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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畫像

印象派 아틀리에

自畫像

에드가 드가

에드가 드가 [자화상] 1855
캔버스에 油彩 | 81.3x64.5cm | 오르세 美術館

印象派 畫家들 中에서 가장 特異한 性格의 所有者를 꼽으라면 드가를 指目할 수 있을 것이다. 1855年에 그린 젊은 時節 드가의 自畫像을 보자. 이 自畫像을 그릴 當時만 해도 드가는 살롱에 데뷔할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은 마네를 만나기 前에 그린 그림이라고 하지만, 어딘가 드가다운 고집스러움이 배어나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성마르고 잘 생긴 靑年은 藝術에서 救援을 찾았을 뿐, 다른 그 무엇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마네나 모네와 달리 드가는 結婚 같은 건 眼中에도 없었다. 그는 露骨的인 女性 嫌惡主義者였고 “女子의 수다를 들어주느니, 차라리 울어대는 羊떼들과 함께 있는 게 낫다”고 斷言하는 爲人이었다. 한 마디로 ‘밥맛’이었다.

고집스런 完璧主義와 女性嫌惡 性向을 가진 드가

모든 女人에게 親切했던 마네의 劇團에 드가가 서 있었다. 어떤 女性 모델이 自身을 그린 드가의 그림을 보고 코가 닮지 않았다고 不平을 하자 드가는 모델을 옷도 입히지 않은 채 門 밖으로 내쫓아버렸다고 한다. 드가가 그린 一連의 ‘沐浴하는 女人 시리즈’에서도 斟酌해 볼 수 있듯이 그에게 女性은 살과 뼈, 그리고 筋肉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態度에서 類推해 드가를 天下의 人間 末種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冷靜하게 생각한다면, 드가의 생각은 當時에 흔했던 ‘科學에 對한 觀點’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科學은 男性이고 自然은 女性’이라는 二分法的 想像力이 19世紀를 支配했었는데 드가는 그 當時로 본다면 常識에 가까웠던 생각을 生活 態度로 體得하고 있었던 셈이다. 드가는 自身의 그림에서 우연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發言이야말로 드가의 女性嫌惡가 어떤 意味를 숨기고 있는지를 斟酌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드가는 그림을 그리기 前에 音樂을 作曲하듯이 모든 것을 計劃했다. 이런 點에서 類推해봤을 때, 그의 女性嫌惡는 自身의 그림에 對한 完璧主義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드가는 親舊들에게 “都大體 마누라가 무슨 所用이지? 아침에 부스스한 모습으로 깨어서 밤새 作業한 내 그림을 보고 ‘正말 잘 그렸네요!’라는 입에 발린 소리나 하는 것 말고 달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正말 이 程度면 드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症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卽興性을 不信하고 色彩에 對한 생각까지도 꼼꼼히 記錄

다른 印象派 畫家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드가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에도 쉴 새 없이 構想하고 있는 그림에 對해 메모를 남겼다. 特히 色彩에 對한 그의 言語的 陳述은 有名한 것이다. 그는 色彩에 對한 생각까지도 꼼꼼하게 記錄했다. 드가는 卽興性이나 感情의 噴出 같은 것을 信賴하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그림은 科學的 觀察의 結果였고 認識의 産物이었다. 따라서 드가는 쓸데없이 모여서 藝術에 對해 헛소리나 늘어놓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해대는 社交 모임을 輕蔑했다. 그에게 藝術은 끊임없는 努力의 結實이었지 어떤 天才的 靈感의 表現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드가의 女性嫌惡는 單純한 個人의 趣向 問題라기보다 科學으로 대표되는 一種의 時代精神을 具現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目錄

1 에드가 드가 [머리 빗는 女人] 1886
2 에드가 드가 [浴槽 속의 女人] 1886

19世紀까지도 유럽에서 女性은 高尙한 藝術을 理解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存在로 여겨졌다.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이 그렇게 女性에게 禮儀바른 말은 아닌 것이다. 女性이 모자라고 弱하니 保護해줘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西洋 文化에서 弱者를 돌보는 것은 美德에 屬하는 것이라는 事實을 想起할 必要가 있다. 勿論 그렇다고 印象派 畫家들이 드가처럼 모두 女性 嫌惡症을 드러낸 건 아니다. 마네가 慇懃히 女性 畫家들을 일컬어 “謀士는 잘하지만 獨創性이 없다”고 評했지만 그렇다고 印象派 畫家들이 女性을 싫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印象派 畫家들만큼 女性에 好意的이었던 藝術家들도 없었을 것이다. 印象派는 드물게 베르트 모리조 메리 카사트 같은 女性 畫家들도 參加했던 畫派라는 點을 다시 確認할 必要가 있겠다.

不幸한 家族史와 드가의 藝術

그러나 아무리 드가의 女性嫌惡가 當時 時代相을 體現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歷史的 過去라는 決코 사라지지 않는 ‘떡밥’은 恒常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法이다. 드가의 境遇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女性嫌惡를 애써 家族史와 關聯해서 바라보고 싶은 이들도 있는데, 이들에게 드가는 ‘不幸한 家族史가 不幸한 天才를 낳는다’는 古典的 믿음을 확인시켜줄 수 있는 좋은 證據일 뿐이다. 드가의 아버지는 有名한 이탈리아系 銀行가였고, 어머니는 그보다 한참 어린 아름다운 크레올 女人이었다. 크레올은 白人과 黑人 사이에 태어난 混血系인데, 드가의 어머니는 異國的이고 惱殺的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이 程度 이야기였다면 별스러울 것도 없겠지만, 드가의 어머니는 男便의 男동생과 깊은 內緣의 關係를 맺고 있었다. 드가의 아버지는 이 事實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그 女人을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祕密에 부치고 默認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드가의 어머니는 32살의 나이에 世上을 뜨고 말았고, 그 餘波로 아버지는 거의 廢人으로 轉落해버린다. 이때 드가의 나이 13살이었다.

平生토록 女性用 鄕愁를 싫어하고 꽃무늬 裝飾이라면 窒塞을 했던 드가의 趣向을 崎嶇하다면 崎嶇하다고 할수 있는 그의 家族史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드가가 法律 工夫를 그만두고 畫家의 길로 뛰어든 게 너무 些少한 일처럼 보인다. 드가가 出世의 지름길을 抛棄하고 畫家가 되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었다고 한다. 1854年 20살이 되던 해, 그는 法律家의 길을 抛棄하고 그토록 그리던 畫家 授業의 길에 들어선다. 그로부터 9年 뒤에 루브르에서 巨匠들의 그림을 模寫하면서 그림 工夫에 熱中하던 드가는 偶然히 마네를 만난다. 드가는 自身의 그림을 偶然의 産物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새로운 歷史는 가끔 偶然의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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發行日

發行日 : 2010. 01. 07.

出處

提供處 情報

  • 이택광 慶熙大學校 글로벌커뮤니케이션學部 영미文化專攻 敎授

    釜山에서 자랐다. 英文學을 工夫하다가 文化硏究에 興味를 느끼고 英國으로 건너가 워릭代學校에서 哲學 碩士學位를, 셰필드大學校에서 文化理論을 專攻해서 博士學位를 받았다. 1999年 映畫 週刊誌 <씨네21>에 글을 發表하면서 本格的으로 文化批評을 쓰기 始作했다. 視覺藝術과 大衆文化에 對한 分析을 통해 政治社會 問題를 解明하는 作業에 많은 關心을 갖고 있다. 現在 慶熙大學校 영미文化專攻 敎授로 在職하면서 文化批評家로 活動하고 있다.

  • 이미지 TOPIC / cor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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