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열記念非 20150609
이 記念碑는 1987年 6月 軍部獨裁에 맞서 民主化 示威를 하던 中 催淚彈에 맞아 産兒한 李韓烈을 記念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1988年 9月 14日 세워져 한열동産을 27年間 默默히 지켜온 옛 追慕碑가 歲月의 무게에 損傷되어, 여러분의 뜻을 모아 2015年 6月 9日 다시 세웠진 것입니다. 198769757922는 한 젊은이의 짧은 삶에서 안타깝던 31日間의 記錄이며 또한 韓國 民主主義 歷史에 있어 가장 劇的인 時間과 重疊되어
있습니다. 그는 87年 6月 民主抗爭과 오늘을 이어주는 通路입니다.
이 記念碑는 個人에 對한 追慕를 넘어 韓國의 民主主義를 進一步시켰던 그때의 熱望과 獻身, 그리고 犧牲에 對한 우리들의 記憶이자 省察입니다.
큰 바위 같았으면 좋겠다.
나지막한 언덕 위
특별한 搜査나 꾸밈없이
덤덤하게
하지만 듬직하고 힘 있게
그렇게 있어줬으면 좋겠다.
87年, 美洲注意를 進一步시켰던 熱望과
갑자기 떠나야 했던 아타까움 숨기지도 않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리고 그 모습
穩全히 간직한 채
거기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1987
1987年, 韓國 民主化運動의 分水嶺을 이룬 ‘87年 6月 民主抗爭’이 일어났다. 全國에서 500餘 萬 名의 市民들이 거리로 나와 獨裁打倒와 直選制 爭取를 외쳤다. 軍事政權의 暴壓에 수많은 犧牲이 따랐지만 結局 市民의 힘으로 大統領 直選制를 위한 改憲 等 여덟 가지 約束을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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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月 9日, 연세대학교에서 ‘6·10 出廷을 爲한 年歲인 決意 大會’가 열렸다. 다음날 있을 ‘박종철 拷問致死 造作, 隱蔽 糾彈 및 護憲 撤廢 國民大會’ 出征을 準備하는 集會였다. 校門 밖에서 示威를 하던 當時 延世大學校 經營學科 2學年 李韓烈은 사람을 向해 낮게 쏜 催淚彈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學友들은 그를 急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意識不明 狀態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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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 5日 이른 새벽, 27日 동안 死境을 헤매던 그는 市民들의 懇切한 바람에도 끝내 意識을 回復하지 못하고 酸素마스크를 쓴 채 世上을 떠났다. 剖檢 結果 催淚彈 被擊이 直接的인 死亡 原因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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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月 9日, 市民들은 6月 抗爭의 起爆劑가 되었던 그의 犧牲을 哀悼하며 ‘愛國學生 故 이한열 烈士 民主國民葬’으로 葬禮式을 擧行했다. 全國的으로 160餘 萬 名이 參與한 追慕 속에 延世大學校 本館을 出發한 李韓烈은 신촌 로터리와 서울市廳 앞을 거쳐 故鄕인 光州 망월동 墓域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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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作家 이경복
이한열 烈士가 전두환 獨裁 權力에 依해 목숨을 빼앗기고 그 이듬해인 1988年, 烈士가 외쳤던 民族 民主 民生의 精神을 이어받고 烈士의 崇高한 犧牲을 기리기 위해 延世 동산 한 모서리에 세워져 한열동産을 27年間 默默히 지켰습니다. 해마다 6月 9日 追慕碑 앞에서 追慕의 밤을 進行해왔습니다.
여기 統一 念願 43年 6月 9日
本校 正門에서 民主化를 부르짖다 催淚彈에 쓰러진 李韓烈님을 追慕하고자 碑를 세운다.
作家 김봉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