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萬歲 運動
(六十萬歲運動)은
日帝强占期
時期 學生을 中心으로 하여 일어난
獨立運動
이다.
純宗
의 因山일(因山日)인 1926年 6月 10日에 일어났기 때문에 6·10 萬歲 運動으로 命名되었다. 1926年이
干支
로
丙寅
年이므로
丙寅萬歲運動
(丙寅萬歲運動)으로 불리기도 한다.
[1]
6·10 萬歲 運動
|
---|
|
6月 10日 群衆의 萬歲 運動을 日本 軍警이 鎭壓하려 하고 있다.
|
날짜
| 1926年 6月 10日
|
---|
地域
| 서울을 비롯한 韓半島
|
---|
原因
| 日帝의 植民 支配
|
---|
種類
| 同盟休學, 示威, 罷業,
|
---|
結果
| 示威 失敗
|
---|
|
|
|
|
6·10 萬歲 運動은
3·1 運動
을 잇는 全國的·前
民衆
敵人
抗日運動
으로, 事前에 緻密하게 準備되었다. 그러나
一齊
는 3·1 運動의 前轍을 밟지 않기 위하여 徹底한 警戒 態勢를 갖추었고,
京城府
에는 7000餘 名의 陸·海軍을 집결시켰다. 主動者는 2次
朝鮮共産黨
수 강달영,
社會主義
系의
權五卨
,
김단야
,
이지탁
, 印刷職工
민영식
,
이민재
,
연희전문
의
이병립
,
박하균
,
중앙고보
의
이현상
,
경성대학
의
이천진
,
天道敎
의
박내원
,
권동진
等으로, 이들은 10萬 張에 達하는
檄文
을 準備하고, 午前 8時 30分頃 順從의
賞與
가
鍾路
를 지날 때 一齊히 萬歲를 부르고 檄文을 撒布,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呼應했다.
檄文의 內容은 "日本 帝國主義 打倒," "土地는 農民에게," "8時間 勞動制 採擇," "우리의 敎育은 우리들 손에" 等이었다. 6月 10日 純種의
因山
에 參加한 學生은 2萬 4000餘 名이었다. 群衆의 呼應으로 示威가 擴大되었으나 組織 사이의 紐帶 缺如와 民族陣營의 組織弱化, 勞總界 社會主義系列의 事前逮捕 等으로 日本 警察에 沮止당하여 곧 失敗하였다.
이 事件으로 千餘 名이 逮捕, 投獄되었으며, 第2次
考慮共産靑年會
責任祕書 權五卨을 비롯한 多數의 共産黨員이 逮捕됨으로써 第2次
朝鮮共産黨
이 무너지는 結果를 가져왔다. 또한 1927年
新幹會
·
槿友會
·
신정회
·
연정회
等의 朝鮮人 社會團體 組織과
1929年
11月
의
光州 學生 抗日 運動
에도 影響을 끼쳤다.
이때
송진우
는
정인보
(鄭寅普)와 함께
順從의
'遺勅' 僞作(遺勅僞作)을 劃策하였다가 發覺되어 이루지 못하였다.
[2]
그들은 곧 6·10 萬歲 運動을 背後에서 操縱한 嫌疑로 鍾路 警察署에 불려가 審問을 받았다. 한便 收監된
박헌영
亦是 背後 操縱 嫌疑로 拷問을 當했으나, 關聯이 있다는 根據는 찾아내지 못했다.
그해 11月 宋鎭禹는 3·1運動 7周年 記念辭 關聯 抗訴에서 敗訴하고 곧
西大門刑務所
에 收監되었다.
[2]
이어 11月 ‘國際農民本部記念辭’ 事件으로 懲役 6月型이 確定되어 服役하였다가 1927年 2月
日本
新任 天皇
히로히토
卽位記念 特赦로 出獄하였다.
[2]
같이 보기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