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年
5月 16日
새벽 朴正熙 少將이 議長으로 推戴된
軍事革命委員會
를 構成해 全權을 掌握하고, 革命의 成功과 老産 李殷相 先生이 作成한 革命宣言文科 6個項의 '革命公約을 라디오를 통해 發表하였다.
第2共和國 當時는 議員內閣制이었던 狀況에서 憲法上의 國政·國軍 統率權은 國務總理인
場面
에게 있었다. 그는
장도영
의 電話를 받고 새벽 4時頃 美國 大使館으로 向해 軍事 勢力을 鎭壓을 하려고 했지만 職員이 不在中이서 들어갈 수 없었고 카르멜 修道院으로 避身하여 數次例 美國에 事態 鎭壓을 要請했다.
[10]
5月 18日
, 朴正熙는
유원식
을 데리고 靑瓦臺로 찾아갔다. 그러나
윤보선
大統領은 쿠데타軍을 鎭壓하기보다, '올 것이 왔다.'며 諦念하는 態度를 取하였다.
[
出處 必要
]
5月 20日
에는
軍事革命委員會
가
國家再建最高會議
로 改編되고
장도영
을 憲法에는 없는 "內閣首班"으로 임명하였다.
政變 初期에
美8軍 司令官
C. B. 매그루더, 野戰司令官
이한림
等의 反對로 暫時 難關에 부딪히기도 하였으나 美 政府의 迅速한 支持 意思 表明,
場面
內閣의 總辭退, 大統領
윤보선
의 默認 等에 依하여 成功했다.
尹潽善 大統領은 國軍 統帥權者이며 國家元首임에도 不拘하고 正統性을 지닌 合法 政府를 守護하지 않았다.
[11]
接見室에서
朴正熙
,
道營
等 쿠데타 主謀者를 만난 尹潽善 大統領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혼자 하는 말이었지만 소리가 워낙 커 다른 사람들도 그 말을 들었다고 한다.
[12]
國防部
長官
현석호
를 비롯한 各 部署의 長官, 次官, 處長級 人士들이 줄줄이 家宅에서 逮捕되거나 連行되는 形式으로
靑瓦臺
에 끌려왔다. 이때
民主黨
新派의 閣僚인
정일형
,
현석호
等은
윤보선
의 發言을 듣고 驚愕한다.
현석호
는 回顧錄에서
윤보선
은 이 말에 이어 "나라를 求하는 길은 이 길밖에 없었다."면서
場面
政府에 非難을 퍼붓고
朴正熙
의 擧事에 讚辭를 보냈다고 했다.
[12]
軍部에 依해 靑瓦臺로 온
현석호
는
윤보선
의 이 發言을 가리켜 '한 마디 平生토록 잊지 못할 말을 했다.'고 陳述했다.
[13]
1962年
3月 22日
大統領
윤보선
은
午後
8時 30分 放送을 통해 下野聲明을 發表하였다.
[14]
今番 軍事쿠테타가 發生하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貴重한 人命의 犧牲이 없기를 바랐으며 順調롭게 收拾되기를 希望하였습니다. 多幸히 하늘은 우리를 도와서 無事하게 이 나라의 일을
軍事革命委員會
의 사람들이 맡아서 보게 하였으며 國民 여러분이 또한 커다란 期待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只今 安心하고 이 자리를 물러나겠습니다. 아무쪼록
軍事革命委員會
의 사람들은 그 所信과 忠誠을 다하여 이 나라를 발전시키고 이 國民을 하루速히 窮乏에서 건져내 주기를 바라며 나의 親愛하는 國民 여러분이 積極的으로 이에 協助해주실 것을 懇曲히 付託하는 바입니다.
[14]
[15]
윤보선
의 辭任發表가 있자 軍政 側은 그의 辭退를 挽留하였다.
5月 19日
밤
朴正熙
와
장도영
이
靑瓦臺
를 찾아와
윤보선
의 辭任을 挽留했다.
[16]
그러나 그 挽留는 시늉이었다.
장도영
에겐
윤보선
이 좀 더 必要했던 것 같으나,
朴正熙
는
윤보선
의 辭任을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16]
이때 辭任를 固辭한 일로 後日 민주당 新派 系列에서는 그가 軍事政權에 協力했거나 內通, 또는 買收했다며 攻擊하였다.
5月 20日
上午
外務部 次官
김용식
이 尹潽善에게 "唯一한 憲法機關인
大統領
의 이 時點에서의 下野는 國際法上 새 政府의 承認問題를 複雜하게 할 憂慮가 있다.
[16]
"라고 說明했다.
김용식
은 이 點을
朴正熙
에게도 說明했다.
5月 20日
午後
2時 윤보선,
朴正熙
,
장도영
,
김용식
4者 會談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
은 다시 "萬一 閣下가 辭任한 뒤 以北이 南侵하면 外國과
유엔
에 呼訴하려 해도
大韓民國
을 代表하여 呼訴할 機關이 없다.
[16]
"며 辭任再考를 要請했다. 再考 要請에
朴正熙
와
장도영
,
美國
의 挽留도 있었다.
[16]
[17]
[18]
結局
윤보선
은 當日
午後
6時 豫定돼 있던 告別會見 代身 "
國家再建最高會議
에서 下野하겠다는 나의 決定이 國際的, 國內的으로 影響이 크다 하므로 나라 일을 해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萬不得已 이 나라 形便을 생각하여 飜意해야 할 것 같다.
[16]
[17]
[18]
"며 下野를 飜覆, 番의 會見을 하였다.
1961年
6月 6日
國家再建最高會議
와
顯忠日
行事에 參席하였다.
5月 16日 革命委員會 布告 第4號로써 民議員, 參議院 및 地方議員 等 代議員 憲法機關은 解散되었고 5月 22日
國家再建最高會議
布告 第6號
[19]
政黨 및 社會團體는 解散되어 政治活動이 完全히 禁止되었다. 따라서 民主的으로 選出된 場面 內閣은 崩壞되었고
國家再建最高會議
에 依한 約 3年間의 軍政統治가 이루어졌다. 軍政期間 中 政變勢力은 特需犯罪處罰法, 政治活動淨化法 等의 法的 措置를 통하여 政治的 反對勢力과 軍部 內의 反對派까지 除去하였다. 또한 核心權力機構로서
中央情報部
를 設置하고 1963年에는 朴正熙 大統領 權限代行이 初代 總裁로 있는
民主공화당
을 創黨해 大統領制 復歸 等을 骨子로 하는 憲法改正을 하였다. 1961年 8月 17日에는 首都師團이
首都防衛司令部
가 되고, 그 해 10月 2日에는 出國과 入國 管理 機關의 職制가
外務部
에서
法務部
로 바뀐다.
[20]
1962年 6月 16日 朴正熙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이 內閣首班 職을 兼任하게 된다.
[21]
朴正熙가
4·19 革命
으로 下野한 李承晩의 歸國을 막았다는 것이 旣存의 認識이며 通說이었으나,
[22]
[23]
그와 相反되게 1962年 11月 朴正熙 大統領 權限 代行은 中央情報部 金鍾泌 部長이
李承晩
에게 巨金 2萬달러를 直接 傳達토록 한다.
[24]
5·16 軍事政變으로 執權한 議長 朴正熙는
1963年
大統領 選擧에 出馬하여 現職 大統領이었던
윤보선
을 물리치고 第5代 大統領에 就任하였다. 以後, 朴正熙는 6代 大統領 選擧에서도
윤보선
을 물리치고 勝利했다.
正軍運動의 暴動鎭壓 奉化作戰 逆利用 封鎖
編輯
1961年
5月 12日 檢察總長 이태희가 서울地區 防諜隊長室에서 國防長官이나 參謀總長의 許諾이 必要한 朴正熙 將軍의 逮捕를 제촉하며 成火를 부렸으나, 參謀總長 公館의 장도영 陸軍參謀總長은 조금더 살펴보겠다고 答한다.
[25]
김덕승氏가 5·16 直前 擧事 資金을 確保하려다 檢察에 逮捕된다.
[26]
5月 15日 저녁 7時 30分 30豫備師團 師團長을 강금하高 10時에 出動 待機 새벽 2時에 쿠데타軍으로 出動하게 되어 있던 計劃이 30師團 師團長에게 漏泄된다.
[27]
報告를 傳해 들은 서울地區防諜隊의 장도영 陸軍參謀總長은 朴正熙 少將에게 尾行팀을 붙인다.
[25]
陸軍本部 憲兵監室에서 鎭壓軍 6管區 司令官은 鎭壓軍 側으로 誤解하며 叛亂軍 側의 6管區 司令部 參謀長室에 있던 參謀長
김재춘
大領에게 電話 通話로 司令部에 곧 到着하게 되는 陸軍本部 憲兵 中隊의 指揮權을 委任한다. 9時 30分 쯔陰 自宅을 나서던 朴正熙 少將에게 擧事 本部로 定해놓은 6管區 司令部의 參謀長은 30師團 밀고, 33師團 出動 不能, 陸軍本部 憲兵隊의 6管區 司令部에 配置 事實을 電話로 報告한다.
[28]
밤 10時頃 15犯罪搜査 大將은 叛亂軍은 卽刻 射殺하라는 命令을 받고, 30師團長과 同行하여 방자명 憲兵 中領의 非常召集韓
窓
看病 兵力으로 30師團에 叛亂을 鎭壓하려 간다.
[27]
完全히 隔離되어 버린 6管區 司令部에 陸軍本部 搜査隊
編輯
6管區 司令部에서 到着한 憲兵車감 이광선 大領과 同行한 정명환 508防諜隊長은
[29]
司令官室에만 있게 된다.
[30]
밤 11時頃 鎭壓軍 側 6管區 司令官으로부터 指揮權을 넘겨받은 叛亂軍의 中心勢力인 領內에 到着한 6官府 司令部 參謀長 김재춘 大領은,
[30]
陸軍本部로부터 憲兵車감 이광선 大領이 이끌고 온 11憲兵中隊를 6管區 司令部 領內의 祭祀 倉庫 안에서 모두 待機하도록 시킨다.
[29]
叛亂軍 6管區 作戰參謀 박원빈 中領도 6管區 司令部 出入門 3個를 6管區 10警備中隊로 完全히 封鎖한다.
[30]
밤 10時까지 6管區 司令部로 가게 되어 있었지만 自宅을 떠나서는 술자리를 가진 朴正熙 所長 一行이,
[28]
6管區 司令部 쪽으로 漢江 人道橋를 건널 때에도 뒤따르던 尾行팀에게 陸軍參謀總長은 逮捕 命令을 내리지 않는다.
[25]
5月 16日
叛亂軍 30師團의 出動은 完全히 沮止되고, 30師團에서는 다시 鎭壓軍 4個 小隊만 編成하여 出動 대기시킨다.
[27]
새벽 0時 15分頃 6管區 司令部는 叛亂軍의 指揮所인데,
[26]
朴正熙는 6管區 司令部 正門을 通過하고 6管區 司令部 參謀長室에 叛亂軍 側 將校 20餘名이 모인다.
[31]
空輸團 出動을 爲해서 6管區 司令部에서 支援한 車輛들이 空輸團에 늦게 到着하였으나, 空輸團의 逮捕組를 이끌기로 했던 領官級 將校들이 제때에 오지 않아서 空輸團 出動이 遲延된다.
[26]
새벽 2時 朴正熙는 空輸團 出動을 督勵하기 위해서 6管區 司令部를 떠난다.
[31]
6管區 參謀長은 陸軍 參謀總長에게 6管區 司令部의 狀況이 鎭靜되었다고 虛僞 報告를 한다.
[26]
오기로 했던 領官級 將校들 中에서 박종규 少領만이 空輸團 到着하니,
[26]
空輸團에 到着한 朴正熙에게 空輸團長 박치옥 大領은 案內 將校가 오지 않는다고 따진다.
[31]
空輸團의 出動을 督勵하고,
[31]
金浦 海兵旅團으로 떠난 朴正熙는 鹽倉校 附近에서 出動해서 트럭에 分乘한 海兵旅團을 만난다.
[31]
朴正熙의 車는 海兵隊를 뒤따르고 空輸團 6管區 트럭은 海兵隊 뒤에 따라 붙는다.
[31]
새벽 3時 20分頃
[32]
같은 時刻 重火器는 없었으나 카빈 小銃으로만 武裝한 7憲兵 中隊 50名의 憲兵들에 漢江 人道橋의 防禦線이 强力해서 海兵隊 病歷만으로 突破를 못한다.
[27]
새벽 3時 30分頃
[26]
海兵隊와 空輸團 漢江인도교 南端에 到着한 時刻에
[31]
第6軍團 4個 砲兵隊는 아무런 制止를 받지 않고 陸軍本部를 接受한다.
[33]
한강인도교에서 海兵隊와 憲兵 間에 熾烈한 交戰이 벌어지고 있을 때, 該當 地域을 擔當하던
용산警察署
는 銃聲을 單純 誤發 事故로 생각했다.
[34]
銃소리가 繼續되자 市民들의 問議 電話가 殺到했으나 銃聲의 震源地를 把握할 수 없었다.
[34]
새벽 3時 40分쯤 용산警察署에 北漢江派出所로부터 海兵들이 陸軍 憲兵들과 衝突하여 人道橋를 匍匐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急報가 들어왔다.
[34]
새벽 3時 50分頃 睡眠 中 流彈을 맞고 負傷을 當한 한 住民이 용산警察署에 실려오자 그제야 事態의 深刻性을 깨달았다.
[34]
새벽 4時 1野戰軍 司令部에 非常 召集 會議에서는 6軍團 砲兵司令部 문재준 大領의 쿠데타 加擔을 報告 받는다.
[27]
海兵隊의 연이은 反擊으로 誤認할만 放心과 敗退
編輯
해는 뜨지 않았으나 하늘은 검고 땅 쪽엔 밝은 狀況에서 空輸部隊張은 이 作戰은 失敗한거 같습니다라며 危險해진 朴正熙 2野戰軍 副司令官을 漢江 人道橋의 다리 橋脚 뒤로 숨긴다.
[27]
그리고 朴正熙가 空輸團에게 協助를 求했고 海兵隊를 뒤따르던 空輸團 兵力이 作戰에 나선다.
[27]
새벽 4時 15分
[31]
다리 한쪽은 空輸團, 한쪽은 海兵隊로 兵力을 다시 編成해서 나아가며 憲兵 防禦線을 擊破한다.
[27]
이 交戰에서 憲兵 3名, 海兵 6名이 負傷을 입는다.
[31]
海兵隊가 용산警察署로 들이닥칠 때까지 용산서 關係者들은 上部로부터 아무런 指示도 받지 못했다.
[27]
새벽 4時25分頃 場面 總理의 宿所
반도 호텔
에서 總理를 逮捕하려던 朴正熙 2野戰軍 副司令官의 副官이 이끌던 空輸團 逮捕組에서 發砲가 일어난다.
[35]
鎭壓軍 30師團 4個 小隊는 陸軍本部를 向했으나, 市內에서 叛亂軍 空輸團으로부터 叛亂軍 30師團의 占領地는 陸軍本部가 아니라며 沮止를 當한다.
[27]
그 卽時 小隊들을 引率하던 防諜隊는 沮止를 하던 空輸團에게 陸軍參謀總長에게 連絡을 해봐라고 하지만, 30師團이 陸軍本部로 오도록 命令한 陸軍參謀總長은 電話 連絡이 되질 않는다.
[27]
陸軍參謀總長은 30師團長에게 4個 小隊를 이끌고 오라는 命令을 내린 것만으로 充分하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電話하기가 바빠서 副官에게 이 電話를 받지 못하겠다고 答해버린다.
[27]
1野戰 司令部 鎭壓軍과 2野戰 司令部 副司令官 叛亂軍
編輯
5月 16日
새벽 4時 30分 叛亂軍 30師團이 占領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遲滯되던 南山KBS에 朴正熙가 漢江을 건너 直行하여 到着한다.
[31]
새벽 4時 40分 朴正熙는 KBS를 떠나 안국동 光明印刷所로 革命公約을 가지러 떠나고 새벽 5時 直前 KBS로 돌아온다.
[31]
새벽 5時
[27]
反共·美國과의 同盟强化·舊惡一掃·經濟再建 等을 公約으로 2野戰軍 副司令官 朴正熙는 5·16 軍士 政變에 參與하여
第2共和國
場面
內閣을 威脅한다.
라디오 放送
으로 6個 抗議 ‘
革命公約
’을 發表하고, 非常
戒嚴令
을 宣布했다.
[36]
午前 9時 1野戰軍 司令官 이한림 中將은 새벽 4時에 不在中이던 6軍團 作戰 參謀를 解任하고, 麾下 6軍團長에게 叛亂軍에 加擔한 砲兵部隊의 撤收와 6軍團 全 部隊에 非常令 下達을 命令한다.
[27]
午後 4時 非常令에 依한 6軍團長 作戰 命令展 第186號를 下達받은 8師團은 師團 作戰課에서 部隊 狀況을 點檢하고, 21聯隊에 出動 準備 命令을 내린다. 홍제동 附近으로 21連帶만을 이동시키거나 21聯隊와 16連帶를 함께 移動 시키는 計劃도 세워본다.
[27]
府民館
文書를 參考하십시오.
5月 16日
直後
朴正熙
는 革命 初期 狀況이 流動的일 때 革命 主體들에게는 든든한 依支處였고 反革命勢力들에게는 두려움의 對象이었다고 致賀한
空輸特戰團
을
德壽宮
에 駐屯시킨다.
[26]
軍事革命委員會
가 設置되면서
장도영
李 議長에 選任되고 朴正熙는 副議長에 就任하였다.
5月 16日
밤 9時 8師團의 非常 出動 準備는 끝나고 上部로부터 出動 命令만을 기다리기 始作한다.
[27]
5月 17日 軍事革命委員會 副議長 朴正熙 所長은 陸軍防諜部隊長 李哲熙 准將에게 陸軍本部에서 軍 搜査機關을 動員해서 容共分子를 索出하라고 指示하여, 李哲熙 准將은 '危險人物 豫備檢束計劃'을 立案하여 戒嚴司令官 等에게 報告하고 承認을 얻는다.
[37]
鎭壓軍 出動에 反對되는 抛棄를 說得한 連絡責
編輯
5月 18日
쿠데타 發生 以後로 生徒들의 外出도 禁止시키던 陸軍士官學校長은 陸軍本部 會議室에 鋼琴을 當하다시피 하고
士官生徒
들은 모두 强制로 트럭에 태워져서 서울대학교 學軍團 敎官
全斗煥
大尉가 앞장서며 東大門에서
國會
앞(現在의 서울市廳 앞)을 지나는 詩가 行進을 하였다.
[38]
쿠데타 後半에 著名한 軍人은 아니었던 朴正熙가 代表者로 나타났다는 理由 等으로 쿠데타가 軍部로부터 거의 沮止를 當했던 狀況이었으나, 이 퍼레이드는 쿠데타가 軍部에 支持를 充分히 받고 있는 것으로 誤解하게 만들었다.
[39]
1軍司令部 隸下 鎭壓軍 出動 命令書 쪽紙를 받아오는 役割이던 경향신문社長 한창우氏가 總理를 몰래 만났으나, 自身의 役割과 다르게 陸士生徒 行進을 根據로 들면서 鎭壓이 아닌 投降을 强하게 回游한다.
[38]
革命이 發生하자
場面
總理는
가르멜 修道院
에 避身하여 숨어 있었는데 이 날 나와
內閣
總辭退 및
下野
를 宣言한다.
[27]
鎭壓軍으로 出動하려던 江原道 원주시 1野戰軍 司令官은 朴正熙 親衛組織으로써 尉官級 將校로 構成된 空輸團 GD팀에 連行되어 와서 德壽宮에 鋼琴된다.
[38]
野戰軍度 革命을 支持한다며
5師團
兵力도 서울에 進駐하여 革命의 終止符를 찍는다.
[26]
5月 19日 '危險人物 豫備檢束計劃'에 이어서 장도영 戒嚴司令官은 布告令 18號를 發表하여, 全國的으로 軍과 警察이 反國家團體에 讚揚, 同調가 憂慮되는 對象者들을 逮捕하여 拘禁 한다.
[37]
5月 20日
장도영
이 內閣首班이 되면서
朴正熙
는
軍事革命委員會
議長에 就任하여 革命委員會를
國家再建最高會議
로 改編한다.
中央情報硏究委員會
를 廢止하며 國家再建最高會議 傘下로
中央情報部
를 設立하고
金鍾泌
情報部長이 就任한다. 이 中央情報部는 陸軍 諜報部隊, 防諜部隊 等에서 基幹要員을 差出해 가며 陸軍防諜部隊에 强力한 競爭者로 登場한다.
[25]
5月 26日 國家再建最高會議는
유엔軍司令部
와의 合意下에 前方으로부터 5個 憲兵 中隊를 配屬 받는다.
[40]
國家再建最高會議
는 5·16 軍士政變 以後 政變 主導勢力이 5月 18日에
軍事革命委員會
를 改編해 만든 統治機構이다.
立法
·
司法
·
行政
3卷을 掌握한 最高統治機構였으며
1963年
12月 17日
第3共和國
이 樹立되면서 解體되었다.
政變 當時 수많은 人士들의 支持 聲明이 있었는데
장준하
는 《
思想界
》 6月號에서 "過去의 放縱, 無秩序, 惰性, 便宜主義의 낡은 껍질에서 脫皮하여, 一切의 舊惡을 뿌리 뽑고 새로운 民族的 活路를 開拓할 契機를 마련한 것이다."라며 軍事政變을 支持하였고 言論인
송건호
도
第3共和國
民族的이라고 評價하여
朴正熙
에 對한 支持를 表明하기도 하였다.
[41]
또한 政變 한달 뒤, 日帝强占期 當時
제암리 虐殺事件
을 暴露한
프랭크 스코필드
博士는 1961年 6月 14日 《코리언 리퍼블릭》誌에 '5·16 軍事革命에 對한 나의 見解'라는 글을 發表하였는데 그는 投稿의 첫머리에서 '5·16 軍事革命은 必要하고도 不可避한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指摘하면서 民主黨 政權의 不正과 無能을 暴露하며 '韓國에는 아직 眞正한 民主主義가 試驗된 적이 없다.'고 主張하였다.
[42]
朴正熙
는 政變 直後 獨立運動家
김학규
를 사면·복권시켰다.
[43]
以後 그가 中風으로 쓰러져 運身에 支障이 생기자,
朴正熙
는 漢學者인
최서면
(崔書勉)에게
김학규
를 입원시켜 드리고 돌봐 드리도록 付託하여 國軍 病院에 入院할 수 있도록 하였다.
[43]
그는 病席에서 입버릇처럼 恒常
朴正熙
는 '내 生命의 恩人'이라는 말을 하였다.
[43]
또한
1962年
3月 1日
과
8月 15日
獨立運動家 2千餘 名에 對한 褒賞을 斷行했다.
陸軍參謀總長 장도영 中將은 1961年 8月 22日 豫編되어 無期 懲役을 宣告받고 1963年 5月 刑執行停止로 풀려난다.
[44]
1野戰軍 司令官 이한림 中將은 2個月 服役後 不起訴 處分을, 陸士校長
강영훈
中章은 4個月 服役後 不起訴 處分을 받는다.
[27]
6軍團長
김웅수
所長은 '麾下社團에 出動 準備를 시킨 罪', '홍종철,
최영두
를 解任 軟禁한 罪', '革命에 加擔한 麾下 將兵의 撤收를 命令한 罪'로 懲役 10年을 宣告 받고 11個月을 服役한다.
[27]
8師團
腸 政綱 所長은 '革命 擊退 作戰 準備 資料를 만든 罪', '部隊 出動을 준비시킨 罪'로 懲役 12年을 宣告 받고 2年 3個月을 服役한다.
[27]
30師團長 이상국 准將은 '30師團內 革命軍의 出動을 沮止한 罪', '市廳 앞에 鎭壓軍을 出動시킨 罪'로 懲役 10年을 宣告 받고 1年을 服役한다.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