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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구치 이치요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히구치 이치요

히구치 이치요 ( 日本語 : ?口一葉 , 1872年 ( 메이지 5年) 5月 2日 ~ 1896年 (메이지 29年) 11月 23日 )는 日本 近代 小說의 開拓者로서 職業 小說家이다. 도쿄部 出生이며 本名은 히구치 나쓰코 (?口夏子), 戶籍上 이름은 히구치 나쓰 (?口奈津)이다.

히구치 이치요
?口一葉
作家 情報
本名 히구치 나쓰(호적상)
?口奈津
出生 1872年 5月 2日 ( 1872-05-02 )
日本 帝國 도쿄部
死亡 1896年 11月 23日 ( 1896-11-23 ) (24歲)
日本 帝國 도쿄部 도쿄시 魂故舊
國籍 일본의 기 日本
言語 日本語
職業 小說家
思潮 浪漫主義

生涯 編輯

메이지 5年( 1872年 ) 히구치 노리요시(?口則義)의 2男 3女 中 둘째딸로 태어났다. 메이지 16年( 1883年 ) 세이카이 小學校(私立?海?校) 高等科 第4級(只今의 初等學校 5學年에 該當)을 首席으로 卒業했지만 女子에게 더 以上의 敎育은 必要없다는 어머니의 反對로 더 以上 學業을 잇지는 못했다. [1] 以後 이치요는 바느질을 배우며 집안일을 했지만 아버지는 理致요의 才能과 文學에 對한 熱情을 認定해 메이지 19年( 1886年 ) 이치요를 나카지마 右打코가 運營하는 와카를 배우는 私設 機關 하기노野(萩の?)에 다니게 해 주었다. 當時 하기노샤는 皇族, 華族 等 높은 身分의 女性이 많이 다녔기 때문에 身分이 낮은 이치요는 發表會에 입을 옷이 없어 苦悶하기도 했다. [1] 메이지 20年( 1887年 ) 오빠 센타로가 結核으로 死亡하여 理致요가 17歲의 나이로 戶主가 되었다. 1889年에는 事業에 失敗한 아버지가 死亡했고 一家는 둘째 오빠 도라노스케의 집으로 移徙했다. 같은 해 이치요는 經濟的인 理由로 約婚者 시부야 사부로(?谷三?)에게서 破婚당했다. 이듬해 어머니와 오빠의 不和로 이치요는 어머니, 女同生과 함께 오빠의 집을 나와 昏鼓로 移徙했고 生計를 위해 小說을 쓰기 始作했다. 메이지 22年( 1891年 4月 14日 노노미野 기쿠코의 紹介로 아사히 新聞 의 記者였던 作家 나카라이 도스이 (半井桃水)를 만나 그에게 文學 授業을 받았고, 메이지 23年( 1892年 ) 3月 나카라이가 發刊한 雜誌 《무사시노》 創刊號에 첫 作品 <어둠 속의 벚꽃>을 發表했다. 그러나 當時 이치요와 나카라이 모두 獨身이었기 때문에 理致요가 나카라이의 집을 드나드는 것을 두고 좋지 않은 所聞이 돌아 이치요는 나카라이와 緣을 끊게 되었다. [1] 以後 이치요는 고다 로한 의 <風流불>의 影響을 받아 藝術에 對한 陶工의 情熱을 事實的 文體로 描寫한 <埋木>(1893)으로 才能을 인정받았고, 같은 해에 要시와라 遊廓 近處로 移徙해 가게를 열었지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이듬해에 門을 닫았다. 이치요는 生活苦를 헤쳐나가기 위해 繼續 글을 써야했고《문학계》 等의 雜誌에 <섣달 그믐날>(1894), <키재기>(1895~96), <濁流>(1895) 같은 抒情性 넘치는 秀作을 發表하여 復古的 時代 風潮 속에서 注目을 받았다. 메이지 29年( 1896年 ) 發表한 〈키재기〉가 모리 오가이 等에게 好評을 받으며 作家로서 인정받게 되었지만 같은 해에 肺結核 診斷을 받고 24歲의 나이로 夭折하였다. 이치요의 作家 生活은 14個月에 不過했지만 近代 文學史에 길이 남을 많은 作品을 남겼다. 主要 作品으로는 <키재기>, <섣달 그믐날>, <흐린 江> 等이 있다.

헤이세이 16年( 2004年 )엔 새 5000엔 紙幣 에 日本의 帝國大學 總長을 歷任했던 泥土베 이羅組 (新渡??造)의 後續 人物로 登場하여 더 有名해졌다.

參考 文獻 編輯

  • 히구치 이치요, 《키재기》(개정판), 생각의 나무, 2005

우리말 飜譯 編輯

  • 강정원 옮김, 《꽃 속에 잠겨》·《배반의 보랏빛》·《가는 구름》, 민음사, 2020年 8月 14日(完譯)
  • 임경화 옮김, 《키 再起 外》, 을유문화사, 2010年 5月 30日(腺疫)


各州 編輯

  1. 히구치 이치요, 《熾烈하게 피는 꽃 理致요》, 北스토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