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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가 없어 나를 輕蔑하던 엄마의 눈빛을” : 表紙이야기 : 한겨레21
Home > 表紙이야기 > 表紙이야기 記事目錄 > 記事內容     2008年01月24日 第695號
“잊을 수가 없어 나를 輕蔑하던 엄마의 눈빛을”

基地村 할머니 51名 設問調査…國家는 美軍 要求대로 女性들 管理하던 ‘巨大한 抱主’

2008年 平澤은 들썩이고 있다. 駐韓美軍 基地의 2012~2013年 平澤 移轉計劃이 나온 뒤, 온갖 薔薇빛 構想들이 쏟아졌다. 開發地區의 땅값은 치솟았고, 市內 곳곳에는 ‘슈퍼平澤’ ‘國際都市 平澤’ 等의 펼침막이 펄럭인다.

美軍 部隊 캠프 험프리(K-6)가 있는 平澤 안정리에도 再開發 바람이 불어닥쳤다. 이곳에서 數十 年 동안 美軍을 相對했던 ‘基地村 할머니’ 59名은 골목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이 바람을 지켜보고 있다. 限平生 ‘出口 없는 삶’을 산 이들은 生存의 마지막 堡壘인 單칸房에서조차 밀려날까 마음 졸이고 있다. <한겨레21>은 평택시 안整理에 살고 있는 ‘基地村 할머니’ 51名의 이야기를 들었다. 編輯者

▣ 平澤=글 박수진 記者 jin21@hani.co.kr
▣ 寫眞 류우종 記者 wjryu@hani.co.kr


1月8日 추운 밤이었다. 京畿道 평택시 안整理 10餘 個의 클럽이 불을 밝힌 큰길에서 5分쯤 걸어갔다. 허름한 2層짜리 시멘트 建物 1層. 파란色 페인트가 드문드문 벗겨진 미닫이 나무 大門을 밀었다. 힘을 줘도 잘 열리지 않고 삐그덕거리기만 했다. 艱辛히 門을 열고 들어서자 앞이 캄캄했다. 0.5坪(1.6㎡) 부엌이었다. 壁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지만 불은 켜지지 않았다. “할머니”를 부르자 안쪽 또 다른 미닫이門이 천천히 열렸다. 그제야 불빛이 비쳤다.

月貰房에서도 쫓겨날 狀況

房門 앞 검붉은 煉炭보일러 옆에 煉炭 20餘 張이 쌓여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김귀자(78·假名) 할머니는 喘息이 甚해져 두 달째 病院에 있다가 이날 退院한 길이었다. 할머니의 單칸房 化粧臺 거울에는 60~70年代 할리우드 女俳優처럼 머리를 부풀려 올린 젊은 時節의 黑白寫眞이 놓여 있다. 寫眞 속의 ‘그女’는 端雅한 表情으로 微笑를 머금고 있다. 金 할머니는 喘息 때문에 한 마디 하고 숨을 몰아쉬고, 또 한 마디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1963年이었을거야.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기도 前에 내가 먼저 미니스커트 입고 부츠 신고 平澤劇場을 돌아다녔어. 그때 파라다이스 클럽 冀州(門지기)하던 사람이 只今도 여기 사는데, 날 보면 놀려. 에이(A)급 색시였던 그 金 마담이 늙은이가 다 됐다고….” 1951年 21살에 結婚한 金 할머니는 애가 들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代를 끊을 거면 제 발로 나가달라”는 媤어머니의 成火에 1年 만에 집에서 쫓겨나, 釜山 美軍部隊 안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就職하면서 ‘基地村 生活’을 始作했다.

‘애를 못 낳는다’던 그는 몇 年 뒤 거짓말처럼 아이를 가졌다. 美軍의 아이였다. 金 할머니는 “애가 안 들어선 것이 내 탓이 아닌데 쫓겨난 것이 抑鬱해”라고 말했다. 태어난 애를 “싸들고” 前男便과 媤어머니를 찾아가 따지기도 했다. 클럽 웨이트리스 生活, 마담 生活, 美軍과의 同居 等 40餘 年의 基地村 生活이 金 할머니에게 남긴 건 月 8萬원짜리 單칸房과 喘息·骨多孔症·膽石症과, 6살 된 아들을 入養 보내고 먹었던 睡眠劑 28알의 記憶과, 2年 前 32年 만에 다시 만나게 된 아들 제임스뿐이다.

金 할머니처럼 ‘基地村 生活’을 한 할머니 59名이 如前히 美軍基地 캠프 험프리(K-6)가 있는 평택시 안整理에 살고 있다. 每週 火曜日 午後 2時면, 할머니들은 안정리 팽성읍에 있는 햇살社會福祉會로 모인다. 안整理에 살고 있는 基地村 女性老人을 돌보는 活動을 하는 團體다. 8日에도 어김없이 모인 할머니들은 “等 붙일 만한, 떠나야 할 不安感 없이 살 수 있는 집 한 채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基地村 할머니의 90%가 家族 없이 혼자 살고 있다. 우리나라 65살 以上 老人 中 獨居老人 比率(18%)보다 다섯 倍假量 높은 數値다.

<한겨레21>은 1月4日부터 11日까지 햇살社會福祉會와 함께 안整理에 살고 있는 基地村 女性老人 實態調査를 했다. 59名 中 51名의 할머니가 設問에 應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大部分이어서, 一一이 問項을 읽어주고 答辯을 들었다. 3名은 頑强히 拒否했고, 5名은 避하거나 連絡이 되지 않았다.

應答한 이들의 96%인 49名의 할머니가 안整理에서 혼자 살고 있다. 우리나라 65살 以上 老人 中 獨居老人 比率은 18.1%(2005年 統計廳 總調査人口)인 데 견줘 다섯 倍假量 높다. 다른 老人들보다 훨씬 ‘疏外’된 與件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혼자 사는 할머니들은 大部分 貰房살이 身世다. 90%인 44名의 할머니들은 傳貰·月貰살이를 하고 있다고 應答했다. 月貰房에 사는 할머니들의 平均 賃貸料는 13萬2200원이다.

할머니들은 이 月貰房에서조차 밀려날 危機에 있다. 平澤 美軍基地 移轉 事業이 2012~2013年 完了를 目標로 進行됨에 따라 美軍基地 豫定地 周邊人 안정리 땅값이 자꾸 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10萬원짜리 月貰房에 사는 전명옥(69·假名) 할머니는 “李 집도 팔려서 1~2年 안에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7家口가 살던 슬레이트 지붕 建物엔 이제 할머니를 包含해 3家口만 남았다.

美軍 要求로 人種差別 禁止

새로 올 美軍에게 집터를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할머니들은, 젊은 時節에는 그 美軍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提供하도록 管理되고 規制됐다. 代表的인 것이 1971年 始作된 性病檢診이다. 朴正熙 政權이 1971~76年 ‘基地村 淨化事業’의 一環으로 벌인 事業으로, 當時 ‘基地村 女性들’은 一週日에 두 番씩 出勤圖章 찍듯 性病 有無를 確認받고 ‘保健證’에 圖章을 찍어야 했다.

황정숙(63·假名) 할머니는 檢査받던 記憶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只今 ○○藥局 院長이 그때 保健所長이었어. 女子가 檢査할 때도 있었는데 그 令監이 檢査할 때면 綿棒으로 子宮을 어찌나 꾹 누르는지, 너무 아프고 수치스러웠어. 그 令監은 우리를 ‘더러운 洋색시’라고 생각했나봐. 그래서 살짝 눌러도 될 걸 부러 꾹 누르는 거 같았어.” 檢査에서 不合格判定을 받은 할머니들은 ‘收容所’라고 불리는 곳으로 끌려갔다. ‘性病管理소’를 할머니들은 ‘監獄’ ‘收容所’라 부렀다. “팬티 쪼가리 몇 個 싸서 갔어. 사흘이고 나흘이고 거기서 하릴없이 주는 藥 먹고 있는 거지. 山골짝에 있는 덴데, 거기 갇혀 있는 게 뭐 좋아. 逃亡도 많이 나오고, 빨리 나오려고 지키는 사람한테 돈도 주고 그랬지.”

美軍의 性病 豫防 等을 目的으로 한 美軍 當局의 要求에서 出發한 基地村 淨化對策으로 惠澤을 받은 이들은 美軍이었다. 性病을 옮기는 ‘主犯’으로 管理·規制된 對象은 基地村 女性이었다. 國家를 代身해 現場 監督 役割을 한 이들은 美軍의 營業停止 命令을 받지 않으려고 勞心焦思한 클럽 業主들이었다. 軍隊와 國家가 ‘巨大한 抱主’였다.


안정리에서 抱主들의 規制는 더 거셌다. 1971年 7月 黑人들이 클럽 內 黑人差別을 問題 삼아 클럽을 돌아다니며 韓國人을 때리고 器物을 부순 事件이 일어났다. 住民 80餘 名이 負傷當한 ‘안정리 事件’이다. 當時 黑人들의 亂動은 ‘領內’의 黑白 葛藤을 ‘營外’로 끌고 나온 側面이 컸다. ‘만만한’ 클럽과 韓國人들을 相對로 憤풀이를 한 셈이다. 實際 當時 클럽들 中에는 黑人 美軍이 가는 곳과 白人 美軍이 가는 곳이 區分됐고, 皮膚色에 따라 出入이 統制되기도 했다. 어떤 皮膚色의 美軍을 相對하느냐에 따라 女性들 사이에서도 ‘階級’李 갈렸다.

이 事件으로 美軍 當局은 열흘間 軍人들의 外出을 禁止했다. 손영순(65·假名) 할머니는 “색시 生活하면서 第一 힘들었던 때가 그때라니까. 우리는 다 主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어. 근데 美軍들이 안 나오니까 어떡해. 먹고살 길이 寞寞했지”라고 말했다. 이 事件 뒤에 美軍은 클럽의 人種差別을 剛하게 規制했고, 美軍 當局의 ‘營業停止’ 命令의 威力을 아는 抱主들은 이에 忠實히 따랐다. 캐서린 文 美國 웨슬리大學 敎授는 그의 冊 <동맹 속의="" 섹스="">(삼인 펴냄)에서 “駐韓美軍 司令部 代表들이 클럽 業主, 從業員, 軍人 그리고 餘他 基地村 住民에게 人種差別과 關聯한 敎育의 必要性을 提起하는 會合을 定期的으로 가졌다”고 쓰고 있다. 美軍은 人種差別 禁止 命令을 내렸고, 外務部는 이를 指針으로 發表했고, 業主들은 이를 忠實히 따랐다.

數字만 알았어도 黠虜, 割로 했겠나

윤복례(51·假名)氏는 黑人 軍人과의 性關係를 강요받았던 記憶을 떠올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잖아. 몸에 깜장이 묻을까 寢臺 위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門밖으로 뛰어나갔더니 글쎄 抱主가 기다리고 있는거야. 매맞고 다시 들어갔지 뭐.” 美軍과 韓國 政府間의 決定이 基地村 女性 個個人의 삶에 미친 影響은 이것만이 아니다. 女性들은 業主들의 다양한 要求를 받아내야 했다. 윤복례氏는 業主들이 건넨 코데인 시럽을 많이 먹었다. 尹氏는 “美軍들과 關係를 할 때 아프면 술에 타 먹으라고 抱主들이 줬어. 다른 藥들도 줬어. 다 感氣藥인데 먹으면 뿅가서 실없이 웃게 되고 自信感도 생기고 아픈 것도 잊어”라고 말했다. 尹氏는 “그러다 中毒돼서 우리가 直接 藥局 가서 사먹고 그랬어”라고 덧붙였다. 感氣藥으로 使用되는 코데인 시럽은 모르핀 成分이 들어 있는 一種의 痲醉劑다.


△ 할머니들은 美軍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大部分 入養 보냈다. 한 할머니의 ‘되찾은 아들’李 보내온 家族寫眞.

尹氏는 서른 살에 ‘洋색시’ 일을 관뒀다. 아이를 열한 番째 지우고서였다. “아이가 들어섰다고 하면 抱主가 그길로 나를 데리고 病院에 가서 애를 지워줬어. 그러면 뭐해. 그러고 다시 그날 밤 내 房으로 美軍을 밀어넣었는데.” 尹氏는 그렇게 열한 番의 手術을 하고 나니, 男子 손이 몸에 닿는 것만으로도 진저리쳐진다고 했다. 尹氏가 그 뒤로 했던 일은 工事場 幕일이다. “차라리 막일이 마음 便했어. 사람들이 그러대. ‘洋색시’ 하다가 工事판에서 일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그러면서 나를 좋게 봐줬어.”

尹氏는 只今 腎不全症, 喘息, 高脂血症 等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몸무게가 2年 前보다 15kg이 불어 있다. 숨이 차서 바깥에 나가 걷지도 못하고, 하루 終日 房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 醫師는 ‘憂鬱症’ 診斷도 내렸다.

尹氏가 그나마 막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肉體的 條件이 돼서였다. 많은 할머니들은 일찍이 健康을 잃었다. 基地村에서 떠나고 싶어도,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도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1999年까지 ‘히빠리’(클럽에 所屬되지 않고 美軍을 相對로 홀로 性賣買를 하는 나이 든 女性을 뜻하는 隱語)를 해 벌이가 좋았다는 강영애(73·假名) 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일은 旅館 計算臺에서 計算하는 일이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은 그 일이 할머니에게는 ‘머나먼 꿈’이었다. “그거라면 몸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근데 그거 하나 할 때도 ‘1, 2, 3, 4’ 數字도 읽을 줄 알아야 하고, 글字도 좀 알아야 하잖아. 내가 數字 배워서 時計를 읽을 수 있게 된 게 3~4年 前이야. 敎會 다니기 始作하면서 十一租를 내야 하는데, 어느 封套가 내 封套인지 모르니까 敎會 사람들이 가르쳐주더라고. 그前에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가르쳐달라 말도 못하겠고. 내가 ‘1, 2, 3, 4’만 알았어도 그렇게 ‘黠虜, 黠虜’ 외치지 않았을지 몰라.” 할머니는 連方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다른 ‘할 수 있는 일’李 없었던 時節에는 그래서 美軍과 結婚하는 게 꿈이었다. 김귀자 할머니는 “美軍과 結婚하지 못해 自殺하는 아가씨들도 여럿 봤다”고 했다. “只今은 文房具로 바뀐 길 건너便 집에 살던 女子는 얼굴이 참 잘생겼어. 結婚하자는 美軍이 있었지. 근데 웬걸. 어느 날부터 이 美軍이 月給날에도 안 나오고, 連絡도 안 되는 거야. 結局 女子가 壁에 自己 머리를 탕탕 찧어 腦震蕩으로 죽었어. 自殺한 거지.”

아이를 보내고 藥을 먹다

美軍과 結婚해도 美國 生活이 쉽지만은 않았다. 美軍과 結婚하고 같이 美國에 가서 아이 둘을 낳았던 전명옥 할머니는 結局 애 둘을 두고 돌아왔다. “男便이 술을 하도 먹어서 別居하게 됐고, 以後 市民權을 얻어야 하는데 保證을 서주겠다던 媤집 食口들이 다 拒絶했어. 結局 保證人을 救하지 못해 市民權 얻기를 抛棄했고, 不法으로 繼續 美國에 있을 수 없으니까 韓國으로 왔어. 젖먹이 아들딸은 지들 할머니한테 두고 왔어. 돌아가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洋색시’ 일인데 애들을 잘 키울 수 없을 것 같았어.” 前 할머니는 韓國으로 와서, 그前에 生活하던 이곳 안整理로 다시 와 웨이트리스 일을 했다. 돌아온 그날부터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애들 생각에 참을 수가 없어서 밤에 잠이 안 왔어. 그때부터 痲藥을 했어. 나도 하고, 몰래 팔기도 하고. ” 痲藥 販賣를 하다 摘發된 前 할머니는 監房 生活을 하기도 했다.

많은 할머니들의 큰 傷處 中 하나는 ‘아이’다. 아이를 보내고 睡眠劑 數十 알을 먹고 自殺을 試圖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한겨레21> 調査에서 設問에 應答한 51名의 할머니 中 17名이 “美軍의 아이를 낳은 적이 있다”고 答했다.


△ 平澤 안정리에는 10餘 個의 클럽이 1960年代 以後 如前히 營業 中이다. 이웃, 家族 等으로부터 ‘洋색시’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傷處를 키워온 할머니들은 안정리를 떠나 새로운 삶을 始作할 돈도, 힘도, 勇氣도 없다.

아이를 낳은 할머니들 中 14名은 아이를 入養 보냈다. 황정숙 할머니는 “우리 아이는 黑人 混血이었어. 迂餘曲折 끝에 낳았는데 키울 길이 寞寞한 거야. 애를 포대기에 싸서 親庭 엄마한테 갔어. 근데 그때 나를 輕蔑하던 엄마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라고 했다. “내 엄마부터 그렇게 우리를 업수이보는데 世上은 오죽하겠어? 勇氣가 없어서 入養 보냈지.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거야.” 정은님(69) 할머니는 아이가 다 큰 中學校 때에야 入養 보냈다. “내가 끼고 살고 싶었어. 氣를 쓰고 키웠지. 근데 學校 生活이 問題였어. 아이들이 化粧室 갈 때마다 놀리니까 애가 化粧室을 못 가고 冊床에만 앉아 있었던 거야. 한겨울이었어. 學校 化粧室을 못 가서 바지에 오줌을 쌌나봐. 집에 왔는데 그 추운 겨울에, 글쎄, 바지가 꽁꽁 얼어가지고는…. 어떡해. (入養) 보내야지.” 周邊에서도 다 入養을 勸誘했다. 아이를 낳으면 펄벅財團이나 大韓社會福祉會 같은 곳에서 찾아와 “韓國에서 混血兒를 잘 키우기란 힘들다”라며 入養을 勸誘하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傷處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과 關係맺기를 힘들어한다. 最近 4年 안에 移徙를 한 17名의 할머니들 中 6名이 “住民과의 不和”로 移徙했다고 털어놓았다. 些少한 것들이 할머니들에겐 다 是非거리가 된다. 오달희(70·假名) 할머니는 “김치를 주는데 막 담은 김치를 안 주고 다 쉬어빠진 걸 찌개 해 먹으라고 주는 거야. 나를 無視하는 거야, 뭐야?”라며 먼젓番 집主人에 對해 한소리 했다. ‘버럭쟁이’인 이찬남(70·假名) 할머니는 이웃과 말할 때는 神經을 곤두세우는 탓에 眉間이 찌푸려진다. “只今은 덜하지만, 몇 年 前만 해도 사람들에게 洋색시인 거 티 안 내려고, 입에서 흘러나오는 英語 單語를 안 쓰려고 無盡藏 애썼어.”

國家가 책임지지 않는 사이…

1月8日 點心食事 자리에서도 食事를 準備 中인 奉仕者들에게 할머니들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한 奉仕者가 무를 썰다 하나 집어먹는 걸 보고는 이찬남 할머니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썰던 걸 지저분하게 주워먹으면 우리가 어떻게 먹어?” 結局 이 할머니는 이날 끝내 食事를 하지 않았다. 빵을 누가 더 많이 먹었는지, 稅制·洋襪 같은 記念品이 누구에게 더 많이 갔는지 等도 主要 關心 對象이자 紛爭의 씨앗이다. 5年째 햇살社會福祉會에서 奉仕活動을 하고 있는 尹아무개 奉仕者는 “할머니들이 傷處가 많아 自己가 더 以上 다치지 않기 위해 먼저 화내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尹氏는 “그래도 마음결은 곱고 宏壯히 純粹하다”고 덧붙였다.

할머니들을 被害者로만 바라보는 것은 基地村 女性을 부르는 單語 앞에 ‘陽’字를 붙이며 그들을 주변화한 것과 다르지 않다. 어떤 할머니들은 自發的으로 이 일을 選擇했고, 또 어떤 할머니들은 휩쓸려가기도 했다. 빠져나갈 機會가 있었음에도 익숙함에 기대어 그대로 남은 할머니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理由로 들어왔건 끝은 비슷했다. 할머니들에겐 ‘出口’가 없었다. 이들의 眞짜 이름은 “가난하고 힘없는 女性”이었다. 國歌는, 共同體는 이들에게 어떤 意味일까.

只今 할머니들의 자리는 필리핀 女性들이 채우고 있다. 안정애(49) 眞實和解를 위한 過去事整理委員會 調査官은 “國家가 謝罪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사이, 美軍基地 近處에서 國家와 軍隊와 家父長의 三角同盟에 따른 女性 搾取는 繼續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제의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오늘도 現在進行形이다.


그때 레인보우77을 안 먹었다면

서울로 돈 벌러 왔다가 基地村으로 들어선 최숙희 할머니 事緣

최숙희(66·假名) 할머니는 노래를 불렀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洞네 處女 바람났네….” 할머니가 안整理에 온 건 18살 때다. 忠淸道 수덕에서 農事짓고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서울 사는 조카가 내려와 “아지매, 뭐하러 이렇게 콩밭, 보리밭 매고 시골서 苦生해? 서울 가면 좋은 職場 많아. 서울 가서 돈 벌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해 서울에 올라왔다. 영등포, 鍾路 等의 手巾工場, 옷工場度 다녀보고 아기 보는 일, 남의 집 淸掃도 했지만 벌이는 시원찮았다.


어느 週末 親舊가 平澤에 아는 언니가 있다며 놀러가자고 할 때까지 할머니는 서울로 돈 벌러온 ‘少女家長’이었다. 처음 간 안整理에서 할머니의 삶은 길을 틀었다. “1960年이었어. 그때 안整理는 허허벌판이었어. 市內에 일곱 집만 있다고 住所도 ‘안정리 일곱집매’였어. 只今 집 있는 자리도 그때는 다 솔밭이었어. 근데 여섯 時가 되니까, 이 좁은 안정리 흙길이 美軍으로 꽉 차는 거야. 한 200名은 되는 것 같아. 신기하데. 얼굴이 하얗고, 눈은 퍼렇고, 코는 또 어찌나 큰지. 여기가 무슨 別世界 같았어.”

클럽에 앉아서 할머니는 주스 같은 술 레인보우77을 시켰다. 그때 갑자기 얼굴 하얀 서전(副士官)李 할머니에게 달러를 손에 쥐어줬다. “주스를 먹으면 내가 돈을 내야 하는데 도리어 나한테 돈을 주는 거야. 그래, 언니한테 물었지. 이거 받아도 되냐고. 근데 언니가 괜찮대. 안정리에선 元來 그렇게 하는 去來. 그래서 생각했지. ‘아, 여기는 가만히 있어도 돈이 벌리는 데구나. 이렇게 쉬운 方法도 있구나’라고.”

그러고서 崔 할머니는 仁川, 富平 等 當時 美軍基地를 돌아다녔다. 仁川에서 만난 美軍과의 사이에서 애도 낳았다. 애 아빠는 自己 나라로 훌쩍 돌아갔다. 애가 세 살 되던 해, 자고 일어났더니 富平에 있던 美軍基地도 싹 사라졌다. “正말 눈 깜짝할 새에 部隊가 移徙가버렸어. 어떡해, 애를 들쳐업고 東豆川, 議政府, 松炭을 다 다녔어. 근데 房값도 비싸고 美軍도 이제는 안 붙어. 그래 돌고 돌다 처음 왔던 안정리로 온 거야.”

안整理에 다시 온 때 서른하나. 할머니는 이제 한물간 ‘나이 든 색시’가 됐다. “어린애들 노는 데 나이 먹으니 낄 수가 없어. 낮에는 食堂에서 일했어. 저녁에 집에 와서 沐浴하고 化粧 싹 하고 돈 벌러 部隊로 갔어. 저녁 6時30分~7時에 部隊 앞에 가면 버스 세 臺가 서 있어. 將校클럽, 서전클럽, 卒兵클럽 各各 25名씩 끊어서, 部隊 안으로 들어가서 美軍이랑 놀 수 있었어. 돈 많은 有婦男이 있는 將校클럽은 어린애들 몫이고, 술 먹고 춤추고 놀기 좋은 卒兵클럽이 우리 몫이야. 그래도 어디야? 部隊 안에서 놀면 좀 점잖게 놀 수 있었어. 그렇게 마흔 돼서는 클럽 마담을 하고, 그렇게 하다가 只今이 됐네.”

할머니는 綠內障 때문에 손手巾으로 繼續 눈물을 찍어내며 이야기했다. 인터뷰 마지막 무렵에 할머니는 <앵두나무 처녀="">를 다시 읊조렸다. “서울이란 妖術쟁이 찾아갈 곳 못 되드라~ 새빨간 그 입술에 웃음짓는 에레나野. 헛苦生을 말고서 故鄕에 가자.” 그때 그 레인보우77을 먹지 않았더라면 할머니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그때 美軍이 없었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