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文鳥 (朝鮮)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文鳥 (朝鮮)

朝鮮의 追尊王. 大韓帝國의 推尊 皇帝
( 驍名世子 에서 넘어옴)

文鳥 (文祖, 1809年 9月 6日 ( 陰曆 8月 9日 ) ~ 1830年 6月 13日 ( 陰曆 5月 6日 ) )는 朝鮮 王世子 利子 推尊 國王 이며, 大韓帝國 推尊 皇帝 이다. 驍名世子 (孝明世子) 또는 첫 廟號였던 翼宗 (翼宗)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順調 의 아들이며 憲宗 의 아버지이다.

文鳥
文祖
익종 어진 (1826년)
翼宗 御眞 (1826年)
朝鮮의 推尊 國王
大韓帝國의 推尊 皇帝
朝鮮의 王世子
在位 1812年 7月 6日 ~ 1830年 5月 6日 (陰曆)
前任 王世子 공 (純祖)
後任 皇太子 척 (純宗)
이름
이영(李?)
別號 驍名世子(孝明世子) · 翼宗(翼宗)
廟號 翼宗(翼宗, 1834年) → 文鳥(文祖, 1899年)
시호 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
(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
尊號
체원贊火···成憲所長
  • 체원찬화석극정명 성헌영鐵예성연경
    융덕순공독휴홍경 紅雲性렬선광준상
    要흠순공우근탕정 界千件通信勳叔母
    建大곤後鑛業英祖 장의창輪行乾杯녕
    기태수유희범唱戱 入境兄도성헌소장
    ( 體元贊化錫極定命 聖憲英哲睿誠淵敬
    隆德純功篤休弘慶 洪運盛烈宣光濬祥
    堯欽舜恭禹勤湯正 啓天建通神勳肅謨
    乾大坤厚廣業永祚 莊義彰倫行健配寧
    基泰垂裕熙範昌禧 立經亨道成獻昭章
    )
陵號 首陵 (綏陵)
京畿道 九里市 東九陵로 197
身上情報
出生日 1809年 8月 9日 ( 1809-08-09 ) (陰曆)
出生地 朝鮮 漢城府 昌德宮 大造殿
死亡日 1830年 5月 6日 ( 1830-05-06 ) (20歲) (陰曆)
死亡地 朝鮮 漢城府 昌德宮 熙政堂
父親 順調
母親 순원왕후
配偶者 신정왕후
子女 1男
憲宗 · 高宗 (量子)

生涯 編輯

誕生 編輯

永安府院君 김조순 (1765-1832)
順調 의 丈人이자 驍名世子의 外할아버지이다. 金祖淳을 主軸으로 安東 金氏 에 依한 勢道政治 가 始作되었다.
 
 
풍은府院君 조만영 (1776-1846)
驍名世子의 丈人이며, 신정왕후 의 아버지이다.
憲宗 의 外祖父로, 憲宗 在位期에 趙萬永과 풍양 조氏 一族은 安東 金氏 와 더불어 國政을 左右하였다.
 
신정왕후 조氏 (1808-1890)
驍名世子의 아내이며 憲宗 의 어머니이다. 高宗 을 養子로 入籍하여 王位를 繼承하게 하고 垂簾聽政 을 實施하였다.

이름은 (?)이며, 1809年 (純祖 9年) 8月 9日, 昌德宮 大造殿 에서 順調 순원왕후 의 아들로 태어났다. [1]

王妃의 原子 誕生은 명성왕후 肅宗 을 낳은 以來 150年만의 일로, 昌德宮 仁政殿 에서 百官이 모여 原子의 誕生을 賀禮하였다. [2] 이때 順調 는 할머니인 혜경궁 洪氏 와 母后인 효의왕후 , 生母인 수빈 朴氏 에게 致謝(致詞)와 專門(箋文), 表裏(表裏)를 올렸으며, 生母인 鬚鬢에게 '低下(邸下)'의 敬稱을 使用하여 부르도록 下諭하였다. [2] 또한 原子의 誕生을 祝賀하며 舊圜과 拯劣米, 了役 等을 蕩減하라고 下敎하였다.

 
仁政殿 에 나아가 直接 王大妃戰( 효의왕후 ) · 혜경궁 (惠慶宮) · 가順宮(嘉順宮, 수빈 朴氏 )에게
致謝와 專門, 表裏를 올리고, 이어 百官의 賀禮를 받았다.
王大妃前에 올린 致死와 全文에 이르기를,
"國王 神(臣) 某(某)는 삼가 佳境(嘉慶) 14年(1809年) 8月 15日에
王大妃 殿下의 德이 洽足하고 自愛하심으로 인하여 後孫이 昌城(昌盛)하는 傾斜를 맞이합니다.
至極한 敎化와 두터운 坤德으로 큰 福祿이 물줄기처럼 이르러서 原子(元子, 驍名世子 )가 誕生함으로써
從事(宗社)가 泰山 盤石처럼 鞏固하여졌으므로 新人(神人)李 함께 기뻐하고 온 나라가 다같이 歡喜에 차 있으니,
신은 경사스럽고 기쁜 마음 견딜 수 없어 삼가 專門을 올려 敬賀드리는 바입니다.
(中略)
삼가 생각건대,
신은 千勝(千乘)의 奉養으로 三兆(三朝)에 精誠을 敦篤히 하여 옛날 돌보아 길러주신 자애로움을 追念하니
기쁜 일을 맞아 더욱 感激하며,
百歲토록 本손(本孫)과 支孫(支孫)의 勁士가 이어져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 純祖實錄 》 12卷,
純祖 9年(1809年 靑 佳境(嘉慶) 14年) 8月 15日 (癸卯)

世子 冊封 編輯

1812年 (純祖 12年) 7月 6日, 昌德宮 인정전에서 王世子로 冊封되었다. [3]

1817年 (純祖 17年) 3月, 文廟 에 酌獻禮를 올린 뒤 成均館 에 入學하였다. [4] 이때 驍名世子의 成均館 入學禮를 記念하여 그린 〈 王世子入學度牒 〉은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第307號로 指定되었다. [5]

 
王世子가 文廟 (文廟)에 나아가 酌獻禮를 行하고, 이어 入學禮를 行하였다.
王世子가 明倫堂에 앉아 《小學》의 祭祀(題辭)를 江(講)하였는데,
‘오직 成人(聖人)만이 天性을 穩全히 保存한 者이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博士 남공철 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成人이 될 수 있습니까?"
하니, 博士가 일어서서 對答하기를,
"低下(邸下)의 이 물으심은 참으로 宗廟 社稷과 臣民의 福입니다.
世子께서 어린 나이에 入學하여 이미 成人이 되기를 스스로 期約하는 뜻이 있으시니,
참으로 이 마음만 잘 미루어 擴充하신다면 요(堯)임금도 될 수 있고 順(舜)賃金도 될 수 있으니
只今부터가 그 始作입니다." 하였다.
世子가 또 묻기를,
"여기에서 ‘들어와서는 孝道하고 나가서는 恭遜하라.’고 하였는데,
孝道를 하려면 무엇부터 먼저 하여야 합니까?"
하니, 博士가 對答하기를,
"孝道를 하는 길에 對하여 그 許多한 絶目을 論하자면 갑자기 다 對答해 올릴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德을 닦고 착한 行實을 하는 것으로 根本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父母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는 데에 어찌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受信(修身)은 제가·치국·평천하의 根本인 만큼 孝道의 큰 根本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하니, 世子가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때 世子의 保寧은 9歲가 되어 비로소 入學하였는데, 資質이 溫順 端雅하고 禮儀 凡節이 熟成하였다.
先聲(先聖)을 지알(祗謁)하는데 周旋(周旋)李 法度에 맞았고,
講讀할 때에 글 읽는 소리가 가락에 맞았으며, 賤人(天人) · 聲明(性命)의 討論과 問答에 있어서
마치 德을 完成한 것처럼 燦爛하게 이루어졌으니
시종하던 臣下들과 많은 선비들이 다리[橋]를 에워싸고, 구경한 사람이 數千 名이나 되었는데,
모두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頌祝하였다.
??《 純祖實錄 》 20卷,
純祖 17年(1817年 靑 佳境(嘉慶) 22年) 3月 11日 (甲寅)

1819年 (純祖 19年) 3月, 慶熙宮 景賢堂에서 冠禮를 치르고 그해 10月 조만영 의 딸 조氏( 신정왕후 )와 家禮를 올렸다.

代理淸淨 編輯

1827年 (純祖 27年) 2月, 順調 의 名으로 인정전에서 百官의 賀禮를 받고 代理淸淨 을 始作하였다. [6] [7]

純祖는 勢道政治 安東 金氏 에게 集中된 國政의 主導權을 驍名世子에게 代理淸淨을 맡김으로서 바로잡고자 하였다. 이에 世子嬪의 親庭인 풍양 조氏 와 다른 黨派의 人物들을 重用하였으며, 李麟佐의 亂 以後 逐出된 少論 系列 人士들을 登用했다. 같은해 7月 18日, 아들( 憲宗 )이 태어났다. [8]

昌德宮 안에 士大夫의 집을 본따 延慶堂(演慶堂)을 建立하였고 글과 춤을 좋아하여 直接 舞踊인 春鶯囀 을 編曲하기도 하였다. 또한 臣下들에게 命하여 歐陽脩 消息 의 글을 가려 뽑아 社문조영(文史咀英)의 編纂, 刊行을 命하고 整理字(整理字) 活字로 刊行하였다.

驍名世子는 어머니 순원왕후 의 40歲가 되는 해인 1828年 (純祖 28年) 2月, 酌獻禮를 行하였다. [9] 다음해인 1829年 (純祖 29年) 2月 9日에는 昌慶宮 明政殿 에서 아버지 順調 의 在位 30周年과 나이 40歲가 되는 해를 맞아 酌獻禮를 行하고 大規模 진하연을 열었다. [10]

敎化를 베푼 지 30年이 되었고, 數는 4旬(四旬)을 더하였습니다.
只今부터 오래오래 뻗어 나가서 1萬 8千 年 동안 些少서.
큰 술盞으로 流霞酒(流霞酒)를 盞질하니 南極星의 빛이 冕旒冠에 빛납니다.
한 殿堂(殿堂)에 기쁨이 넘치니 온 나라가 함께 즐거워합니다.
 
? 아버지 順調 에게 첫番째 盞을 바치며

이를 통해 父母에 對한 孝를 나타냄과 同時에 王室의 權威를 强化하고자 하였다. 이때 驍名世子는 進饌市와 樂章의 歌詞를 直接 지었고, 宋나라의 長生寶宴之樂에서 따온 〈 長生寶宴之舞 (長生寶宴之舞)〉를 만들어 純祖의 진찬연때 試演하였다. [11]

王과 臣下들은 世子의 學問 振興策을 비롯해 여러 黨派를 重用하는 政局 運營으로 世子가 張差 王權을 强化하고, 國政을 刷新하리라 期待하였다. 그러나 驍名世子는 代理淸淨 4年만에 夭折하였다.

最後 編輯

1830年 (純祖 30年) 5月 6日, 昌德宮 熙政堂 에서 薨逝하였다. [12] 順調 순원왕후 는 世子의 죽음을 悲痛해하였다.

 
京仁(庚寅, 1830年) 5月 6日 壬戌日에 王世子가 病으로 熙政堂 의 서협室(西夾室)에서 薨逝하였으니,
春秋가 22歲였다.
聖像(聖上, 順調 ) 및 王妃( 순원왕후 )가 痛哭하고 韻절하면서 하늘에 呼訴하였으나 어쩔 길이 없었으며,
卿士大夫(卿士大夫)와 搢紳章甫(搢紳章甫)가 가슴을 어루만지며 痛哭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울먹이며 서로 世子의 죽음을 슬퍼하기를,
‘하늘이 우리 國家를 亡하게 하려고 하는가?
氐星(儲聖, 世子)이 돌아갔으니, 國家를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으며,
宮中의 僞史(衛史)와 모든 部署의 官僚들이며 都城에 가득한 軍人과 百姓, 賤한 이들,
婦女子와 아이들도 모두 머리를 들고 애처롭게 울기를,
‘우리 陽性(兩聖, 順調 순원왕후 )의 仁慈함과 성덕(盛德)으로도 이런 일이 있는가?
하늘이 어찌 차마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며칠 사이에 슬퍼하며 원통해 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사무쳤다.
??《驍名世子 指紋(孝明世子誌文)》

7月 12日, 順調 는 貧窮에 나아가 別錢을 行하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直接 祭文을 作成하였다.

驍名世子 祭文

아! 하늘에서 너를 빼앗아감이 어찌 그렇게도 빠른가?
앞으로 네가 喪制(上帝)를 잘 섬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將次 우리 나라를 두드려서 亡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인가,
아니면 착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하며 不德하여 신명(神明)에게 罪를 얻어
酷毒한 處罰이 먼저 世子에게 미쳐서 그런 것인가?
내가 將次 누구를 怨望하고 누구를 허물하며 어디에 依支하고 어디에 呼訴할까?
말을 하려고 하면 기운이 먼저 맺히고 생각을 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히며
哭(哭)을 하려고 하면 소리가 나기도 前에 목이 먼저 메인다.
天下와 古今(古今)에 或是라도 國家를 所有하고서 나의 處地와 같은 者가 있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내가 눈으로 네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귀로 네 音聲을 듣지 못한 지 이미 60日이 지나고
節氣가 두番이나 바뀌었다.
그런데 너는 아직까지 잠이 들어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이 어둡고 漠漠하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미련하여 참으면서 먹고 呼吸하기를 泰然히 하며 劉裕 泛泛하게 여겨서인가?
네가 正말로 알고 있는가 모르는가, 내가 果然 바야흐로 꿈을 꾸면서 깨지 않고 있는가?
네가 正말로 훌쩍 떠나버렸는가, 아니면 네가 將次 벌떡 일어나 돌아올 것인가?
(中略)
해와 달은 그 運行이 變함이 없고 한 해가 가고 한 해가 오는 그 까닭도 變함이 없으며,
하늘은 높고 땅이 두터운 그 至極함도 變함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期約은 언제이며 期約은 누구와 같이 알겠는가?
(中略)
네가 태어나면서부터 내 마음에 즐거움은 아버지가 되었다는데 그칠 뿐만이 아니고
나라의 根本이 堅固해져 皇考와 列聖朝의 遺業에 힘입어 뜻을 펼칠 수 있어서였다.
(中略)
只今 나의 슬픔은 너로 인한 슬픔일 뿐만이 아니고
나의 어질지 못함과 婦德으로 나 自身에게 罪가 쌓여 나의 훌륭한 子息을 잘 保全하지 못하였고
4百年의 宗廟社稷이 한 올의 머리카락처럼 위태로우나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는 것이니,
오히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슬프고 슬프다.
아! 哀痛하도다.

?? 順調 知音

事後 編輯

 
翼宗과 신정왕후 의 陵인 首陵

驍名世子가 죽자, 純祖는 元孫( 憲宗 )을 世孫으로 冊封하였다. [13] 驍名世子가 죽고 2年後인 1832年 (純祖 32年), 동생인 명온공주 복온공주 가 잇따라 죽자 純祖는 크게 傷心하였고 失意에 빠졌다가 슬픔을 抑制하지 못하고 昇遐하였다. [14]

시호 및 陵墓 編輯

世子의 諡號는 曉明 (孝明)이며 뜻을 이어 事業을 이루었다는 '孝(孝)'와 四方에 빛을 비춘다는 '名(明)'에서 由來하였다. 以後 아들 憲宗 이 卽位하여 翼宗 (翼宗)으로 推尊하였다. [15] 翼宗의 神主는 宗廟 停戰 에 配享되어있다. 이는 推尊 國王은 宗廟에 配享될 때 永寧殿 에 모셔진다는 慣例를 깬 것으로, 推尊 國王 中 唯一하게 停電에 配享되었다.

1863年 (哲宗 14年) 12月, 哲宗 이 後嗣 없이 昇遐하자 신정왕후 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再黃(載晃, 高宗 )을 翼宗의 養子로 삼아 翼城軍(益成君)의 軍號를 내리고 王으로 卽位시켰다. [16] 1899年 ( 光武 3年), 高宗 에 依해 益皇帝 (翼皇帝)로 追尊되면서 翼宗에서 文鳥 (文祖)로 廟號가 改稱되었다. [17]

陵은 京畿道 九里市 東九陵 內에 位置한 首陵 (綏陵)으로, 아내 신정왕후 와 合掌되어 있다.

著書 編輯

  • 《敬軒집 (敬軒集)》 12卷, 詩集 모음
  • 《淡여헌詩集 (淡如軒詩集)》, 詩集 모음
  • 《敬軒詩抄 (敬軒詩草)》
  • 《학석집 (鶴石集)》 6卷, 文集

家族 關係 編輯

朝鮮의 推尊 國王
大韓帝國의 推尊 皇帝
 
文鳥 益皇帝
文祖 翼皇帝
出生 1809年 9月 6日 ( 陰曆 8月 9日 )
  朝鮮 漢城府 昌德宮 大造殿
死亡 1830年 6月 13日 ( 陰曆 5月 6日 ) (20歲)
  朝鮮 漢城府 昌德宮 熙政堂

父母 編輯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順調 숙皇帝
純祖 肅皇帝
純祖大王
純祖大王
全州 1790年 - 1834年 正祖 先皇帝
正祖 宣皇帝
玄木守備 朴氏
顯穆綏妃 朴氏
第23代 國王
순원熟荒後 金氏
純元肅皇后 金氏
순원왕후
純元王后
安東 1789年 - 1857年 永安府院君 김조순
永安府院君 金祖淳
靑陽夫婦인 沈氏
靑陽府夫人 沈氏
明鏡王大妃
明敬王大妃
明鏡大王大妃
明敬大王大妃

王妃 編輯

시호 本館 生沒年 父母 備考
推尊 王妃
推尊 皇后
신정익皇后 조氏
神貞翼皇后 趙氏
신정왕후
神貞王后
풍양 1808年 - 1890年 풍은府院君 조만영
豊恩府院君 趙萬永
덕안夫婦인 宋氏
德安府夫人 恩津 宋氏
曉諭王大妃
孝裕王大妃
曉諭大王大妃
孝裕大王大妃
朝鮮의 推尊 王妃
大韓帝國의 推尊 皇后

王子 編輯

軍號 이름 生沒年 生母/親父母 配偶者 備考
1 憲宗 城隍祭
憲宗 成皇帝
憲宗大王
憲宗大王

?
1827年 - 1849年 신정익皇后 조氏 효현性皇后 金氏
孝顯成皇后 金氏
효현왕후
孝顯王后

孝精誠皇后 洪氏
孝定成皇后 洪氏
효정王后
孝定王后

第24代 國王
大韓帝國의 推尊 皇帝
兩者 高宗 太皇帝
高宗 太皇帝
翼城軍
益成君

?
1852年 - 1919年 獻議大院王
興宣獻懿大院王
순목隊員非 閔氏
純穆大院妃 閔氏
명성태皇后 閔氏
明成太皇后 閔氏
명성황후
明成王后
第26代 國王
大韓帝國의 初代 皇帝

關聯 文化財 編輯

文鳥가 登場한 作品 編輯

小說 編輯

  • 구르미 그린 달빛 》 윤이수 지음, 글攻防, 2014, 네이버 웹小說 完決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原作)

드라마 編輯

映畫 編輯

各州 編輯

  1. 純祖實錄 》 12卷, 純祖 9年(1809年 靑 佳境(嘉慶) 14年) 8月 9日 (精油)
    原子가 誕生하다
  2. 純祖實錄 》 12卷, 純祖 9年(1809年 靑 佳境(嘉慶) 14年) 8月 15日 (癸卯)
    王大妃戰 · 혜경궁 · 가順宮에 올린 致死와 專門의 內容
  3. 純祖實錄 》 16卷, 純祖 12年(1812年 靑 佳境(嘉慶) 17年) 7月 6日 (病者)
    仁政殿 (仁政殿)에 나아가 王世子를 冊封하였다.
  4. 純祖實錄 》 20卷, 純祖 17年(1817年 靑 佳境(嘉慶) 22年) 3月 11日 (甲寅)
    王世子가 文廟에 나아가 酌獻禮를 行하고, 이어 入學禮를 行하다
  5. 서울特別市告示 第2010-220號, 《서울特別市 有形文化財 指定 告示》, 서울特別市葬, 서울市報 第2981號, 19面, 2010-06-17
  6. 純祖實錄 》 28卷, 純祖 27年(1827年 靑 道光(道光) 7年) 2月 9日 (乙卯)
    王世子에게 庶務를 代理하도록 하다
  7. 純祖實錄 》 28卷, 純祖 27年(1827年 靑 道光(道光) 7年) 2月 18日 (甲子)
    인정전에서 賀禮를 받고 世子 청청에 關한 頒敎文을 내리다
  8. 純祖實錄 》 29卷, 純祖 27年(1827年 靑 道光(道光) 7年) 7月 18日 (辛酉)
    世子嬪이 元孫을 낳자 大臣들이 賀禮하다
  9. 純祖實錄 》 30卷, 純祖 28年(1828年 靑 道光(道光) 8年) 2月 12日 (壬午)
    王世子가 大殿과 中宮殿에게 술盞을 올리다
  10. 純祖實錄 》 30卷, 純祖 29年(1829年 靑 道光(道光) 9年) 2月 9日 (戒喩)
    明政殿에서 술盞을 받다
  11. 《順調基軸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12. 純祖實錄 》 31卷, 純祖 30年(1830年 靑 道光(道光) 10年) 5月 6日 (壬戌)
    王世子가 죽다
    卯時(卯時, 午前 5時~7時)에 王世子가 昌德宮의 희정당에서 薨逝하였다.
  13. 純祖實錄 》 31卷, 純祖 30年(1830年 靑 道光(道光) 10年) 9月 15日 (경오)
    王世孫을 冊封하다
  14. 純祖 大王 墓地門 [誌文]

    (中略)
    庚寅年(1830年)에 世子( 驍名世子 )가 薨逝하니 元孫(元孫, 憲宗 )을 王世孫으로 冊封하였다.

    王은 至極한 情을 애써 억누르면서 다시 機務를 直接 보살폈는데, 壬辰年(1832年)에 두 公主( 명온공주 , 복온공주 )가 또 서로 잇따라 요서(夭逝)하니,

    王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顔色에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營爲(榮衛)가 안에서 삭아져서 恒常 실의(失意)한 모습으로 즐거움이 없는 것 같았다.

  15. 憲宗實錄 》 1卷, 憲宗 卽位年(1834年 靑 道光(道光) 14年) 11月 19日 (競進)
    代行 大王과 驍名世子의 諡號를 定하다
  16. 고종실록 》 1卷, 高宗 卽位年(1863年 靑 童穉(同治) 2年) 12月 8日 (競進)
    大王大妃가 國喪 中에 情事를 代理할 사람을 定하고 哲宗의 뒤를 흥선군의 두 番째 아들로 定하다
  17. 고종실록 》 39卷, 高宗 36年(1899年 對한 光武 (光武) 3年) 12月 7日
    太祖, 章宗, 正宗, 順調, 翼宗 皇帝를 溯及하여 높일 廟號와 皇帝 稱號를 醫定하여 상주하다

같이 보기 編輯

外部 링크 編輯

前任
王世子 공 (純祖)
朝鮮의 王世子
1812年 ~ 1830年
後任
皇太子 척 (純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