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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人物韓國史

김정희

實事求是 精神으로 이룩해 낸 學問과 藝術魂

[ 金正喜 ]

出生 - 死亡 1786 ~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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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國史에서 19世紀 最高의 人物을 꼽으라면 斷然 秋史 김정희 (金正喜, 1786~1856)를 꼽지 않을 수 없다. 金正喜는 秋史體 라는 固有名詞로 불리는 最高의 글씨는 勿論이고 歲寒圖로 대표되는 그림과 詩와 散文에 이르기까지 學者로서, 또는 藝術家로서 最高의 境地에 이른 人物이다. 金石學 硏究에서도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業績을 남겼으며 殿閣 (篆刻) 또한 最高의 技術을 가져 天才 藝術家로서 그의 이름을 凌駕할 人物은 거의 없다고 評價받고 있다.

不遇한 어린 時節, 하늘이 내린 資質

金正喜는 1786年(正祖 10) 6月 3日 忠南 禮山郡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慶州이며 어릴 적 이름은 원춘(元春)이다. 김정희만큼 號가 많은 人物이 또 있을까. 一般的으로 많이 알려진 秋史(秋史)와 阮堂(阮堂) 外에도 勝泄道인(勝雪道人), 노과(老果), 天竺高(天竺古先生) 等 生前에 100餘 가지가 넘는 號를 바꿔가며 使用했다.

天才의 出生이니만큼 誕生 逸話가 없을 理 없다. 어머니 뱃속에서 10달이 아닌 24個月 만에 世上에 태어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태어날 무렵 시들어가는 뒷山 나무들이 아기 金正喜의 生氣를 받아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傳한다. 誕生逸話는 天才를 包裝해주는 이야기일 뿐이고, 어려서부터 뛰어난 資質을 보였음은 틀림없는 事實이다.

김정희 집안은 安東 金氏, 풍양 조氏와 더불어 朝鮮後期 兩班家를 代表하는 名門 家門이었다. 曾祖父 김한신은 英祖 의 둘째딸인 和順翁主와 結婚하여 월성위에 봉해진 人物이다. 김한신이 39歲에 後嗣 없이 죽자 월성위의 조카인 김이주가 養子로 들어가 代를 이었는데, 이가 金正喜의 祖父이다. 秋史는 兵曹判書 金魯敬과 機械 兪氏 사이에 長男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김노영이 아들이 없어 養子로 入養되었다. 큰宅으로의 兩者 入養은 朝鮮後期 兩班家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어린 金正喜의 天才性은 일찍부터 發見되었다. 그의 나이 일곱 살 때의 일이다. 樊巖 채제공 이 집 앞을 지나가다가 大門에 써 붙인 ‘立春帖(立春帖)’ 글씨를 보게 되었다. 예사롭지 않은 글씨임을 알아차린 蔡濟恭은 門을 두드려 누가 쓴 글씨인지를 물었다. 마침 親아버지인 金魯敬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對答했다. 글씨의 主人公을 안 蔡濟恭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名筆로서 이름을 떨칠 것이다. 그러나 萬若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運命이 祈求해 질 것이니 絶對로 붓을 쥐게 하지 마시오. 代身에 文章으로 世上을 울리게 되면 반드시 크고 貴하게 될 것입니다.” [大東奇聞(大東奇聞)]

金正喜는 어린 時節의 大部分을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宮에서 보냈다. 월성위宮은 英祖가 사위인 粤省위 김한신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金正喜가 서울집이 아닌 豫算에서 出生한 것은 그때 當時 天然痘가 猖獗하여 暫時 移住한 것이라 한다. 월성위宮에는 梅竹軒이라하여 김한신이 平生 모은 書庫(書庫)가 있었다. 수많은 藏書는 金正喜의 學問世界를 바다처럼 넓게 만들어 주었다. 아버지 노경은 아들의 資質을 알아보고 當時 北學派의 거두였던 박제가 밑에서 受學하게 하였다. 스승이었던 박제가 亦是 어릴 적 金正喜의 ‘立春帖’ 글씨를 보고 “이 아이가 크면 내가 直接 가르쳐 보고 싶다.”고 했다는 逸話가 傳한다.

1800年 열다섯의 나이에 寒山 李氏와 結婚한 金正喜는 이 時期를 前後로 견디기 어려운 試鍊에 부닥쳤다. 이미 十 代 初盤에 할아버지와 養아버지의 죽음을 經驗했고 結婚 이듬해인 1801年에는 親어머니마저 世上을 떠났다. 1805年에는 婦人인 寒山 李氏와 死別했고, 뒤이어 스승인 박제가마저도 世上을 떠났다. 10代 時節은 끊이지 않는 집안 凶事로 苦痛과 외로운 나날의 連續이었다.

韓中文化 交流史에 足跡을 남기다

寒山 李氏와의 짧은 因緣을 뒤로하고 金正喜는 23歲인 1808年에 瘞安 李氏와 再婚하였다. 그 뒤로는 凶事度 그쳤고 平安함을 되찾았다. 生父 노경이 好調參判으로 昇進했고 또 同志府使가 되어 淸나라 燕京(只今의 北京)에 가게 되었다. 當時 私馬試驗(生員·眞사 資格을 주는 過去試驗)에 合格했던 金正喜는 外交官의 自制(或은 親姻戚)에게 附與되는 自制軍官의 資格으로 使行길에 同行하였다. 蛇行段의 한 사람으로 燕京에 가서 外國 見聞을 넓히고 온 經驗은 人生의 轉換期라 할 만큼 큰 影響을 미쳤다. 아마도 燕京을 세 番이나 다녀온 스승 朴齊家의 影響도 無視하지는 못할 것이다.

金正喜의 學問과 藝術을 낱낱이 밝혀낸 東洋哲學者 후지츠카 는 20世紀 初에 韓國 仁寺洞 書店街를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며, 羅聘이 그린 박제가 肖像畫, 淸나라 畫家 株學年이 金正喜에게 보내준 그림, 그 有名한 歲寒圖 等을 發見하여 購入하였다. 후지츠카의 硏究로 朝鮮의 北學派들人 이덕무 , 박제가, 유득공 , 이서구 , 金正喜 等이 北京과 서울을 오가며 朝鮮後期 知性史를 燦爛하게 비추었음이 밝혀졌다. 父親을 따라 金正喜가 北京으로 出發한 것은 1809年 10月 28日이다. 北京 滯留 期間은 2달 남짓이었는데 이 使行길에서 2名의 中國人 거유(巨儒)와 運命的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中國 第一의 금석학자 옹방강 (翁方綱, 1733~1818)과 阮元 (阮元, 1765~1848)이었다. 金正喜는 옹방강, 阮元과 같은 當代 最高의 碩學들과 交流하면서 當時 最高潮에 이른 考證學의 眞髓를 工夫하였다. 燕京學界의 元老이자 中國 第一의 금석학자였던 옹방강은 秋史의 非凡함에 놀라 “庚戌文章 海東第一”이라 讚歎했고, 阮元으로부터는 阮堂(阮堂)이라는 愛情어린 雅號를 받았다. 후지츠카는 이들의 만남을 韓中文化 交流史의 歷史的 事件이라 評價했다.

스승인 朴齊家가 만났던 羅聘이나 氣菌과 老大家들은 이미 世上을 떠났지만, 金正喜는 北京에서 옹방강, 阮元과 같은 스승 外에도 이정원, 서송, 鳥綱, 株學年 等 많은 學者들을 만났다. 이들은 1810年 2月 1日 朝鮮으로 돌아가는 金正喜를 위해 北京 法院社에서 送別宴을 열었다. 株學年은 送別宴 場面을 卽席에서 그림으로 그리고 參席者 이름을 모두 記錄했다. 그 當時 株學年이 그린 前別途 實物은 사라지고 없지만, 1940年 二學年이 模寫한 그림이 果川市 文化院에 所藏되어 있다. 燕京學界와의 交流는 歸國한 以後에도 끊임없이 이어져 萬年까지 繼續되었고 金正喜의 學問 世界를 豐盛하게 해 주었다.

北京 法院社. 金正喜와 中國 文人들이 만났던 곳이다. <出處 : 정성희>

實事求是 精神을 實現한 學問世界

金正喜의 學問世界는 한마디로 ‘實事求是’로 要約할 수 있다. 實事求是 (實事求是)는 淸나라 考證學者 顧炎武 가 主唱한 것으로 ‘事實에 依據하여 事物의 眞理를 찾는다.’는 뜻이다. 金正喜는 實事求是 精神에 立脚하여 學問 世界를 完成해 나갔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天文學에 對한 識見도 刮目할 만한 程度였다. 日蝕과 月蝕 現象 等 觀測에 根據하여 西洋天文學의 知識을 받아들였다.

1821年 34歲의 金正喜는 大科(大科)에 及第하여 出世길에 접어들었다. 以後 10餘 年間 金正喜와 父親 金魯敬은 各各 要職을 涉獵하여 人生의 黃金期를 맞았다. 그러다가 어지러운 柾國과 政爭의 波高 속에서 1830年 父親 金魯敬이 彈劾받는 일이 發生했다. 아들로서 金正喜는 꽹과리를 치며 父親의 無罪를 主張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金魯敬은 강진현 古今島에 竊盜安置(絶島安置, 陸地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流配하는 刑罰)되었다가 1年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이들 父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다가 1838年 金魯敬이 世上을 떴고 金正喜는 그 이듬해 兵曹參判에 올랐다. 薰風도 잠깐, 김노경을 彈劾했던 安東 金氏 勢力들이 이番에는 金正喜를 攻擊하여 그를 官職에서 끌어내렸다.

秋史體와 歲寒圖를 完成한 藝術魂

金正喜는 酷毒한 拷問 끝에 濟州島에서 西南쪽으로 80里나 떨어진 대정현에 圍籬安置되었다. 圍籬安置(圍離安置)는 流配刑 가운데 가장 酷毒한 것으로 流配地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刑罰이다. 現在 南濟州郡 대정읍 안성리 옛 대정현 縣廳에 이웃한 金正喜의 敵거지는 復元된 것으로 遺墟碑와 함께 조그만 遺物展示館이 세워져 있다.

봉은사에 있는 秋史 親筆의 懸板. <出處 : 정성희>

金正喜는 濟州島에서 9年間 귀양살이를 했다. 이 時期 동안 많은 便紙를 통해 陸地에 있는 知人과 後學들에게 自身의 學問世界를 傳했다. 特히 流配 期間 中 夫人과 며느리 等과 주고받은 40統에 達하는 한글 便紙는 그의 人間的 面貌 드러내고 있는 重要한 資料이다. 流配 期間 동안 畫家이자 弟子인 小癡 許維(1809~1893)가 세 次例나 濟州島로 건너가 수발을 들어준 일은 有名하다. 小癡는 衷心으로 스승인 秋史의 글씨와 그림을 배웠다.

濟州島 流配期間을 통해서도 그는 쉬지 않고 붓을 잡아 그리고 쓰는 일에 邁進하였다. 最高의 傑作品인 ‘ 歲寒圖 ’도 이 時期에 그려졌고, 흔히 秋史體라 불리는 그의 獨創的인 書體도 이때 完成되었다. 流配 中에 그린 세한도는 金正喜의 最高 傑作이자 우리나라 文人畫의 最高峯이라 評價받는 그림이다. 1844年 그의 나이 59歲에 首弟子인 理想的에게 세한도를 그려 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連休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孔子의 글을 跋文에 적은 것은 有名하다.

流配 期間 中인 1842年 11月 13日, 流配生活 내내 힘이 되고 慰勞가 되는 存在였던 아내 瘞安 李氏가 世上을 떠났다. 1849年 9年間의 流配를 끝으로 마침내 귀양에서 풀려났다. 그 後 서울 용산 漢江 邊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는데, 다시 謀陷을 받아 1851年 北靑으로 流配 길에 올랐다. 多幸히 귀양은 1年으로 끝났지만, 그는 이제 世上에 아무런 未練이 없었다. 七十 平生 열 個의 벼루 밑을 뚫고, 1千 자루의 붓을 망가뜨릴 程度의 藝術魂을 지녔던 金正喜는 末年을 京畿道 果川에서 지내며 일흔한 살의 나이로 世上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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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초상 / 이한철

김정희 肖像 /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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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日

發行日 : 2011. 01. 23.

出處

提供處 情報

  • 정성희 實學博物館 學藝硏究士

    정성희는 歷史硏究家로 ‘現在와 疏通하는 살아있는 歷史’를 發掘해 내는 일에 專念하고 있으며, 現在는 ‘21世紀와 實學’이라는 主題에 關한 著述을 하고 있다.

  • 그림 장선환 畫家,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慶熙大學校 美術敎育學科와 同大學院 繪畫科를 卒業했다. 畫家와 그림冊 作家로 活動을 하고 있으며, 現在 경희대에서 講義를 하고 있다. https://blog.naver.com/fartzz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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