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李鍾贊 前 國家情報院長 (上) : 月刊朝鮮
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本文 바로가기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李鍾贊 前 國家情報院長 (上)

“盧泰愚 後繼는 1980年에 이미 決定” (兪學聖)

整理 : 배진영  월간조선 記者   ironheel@chosun.com

寫眞 : 서경리  월간조선 記者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1962年 最高會議에서 全斗煥과 처음 만나, 12·12 後 再會
⊙ 2·12 總選 앞두고 “西大門 出馬 막아 달라”던 盧泰愚, 大統領 된 後 “이종찬이 내 出馬 막았다”
⊙ 盧泰愚 當選 後 만난 權翊鉉, “黨이 順坦치 않을 거요”

李鍾贊
⊙ 76歲. 陸士 卒業(16期). 서울대 行政大學院 碩士.
⊙ 中央情報部 總務局長·企劃調整室長, 11~14代 國會議員, 민정당 院內總務·事務總長, 政務第1長官,
    새한국당 代表, 第14代 大統領候補, 새정치국민회의 副總裁, 第15代大統領職引受委員長,
    國家情報院長 歷任. 現 友黨奬學會 理事長.
   1962年 5月 23日 京畿道 漣川 第28師團 連帶 敎育將校로 있던 내게 人事命令이 내려왔다. “5月 24日 10時까지 國家再建最高會議로 出頭하라”는 것이었다.
 
  다음 날 서울 光化門 美國大使館 옆 옛 文化體育관광부 廳舍에 있던 國家再建最高會議에 出頭하고 나서야 나는 財政擔當 最高委員 유원식(柳原植) 將軍의 副官으로 任命됐다는 事實을 알게 됐다. 유원식 將軍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지만, 柳 將軍의 집안은 우리 집안과 특별한 因緣이 있었다. 柳 將軍의 아버지인 短珠 儒林(丹洲 柳林) 先生은 내 할아버지(友堂 李會榮)와 마찬가지로 아나키스트(無政府主義者) 系列의 有名한 獨立運動家였다.
 
 
  全斗煥과의 첫 만남
 
國家再建最高會議 時節의 全斗煥 大尉.
  유원식 將軍을 뵙고 물러나온 나는 村닭처럼 어리벙벙했다. 그때 電話가 걸려 왔다.
 
  “이종찬 中位인가?”
 
  “네, 그렇습니다.”
 
  “亂 議長室에 있는 11期 全斗煥(全斗煥) 大尉네. 자네가 赴任했단 말을 들었어. 點心 約束이 없으면 點心이나 같이 하지 않겠나?”
 
  當場 點心食事는 어디서 해야 하는지, 食券은 어디서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고맙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全斗煥 大尉가 일하고 있는 3層 議長室로 올라갔다. 全斗煥 大尉는 그때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每事에 自信滿滿해 보였다.
 
  “앉게. 盧泰愚(盧泰愚) 大尉하고 배명국(裵命國) 中尉가 곧 올 테니까 함께 나가지.”
 
  暫時 後 두 사람이 나타났다. 우리는 近處 불고기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陸士 14基인 배명국 中尉(後日 11·12·14代 國會議員 歷任)는 學窓 時節부터 잘 아는 사이였지만, 盧泰愚 大尉와는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
 
  全斗煥 大尉는 “最高會議란 데는 複雜하고, 特히 財政委員會는 말이 많은 곳이니 말操心하라.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利權(利權)과 關聯된 사람들이니깐 恒常 警戒하는 것이 좋다”는 等 勤務에 必要한 助言을 해 주었다. 盧泰愚 大尉는 말數가 적었고, 사람을 有心히 觀察하는 듯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當時 最高會議 議長室에는 全斗煥 大尉 말고도 朴正熙 議長의 副官이었던 손영길(孫永吉·首警司 參謀長 歷任) 大尉, 최성택(崔性澤·豫備役 陸軍中將) 大尉 等의 先輩들이 勤務하고 있었다. 하지만 後輩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전두환 大尉뿐이었다. 全斗煥 大尉는 機會만 있으면 불러내 밥을 샀지만, 다른 先輩들은 커피 한 盞 하자는 法이 없었다.
 
 
  中央情報部에 발을 들여놓다
 
中央情報部 對共指導係長 時節이던 1968年 김신조(왼쪽)와 함께 1·21事態 當時 共匪들의 浸透路를 돌아봤다.
  그해 6月 第2次 通貨改革 失敗에 對한 責任을 지고 유원식 將軍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後에도 나는 한동안 柳 將軍을 모시다가 1962年 9月 陸士 敎育將校로 자리를 옮겼다.
 
  1964年 나는 美(美) 特殊戰(特殊戰)學校 心理戰(心理戰) 過程에 應試, 合格했다. 그런데 都彌(渡美)留學을 위해 副官(副官)學校에서 3個月間의 英語敎育을 받고 있는 中에 美 특수전학교 心理戰 過程이 取消돼 버렸다. 代身 나는 英語敎育을 받은 資源이라는 理由로 軍事情報部隊로 專屬됐다. 여기서 나는 美國이 提供해 주는 情報 關聯 文件들을 飜譯하는 일을 맡았다.
 
  軍事情報部隊에 勤務하면서 美國의 셔먼 켄트(Sherman Kent)가 지은 《戰略情報론(The Strategic Intelligence)》이라는 冊에 빠져들었다. 이 冊을 통해 나는 情報가 軍(軍) 運營의 中樞神經日 뿐 아니라 國家經營에도 必須不可缺한 要素임을 認識하게 됐다. 그와 함께 ‘已往 情報 일을 할 거면, 情報의 總本山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1965年 中央情報部(以下 中庭)에서 公採(公採) 1期 要員을 選拔했다. 여기에는 當時 中央情報學校長이던 강창성(姜昌成·陸士8期) 將軍이 큰 役割을 했다. 國內 有數大學 및 各軍(各軍) 士官學校 出身者 20名이 最終 合格했는데, 나는 20名 가운데 首席이었다. 以後 15年間 중정에 勤務하면서 1·21事態, 蔚珍·三陟地區 共匪事件, 1971年 大選(大選), 10·2抗命波動, 10月維新 宣布, 윤필용(尹必鏞)事件, 10·26事態, 5共 出帆 等을 지켜보았다.
 
 
  尹必鏞 事件에 連累된 金宇中
 
京畿高校 2學年 때 親舊 金宇中(왼쪽)과 함께.
  1970年 12月 赴任한 이후락(李厚洛) 部長은 이듬해 第7代 大統領選擧를 勝利로 이끌었다. 不淨腐敗와 工作政治의 元兇으로 指彈받던 그는 1972年 7·4共同聲明으로 國民的 英雄이 됐다. 이어 10月維新(維新)까지 성사시키면서 李 部長의 威勢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그의 獨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3年 4月 윤필용(尹必鏞)事件이 터졌다. 이 事件은 當時 朴正熙(朴正熙) 大統領의 側近으로 軍部(軍部) 實勢(實勢)이던 윤필용(陸士8期) 首都警備司令官이 私席(私席)에서 “朴 大統領은 이제 老衰했으니 2線으로 물러나고 이후락 部長이 後繼者가 되어야 한다” 云云의 發言을 했다 하여 謀反(謀反)을 劃策한 것으로 몰린 事件이다. 이 事件으로 윤필용 將軍은 勿論 首警司 參謀長 손영길 准將(陸士11期) 等 13名이 獄苦(獄苦)를 치렀고, 권익현(權翊鉉·陸士11期) 大領 等 30餘 名의 하나회 멤버들이 軍服을 벗었다. 내가 보기에 윤필용事件은 이후락 中情部長을 牽制하려던 박종규(朴鐘圭) 警護室長이 尹 將軍의 私席 發言을 針小棒大(針小棒大)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나는 事件 初期만 해도 윤필용事件을 單純 瀆職(瀆職)事件 程度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경기고 動機인 이우복(李雨馥·대우그룹 會長 歷任) 대우실업 專務가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큰일났어! 雨中이(김우중)가 어제 保安司令部로 잡혀갔어!”
 
  김우중과 이우복은 경기고 時節 나와 切親한 사이였다. 當時만 해도 대우실업은 輸出을 主로 하는 有望한 中小企業에 不過했다.
 
  “왜?”
 
  “잘 모르지만 尹 將軍 側近들에게 돈을 준 게 問題가 된 것 같아.”
 
  ‘前에 中庭에서 함께 勤務했던 강창성 保安司令官의 側近 김종진 保安司 保安處長(大領)에게 付託하면 되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우복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랫사람에게 付託해서 될 일이 아니야. 네가 꼭 姜 司令官을 直接 만나서 付託해야 雨中이가 풀려날 수 있어.”
 
軍法會議 裁判廷에 선 윤필용事件 關係者들. 앞줄 오른쪽 끝이 윤필용 所長, 그 옆이 손영길 准將, 왼쪽 끝이 권익현 大領.
 
  강창성 將軍에 付託해 金宇中 救命
 
  강창성 司令官이 中庭 保安次長補로 있을 때, 나는 補佐官으로 일하면서 1971年 7代 大選을 치른 因緣이 있었다. 姜 將軍은 1971年 9月 保安司令官으로 가면서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할 程度로 寵愛했다. 하지만 나는 軍(軍)으로 돌아갈 境遇 郡內 派閥싸움에 휘말릴 것 같아, 陸軍少領으로 豫編하는 길을 擇했었다.
 
  다음 날 保安司로 갔다. 姜 司令官의 補佐官에게 윤필용事件에 對해 물어보자 그는 “이 事件은 國家變亂 陰謀”라고 斷言했다. 강창성 將軍을 만난 나는 말했다.
 
  “대우실업의 金宇中 社長이라고, 저와 둘도 없는 親舊인데 只今 尹 將軍 事件으로 連行되었습니다. 맨손으로 企業을 일구어 낸 有能한 事業家인데, 善處를 付託 드립니다.”
 
  姜 將軍은 서랍에서 事件 關聯者 名單을 꺼내 보더니 한마디 했다.
 
  “웬 돈을 이렇게 많이 줬어?”
 
  “政治는 잘 모르는 親舊인데, 事業을 하자니 權力層과 가까이 지낸 것 같습니다. 잘 付託 드립니다.”
 
  金宇中은 다음 날 풀려났다. 그는 그 길로 地方으로 潛跡해 버렸다. 얼마 後에는 이재걸(李載杰) 中庭 監察室長이 保安司로 끌려갔다. 이후락 部長과 動向(同鄕)인 蔚山 出身의 그는 윤필용 將軍의 側近인 손영길 首警司 參謀長과는 親舊 사이였다. 윤필용事件이 이후락 部長을 겨냥한 것이라는 點이 漸漸 분명해졌다.
 
  立場이 難處해진 것은 金同根(金東根) 保安次長補였다. 그는 陸士 8期 出身으로 강창성 司令官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후락 部長 밑에서도 重用됐던 사람이었다. 結局 그는 次長補 자리에서 解任되어 駐英(駐英)工事로 나가게 됐다. 金 次長補는 내게 같이 英國으로 가자고 提案했다. 나는 老父母님을 모시고 있던 處地라 망설였지만, 早晩間 이후락 部長이 中庭 內에서 강창성 司令官과 가까운 사람들을 쳐낼 것이라는 所聞이 決心을 재촉했다. 結局 나는 김동근 次長補와 함께 英國으로 가기로 決心했다. 海外派遣 敎育을 받는 동안에도 윤필용事件은 繼續 擴大되고 있었다.
 
 
  姜昌成, “李厚洛은 反逆者!”
 
保安司令官 時節의 강창성 將軍.
  英國으로 떠나기 1週日 前, 나는 出國(出國)人事次 강창성 司令官을 찾아갔다.
 
  “떠나기 前 한 가지만 建議 드리고자 합니다. ‘長壽(將帥)는 兩面에 敵(敵)을 두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윤필용 將軍을 搜査하는 것도 큰일인데, 이후락 部長까지 건드리는 것은 너무 큰일입니다. 반드시 反擊이 들어옵니다. 이런 點을 살펴 가면서 일을 處理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瞬間 불벼락이 떨어졌다.
 
  “무슨 소리야. 이후락은 나쁜 놈이야! 反逆者라고!”
 
  나도 火가 났다. ‘이런 式으로 얘기하는 上官에게 무슨 忠言을 더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房을 나왔다. 火가 안 풀린 나는 保安處長 김종진 大領을 찾아갔다.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金 大領에게 나는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側近이라는 게 뭡니까? 司令官님이 잘못 判斷하면 아니라고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司令官님 하는 일에 옳다고 맞장구만 치면 어떻게 합니까?”
 
  김종진 大領은 한숨만 푹푹 쉬었다. 그런데 밖에서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司令官室에서 나를 찾는데, 내가 아직 衛兵所를 나가지 않았다고 하자 兵士들이 찾아 나선 것이다. 司令官室로 가자 姜 司令官이 말했다.
 
  “아까는 화내서 未安하네. 자네 얘기에도 一理가 있어. 그런데 무슨 具體的인 情報가 있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인가?”
 
  “情報가 있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후락·윤필용 두 사람이 심어 놓은 사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반드시 그들이 反擊하는 狀況이 옵니다. 부디 彫心하시기 바랍니다.”
 
  姜 司令官은 “알겠다”면서 餞別金을 주었다. 나는 김동근 工事를 모시고 1973年 6月 英國으로 떠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當時 이(李) 某 中庭 搜査局長은 강창성 將軍의 弱點을 캐기 위해 나를 調査하려 했지만, 이후락 部長과 김치열(金致烈) 次長이 中斷시켰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後, 강창성 將軍은 大田에 있는 3管區司令官으로 左遷됐다.
 
  윤필용事件으로 강창성 將軍은 하나회와 怨讐가 됐다. 1980年 新(新)軍部가 登場할 때, 전두환 保安司令官과 만난 강창성 將軍은 前 司令官의 協助 要請을 拒絶했다고 한다. 5·17措置 後 姜 將軍은 外換管理法 違反 等의 嫌疑로 拘束됐다가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나는 保安司의 한용원(韓鎔源) 大領을 만나 “三淸敎育隊行(行)은 너무 苛酷한 것 아닌가? 이러면 하나會議 舍監(私感) 때문이라는 얘기를 듣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姜 將軍을 도울 힘은 내게 없었다.
 
 
  李厚洛 “아무려면 DJ를 죽이려고 拉致했겠나”
 
주영大使館 勤務 時節 王室 파티에 參席하기 위해 正裝을 한 李鍾贊 夫婦.
  英國에서 勤務하던 1973年 12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歸國해서 約 열흘間 몇 가지 葬禮 뒤處理를 한 後 나는 英國行 캐세이퍼시픽 飛行機에 올랐다. 타이완과 홍콩 等을 經由하는 飛行機였다.
 
  그런데 타이완空港 待機室에서 뜻밖의 人物을 만났다. 바로 그 直前에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락 前 中情部長이었다. 그는 선글라스를 쓰고 空港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瞬間 ‘저분이 몰래 빠져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가서 人事를 했다. 내가 홍콩을 經由해 英國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그는 반색을 했다.
 
  “아, 잘됐소. 나도 홍콩으로 가는 길인데 마중 나올 사람도 없고 호텔 豫約도 안되어 있으니 좀 도와 주게.”
 
  瞬間 ‘이 兩班이 正말 亡命(亡命)이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이 됐다. 하지만 며칠 前까지만 해도 部長으로 모시던 분인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홍콩 힐튼호텔에 旅裝을 풀었다. 스위트룸 하나와 一般실 하나를 얻었다. 李 前 部長은 ‘一切 外部에 連絡하지 말아 달라’고 當付했다. 그때 이후락 前 部長은 在職 中의 不淨腐敗 等을 理由로 司法處理될 것을 憂慮해 外國으로 몸을 避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 사흘 동안 이후락 前 部長을 곁에서 모시면서, 7·4共同聲明이나 김대중(金大中)拉致事件 等에 對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只今은 어느 程度 널리 알려진 얘기들이지만, 그때만 해도 베일에 감추어졌던 이야기였다. “김대중은 왜 拉致한 거냐?”고 묻자, 그는 “이 사람아, 아무려면 내가 그 사람을 죽이려고 그랬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英國으로 돌아가야 할 날짜가 지났다. 나는 이 前 部長에게 事情을 이야기하고 함께 英國으로 가자고 勸했다.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結局 나 혼자 英國으로 돌아갔다.
 
  김동근 工事를 통해 내가 이후락 前 部長과 함께 지냈다는 報告가 올라가자 李哲熙(李哲熙·陸士2期) 中庭 次長이 電話를 걸어 왔다. 그는 다짜고짜 “왜 이 前 部長과 같이 있다는 걸 바로 報告하지 않았느냐?”고 惹端을 쳤다. 當時 韓國에서는 이후락 前 部長이 海外亡命을 한 것으로 보고 非常이 걸려 있었다. 나도 火가 나서 맞對應했다.
 
  “엊그제까지 部長으로 모시던 분인데, 사람이 義理가 있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野薄하게 굽니까?”
 
  그러고는 會社를 그만둔다는 생각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次長님이 그런 處地가 된다고 해도 義理를 지키겠습니다.”
 
  李哲熙 次長은 “뭐야, 자네 그걸 말이라고 하나!”라면서 펄펄 뛰었다. 이후락 前 部長은 나중에 英國으로 왔지만, 내게는 連絡을 하지 않았다. 그는 英國領(領) 바하마群島(群島) 等을 떠돌다가 政府로부터 身邊安全을 保障받고서야 歸國했다.
 
 
  클러프, 韓國政治 變革의 安全瓣으로 軍·中央情報部 꼽아
 
  1976年 6月 나는 本部로 復歸했다. 그로부터 6個月 後 코리아게이트의 餘波로 신직수(申稙秀) 部長이 물러나고 김재규(金載圭) 建設部長官이 中央情報部長이 됐다.
 
  朴正熙 大統領 末期의 政局은 살얼음板 같았다. 1978年 12月 第10代 總選에서 신민당이 得票率로 공화당을 1.1% 앞섰다. 이듬해 5月 신민당 全黨大會에서는 維新政權에 對해 强勁路線을 宣言한 김영삼(金泳三) 總裁가 黨權(黨權)을 奪還했다. 8月에는 YH事件이 일어났다. 이어 김영삼 總裁의 《뉴욕타임스》 인터뷰 記事가 波紋을 일으켰고, 김영삼 總裁職 停止 假處分(假處分)申請과 總裁職 剝奪, 김영삼 總裁의 議員職 除名 等이 이어졌다. 밖에서는 美國의 카터 大統領이 人權外交와 駐韓美軍 撤收를 武器로 朴正熙政權을 壓迫했다. 이 渦中에 美國 等에 派遣된 中庭 要員들이 亡命하는 일들까지 이어지면서 中庭 雰圍氣는 어수선해졌다.
 
  이런 狀況에서 중정의 海外파트라고 便할 수는 없었다. 우리도 韓國事態에 對한 外國政府의 反應이나 言論報道를 把握하느라 連日 夜勤을 했다.
 
  이 무렵 美國의 아시아問題 專門家인 랠프 클러프(Ralph N. Clough) 博士의 報告書가 눈길을 끌었다. 그의 報告書를 要約하면 ‘韓國에서 朴正熙 大統領이 無力化(無力化·decapitate)될 때 어떤 事態가 일어나겠느냐?’하는 글이었다. 當時 國內에서는 敢히 想像조차 할 수 없는 얘기였다. 더욱이 클러프가 使用한 ‘decapitate’라는 用語에 特히 神經이 쓰였다. 이 말은 ‘목을 자르다. 斬首(斬首) 하다’는 意味였다. ‘朴 大統領을 强制로 물러나게 한다’는 解釋이 可能한 얘기였다.
 
  그러면서 클러프는 有事時 政治的 變革으로부터 安全瓣 役割을 할 수 있는 集團으로 軍部(The Military), 官僚組織(The Government Bureaucracy), 企業家(The Business Men), 中央情報部(KCIA) 等 네 個를 꼽았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클러프가 與野(與野)를 莫論하고 韓國의 政黨이나 政治人을 全혀 擧論하지 않았다는 點이다. 實際로 10·26 以後 狀況은 中央情報部가 大統領을 弑害한 主犯으로 낙인찍혀 제 役割을 하지 못한 것만 除外하면 클러프의 豫見과 비슷하게 展開됐다.
 
 
  全斗煥과의 再會
 
1978年 김재규 中央情報部長(왼쪽)으로부터 副局長 任命狀을 받는 李鍾贊.
  나는 김재규 部長으로부터 두터운 信任을 받았다. 德分에 課長級 中에서는 先頭 走者로 副局長으로 昇進할 수 있었다.
 
  김재규 部長은 내게 祕密特命(特命)을 내리기도 했다. 바로 1975年 越南敗亡 以後 共産베트남에 抑留된 이대용(李大鎔) 前 駐월(駐越)工事 等 세 名의 外交官을 救出하는 일이었다. 救出公爵은 1960~70年代 韓國의 外資(外資)導入을 주물렀던 유대人 事業家 아이젠버그의 도움을 받아 進行했다.
 
  10·26事態 後 중정이 推進하던 旣存의 事業들은 事實上 痲痹됐다. 나는 救出工作건(件)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전두환 保安司令官의 도움이 必要하다고 생각했다. 12·12事態 後 나는 保安司로 찾아가 祕書室長 허화평(許和平·陸士17期) 大領을 통해 전 司令官 面談을 申請했다. 前 司令官은 17年 만에 만나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는 그間의 抑留 外交官 救出工作에 對해 說明하고, 그 事業을 繼續하기 위해서는 김재규를 만나 關聯 書類를 받아 내야 한다고 말했다. 前 司令官은 김재규와의 만남을 許諾하지 않았지만, 年金(軟禁) 中이던 김재규의 祕書室長 金甲洙 將軍이 保管하고 있던 關聯 書類를 入手할 수 있도록 措置해 주었다. 이대용 公社 等은 이듬해 4月, 5年間의 抑留에서 풀려나 아이젠버그의 專用機便으로 歸國했다. 이 過程을 지켜보면서 전두환 將軍은 나를 信任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中央情報部 改編 作業
 
  10·26事態 後 中庭은 大統領을 弑害한 帶域(大逆)集團으로 낙인찍혔다. 局長級 以上 幹部들은 모두 保安司로 連行되어 苦楚를 겪었다. 保安司에서 최예섭(崔禮燮) 將軍이 監督官으로 나와서 中庭 業務를 監督했다.
 
  나는 중정部長 서리(署理) 이희성(李熺性·陸士8期) 將軍에게 “10·26事態는 비록 김재규 個人이 저지른 行爲이지만 事實 原因을 따지면 중정이 政治에 介入하여 일어난 事件이며, 이 機會에 중정의 國內部署에 對한 大大的인 改編作業을 해야 한다”는 內容의 建議를 올렸다. 며칠 後 12·12事態가 發生했고, 이희성 將軍은 陸軍參謀總長으로 任命되면서 富(部)를 떠났다.
 
  1980年 2月 9日 권정달(權正達) 保安司 情報處長에게서 저녁食事를 같이 하자는 連絡이 왔다. 約束場所인 서린호텔로 나가 보니 권정달 大領 外에 保安司令官 祕書室長 허화평 大領, 行政處長 허삼수(許三守·陸士17期) 大領, 搜査處長 이학봉(李鶴捧·陸士18期·民政首席, 安企部2次長, 13代 國會議員 歷任) 大領 等이 모여 있었다. 권정달 大領은 “情報部 改革에 對하여 意見을 나누기 위해 모이자고 했다”고 말했다.
 
  이야기가 끝날 무렵 권정달 大領은 내게 中庭 改革方案을 作成해 달라고 要請했다. 나는 ‘전두환 司令官이 情報部長을 맡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以後 허화평·허삼수 大領, 그리고 中庭 輸送課長으로 있다가 國防硏究院 派遣 敎育 中이던 金容甲(金容甲·陸士17期)氏와 만나 中庭 改革方案을 論議했다. 3月 12日 나는 中庭 改革方案을 作成해 권정달 大領에게 넘겨주었다.
 
  1980年 4月 15日, 전두환 保安司令官이 중정部長 署理로 任命됐다. 그는 就任辭에서부터 强度 높은 改革을 다짐했다. 다음 날 部署長級 以上 40名 가운데 33名의 辭表를 受理했다.
 
  以後 나는 總務局長으로 중정의 組織 및 人事改編을 推進했다. 國內情報 機構는 大幅 줄이고, 海外 및 對北(對北)情報 部署를 强化하는 方案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政局(政局)은 하루가 다르게 惡化되어 갔다. 學生들은 光化門까지 進出해 “戒嚴解除” “전두환 退陣”을 口號로 외치기 始作했다. 5月 15日에는 서울驛 앞에서 學生들이 奪取한 버스에 戰鬪警察 한 名이 깔려 죽었다. 大學生 示威가 激化되자 中東(中東)巡訪 中이던 최규하 大統領이 5月 16日 急遽 歸國했다. 그리고 5·17 戒嚴擴大 措置가 斷行됐다.
 
 
  全斗煥의 親舊를 자르다
 
  김대중氏는 國紀紊亂 嫌疑로 中情으로, 金鍾泌(金鍾泌)氏는 不淨腐敗 嫌疑로 保安司로 連行됐다. 김영삼氏는 自宅軟禁 됐다.
 
  5月 18日 아침 構內食堂에서 食事를 하다가 김근수(金瑾洙) 保安搜査局長을 만났다. 그가 한 말이 나를 긴장시켰다.
 
  “김영삼은 놔두고, 金大中(金大中)만 저렇게 잡아들이면 全羅道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걱정입니다.”
 
  그의 말은 的中했다. 釜山·馬山은 平穩했지만, 光州(光州)에서는 大規模 示威가 일어났다.
 
  5月 29日 나는 전두환 部長署理와 함께 靑瓦臺로 들어가 中庭 組織改編案을 說明하고 裁可를 받았다. 이어 人力 構造調整에 들어갔다. 몇 次例의 人事委員會를 거쳐 最終的으로 約 100名을 추려서 決裁書類를 만들어 保安司令官室로 갔다. 決裁書類와 人事카드를 살펴보던 全斗煥 部長署理가 人事카드 한 張을 꺼내 들더니 물었다.
 
  “이 사람은 왜 안된다는 거야?”
 
  나는 그의 脾胃事實들을 說明했다.
 
  “이 사람이 누가 推薦해서 部員이 된 줄 아나?”
 
  그는 전두환 將軍과 高校 動機로서 前 將軍이 中庭 人事課長 時節에 推薦해 入社시킨 사람이었다. 人事書類의 推薦人欄에도 ‘全斗煥’이라는 이름 석字가 적혀 있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部長님께서 推薦한 사람이어서 더 神經을 썼습니다. 그런데 人事委員들이 이런 사람을 두면서 다른 사람을 자르면 공정하지 못하다는 評을 듣게 될 것이라고 하여 苦悶 끝에 包含시켰습니다.”
 
  前 部長은 못마땅하다는 表情을 지으면서도 決裁書類에 署名했다.
 
  “뻔히 내가 推薦한 줄 알면서도 整理對象에 包含시킨 것을 보니 이 審査는 공정하다고 믿고 決裁하는 거야. 다만 退職하는 사람들에 對해서는 退職 後 生計問題에 神經을 써 주기 바라네.”
 
 
  新黨 創黨 着手
 
1980年 전두환 中央情報部長 署理로부터 任命狀을 받는 中央情報部 幹部들. 오른쪽에서 두 番째가 李鍾贊 總務局長, 맨오른쪽이 허문도 部長祕書室長.
  5月 27日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國保委)가 設置됐다. 전두환 保安司令官은 國保委 常任委員長이 됐고, 노태우 將軍 等 新軍部(新軍部)의 核心人士들이 國保委에 參與했다. 이제 전두환 將軍의 執權은 時間問題였다.
 
  이때의 일로 전두환·노태우 前 大統領을 비롯해 新軍部 核心人士들은 김영삼 政權 時節, 內亂罪(內亂罪)로 斷罪됐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前 大統領이나 當時 新軍部 核心들은 아직도 “當初 執權할 醫師가 없었으나, 狀況에 떠밀리다 보니 政權을 맡게 됐다”는 式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10·26 以後 國難(國難) 狀況에서 國政을 擔當할 만한 勢力은 없었다. 그래서 나라를 救하기 위해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 堂堂하지 않을까? 實際로 나는 當時 大韓民國號(號)가 難破할 危機에 處해 있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狀況을 막는 데 一助하겠다는 생각으로 5共(共)政權에 參與했다. 나는 只今도 5共 參與에 對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1980年 7月 3日 아침 나는 서울 삼청동에 있는 전두환 國保委 常任委員長에게 불려갔다. 1時間쯤 기다린 後에 나는 권정달 保安司 情報處長, 情報處 補佐官 이상연(李相淵·內務部長官·安企部長 歷任) 大領, ‘강기덕’이라는 假名(假名)을 쓰던 合同搜査本部 言論檢閱팀의 이상재(李相宰·12·14代 國會議員 歷任) 補佐官, 곽회정 中庭 政治課長 等과 함께 委員長室로 들어갔다. 次(茶)를 한盞 마시면서 全斗煥 委員長은 “이제부터 權 處長을 中心으로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권정달 處長 等과 함께 保安司로 내려왔는데, 複道에서 허문도(許文道) 중정部長 祕書室長과 마주쳤다. 그는 웃으면서 “이 先輩님, 政黨을 만드는데 윤석순(尹碩淳·11代 國會議員·總理祕書室長 歷任)이도 한몫해야잖겠어요?”라고 말했다.
 
  當時 中情 總務局 副局長으로 있던 윤석순은 허문도 室長과는 釜山高等學校 同期同窓이었다. 瞬間 나는 삼청동에서 만난 멤버들이 새로운 執權黨을 만들기 위한 태스크포스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保安司 뒤便 建物 2層 事務室에서 會合을 가졌다. 權 處長은 特別히 保安을 當付하면서 “이제부터 新黨에 參與할 人事를 고르는 作業을 해달라”고 했다. 강기덕(李商在) 補佐官은 言論界, 이상연 大領은 軍部(豫備役 包含), 나와 곽회정은 政治人·敎授·社會著名人士들을 맡기로 했다.
 
 
  李載灐 先生 迎入 作戰
 
운경 이재형.
  人選作業에 具體的인 指針은 없었다. 各自 알아서 하라는 式이었다. 나는 새 政黨이 事後(事後)에라도 분명한 名分과 正統性을 確保하려면 새 政黨에 參與하는 人物들은 過去 政治에서 疏外되었던, 民族意識이 剛한 분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義烈團(義烈團) 出身의 獨立運動家 유석현(劉錫鉉) 先生을 비롯해, 민족일보事件으로 受難을 받은 言論人 송지영(宋志英·11代 國會議員 歷任) 先生, 進步黨 事件으로 6年 獄苦를 치른 윤길중(尹吉重·2·11~13代 國會議員, 민정당 代表委員 歷任) 先生, 재야(在野)여성계 代表 김정례(金正禮·11·12代 國會議員, 保健社會部 長官 歷任) 先生 等은 그렇게 해서 모시게 됐다.
 
  第一 어려운 것은 黨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代表 選定이었다. 苦心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靑瓦臺에서 운경 이재형(雲耕 李載灐) 先生을 모시는 問題를 論議해 보라는 指示가 내려왔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 將軍이 大統領이 된 다음이었다.
 
  이재형 先生은 制憲(制憲)國會 때부터 政治에 몸담았던 政界 元老로 한때 신민당 內에서 鎭山系(珍山系)에 맞서는 派閥을 이끌기도 했으나, 維新 以後에는 政界에서 물러나 있었다.
 
  마침 이재형 先生은 내 親舊인 이준용(李埈鎔) 現 대림산업 名譽會長의 큰아버지였다. 나는 이준용에게 이재형 先生과의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付託했다. 1980年 9月 4日 아침 나는 권정달 處長과 함께 이재형 先生 宅을 찾아갔다. 保安을 지켜 달라는 付託 때문에 이준용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自己가 直接 茶를 내오는 等 接待를 했다.
 
  권정달 處長으로부터 民主正義黨(민정당) 參與 要請을 받은 이재형 先生은 韓半島 周邊 國際情勢와 나라 걱정에 對한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原則的으로 參與하겠다는 意思를 밝혔다. 그러면서 “當身들 얘기만 듣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大統領을 만나게 해 달라”고 要求했다.
 
  後날 이재형 先生의 自敍傳을 보니, 이재형 先生은 전두환 大統領을 만난 자리에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民主主義뿐인데, 閣下는 正말로 民主主義를 하실 意向이 있으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前 大統領은 “바로 그것입니다. 꼭 이 땅에 民主主義를 심고 싶습니다”라고 對答했다고 한다.
 
  나는 이재형 先生을 모시면서 過去 3共 時節 共和黨이 尊敬받는 元老 法曹人인 정구영(鄭求瑛) 先生을 ‘얼굴마담’ 格으로 모셨다가 버린 일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재형 先生도 民主正義黨 代表委員을 맡은 後, 어려운 狀況 속에서도 “黨에서 兵營 色彩를 빼겠다”며 意欲을 보였다. 하지만 힘은 軍 出身인 권정달 事務總長에게 있었다.
 
  이재형 先生은 내게 늘 “구름(雲)만 가지고는 안 돼. 구름을 갈아야(耕) 해”라고 말하곤 했다. 구름은 以上(理想), 구름을 간다는 것은 現實을 의미했다. 卽 以上(理想)과 現實의 調和를 强調한 말이었다. 나는 只今도 이재형 先生을 내가 만났던 政治人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 나의 政治 멘토(mentor)로 여기고 있다.
 
 
  吳有邦, 政治參與 規制 反對하며 潛跡
 
  민정당 創黨 過程에서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오유방(吳有邦) 前 議員이다. 그는 9·10代 共和黨 議員으로 10·26 後에는 正風波(整風派)의 一員으로 活動했다. 그는 當初 民政黨 政綱政策 마련 作業 等에 積極的으로 參與했다. 그러던 次에 國家保衛立法會議에 區(舊)政治人의 政治參與를 規制하는 政治風土刷新法이 上程됐다. 그는 내게 斷乎하게 말했다.
 
  “政治活動을 强制로 規制하는 그런 法은 絶對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公正하게 競爭하여 國民에게 選擇權을 주어야 합니다. 새政治를 하겠다면 正正堂堂하게 해야지요. 李 局長이 막아 주세요.”
 
  하지만 내가 막을 수 있는 問題는 아니었다. 政治風土刷新法이 通過되자 오유방은 蹤跡을 감추고 말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 꼭 새 政黨에 參與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를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結局 그는 스스로 政治風土刷新法에 묶여 11代 總選에 出馬하지 못한 것은 勿論, 1985年 12代 總選에도 出馬하지 않았다. 그가 政治를 再開한 것은 1988年 13代 國會에서였다.
 
  민정당 創黨을 위해 뛰어다니는 사이에 나는 中庭 總務局長에서 企劃調整室長으로 昇進했다. 하지만 이미 中庭 일은 뒷전으로 밀려 있었다. 創黨 作業 初期에만 해도 나는 일을 마치면 中情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國家保衛立法會의 立法委員까지 맡은 나는 이미 事實上 政治人이 되어 버린 狀態였다. 유학성(兪學聖) 中情部長度 내게 “이제 創黨 作業에 專念하라”고 注文했다. 結局 1980年 10月 30日 나는 企劃調整室長을 끝으로 15年間 몸 담았던 중정을 떠났다.
 
 
  許和平, 大統領 直選制 主張
 
1981年 11代 總選 當時 選擧運動을 하는 李鍾贊.
  暫時 時計를 거꾸로 돌려 보자. 1980年 7月 15日 保安司 事務室에서 組織責 名單 作業을 하고 있는데 허삼수 大領에게서 司令官室로 오라는 連絡이 왔다. 司令官室에는 전두환 司令官을 비롯해 정도영(鄭棹永·陸士14期, 保安司 參謀長 歷任) 將軍, 권정달·허화평·이학봉 大領 等이 앉아 있었다. 暫時 後 카키色 軍服 차림의 盧泰愚 首警司令官이 말채찍을 휘두르며 들어왔다. 그는 전두환 司令官에게 깍듯이 擧手敬禮를 했다.
 
  자리가 整理되자 권정달 處長이 改憲案에 對해 브리핑을 했다. 特히 論難이 됐던 것은 大統領 間選制(間選制)였다. 허화평 大領은 “國民을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大統領 直選制를 實施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노태우 將軍은 “直選制는 時機尙早이며 政局安定을 위해서는 間選制가 바람직하다”고 主張했다. 結局 전두환 司令官은 安全한 間選制 쪽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80年 8月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大統領으로 選出됐던 전두환 大統領은 그해 12月 新憲法에 依해 7年 任期의 大統領으로 選出됐다.
 
  1981年 3·24 總選에서 나는 서울 鍾路·中區 選擧區에 出馬해 當選됐다. 事實 그해 1月까지만 해도 나는 出馬를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권정달 事務總長은 鍾路·中區 國會議員 候補로 反共檢事로 有名한 오제도(吳制道)氏를 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오제도氏는 이미 過去의 人物이었다.
 
  1981年 1月 13日 나는 報告次 靑瓦臺로 갔다. 補佐官室에는 허화평·허삼수 두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허화평 大統領祕書室 補佐官이 “다른 黨을 創黨하려던 사람(오제도氏는 當初 反共保守政黨 創黨을 推進하다가 민정당에 入黨)을 政治1樊紙라는 鍾路·重九에 내세우면 민정당은 뭐가 되느냐?”면서 “先輩님이 나가십시오”라고 말했다.
 
  唐慌하는 내게 虛 補佐官은 “우리가 모든 걸 걸고 審判을 받는 게 正正堂堂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나도 同意했다. 나는 바로 前 大統領의 執務室로 들어가서 鍾路·中區 出馬 意思를 밝혔다. 前 大統領은 “이종찬! 잘 생각했다. 나도 同感이다. 그래, 正正堂堂하게 싸워야지. 안 그래?”라며 激勵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다가 어렵게 “鍾路·中區 國會議員 選擧에 나가게 됐다”고 말했다. 아내는 바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버렸다. 總選 結果 나는 48.7%를 得票, 當選됐다. 民主한국당의 김판술(金判述) 候補가 同伴 當選됐다.
 
 
  ‘51%主義者’
 
  第11代 國會 開院(開院)과 함께 나는 민정당 院內總務가 됐다. 率直히 나는 院內總務가 어떤 자리인지도 잘 몰랐다. 總務라면 어떤 團體든 심부름 잘하면 되는 자리인 줄로만 알았다. 初選(初選)의 政治新人인 내가 院內總務가 될 수 있었던 것은 ‘傳統의 政治1番地’인 서울 鍾路·重九에 나가 當選된 것을 전두환 大統領이 좋게 봐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野黨인 民主한국당의 고재청(高在淸), 韓國國民黨의 이동진(李東鎭) 議員은 모두 政界 先輩였다.
 
  흔히 11代 國會는 5共 初의 森嚴한 雰圍氣 속에서, 그것도 鬪爭的인 野黨 政治人들을 政治風土刷新法으로 묶어 놓은 狀態였기 때문에, ‘院內總務 하기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았다. 밖에서는 ‘2中隊’니 ‘官製(官製)野黨’이니 했지만, 野黨은 어디까지나 野黨이었다.
 
  1981年 9月 定期國會 때 野黨이 새마을運動本部 豫算 削減을 要求하며 豫算審議를 보이콧했던 것이 代表的이다. 허화평 補佐官을 통해 전두환 大統領에게 狀況을 報告하자 前 大統領은 “豫算案 審査權은 國會가 갖고 있지 않으냐? 國會에서 審査하는데 聖域(聖域)李 어디 있느냐? 所信껏 하라”고 傳해 왔다. 以後 學院安定法 波動 때까지 전두환 大統領은 國會運營에 關해서는 나에게 맡겼다.
 
  그게 全斗煥 리더십의 長點이었다. 그는 사람을 신중하게 골라 썼고, 一旦 사람을 쓰면 그에게 全權을 주었다. 政治를 하면서 여러 大統領을 봤지만, 그後 어떤 大統領도 前 大統領만큼 權限을 全幅 委任(mandate)하여 政府를 效率的으로 運營하는 指導者는 보지 못했다. 當時 허화평 補佐官(나중에 政務首席)도 ‘實勢 中의 實勢’로 꼽혔지만, 具體的인 懸案을 가지고 國會運營에 干涉하는 일은 없었다.
 
  민정당은 國會 全體議席 276席 가운데 151席을 차지하는 多數黨(多數黨)이었지만, 나는 ‘51%主義者’를 自處했다. ‘與黨은 51% 以上의 權限을 行使하지 말자. 與黨이 모든 것을 다 가지려 하면, 議會主義가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李哲熙·장영자 事件으로 권정달 退陣시켜
 
  1982年 5月 稀代의 어음詐欺 事件인 李哲熙·張玲子(張英子) 事件이 일어났다. 張玲子의 男便은 中庭 次長을 지낸 李哲熙 將軍, 그女의 兄夫는 전두환 大統領의 妻三寸인 이규광(李圭光) 當時 鑛業振興公社 社長이었다. 권정달 민정당 事務總長의 이름도 擧論됐다. 張玲子에게 엮여 들어간 公營土建 오너가 卷 總長의 親舊였기 때문이다. 政府는 이철희 장영자 夫婦는 勿論 이규광 社長까지 拘束했지만 輿論은 쉬 수그러들지 않았다. 輿論은 권정달의 목을 要求하고 있었다.
 
  5月 19日 전두환 大統領은 少年體典 參席次 大田에 있었다. 장세동(張世東) 警護室長으로부터 急히 내려오라는 電話가 걸려 왔다. 大統領 專用汽車에서 大統領을 만났다. 前 大統領은 “더 以上 안되겠다. 권정달의 辭表를 받으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閣下, 卷 總長만 辭退하면 그가 事件에 連累되어 있다는 嫌疑를 認定하는 게 됩니다. 院內總務인 저까지 그만두어야 그런 嫌疑를 稀釋시킬 수 있고, 民心(民心)收拾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前 大統領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럼 차라리 當直도 全面 改編하고, 內閣도 바꾸지. 그게 民心收拾에 더 낫지 않겠나? 只今 當場 올라가 黨職者 全員의 辭表를 받아 오게. 이재형 代表와 자네의 辭表는 返戾하도록 하겠네.”
 
  전두환 大統領은 一旦 決心을 하면 行動이 빠르다. 그는 卽時 벨을 눌러 장세동 室長을 부르더니 國會手帖을 가져오라고 했다. 前 大統領은 張 室長이 가져온 國會手帖을 뒤적이면서 “事務總長은 누가 좋겠나?”라고 물었다.
 
  나는 권익현 議員을 推薦했다. 政務長官으로는 오세응(吳世應) 議員, 代表祕書室長으로는 남재두(南在斗) 議員을 推薦했다. 내친 김에 女性인 김정례 議員을 保健社會部 長官으로 推薦했다.
 
  전두환 大統領은 나를 서울로 올려 보내면서 保安維持를 當付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허화평 政務首席이 電話를 걸어 “大田에서 大統領과 무슨 얘기가 있었느냐?”고 물어 왔지만, 適當히 둘러댔다.
 
  다음 날 민정당 黨職者들은 一括 辭表를 提出했고, 권정달 事務總長은 退陣했다. 전두환 大統領은 同壻인 金相球(金相求) 평통 事務次長까지 물러나게 하면서 民心收拾을 위해 努力했다. 하지만 한番 싸늘하게 돌아선 民心은 돌아서지 않았다. 이 事件으로 ‘正義社會具現’을 외치며 出帆한 5共은 道德性에 甚大한 打擊을 입었다.
 
 
  金玉淑, “서울 出馬, 우린 못해요”
 
1983年 黨 院內總務 會談을 하는 3黨 院內總務들. 왼쪽부터 時計方向으로 臨終期(민한당), 이동진(國民黨), 李鍾贊(민정당).
  1984年 8月 어느 날이었다. 나는 地區黨員들과 함께 競技도 天摩山에서 黨員 下溪(夏季)練修會를 갖고 있었다. 갑자기 盧泰愚 서울올림픽組織委員長에게서 電話가 걸려 왔다. 急히 만나자는 것이었다. 자리를 뜨기 어렵다고 하자, 自己가 오겠다고 했다. 1時間 後 正말 노태우 委員長이 나타났다. 그는 茶도 마시지 않고 用件부터 꺼냈다.
 
  “閣下께서 來年 選擧에 서울 西大門에서 出馬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 ‘故鄕 大邱라면 몰라도, 서울은 基盤도 없고 生疏하다’고 말씀드렸더니, 閣下는 ‘李鍾贊이도 鍾路에서 됐는데, 當身이 왜 안 되느냐. 서울에서 當選돼야 全國的인 人物로 클 수 있다’고 하시더군. 내가 西大門에서 나오면 될 수 있을까?”
 
  12·12事態 直後부터 ‘2人者’ 소리를 듣던 그가 西大門에서 出馬하면 野黨의 集中攻擊 對象이 될 것이 뻔했다. 나는 率直하게 “野黨의 集中攻擊 對象이 될 것이고, 잘해야 2等으로 當選될 것”이라고 말했다.
 
  盧泰愚 委員長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閣下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내가 어렵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니, 李 議員이 잘 좀 말씀드려 달라”고 付託했다.
 
  하지만 전두환 大統領과 노태우 委員長 사이에서 論議된 일인데, 내가 나서서 뭐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여러 날을 苦悶하다가 陸士 同期生인 정순덕(鄭順德) 靑瓦臺 政務首席祕書官과 만나 議論했다. 그는 “이미 決定된 事案이니 너는 끼어들지 마라”고 했다. 권익현 代表와도 議論했으나 “閣下께서 다 생각이 있어서 한 決定이니 黨에서 曰可曰否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얘기만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金浦空港에서 열린 外國 國賓(國賓) 歡送行事에 나갔다가 盧泰愚 委員長 內外와 遭遇했다. 盧 委員長은 “行事가 끝나면 連喜洞 우리 집에 좀 들러 달라”고 했다. 무거운 걸음으로 연희동으로 갔다. 盧泰愚 委員長은 “어떻게, 말씀은 드려 보았나? 잘 안되는 것 아닌가?”라며 걱정했다. 김옥숙(金玉淑) 女史는 더 直說的으로 얘기했다.
 
  “우리는 이 議員에게 모든 것이 달렸다고 생각해요. 서울 出馬, 우리는 못해요.”
 
 
  “애써 줘서 고맙다”더니…
 
1985年 노태우 代表(오른쪽)와 이야기를 나누는 李鍾贊 院內總務.
  나는 얼마 後 권익현 代表가 12代 總選 公薦 候補者 名單을 가지고 靑瓦臺로 올라갈 때 따라나섰다. 權 代表는 “이미 閣下의 決心이 굳으니, 盧泰愚 委員長 얘기는 하지 말라”고 注意를 주었다. 大統領 執務室 밖 待機室에서 만난 정순덕 首席도 “며칠 前 閣下께 다시 確認해 봤는데 確固하시더라”고 했다. 권익현 代表가 報告를 마치고 나온 後 나는 執務室로 들어갔다.
 
  “閣下! 한 가지 제가 個人的으로 報告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 말해 봐.”
 
  전두환 大統領은 조금 귀찮다는 表情이었다.
 
  “우리가 민정당을 創黨하면서 過去에 野黨을 했던 조종호(趙鍾昊·4·5·11·12代 國會議員 歷任)·김정례·윤길중氏 等을 迎入했습니다. 조종호氏는 尹潽善(尹潽善) 前 大統領의 祕書를 지낸 분이고, 윤길중氏는 代表的인 革新系 人士 中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番에 조종호氏의 地域區인 動作에 허청일(許淸一·陸士20期, 11·12代 國會議員 歷任)氏를, 윤길중氏의 地域區인 西大門에 盧泰愚 先輩를 公薦한다면 世上에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過去 野黨 사람들을 데려다가 一回用으로 써먹고 버리면서, 陸士 나온 TK 出身으로 그 자리를 메운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종찬! 나는 거기까지 생각 못했다. 좋은 것을 指摘해 주었어!”
 
  이런 率直함이 전두환 大統領의 長點이었다. 前 大統領은 “둘 中 한 사람만 公薦한다면, 누가 좋을까”라고 물었다. 나는 “허청일은 오래 前부터 動作에서 準備를 했는데, 盧 先輩는 準備가 안되어 있다”고 말씀드렸다. 前 大統領은 “그럼 노태우는 빼고, 代身 全國區 1番으로 하지”라고 結論을 내렸다.
 
  黨舍로 돌아와 권익현 代表에게 報告했더니 “노태우를 위해서나 黨을 위해서나 잘된 일”이라며 좋아했다. 盧泰愚 委員長도 내 얘기를 듣고 “잘됐다”고 기뻐하면서 “애써 줘서 고맙다”고 했다.
 
  萬一 2·12 總選에서 노태우 前 大統領이 西大門에서 出馬했다면, 그는 野黨의 集中攻擊을 받아 傷處를 입었을 것이고, 以後 大權街道(大權街道)에도 支障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노태우 大統領 時節이 되자 異常한 얘기가 나왔다. “노태우 大統領의 西大門 出馬를 이종찬이 氣를 쓰고 막은 것은 自己가 서울의 盟主(盟主) 노릇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盧 大統領은 當時 모든 覺悟를 하고 西大門 出馬에 萬般의 準備를 했는데 中間에 李鍾贊의 妨害로 挫折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나는 그래도 ‘노태우 大統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1992年 民主自由黨 大統領 候補 競選 때의 일이다. 靑瓦臺 民政首席祕書官으로 있던 안교덕(安敎德·陸士11期) 先輩가 나에게 물었다.
 
  “왜 85年 總選擧 때 盧 大統領의 서울 出馬를 막았소? 그게 當身이 誤解를 받게 되는 原因이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나는 노태우 大統領이 1985年 總選을 앞두고 나의 個人的 野心 때문에 그의 西大門 出馬를 막았다는 얘기를 믿고서 나에 對해 不快感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盧泰愚, “金復東 出馬 막아달라”
 
  나중의 일이지만, 1987年 大選 直後의 일이다. 강창성 將軍이 김복동(金復東) 將軍과 내게 點心食事를 같이 하자고 했다. 姜 將軍이 師團長 時節에 金 將軍이 그 아래서 大隊長을 했던 因緣이 있어 두 사람은 무척 가까웠다. 나는 조심스러웠다. 윤필용事件 當時 노태우 當選者도 調査를 받고 軍服을 벗을 뻔했기 때문에, 盧 當選者는 姜 將軍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태우 當選者와 함께 車를 타고 汝矣島 國會로 가는 길에 “來日 강창성 將軍, 김복동 將軍과 點心約束이 있다”고 報告했다. 盧泰愚 當選者는 “잘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김복동 將軍이 이番 總選 때 大邱에서 出馬하겠다고 하는데, 當身이 後輩로서 좀 말려 주시오. 요새 내가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소.”
 
  食事 자리에서 그 얘기를 어떻게 꺼내나 苦悶하고 있는데, 강창성 將軍이 먼저 그 얘기를 꺼냈다.
 
  “金 將軍, 이番에 出馬하려고 그러나?”
 
  “전두환 時節 내내 물먹고 있다가 이番에 出馬 좀 해 보려 했더니, 웬 雜소리가 그렇게 많은지 …. 어제 事務室 門을 닫았습니다.”
 
  姜 將軍은 “잘 생각했다. 2線에서 노태우 大統領을 잘 도와주고, 다음에 出馬해도 된다”며 金 將軍을 激勵했다. 나도 “先輩님, 決心 잘하였습니다. 盧 大統領을 便하게 해드리는 것이 只今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얼마 後 김복동 將軍이 만나자고 했다. 그는 무척 火가 나 있었다.
 
  “왜 當身이 나서서 내 出馬를 가로막은 거요? 그럴 수가 있소? 내가 當身의 政治的 進路에 무슨 걸림돌이라도 된다는 거요?”
 
  나는 펄쩍 뛰었다.
 
  “誤解입니다. 盧 大統領으로부터 先輩님의 出馬를 挽留해 달라는 付託을 받았지만, 지난 番 食事 자리에서 말씀드린 게 全部입니다.”
 
  하지만 김복동 將軍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盧 大統領은 ‘이종찬 等 後輩들이 김복동 將軍의 出馬를 말려야 한다고 했다’고 하던데, 무슨 소리요 ….”
 
  노태우 大統領은 다른 사람을 둘러대면서 自己 意思를 傳達하는 境遇가 많았는데, 그 바람에 나는 여러 番 바가지를 썼다.
 
 
  ‘改宗贊!’ 소리 들으며 2·12總選 치러
 
  1985年 2·12 總選을 치렀다. 選擧 前까지만 해도 민정당은 그間의 實績으로 國民들에게 좋은 評價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內 個人的으로는 與黨 院內總務로서 나름대로 議會民主主義 定着을 위해 努力했다고 自負해 왔다. 하지만 그건 錯覺이었다.
 
  나의 母校이기도 한 창신國民學校에서 열린 合同政見發表會에서 나는 憎惡로 이글거리는 有權者들의 눈빛을 봤다. 서울高等學校 矯正(慶熙宮)에서 열린 合同演說會에서는 “改宗贊!”이라는 辱說이 터져 나왔다.
 
  ‘政治1番地’라는 鍾路·中區에서 激戰을 치른 나는 돌아선 民心을 實感했다. 하지만 黨 指導部는 나처럼 危機意識을 느끼지 않았다. 11代 때 151席이던 議席에서 3席만 잃었을 뿐이니 平年作(平年作)은 했다는 것이 衆論(衆論)이었다. 이 일로 나는 권익현 代表와 言爭을 벌였다.
 
  “事實上 敗北한 選擧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내게 權 代表는 “이番 選擧에서 우리는 35.3%의 支持를 받았다. 지난 11代에 비해 不過 0.2%포인트 減少했을 뿐인데, ‘敗北한 選擧’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나도 反駁했다.
 
  “서울選擧를 보십시오. 나하고 성동의 李世基(李世基)만 1等 했고, 나머지는 모두 2等 當選입니다. 萬若 1具(區)1人(人)의 소(小)選擧區制였다면 모두 떨어지는 選擧였습니다.”
 
  하지만 權 代表는 “왜 서울選擧만 말하는 거냐? 서울이나 地方이나 똑같은 1席 아니냐?”고 받아쳤다. 이어 노태우 代表 體制가 들어섰지만, 이런 雰圍氣 속에서 總選 直後 민정당 內에서 나오던 自省(自省)의 목소리는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버렸다.
 
  2·12 總選 後 나는 與黨의 院內總務로서 원(院)構成을 推進해야 했다. 3月 21日 서울 大學路 興士團 講堂에서 김병오(金炳午) 議員의 出版記念會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김동영(金東英) 宸翰민주당 院內總務와 遭遇했다. 寫眞記者들의 要請에도 不拘하고 그는 나와 握手하는 것조차 拒絶하였다. 그는 “國會 開院되면 만납시다”라는 말만 남기고 쌀쌀하게 돌아섰다.
 
  이는 以後 險難한 政局(政局)의 豫告篇이었다. 4月 1日 첫 總務 接觸이 있었다. 以後 12代 國會 院構成 協商은 한 달 半을 끌었다. 都大體 國會議員이 登院(登院)을 條件으로 協商한다는 것 自體가 말도 안되는 얘기였지만, 나는 忍耐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신민당의 公式的인 代表는 李珉雨(李敏雨) 總裁였지만, 그 뒤에는 金永三·김대중氏가 있었다. 상도동과 동교동의 利害關係는 또 달랐다.
 
  어렵게 開院協商이 妥結된 것은 김동영 總務와 거의 每日같이 만나면서 어느 程度 信賴關係가 形成된 德分이었다. 나와 親한 親舊인 서울大 學生委員長 出身의 김인학, 서울대 文理大 學生委員長 出身의 윤항렬 等이 김동영 總務의 親舊였던 것도 우리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됐다.
 
 
  美文化院 占據事件後 나온 學院安定法
 
1985年 5月 서울 乙支路 美國文化院을 占據한 大學生들이 窓밖으로 口號를 외치고 있다.
  1985年 2·12 總選으로 한 番 民心이 暴發하자, 5共 政權에 對한 抵抗은 漸漸 거세졌다. 그해 5月 23日 삼민투位(三民鬪委·民族統一民主爭取民衆解放鬪爭委員會) 傘下 ‘光州虐殺元兇處斷鬪爭委員會’ 所屬 大學生 73名이 서울 을지로에 있는 美(美)文化院을 占據했다. 이들은 ‘光州虐殺 眞相 糾明’과 ‘光州虐殺을 支援한 美國의 公開謝過와 全斗煥 政權에 對한 支援 中斷’을 要求했다. 政府는 이 事件의 主動者인 서울大 學生會長 함운경(咸雲炅) 等 25名을 拘束하고, 全國學生總聯合(전학련) 議長 兼 서울대 總學生會長 金民錫(金民錫·15 ·16代 國會議員 歷任), 삼민투位 委員長 허인회(許仁會) 等을 手配했다.
 
  美 文化院 占據事件이 있은 지 며칠 後, 盧信永(盧信永) 國務總理가 만나자고 했다. 總理室에 갔더니, 盧 總理는 김석휘(金錫輝) 法務長官과 要談 中이었다. 盧 總理가 내 意見을 물었다.
 
  “美 文化院 占據事件 主動者들에 對해서 위에서는 모두 國家保安法으로 起訴하라고 하는데, 金 長官은 지나친 措置라며 反對하고 있습니다. 李 總務의 意見은 어떻습니까?”
 
  “社會通念上 國家保安法은 間諜을 다루는 法인데, 이것을 學生運動 處罰하는 데 適用하는 것은 過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國家保安法이라는 칼은 칼집에 있어야 權威를 갖는 것인데, 한番 칼집에서 뽑으면 權威가 없어집니다.”
 
  김석휘 長官의 얼굴이 밝아졌다. 盧 總理도 “李 總務 말씀이 맞는 것 같다”면서 金 長官에게 靑瓦臺로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그러나 靑瓦臺의 姿勢는 强勁했다. 學生運動에 微溫的으로 對處한다는 理由로 김석휘 法務長官과 李賢在(李賢宰) 서울대 總長이 잇따라 更迭됐다. 警察의 學院査察과 搜索이 日常化됐다. 이어 허문도 政務首席祕書官과 장세동(張世東) 安企部長 等 强勁派는 5000名의 學生들을 强制收用해 醇化敎育을 하는 內容의 ‘學院安定法案’을 내놓았다. 5共 初期 삼청교육대를 연상시키는 이 法案이 나오자 輿論이 들끓었다.
 
 
  學院安定法 反對로 院內總務에서 물러나
 
  여러 次例의 黨政(黨政)協議가 있은 後, 그해 7月 26日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장세동 安企部長과 허문도 政務首席, 그리고 나와 李漢東(李漢東) 민정당 政策위議長 等이 만났다. 政府側에서는 學院安定法을 議員立法으로 處理해 달라고 注文했다.
 
  나는 學院安定法을 만든다고 大學街가 조용해질지도 疑問이거니와, 正當한 司法(司法)節次도 거치지 않고 單純히 學院所要의 主動者라는 理由만으로 人身(人身)을 强制로 拘束한다는 것은 違憲(違憲) 素地가 크다고 생각해 繼續 反對했다.
 
  甲論乙駁(甲論乙駁)李 繼續되는 가운데 李漢東 政策위議長이 折衷案을 냈다. 醇化敎育 對象者들을 준(準)사법적 委員會가 아니라 判事가 決定하도록 法案을 修正하면 自己는 贊成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벌컥 火를 냈다.
 
  “李 議長, 當身은 檢査도 해 보고 判事도 해 본 사람 아니오? 判事가 檢事의 公訴狀을 보고 判斷하지, 어디 한 사람의 人生을 보고 判斷합니까? 나는 贊成할 수 없어요.”
 
  그러자 장세동 部長과 허문도 政務首席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7月 31日 정재철(鄭在哲) 政務長官과 만나 對策을 熟議하고 있는데, 노태우 代表로부터 急히 黨舍로 들어오라는 連絡이 왔다. 나를 맞은 盧 代表는 未安한 表情으로 말했다.
 
  “청남대에 가 계신 閣下로부터 急히 오라는 指示를 받고 헬기便으로 다녀오는 길이오. 李 總務를 更迭하라고 하시는군. 學院安定法에 對해서는 나도 異議가 있지만, 閣下가 너무 强勁하셔서 아무 말 없이 돌아왔소. 그동안 心慮가 많았을 터이니 좀 쉬면서 앞으로 할 일을 整理합시다.”
 
  나의 院內總務 時節은 그렇게 끝났다. 政府는 내가 院內總務를 그만둔 以後에도 學院安定法을 繼續 밀어붙였으나, 輿論과 野黨의 反對 때문에 結局 抛棄하고 말았다.
 
 
  鄭鎬溶, “이대로 가면 10·26 直前처럼 된다”
 
  野黨의 直選制(直選制) 改憲 攻勢에 맞서 민정당이 들고 나온 카드는 內閣制 改憲이었다. 與野(與野)의 主張이 엇갈리면서 政局이 膠着狀態에 빠지자 李珉雨 신민당 總裁는 1986年 12月 24日 이른바 ‘이민우 構想’을 내놓았다. 言論自由 保障, 拘束者 釋放, 赦免復權, 公務員의 政治的 中立 保障, 國會議員選擧法 改正, 地方自治制 實施 等 7個 條件이 充足되면 內閣制 改憲도 檢討할 수 있다는 內容이었다.
 
  하지만 이로 因해 이민우 總裁는 金永三·김대중氏의 反擊을 받아 政治的으로 埋葬되다시피 했다. 김영삼·김대중 두 사람은 이민우 總裁를 枯死(枯死)시키기 위해 統一민주당 創黨 作業에 나섰다.
 
  1987年 劈頭에 박종철 事件이 터졌다. 大學生이 對共(對共)搜査機關에 連行되어 拷問을 當하다가 죽었다는 事實 앞에서 國民들의 民主化 要求는 漸漸 더 거세졌다.
 
  4月 初 어느 날 정호용(鄭鎬溶) 內務部長官을 만났더니, 장세동 安企部長이 作成한 政局 判斷書에 對한 얘기를 해 주었다. 內容은 다음과 같았다.
 
  <‘이민우 구상’의="" 여파로="" 야당은="" 분열한다.="" 신민당에="" 잔류하는="" 의원은="" 약="" 40명,="" 신당으로="" 가는="" 의원은="" 30명="" 정도="" 될="" 것으로="" 보이며,="" 신당은="" 제2야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분당으로="" 야당이="" 국민의="" 비난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 개헌유보="" 결단을="" 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마디로 4·13 護憲(護憲)措置를 豫告하는 것이었다. 정호용 長官은 “靑瓦臺로 들어가 前 大統領에게 장세동 部長의 判斷은 適切치 못하다고 말씀드렸지만, ‘國內政治 問題는 張 部長의 일이니 鄭 長官은 介入하지 말라’고 하더라”면서 “이대로 가면 政局은 10·26 直前처럼 될 것”이라며 걱정했다. 鄭 長官은 내가 장세동 部長과 陸士 動機라는 것을 알면서도 張 部長을 激烈하게 非難했다.
 
  4·13護憲措置는 金永三·김대중氏가 推進하던 新黨 推進을 加速化했다. 新民黨 議員 74名이 새 野黨인 統一민주당으로 合流했다. 自身들의 判斷이 엇나가자 安企部는 統一민주당 創黨을 妨害하기 위해 깡牌들을 動員했다. 이른바 ‘용팔이事件’이다.
 
  5月 18日 明洞聖堂에서 열린 ‘光州抗爭 犧牲者 追慕會’에서 天主敎正義具現司祭團은 “박종철拷問致死(致死)事件 加擔者가 더 있으며, 事件의 眞相이 隱蔽됐다”고 暴露했다. 憤怒한 民心에 直面한 전두환 大統領은 5月 26日 改閣(改閣)을 斷行했다. 한때 後繼者說(說)이 있던 노신영 總理와 장세동 安企部長이 更迭됐다.
 
 
  全斗煥, “이종찬, 盧泰愚 잘 받들어”
 
1987年 6月 10日 민정당 候補指名大會에서 전두환 大統領과 노태우 代表가 손을 들고 參席者들의 歡呼에 答하고 있다.
  1987年 6月 2日 전두환 大統領은 민정당 中央執行委員 全員을 靑瓦臺 常春齋로 부른 자리에서 노태우 代表를 後繼者로 指名했다. 盧 代表는 “閣下의 河海와 같은 恩惠로 指名을 받고 보니 두려움이 앞선다”면서 前 大統領에게 辭意(謝意)를 표했다.
 
  이어 술이 돌기 始作했다. 參席者들이 전두환 大統領 앞으로 나가 옆에 있던 새 盞에 술을 따라 올렸다. 그러면 前 大統領은 술을 조금 마시는 시늉을 한 後, 다른 盞에 술을 따라서 돌려주었다. 내 次例가 왔다. 내가 前 大統領에게 술盞을 올리는 瞬間, 醉氣가 돌았는지 전두환 大統領이 한마디 했다.
 
  “이종찬! 내가 누군지 알지? 자네가 잘해야 돼! 노태우 候補를 잘 받들어야 해! 알지?”
 
  자리가 얼어붙었다. 노태우 代表도 나를 凝視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했다. 瞬間 나는 前 大統領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斟酌이 갔다. 얼마 前 親하게 지내는 記者가 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김영일(金榮馹) 靑瓦臺 司正(司正)祕書官의 房에 갔다가 나에 對한 파일을 偶然히 봤는데, 거기에는 “이종찬은 노태우 代表에 對하여 不滿을 包紙(抱持)하였다. 이종찬은 ‘노태우가 優柔不斷하고, 政府를 效果的으로 統制할 만큼의 리더십이 不足하다’고 言動하였다”는 內容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그 外에도 當時 政權 內部에서는 “이종찬은 大衆迎合主義子(포퓰리스트)”라는 式의 誹謗이 橫行했다.
 
  나는 泰然하게 對答했다. “閣下께서 하신 말씀의 뜻,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熱心히 하겠습니다.”
 
  ‘그런 파일에 있는 謀略은 믿지 말아 달라’는 意味였다. 전두환 大統領은 “그래, 알았어. 자네가 앞장서야 해”라며 豪宕하게 웃었다.
 
 
  兪學聖의 獨白
 
  다음 날 노태우 代表를 正式으로 大統領 候補로 推戴하기 위한 中央執行委員會가 召集됐다. 節次는 一瀉千里로 進行됐다. 이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학성 議員이 獨白(獨白)처럼 말했다.
 
  “오늘까지 오는 데 7年이 걸렸소.”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中情部長으로 가기로 決定된 1980年 6月 27日, 전두환 大統領, 노태우 代表와 나, 세 사람이 술자리를 가졌어요. 그 자리에서 ‘다음은 盧泰愚’라는 約束이 있었어요. 迂餘曲折이 있었지만, 結局 여기에 이르니 感慨無量합니다.”
 
  12·12事態 直後부터 노태우 代表는 新軍部의 2人者로, 전두환 大統領의 後繼者로 꼽혀 왔다. 하지만 過去 김종필氏의 前例(前例)도 있어서 그가 果然 後繼者가 될 수 있을지에 對해서는 疑問이 있었다. 내가 노태우 代表가 전두환 大統領의 後繼者가 될 것으로 確信하게 된 것은 1985年 그가 민정당 代表가 되었을 때부터였다. 하지만 유학성 議員의 말을 듣고 보니, 12·12 主導勢力 內에서는 일찌감치 노태우 將軍이 後繼者로 確定되어 있었다는 것을 새삼 確認할 수 있었다.
 
  6月 10日 잠실실내체육관에서 노태우 候補 指名大會가 열렸다. 室內는 祝賀 雰圍氣 一色이었지만, 밖에서는 催淚彈이 터지고 있었다. 狀況은 나날이 惡化됐다.
 
 
  洪性宇·이용훈, “直選制로 突破” 主張
 
1987年 6月事態 當時 서울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市民과 學生들이 民主化要求 示威를 벌이고 있다.
  6月 20日 서울地域 國會議員들이 汝矣島에 있는 中國飮食店 ‘桃源’에 모였다. 洪性宇(洪性宇) 議員이 直說的으로 내뱉었다.
 
  “이제 體育館選擧는 그만해야 해! 더 以上 안 돼! 이게 國民의 소리야!”
 
  드디어 黨內에서도 異見이 나오기 始作한 것이다.
 
  6月 21日 아침 9時부터 서울 가락동 민정당 硏修院에서 議員總會가 召集되었다. 議員總會에 앞서 各 地域別로 分任討議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서 洪性宇 議員은 다시 한 番 ‘體育館選擧 不可論’을 力說했다.
 
  議員總會가 始作되자 法制處長을 지낸 이용훈(李龍薰) 議員(全國區)李 登壇해서 외쳤다.
 
  “이제 잔재주 그만 피우고, 國民에게 率直하게 對해야 합니다. 直選制로 가자고 大膽하게 主張하고 正面 突破해야지 무엇을 躊躇합니까!”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洪性宇 議員도 壇上으로 올라가 “直選制로 正말 突破하세요!”라고 主張했다.
 
  6月 22日 민정黨 中央執行委員 懇談會가 있었다. 前날 議員總會 雰圍氣에 對한 報告를 받았는지, 노태우 代表의 表情은 대단히 어두웠다. 中집위員들도 盧 代表의 눈치를 살피느라 特別히 公開的인 發言을 삼갔다. 懇談會가 끝난 後 近處 韓食집에서 點心食事를 하면서 노태우 代表가 말했다.
 
  “議員들이 할 말이 있으면 나에게 와서 말해야지, 議員總會라는 公開된 會議에서 露骨的으로 發言을 하면 黨이 分裂된 것처럼 비쳐질 것 아니오? 黨內에서도 나에게 壓力을 加하는 게 옳은 일이오?”
 
  이렇게 말하는 동안, 盧 代表는 내게서 視線을 떼지 않았다. 마치 서울地域 議員들의 意見噴出이 내가 袖手傍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대로 가다가는 서로 誤解가 쌓일 것 같아, 그날 午後 노태우 代表를 面談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陸士 時節 ‘後退를 해야 할 때에는 果敢하게 확 後退해서 戰線(戰線)을 다시 構築해야 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漢江을 防禦線으로 해서 싸우다 안되면 水原까지 後退해서 싸워 보고, 그게 안되면 다시 誤算까지 後退해서 싸워 보는 式으로 찔끔찔끔 後退하다가는 싸움에서 지고 맙니다. 차라리 大田까지 확 後退해서 거기서 戰線을 다시 構築하는 것이 낫습니다. 只今 이 事態를 收拾하려면 카드를 한 張씩 내놓는 式의 戰術的인 接近을 할 게 아니라, 뭔가 알맹이가 있는 包括的인 提案을 해야 합니다.”
 
  盧 代表는 내가 말하는 ‘包括的 提案’의 內容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나는 4·13 措置 撤回와 改憲을 위한 實世間 對話, 拘束者 釋放, 金大中 年金解除, 赦免復權 等을 꼽았다.
 
  盧 代表는 내 말에 對해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마음먹고 한 建議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힘없이 議員會館 事務室로 돌아왔다. ‘이제 나도 政治와 下直할 때가 되었구나’ 하는 무거운 마음이었다.
 
  6月 25日 노태우 代表는 中央執行委員들과의 午餐懇談會를 마친 後 나를 自己 事務室로 불렀다. 그는 내게 “이용희(李龍熙) 議員을 통해 동교동系와 물밑對話를 해 달라”고 付託했다. 上島洞 쪽은 유학성 議員과 박준병 議員이 맡기로 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意味深長한 말을 했다.
 
  “지난番 자네가 한 말처럼 臺도(大道)를 걸을 決心을 하고 있네. 必要하다면 國民이 바라는 것을 受容할 생각이네.”
 
  나는 노태우 代表의 態度가 相當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後에 밝혀진 일이지만 前날 전두환 大統領은 盧 代表에게 “直選制를 受容해서 正面 突破하자”고 提案했다. 盧 代表도 直選制 受容을 避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박철언(朴哲彦) 安企部長 補佐官, 李丙琪(李丙琪·儀典首席·安企部 2次長 歷任) 민정당 代表 補佐役에게 隱密하게 時局宣言을 準備하도록 指示했다. 나흘 後 노태우 代表는 6·29宣言을 發表했다.
 
 
  김병관 동아일보 會長 仲裁로 YS·DJ 大權·黨權 覺書 써
 
  6·29 宣言이 나오자 온 나라가 기뻐했다. 온 國民이 하나가 된 것 같았다. 與野 合意로 國民들이 苦待해 온 直選制 改憲도 이루어졌다. 改憲 過程에서 나는 光復軍 出身인 김준엽(金俊燁) 前 고려대 總長의 提案에 따라 憲法 全文(前文)에 ‘大韓民國 臨時政府의 法統(法統) 繼承’이라는 文句가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썼다.
 
  12月 19日 實施된 第13代 大選에서 노태우 候補는 36.6%의 得票率로 大統領에 當選됐다. 金永三 통일민주당 候補는 28.0%, 金大中 平和민주당 候補는 27.1%의 票를 얻었다. 여기서 보듯, 노태우 候補의 勝利는 兩金(兩金)氏의 分裂에 힘입은 것이었다.
 
  後날 金炳官(金炳琯) 동아일보 會長은 나와 點心食事를 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祕密裏에 兩金氏를 만나서 한 분은 大權(大權), 다른 한 분은 黨權(黨權)을 갖도록 하는 內容의 覺書를 쓰도록 했어요. 김대중氏는 내 說明을 듣고 바로 覺書를 써 주었고, 김영삼氏도 한참 생각하더니 써 주더군요. 그런데 다음날 김영삼氏가 김덕룡(金德龍) 議員을 내게 보냈어요. ‘어제 써 준 覺書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傳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 瞬間, 火가 치밀어 그 자리에서 覺書를 찢어 버렸지요.”
 
  나는 놀라서 金 會長에게 말했다.
 
  “아니 그 覺書를 찢기는 왜 찢어요. 歷史의 重要한 記錄인데 ….”
 
  그는 손을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두어서 무얼 하게요. 그 後부터 나는 兩金氏와 距離를 두게 됐습니다.”
 
 
  權翊鉉의 不安感
 
  1987年 12月 19日, 大統領 選擧에 勝利한 後 노태우 當選者의 연희동 私邸(私邸)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자리에는 盧 當選者의 最側近만이 參席할 수 있었다.
 
  민정당에서는 盧 當選者의 陸士 同期生이자 민정당 選擧對策委員長으로 수고한 권익현 拷問만이 그 자리에 參席했다.
 
  盧泰愚 當選者의 向後 政局 構想이 궁금했던 나는 다음날 아침 아현동에 있는 권익현 顧問의 집을 찾아갔다. 權 顧問의 얼굴은 어두웠다. 그는 나를 안房으로 끌고 들어가더니 말했다.
 
  “黨(黨)의 앞날이 매우 걱정됩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았다. 權 顧問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제 김옥숙 女史가 ‘이番 大選에서 民政黨이 한 일이 뭐가 있나요. 事實 選擧는 월계수회와 台臨膾가 다 한 것 아니에요’라고 말합디다. 民政黨이 얼마나 苦生을 했는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걸 보고 衝擊을 받았어요. 내가 그 집안을 잘 아는데, 김옥숙 女史가 그렇게 말한 것은 노태우 當選者의 말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권익현 顧問은 담배를 꺼내 물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黨의 앞날이 順坦치 않을 거요.”⊙
Copyright ⓒ 朝鮮뉴스프레스 - 月刊朝鮮. 無斷轉載 및 再配布 禁止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件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