이 民間人인 ‘數十 名’의 負傷者가 發生했다는 報告도 있음. 多數 負傷者 發生과 殘惡 行爲에 對한 所聞은 鎭壓軍이 銃劍을 使用했다는 것을 말해줌. 光州文化院 報告로는 着劍한 兵力을 보긴 했으나 武器가 使用되는 걸 본 적이 없다고 함.

    軍 兵力이 學生들을 索出하려고 家庭집과 公共場所를 無作爲로 搜索하고 있다는 報告가 있음. 軍人들이 逮捕된 사람들(prisoners)의 옷을 벗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나 어디까지 옷을 벗기고 있는지에 對해서는 알지 못함. 逮捕된 사람 數는 아직 把握되지 않고 있음. 光州에 投入된 特戰司 兵力이 全羅道와는 傳統的으로 競爭 關係에 있는 慶尙道 出身이라는 所聞 때문에 地域 敵對感이 擴散되고 있음. 光州文化院의 午後 1時45分 報告에 따르면 都心에 民間人들이 모여들기 始作했음.」

    無慈悲한 武力鎭壓 後 深刻性 認識

    이때까지도 글라이스틴이 워싱턴에 報告한 光州 關聯 情報의 거의 모든 것은 所聞 次元에 머물러 있었다. 美 國務部가 1989年 6月에 發刊한 ‘背景 說明’ 聲明書와 글라이스틴 個人의 記錄에도 光州事態 初期에 駐韓 美 大使館이 接할 수 있는 情報라고는 光州文化院에서 報告되는 制限된 情報와 光州에서 12마일 떨어져 있는 美 空軍基地로부터의 亦是 制限的인 觀察 報告, 外信 報道뿐이었다는 點을 强調하고 있다.

    위의 5月20日 午後 2時 發送 文書만 보더라도 鎭壓軍의 亂暴한 鎭壓에 對한 여러 種類의 報告가 있었음에도, 駐韓 美 大使館의 韓國 政治狀況 報告에서 光州에서의 事態 進展은 優先順位에서 밀려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光州事態에 對한 美 大使館의 認識이 바뀌기 始作한 건 5月21日부터. 그러나 이때는 이미 光州事態의 悲劇의 씨앗이 된, 示威 群衆에 對한 强壓的인 鎭壓이 이뤄진 後 特戰司 部隊가 光州市 外郭으로 撤收한 時點이었다. 美國은 以後 光州事態에 對한 評價에서 첫 武力 鎭壓이 이루어진 5月18日이나 27日의 全面 再鎭壓보다는 5月21日을 事態의 頂點(peak)으로 把握하고 있다.

    鎭壓軍의 毆打 場面, 逮捕된 示威隊가 발가벗겨진 채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는 모습, 軍靴로 毆打당하는 젊은이의 모습 等 光州事態 初期의 現場 모습을 寫眞이나 動映像으로 傳하고 있는 大部分의 資料는 5月19日 또는 20日의 記錄物들이다. 20日 午後가 지나면서 强勁鎭壓에 憤怒한 群衆의 示威는 MBC 放送局과 視聽을 占領하는 等 過激한 樣相을 띠기 始作했고, 21日에는 市民들이 武裝을 始作했다.

    事態 初期 所聞 次元의 情報에 依存해 光州事態를 ‘暴動’으로 規定하고 있었던 美 大使館의 判斷대로라면 市民軍과 武裝 兵力이 對峙하는 事態로까지 번진 5月21日을 事態의 頂點으로 把握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5月21日 글라이스틴은 國務部에 總 6件의 文書를 打電한다. 靑瓦臺 動靜, 新任 國務總理(박충훈) 任命 等 一般 報告 文書가 2件이고, 韓國의 全般的인 狀況 報告가 2件이며, 나머지 2件이 光州 關聯 報告다. 5月18日 以後 獨立的인 題目으로 光州 關聯 報告가 打電된 것이 이때부터이며, 5月21日子 文書에서 비로소 光州事態의 原因에 對한 言及이 나타난다.

    “光州 暴動은 地域主義가 原因”

    5月21日 文書 가운데 첫째는 光州 投入 兵力의 示威隊에 對한 發砲 事實을 言及한 文書다. 이때부터 報告되는 市民軍의 公共建物 破壞와 鎭壓軍에 對한 攻擊 事實은 所聞의 形態가 아니라 美 大使館이 把握한 ‘事實’의 形態로 記述되고 있다.

    「題目 : 5月21日 午後 2時40分 現在 韓國 狀況 報告서울, 釜山, 大邱 繼續 平穩 維持. 光州 關聯 所聞 繼續 流布中.光州 : 5月20日 光州 都心에 示威 群衆 8萬∼10萬 雲集. 午後 7時 示威隊가 特戰司 兵力과 公共建物 攻擊. 最小 5個 警察署가 공격당함. 2個 放送局은 全燒됨. 脂肪 戒嚴司令部와 視聽, 郵遞局, 道廳 等이 모두 包圍당하거나 점령당함.5월21일 늦은 아침, 光州의 한 美軍 觀察者는 鎭壓軍이 發砲했다는 事實을 報告함. 서울을 出發한 韓國軍 2∼3個 連帶가 光州에 投入되고 있음.」

    다음은 5月18日 以後 처음으로 光州 關聯 題目을 獨立的으로 붙이고 光州 關聯 內容만 담고 있는 2張짜리 3級 祕密 文書다. 事態의 原因에 對한 言及도 처음으로 담겨 있다.

    「題目 : 光州 暴動과 向後 政治的 安定

    5月21日 午後부터 光州의 無秩序 狀態가 極度로 深刻한 狀態로 進行中임. 軍部가 秩序 回復을 위해 相當한 兵力(considerable force)을 投入할 것으로 보이며, 向後 몇 年間 持續될 傷處와 被害가 이미 많이 發生했음.

    光州의 口號들은 여러 面에서 서울이나 其他 地域의 救護와 類似함. 그럼에도 왜 이 南部 地域 都市는 深刻한 暴動 狀態에 빠졌으며, 政府의 公共秩序 維持 能力이 顯著하게 떨어졌는가? 아마도 激烈한 光州 暴動에는 地域主義가 相當한 役割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임. 全羅道民은 아주 오랜 期間 동안 스스로를 2等 市民이라고 느껴왔으며, 全羅道의 政治 指導者인 김대중 拘禁 小食과 戒嚴 擴大 消息을 接하고 敏捷하게 政府 當局과 對峙하려는 생각에서 示威가 加速化되었음.

    警察과 軍은 이들에게 特히 苛酷하게 對應했는데, 이는 政府 當局의 權威에 挑戰하는 것을 容納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고 있으나 全羅道民은 그렇게 對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음.

    光州 暴動은 政治 環境에 反美 感情이라는 藥물을 投與하게 되었음. 大多數 韓國人들은 美國이 狀況을 制御할 수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暴動의 副産物로 死傷者가 發生하고 毆打와 放火가 일어난 點 때문에 韓國人들이 美國에 對해 가졌던 생각이 훨씬 생생하게 깨져버렸음.

    暴徒들은 美國이 韓國軍을 支援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따라서 現在 發生한 일에 對해 責任이 있는 쪽으로 連結시키고 있음. 바깥에서 惡役을 찾으려는 이런 傾向은 向後 더 큰 問題를 일으킬 수 있음.」

    앞에서도 指摘되었듯이 이 文書에서도 글라이스틴은 光州事態의 發生 原因으로 地域主義를 擧論하고 있다. 全體 5個項 42行의 文書 分量 가운데 35行을 割愛해 事態 原因과 向後 問題點을 指摘하면서 地域主義에 對해 言及하고 있는 것이다.

    이 時期 駐韓 美 大使館의 國務部 報告 文書의 끄트머리에는 모두 글라이스틴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專門을 글라이스틴 大使가 直接 作成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大部分은 政治 擔當 職員이 作成하고 臺詞의 이름으로 報告되는 것이 專門 作成의 慣例다. 그러나 臺詞의 意見과 相馳되는 內容이 大使의 이름으로 報告될 수는 없으며, 大使에게 報道하지 않은 채 打電되는 前文은 있을 수 없는 것 또한 專門 作成의 慣例다.

    5月21日에 打電된 專門 가운데 ‘光州 危機’라는 題目이 붙은 文書는 地域主義에 根據한 原因 分析을 한層 더 强調하고 있다.

    「題目 : 光州 危機

    光州의 大規模 叛亂이 如前히 統制 不能이며, 最小限 지난 20年 사이에 國內에서 이와 類似한 事態에 直面해본 적이 없는 韓國 軍部에게 非常 狀況이라는 認識을 심어주고 있음.

    直接的인 原因(immediate cause)은 金大中 및 全羅道 出身 政治人들에 對한 政治 彈壓인 것이 분명하지만, 現在로서는 모든 全羅道民이 暴力에 加擔하고 있으며, 뿌리 깊은 歷史的 地域 敵對注意를 反映하고 있음. 最小 15萬名이 加擔하고 있으며, 大規模 破壞가 이루어졌음. 最新 情報에 依하면, 暴徒들이 武器庫를 부수고 武器와 彈藥, 爆彈을 奪取했음. 韓國軍은 오늘 밤 軍 兵力을 市 外郭으로 撤收시킬 計劃임.

    위컴 將軍은 (暴徒들의 : 옮긴 이) 浸透에 對備해 內部 非常 水準을 强化하기로 同意했으며, 非公式的으로는 데프콘 3에 該當하는 非常 對策을 講究하고 있음.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對해서도 論議했음. 事態 鎭火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萬若 그가 그렇게 할 意志가 있다면, 김대중뿐인데 그는 拘禁 狀態이고 아마도 큰 讓步를 받아내지 않는 限 도움을 주려 하지 않을 것임. 다른 어떤 人物(hero)도 나서려 할 것 같지 않음.」

    示威 强勁鎭壓에서 市民軍의 武裝 對抗이 前半部라면, 5月21日을 起點으로 光州事態는 後半部로 접어든다. 事態 前半部 내내 글라이스틴은 光州 問題를 深刻하게 對하지 않았다. 制限된 現地 觀察 情報 때문이었다는 것이 글라이스틴의 主張이다.

    그러나 當時 데이비드 밀러 光州 美 文化院長이 大使館과 電話로 처음 接觸한 時間은 글라이스틴의 말대로 5月18日 밤이라는 比較的 이른 時點이었다. 深刻할 만큼 死傷者가 많이 發生했으며 鎭壓軍의 亂暴한 鎭壓에 市民들의 非難이 쏟아지고 있다는 現地 狀況도 傳達되었다.

    “이 事態는 當身네 政府가 막아줘야 한다”

    하지만 글라이스틴이 事態를 深刻하게 보기 始作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나 지난 5月21日이었다. 當時 美 大使館 武官이었던 제임스 영(James V. Young)은 2003年에 發刊된 ‘韓國 觀察(Eye on Korea)’이라는 題目의 備忘錄에서 이때의 狀況을 이렇게 적고 있다.

    ‘5月20日 낮, 나는 約束도 없이 한 韓國 陸軍 中領의 事務室에 들렀다. 그는 光州 出身이며 全斗煥의 參謀를 지낸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事務室 밖으로 데리고 나가 駐車場으로 가더니 光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對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光州에 계신 父母님께 電話를 해 現地 事情을 傳해 들었다는 것이었다. 父母님 말에 따르면 狀況은 끔찍할 程度이며 特戰司 軍人들은 統制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事態를 當身네 政府가 막아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最善을 다하겠다는 約束을 하고 서둘러 大使館으로 돌아왔다.

    5月20日 늦게까지도 우리는 光州의 悲劇이 어느 程度인지 確信을 못하고 있었다. 돈 블로티(Don Blottie) 大領(제임스 靈의 上官 : 옮긴이)과 봅 브루스터(Bob Brewster)에게 바로 報告를 했지만 光州가 그 程度로 惡化되어 있으리라고 믿는 雰圍氣가 아니었다.’

    제임스 靈의 이 證言은 위에서 살펴본 글라이스틴의 國務部 報告 文書에 나타난 바와 一致한다. 제임스 英은 5月20日 午後라는 時點은 이미 美國이 光州 狀況에 影響을 끼치기에는 너무 늦은 時間이었다고 指摘하고 있다.

    글라이스틴은 光州事態 初期 狀況을 제대로 把握하는 데 失敗했다. 對應하는 速度도 늦었고, 워싱턴에 事態의 眞實을 報告하는 것도 늦었다. 그러나 글라이스틴은 무엇보다도 新軍部가 主導하는 韓國 政府를 크게 刺戟하지 않으려는 워싱턴의 對韓國 政策을 忠實히 따랐다. 5月18日과 19日 이틀 동안 光州의 慘劇보다는 서울의 政治 地形 變化에 더 큰 比重을 두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勿論 글라이스틴度 ‘서울 狀況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理由에 對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駐韓 美 大使館만 光州에 比重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워싱턴도 마찬가지였다. 1980年은 美 大統領選擧의 해였고, 이란 人質 救出 作戰이 失敗로 돌아간 탓에 워싱턴의 봄은 이란 問題로 시끌시끌한 狀態였다. 사이러스 밴스 國務長官이 이란 事態에 對한 責任 等을 理由로 4月28日 辭任했고 에드먼드 머스키가 새 國務長官이 됐다.

    美 國務巫歌 韓國 問題로 高位 政策檢討 會議를 처음 召集한 것은 光州事態가 後半期로 접어든 5月22日이었다. 이날 머스키 國務長官이 主宰한 檢討會議가 끝난 後 好딩 카터 國務部 代辯人이 光州事態에 對한 美 政府의 立場을 처음으로 發表했다. 美國의 첫 公式 立場이었다.

    5月22日 光州 狀況만 後半部로 접어든 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美國에게도 壓力이 加해졌다. 5月22日 워싱턴에 打電한 글라이스틴의 前文에는 只今까지와는 天壤之差로 緊迫感이 배어난다. 다음은 新任 머스키 國務長官에게 發送한 專門 가운데 主要 部分이다.

    「題目 : 光州 危機 關聯, 美 政府의 後續 聲明 건

    好딩 카터의 5月21日(美國 時間 : 옮긴이) 聲明은 도움이 되었으나 光州에는 아무에게도 傳達되지 않았음. 狀況은 極度로 深刻함. 漸漸 더 많은 韓國人이 美國의 立場을 알고 싶어하며, 韓國 政府도 우리가 聲明을 發表해주기를 願하고 있음. 보다 重要한 것은 위컴 將軍과 本人이 韓國 軍部로부터 우리 政府의 立場을 밝힌 問安을 檢閱하지 않은 채로 配布할 것이며, 狀況이 完全히 惡化되지 않는 限 最小限 이틀 內에는 光州에서 强壓的인 鎭壓으로 우리의 立場을 難處하게 만들지 않겠다는 確約을 받았다는 것임.」

    事態 好轉될 것으로 誤判

    美國은 新軍部와 新軍部에 反對하는 韓國民 兩쪽으로부터 同時에 立場 表明의 壓力을 받은 것이다.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聲明書에 包含시킬 4個項을 다음과 같이 提案했다.

    ‘聲明書는 來日 記者會見 때 發表해 來日 이곳 新聞에 報道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로울 것임. 다음과 같은 內容이 包含되어야 함.

    -우리는 光州에서의 市民 紛爭(civil strife)에 驚愕하고 있음(alarmed)

    -모든 關聯 當事者들이 極度의 自制心을 發揮, 平和的인 問題 解決을 위해 對話를 推進할 것을 促求함’

    글라이스틴은 美 政府 發表文에 위의 2가지 事項 外에도 北韓을 의식해 ‘美 政府는 韓國 狀況을 利用하려는 어떠한 外部 勢力의 企圖에 對해서도 條約 精神에 依據, 强力하게 對處할 것임을 再闡明한다’는 內容도 包含시키면서 ‘祕話 通話基로 워싱턴 時間 午前 8時에서 8時30分 사이에 電話할 것임’을 머스키 國務長官에게 알렸다.

    글라이스틴의 提案대로 이튿날인 5月22日(워싱턴 時間) 國務部 代辯人은 글라이스틴의 問安을 거의 그대로 反映한 聲明을 發表했으나, 言論을 統制하고 있던 韓國의 新軍部는 美國의 이런 立場이 一般에게 傳達되는 길을 封鎖해버렸다. 글라이스틴과 위컴의 誤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新軍部側에 反感을 가지고 있었던 위컴은 이 일을 두고두고 非難하게 된다.

    光州事態 初期 거의 無關心에 가까운 對應으로 一貫하던 글라이스틴 大使는 5月21日을 起點으로 ‘極度로 深刻한 狀況’이라는 認識을 하게는 됐으나 事態 收拾 過程에서 또 한番의 誤判을 하게 된다. 光州 秩序 回復을 위해서는 戒嚴軍 再投入이 不可避하다는 新軍部의 主張에 ‘最小限의 武力 動員’을 容認한 것이다. 事實上 이 ‘最小限의 武力 動員’은 이미 5月22日 머스키 國務長官 主宰 下에 열렸던 高位 政策檢討 會議에서 決定된 事案이었다.

    新軍部로부터 光州 秩序 回復을 위한 鎭壓軍 再進入 計劃을 通報받기 하루 前인 5月23日 글라이스틴이 國務部에 發送한 前文은 武力 鎭壓의 可能性이 낮아졌다는 쪽으로 把握하고 있다.

    「題目 : 5月23日 午後 3時30分 現在 韓國 狀況

    光州 狀況이 늦은 速度이긴 하지만 好轉되는 것으로 보임. 유재현 合參議長은 軍 兵力이 하루나 이틀 後 光州에 再進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음.

    見解 : 光州의 無秩序 狀態에 對한 武裝 鎭壓을 避하는 方向으로 지난 24時間 사이에 狀況이 好轉되었음. 하지만 鎭壓軍이 光州市로 평화롭게 成功的으로 再進入하기 前까지는 確實하지 않음. 光州市 再進入은 며칠 後에 이루어질 것으로 보임.」

    聯合司 兵力 ‘떼주기’ 合意

    5月23日 글라이스틴 大使는 박충훈 國務總理署理와 만났다. 이들間의 對話內容을 要約한 4張짜리 文書는 2級 祕密로 分類되었고 祕密 解除된 文書에는 朴 總理署理가 말한 部分이 거의 削除되었다. 主로 新軍部에 對해 言及한 대목들이다. ‘國務總理署理와의 첫 會同’이라는 題目이 붙어 있다.

    「‘要約 : 박충훈 國務總理署理와 첫 會同을 가짐. 本人 要請으로 이루어진 會同이며, 本人은 朴正熙 大統領 弑害 以後 美國의 對 韓國 政策을 要約해 說明했음. 韓國의 5月17日 戒嚴令 擴大 政策이 우리에게 衝擊을 주었다고 말했음. 示威를 確固하게 鎭壓하는 것은 必要할지 모르지만 政治 彈壓을 隨伴한 것은 政治的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結局 光州에서 深刻한 事態가 發生하는 데 一助한 것이 틀림없다는 見解를 披瀝했음.

    그리고 우리(朴 總理署理와 글라이스틴 : 옮긴 이)는 韓美聯合司 指揮下에 있는 兵力을 光州에서 使用할 수 있도록 韓國 當局에 ‘떼주기(chop)’로 合意를 보았음.’」

    글라이스틴 大使와 박충훈 總理署理의 兵力 ‘떼주기(chop)’ 合意가 있었던 날, 光州에서는 示威隊의 武器 回收를 둘러싸고 市民軍 內部에서 强溫派 對立이 深化되고 있었다. 光州市 全體로 봐서는 市民들이 거리 淸掃에 나서는 等 安定이 回復되어가고 있었지만 不安感은 가시지 않았다. 强勁派의 主張대로 鎭壓軍 再投入 可能性을 憂慮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흘 後인 5月27日 午前 2時, 戒嚴軍의 光州 再進入 作戰이 開始되었고 光州事態는 또 한番의 피를 뿌리면서 마무리가 지어졌다. 새벽 5時23分이었다. 5月22日 白堊館 狀況室에서 열렸던 高位 政策檢討 會議(PRC, Policy Review Committee)에서의 決定 事項대로 ‘最小限의 兵力’李 動員된 ‘秩序 回復’이었다. 다음은 2級 祕密로 分類되어 있는 1980年 5月22日의 高位 政策檢討 會議錄 專門(全文)이다.

    「政策 檢討 委員會(Policy Review Committee)

    1980年 5月22日

    場所 및 時間 : 白堊館 狀況室, 午後 4時~5時15分

    主題 : 韓國



    國務部 : 에드먼드 러스키 長官 (議長), 워런 크리스토퍼 次官, 리처드 홀부르크 동아태 擔當 次官補/ 中央情報局(CIA) : 스탠스필드 터너 除毒, 존 홀드리지 中國 및 東아시아 擔當/ 合參 : 데이비드 존스 將軍, 合參 副議長 존 퍼스테이 中將, 陸軍 副參謀長 존 베시 將軍/ 白堊館 :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國家安保補佐官, 데이비드 아론/ 國家安保會議 : 도널드 그레그/ 國防部 : 헤럴드 브라운 長官, 國際安保擔當 副次官補 닉 플래트, 國際安保擔當 次官補 데이비드 脈氣퍼트



    韓國의 現 狀況에 對한 充分한 論議 끝에, 最優先 順位는 向後 無秩序 狀態가 擴散되지 않도록 必要한 武力을 最小限으로 使用해 韓國 政府가 光州의 秩序를 回復하는 것이라는 一般的인 合意에 到達했음. 一旦 秩序를 회복시킨 後에는 政治 自由의 水準을 한層 높이도록 韓國 政府, 特히 軍部에 壓力을 加해야 한다는 데 同意했음.

    브레진스키 博士는 接近 方式을 다음과 같이 要約했음. 卽, ‘短期的으로는 支援하되, 長期的인 觀點에서는 政治 發展의 壓力을 加한다’는 것임.

    머스키 國務長官은 결정지을 事案들을 提示했고 그 議題에 對해 다음과 같은 決定을 내렸음.

    1. 公開 聲明 : 5月22日 聲明으로 當分間은 充分하다는 데에 同意.

    2. 光州 狀況에 對한 美國의 姿勢 : 只今까지 우리가 取해온 行動 以上의 일은 할 必要가 없다는 데에 同意. 우리는 穩健한 方法을 選擇할 것을 助言했으나, 韓國民이 秩序 回復의 必要를 느낄 境遇 武力을 使用하는 것을 排除하지는 않았음.

    3. 美國의 追加的인 軍事措置 : 現在는 아무런 追加措置가 必要하지 않다는 데에 同意. 韓國民은 우리가 該當地域에 早期警報器를 迅速하게 配置한 것을 좋아하고 있음. 北韓에 對한 美國의 非常警戒 措置는 올바른 判斷이었음.

    航空母艦 코럴 氏(Coral Sea)의 位置를 再檢討重任. 現在는 필리핀 北部에 있으며 東쪽으로 移動中임. 航路를 東海上으로 再調整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음.

    머스키 國務長官은 國防部에 此後 發生할 수도 있는 ‘最惡의 시나리오’에 對備해 必要한 追加措置를 取해줄 것을 要請함. 特히 머스키 長官은 暴力이 光州 外郭으로 擴散될 境遇 어떤 措置를 取해야 하는지와, 萬若 韓國軍 再配置가 北韓軍 防禦 任務에 持續的으로 威脅이 될 境遇 國防部가 對案을 準備해줄 것을 要請.

    4. 美國人의 訪韓 : 輸出入銀行 존 무어 總裁의 訪韓 問題가 討議됨. 글라이스틴 大使의 意見을 求하고, 무어 總裁가 日本에 到着한 後 最終 決定을 하기로 同意함. 다른 訪韓 日程을 取消함으로써 韓國人들에게 否定的인 信號를 보내는 것은 只今으로서는 失手가 될 수 있다는 共感帶가 會議 參席者들 사이에 形成되었음(OPIC의 리月른 訪韓이 이미 取消된 바 있음).

    5. 光州에서의 秩序 回復 後 무슨 措置를 取해야 하나 : 우리가 할 일은 光州 狀況이 어떻게 解決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는 點에 同意했음. 萬若 死亡者가 적게 發生하고 잘 處理될 境遇 조용히 政治 發展에 對한 壓力을 加할 수 있을 것임. 萬若 死傷者가 많이 發生할 境遇 政策檢討 會議를 再召集해 方法을 講究하기로 函.

    6. 光州 以後의 目標 : 머스키 長官은 韓國에서 우리가 達成하고자 하는 目的에 關心을 집중시키는 것이 좋긴 하나 長期的인 觀點에서 그 目的을 어떻게 達成할 것인지에도 關心을 가져줄 것을 要請했음.

    現在는 글라이스틴 大使를 再召喚해서는 안 되며, 當分間 워싱턴에서 特使를 派遣할 必要도 없다는 데에 同意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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