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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예르모 스타빌레

월드컵 이야기

기예르모 스타빌레

1930年 우루과이 월드컵

[ Guillermo Stabile ]

出生 - 死亡 1905.1.17. ~ 1966.12.27.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非凡한 스피드와 골 決定力, 그리고 남다른 位置選定으로 因해 1930年 월드컵 내내 守備手들 사이에서 恐怖의 對象으로 君臨하던 攻擊手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스타빌레의 技倆에 놀라워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疑問點을 머릿속에 떠올려야 했다. “저 選手는 都大體 어디서 나타난 누구인가?”

初代 월드컵의 신데렐라

월드컵 招待 得點王이었던 기예르모 스타빌레

第1回 월드컵 이 開幕하기 直前까지 스타빌레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大會 前까지 單 한 番도 아르헨티나 代表팀의 유니폼을 입고 國際 競技를 치러 본 經驗이 없는, 더 나아가 所屬팀 우라칸에서도 오랜 벤치 生活을 면치 못했던 스타빌레는 어쩌면 월드컵 엔트리에 拔擢된 것 自體가 異常해 보일 程度였다. 事實 이 無名 攻擊手가 월드컵 最高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 事緣은 조금 특별하다. 本來 스타빌레는 當時 代表팀 主張이었던 페레이라,1920~30年代 最高의 스타 攻擊手 마리오, 보카 주니어스 最高의 골잡이들이었던 替勞와 바라요, 그리고 當代 最高의 테크니션 페우셀레 等의 뒤를 받치는 백업 멤버에 不過했다. 프랑스와의 組別리그 첫 競技에서 스타빌레가 默默히 벤치를 지켜야 했음은 當然했고, 이러한 팀 內 立地에는 월드컵 내내 變化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멕시코와의 두 番째 競技를 앞둔 時點에서 司正은 180도 달라졌다. 마리오는 첫 競技에서 當한 負傷으로 인해 멕시코戰에 나설 수 없는 狀態였고, 체로 亦是 갑작스럽게 恐慌發作을 일으키며 病床에 드러누웠다. 한 술 더 떠 學位를 準備하던 主張 페레이라는 期末試驗을 치르기 위해 蹴球協會의 許可를 받고 아르헨티나로 一時 歸國했다. 主戰 攻擊手 3名이 同時에 戰力에서 離脫해 버린 것이다.

올라사르 監督은 結局 멕시코를 相對로 候補 攻擊手들을 풀稼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 過程에서 機會를 附與받은 攻擊手들이 데마리아, 스파라도, 그리고 스타빌레였던 셈이다. 가장 無名이었고, 또 가장 뒷順位 攻擊手였던 스타빌레는 아마도 가장 注目받지 못하던 候補 選手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타빌레는 모두의 豫想을 뒤엎고 해트트릭을 炸裂시키며 一大 事件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스타빌레는 칠레와의 세 番째 競技에서도 替勞를 代身하여 選拔 出戰 機會를 附與받았다. 負傷에서 回復한 마리오, 期末試驗을 치르고 돌아온 主張 페레이라와 함께 무시무시한 콤비를 이룬 스타빌레는 이 競技에서도 두 골을 터뜨리는 猛活躍을 펼쳤다. 美國과의 準決勝戰에서도 다시 한 番 두 골을 폭발시킨 스타빌레는 어느덧 大會 最高의 스타플레이어로 急浮上해 있었다.

비록 아르헨티나는 개최국 우루과이의 壁을 넘지 못해 準優勝에 머무르고 말았지만 스타빌레의 이름은 全 世界로 一波萬波 퍼져나갔다. 甚至於 이탈리아 名門球團 제노아는 巨額을 들여 스타빌레를 迎入하기까지 했다. 볼로냐와의 데뷔戰에서 해트트릭을 炸裂시키며 그 名聲을 再確認시킨 스타빌레였지만, 아쉽게도 그 後에는 30年 大會의 活躍을 좀처럼 再現해내지 못했다. 스타빌레는 이른바 初代 월드컵의 ‘신데렐라’였던 셈이다.

別名은 ‘侵略者’

1930年 월드컵을 지켜본 蹴球人들은 스타빌레를 빠른 스피드와 空間 浸透能力을 갖춘 타고난 스트라이커였다고 回想한다. 特別히 個人技가 華麗한 것은 아니었지만, 周邊 同僚들이 찔러주는 패스 타이밍에 발맞춰 뒷空間을 破壞하는 能力이 남달랐다. 이러한 스타일로 因해 30年 월드컵 當時 스타빌레에게 붙여진 別名은 바로 ‘侵略者(El Filtrador)’였다. 反面 스타빌레의 키는 168cm에 不過했으며, 헤딩이나 몸싸움에는 그리 剛한 面貌를 나타내지 않았다. 이처럼 스타빌레의 不足한 파워를 效果的으로 補完해 준 選手는 主張 페레이라였는데, 페레이라는 작지만 빠른 스타빌레, 마리오, 페우셀레 等이 원활하게 空間으로 浸透할 수 있도록 볼을 키핑하는 플레이에 注力하는 모습을 보였다.

監督으로서의 成功

아르헨티나 自國 內에서 스타빌레의 이름은 選手보다 監督으로서 더욱 有名하다. 스타빌레는 所屬팀 우라칸에서 오랜 벤치 生活을 經驗하는 동안 同僚 選手들의 플레이나 監督의 戰術運用을 集中力 있게 지켜봤고, 그것을 自己發展의 土壤으로 삼고자 했던 學究派이자 努力派였다. 이러한 스타빌레의 知性派 氣質은 26歲의 젊은 나이로 選手 兼 監督職을 遂行하게 되는 決定的 契機로 作用했다.

隱退 後 1939年에는 34歲의 나이로 아르헨티나의 새 司令塔으로 赴任했는데, 以後 스타빌레는 無慮 21年이나 代表팀 監督職을 留任하게 된다. 그 발자취도 初代 월드컵에서 ‘반짝 活躍’에 그쳤던 現役 時節에 비해 훨씬 더 또렷했다. 스타빌레의 麾下에서 아르헨티나는 無慮 6番이나 코파아메리카 優勝을 經驗했고, 디 스테파노, 모레노, 페데르네라, 라브루나와 같은 當代 最高의 選手들을 排出하며 첫 番째 黃金期를 누렸다. 그러나 스타빌레 監督의 월드컵 데뷔는 1958年이나 되어서야 現實로 이뤄졌다. 第2次 世界大戰으로 因해 40年代 내내 월드컵이 치러지지 않았을 뿐더러, 1950年 大會는 브라질과의 葛藤 問題로, 1954年 大會는 國內 事情으로 인해 아르헨티나 蹴球協會가 월드컵 出戰을 스스로 抛棄했기 때문이다. 스타빌레 監督은 意欲的으로 월드컵 데뷔 舞臺를 準備했지만, 디 스테파노를 비롯한 스타 選手들의 流出 空白을 메우지 못한 채 組別리그 脫落이란 受侮를 當하고 말았다.

뒤바뀐 월드컵 첫 해트트릭 記錄

한便 스타빌레는 不過 얼마 前까지만 하더라도 월드컵 첫 해트트릭을 記錄한 主人公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 記錄은 지난 2006年 11月, 피파에 依해 美國 攻擊手 베르트 파테노드의 것으로 公式 修正됐다. 피파 側의 發表에 따르면 파테노드는 스타빌레보다 이틀 먼저 해트트릭을 記錄했다고 한다. 스타빌레가 멕시코를 相對로 해트트릭을 성공시킨 날짜는 1930年 7月 19日로, 이는 파테노드가 파라과이前에서 해트트릭을 記錄한 1930年 7月 17日보다 이틀 뒤늦은 時期였다. 이처럼 피파가 스타빌레로부터 월드컵 첫 해트트릭의 榮譽를 빼앗아가게 된 事緣은 바로 이렇다.

本來 피파는 파테노드의 파라과이戰 1得點을 또 다른 美國 選手 플로리의 골로 記錄해놓고 있었다. 그러나 美國 蹴球協會 側의 資料 檢討 結果 이 골은 플로리가 아닌 파테노드의 골인 것으로 確認됐고, 피파 亦是 美國 側의 異議提起를 받아들여 記錄을 公式的으로 修正했다. 이 論難은 事實 1930年 월드컵 直後부터 種種 있어 왔는데, 美國 側이 2006年 들어 決定的인 證據를 發見함에 따라 피파도 自身들의 失手를 認定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피파의 公式 發表가 있었음에도 不拘, 뒤바뀐 월드컵 첫 해트트릭 記錄은 아직까지 大衆들에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만큼 스타빌레가 월드컵 첫 得點王이란 타이틀 以外에도 월드컵 첫 해트트릭의 主人公으로 오랜 期間 동안 紹介되어 왔기 때문이다. 最初는 最高보다 偉大하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스타빌레가 월드컵이란 大會에 남긴 발자취는 여러 가지 意味에서 남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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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日

發行日 : 2010. 05. 11.

出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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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형석 蹴球 칼럼니스트

    글쓴이 이형석은 國內 最大 規模 海外蹴球 專門 사이트인 <사커라인>( www.soccerline.co.kr )의 칼럼니스트로 다 年間 活動해 왔다. 代表的인 著書로는 [現代蹴球의 戰術, 알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와 [한 卷으로 씹.어.먹.는 월드컵] 等이 있으며, 그 밖에 <후추>, <베스트일레븐>, <스포츠온> 等 다양한 媒體를 통해 寄稿活動을 벌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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