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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記念事業會

平日 10時~17時

02) 325-7216

後援計座(宸翰) 100-028-371614 (寺)이한열記念
事業會


紹介와 沿革

  • 記念事業會 紹介
  • 記念碑
  • 銅版

紹介

安寧하세요? 이한열記念事業會에 홈페이지를 訪問해주신 여러분을 歡迎합니다.

李韓烈은 1987年 6月 9日 示威에 參與했다가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는 延世大學校 經營學科 86學番으로, 27日間 세브란스 重患者室에서 死境을 헤매다 7月 5日 世上과 離別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1987年 8月 ‘故 이한열 烈士 追慕事業會(會長 오충일)’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1989年 6月 ‘이한열 追慕事業會(理事長 성내운)’로 名稱을 바꿨습니다. 이한열 追慕事業會는 追慕 寫眞集을 發刊하고, 追慕碑를 연세대학교 學生會館 옆 동산에 세웠습니다. 또한 그의 日記와 便紙 等을 모아 追慕 文集을 發行하였습니다.

2008年 그를 記憶하는 몇몇이 모여 李韓烈奬學會를 만들었습니다. 李韓烈奬學會를 基盤으로 2010年 社團法人 이한열記念事業會가 出帆합니다.
이한열記念事業會는 設立 以後 李韓烈奬學會의 뜻을 이어 2023年 2月 現在 283名의 學生에게 4億 원의 奬學金을 支給하였습니다.
2022年부터 靑年活動家들을 支援하는 ‘李韓烈소셜펠로우쉽’ 事業을 進行하고 있습니다. 2013年부터 2015年까지 ‘이한열 漫畫賞’을 主催하고, 2013年부터 2018年까지 延世大學校 校誌인 《연세》紙와 함께 ‘李韓烈文學賞’도 共同으로 主催했습니다.
每月 600 餘 名의 後援會員들이 1萬 假量의 後援金을 모아주셔서 만들어낸 成果입니다.
이한열記念事業會는 每해 6月 9日 李韓烈 追悼式과 7月 5日 光州 망월동 그의 墓所에서 追慕 行事를 進行합니다.

2004年 國家로부터 받은 賠償金을 家族이 내놓아 마련한 터에 모금을 더해 李韓烈記念館을 세웠습니다. 이곳에서는 이한열의 遺品과 87年 6月抗爭 關聯 資料들을 展示하고 있습니다.

每해 6月이면 6月 民主抗爭을 記憶하는 展示를 開催하고, 2015年부터 2021年까지 ‘보고 싶은 얼굴’展을 통해 다른 烈士들도 記憶하고자 했습니다. 2023年에는 이태원慘事追慕展示를 進行하고 있습니다.

걸어온 길

  1. 2024 . 2 . 禹相虎 理事長 就任
  2. 2023 . 12 . 李韓烈소셜펠로우 事業 始作
  3. 2021 . 2 . 한동건 理事長 就任
  4. 2019 . 2 . 강성구 理事長 就任
  5. 2018 . 11 . 第1回 李韓烈學術祭 開催 以後 每해 開催
  6. 2017 . 6 . 30周忌 追悼式 및 市廳廣場 ‘이한열 文化祭’
  7. 2016 . 6 . 李韓烈 被擊地點 銅版 除幕
  8. 2016 . 2 . 記念碑 圖錄 發刊
  9. 2015 . 10 . 《보고 싶은 얼굴》展 開催 以後 每해 開催
  10. 2015 . 6 . 이한열記念非 再建立
  11. 2014 . 1 . 新村 靑春 文化祭 進行
  12. 2011 . 2 . (寺) 이한열記念事業會 創立式
  13. 2010 . 12 . (寺)이한열記念事業會(理事長 김학민) 行安部 承認
  14. 2010 . 6 . (寺) 이한열記念事業會 準備委員會 結成(準備委員長 김학민)
  15. 2009 . 3 . 第 1回 李韓烈奬學金 授與 以後 年 2回 奬學金 授與 中
  16. 2008 . 7 . 李韓烈 奬學會 始作
  17. 2005 . 6 . 李韓烈 記念館 開館
  18. 1989 . 11 . 追慕文集 『이한열, 六月하늘의 喊聲이여』 發刊
  19. 1988 . 9 . 이한열 烈士 追慕碑 建立 李韓烈 동산 造成
  20. 1988 . 6 . 이한열 追慕事業會 結成(理事長 성내운)
  21. 1987 . 11 . 故 이한열 烈士 追慕事業會(會長 오충일) 結成
  • 每해 6.9題 追慕의 밤 進行
  • 每해 7.5 追悼式 進行

이한열記念非 20150609

이 記念碑는 1987年 6月 軍部獨裁에 맞서 民主化 示威를 하던 中 催淚彈에 맞아 産兒한 李韓烈을 記念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1988年 9月 14日 세워져 한열동産을 27年間 默默히 지켜온 옛 追慕碑가 歲月의 무게에 損傷되어, 여러분의 뜻을 모아 2015年 6月 9日 다시 세웠진 것입니다. 198769757922는 한 젊은이의 짧은 삶에서 안타깝던 31日間의 記錄이며 또한 韓國 民主主義 歷史에 있어 가장 劇的인 時間과 重疊되어
있습니다. 그는 87年 6月 民主抗爭과 오늘을 이어주는 通路입니다.
이 記念碑는 個人에 對한 追慕를 넘어 韓國의 民主主義를 進一步시켰던 그때의 熱望과 獻身, 그리고 犧牲에 對한 우리들의 記憶이자 省察입니다.

큰 바위 같았으면 좋겠다.
나지막한 언덕 위
특별한 搜査나 꾸밈없이
덤덤하게
하지만 듬직하고 힘 있게
그렇게 있어줬으면 좋겠다.
87年, 美洲注意를 進一步시켰던 熱望과
갑자기 떠나야 했던 아타까움 숨기지도 않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리고 그 모습
穩全히 간직한 채
거기 그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1987
1987年, 韓國 民主化運動의 分水嶺을 이룬 ‘87年 6月 民主抗爭’이 일어났다. 全國에서 500餘 萬 名의 市民들이 거리로 나와 獨裁打倒와 直選制 爭取를 외쳤다. 軍事政權의 暴壓에 수많은 犧牲이 따랐지만 結局 市民의 힘으로 大統領 直選制를 위한 改憲 等 여덟 가지 約束을 받아냈다.

69
6月 9日, 연세대학교에서 ‘6·10 出廷을 爲한 年歲인 決意 大會’가 열렸다. 다음날 있을 ‘박종철 拷問致死 造作, 隱蔽 糾彈 및 護憲 撤廢 國民大會’ 出征을 準備하는 集會였다. 校門 밖에서 示威를 하던 當時 延世大學校 經營學科 2學年 李韓烈은 사람을 向해 낮게 쏜 催淚彈에 뒷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學友들은 그를 急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意識不明 狀態에 빠졌다.

75
7月 5日 이른 새벽, 27日 동안 死境을 헤매던 그는 市民들의 懇切한 바람에도 끝내 意識을 回復하지 못하고 酸素마스크를 쓴 채 世上을 떠났다. 剖檢 結果 催淚彈 被擊이 直接的인 死亡 原因으로 밝혀졌다.

79
7月 9日, 市民들은 6月 抗爭의 起爆劑가 되었던 그의 犧牲을 哀悼하며 ‘愛國學生 故 이한열 烈士 民主國民葬’으로 葬禮式을 擧行했다. 全國的으로 160餘 萬 名이 參與한 追慕 속에 延世大學校 本館을 出發한 李韓烈은 신촌 로터리와 서울市廳 앞을 거쳐 故鄕인 光州 망월동 墓域에 묻혔다.

22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두 살이었다.

作家 이경복

高李韓烈烈士追慕碑 19880914

이한열 烈士가 전두환 獨裁 權力에 依해 목숨을 빼앗기고 그 이듬해인 1988年, 烈士가 외쳤던 民族 民主 民生의 精神을 이어받고 烈士의 崇高한 犧牲을 기리기 위해 延世 동산 한 모서리에 세워져 한열동産을 27年間 默默히 지켰습니다. 해마다 6月 9日 追慕碑 앞에서 追慕의 밤을 進行해왔습니다.

여기 統一 念願 43年 6月 9日
本校 正門에서 民主化를 부르짖다 催淚彈에 쓰러진 李韓烈님을 追慕하고자 碑를 세운다.

作家 김봉준

李韓烈 被擊地點 銅版

延世大學校 正門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서 두 番째 기둥 앞 바닥에는 銅板이 하나 있습니다.
1987年 6月 9日 示威에 參與했다가 警察이 쏜 催淚彈에 맞아 쓰러진 李韓烈을 기리는 銅板입니다. 다음 글과 함께 薔薇 한송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가 病院에 있을 때 그의 蘇生을 빌며 親舊가 그려준 薔薇입니다.

“1987年 6月 9日 午後 5時
當時 연세대 2學年이었던
이한열 烈士가
催淚彈을 맞고 쓰러진 이곳,
六月民主抗爭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2016年 6月 9日
이한열記念事業會
延世大學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