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翰苑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翰苑》 (翰苑)은 中國 高宗 懸磬 5年( 660年 ) 以前에 장초金(張楚金)이 著述하고, 臺에 옹工藝(雍公叡)가 註釋을 붙인 遺書(類書)로, 勸第30에 該當하는 番移部(蕃夷部) 1卷만이 日本 후쿠오카시 多子以後 덴만구 (太宰府天滿宮)에 傳한다. 該當 寫本은 日本의 國寶로 指定되어 있다.

槪要 編輯

日本의 史學者 유아사 유키히코(湯淺幸孫)에 따르면 《翰苑》은 元來 兒童 對象의 (後날의 4-4-6-4 形式으로 이루어지는 四六병려문 創作을 위한) 大邱(對句) 練習用 敎材로써 著者 腸草琴이 自身의 一族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用으로 이 冊을 作成하였다고 指摘되고 있다. [1] 장초金의 自序에 따르면 唐 高宗 懸磬 5年 무렵에 作成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3月 12日 癸丑에 꿈에서 孔子 를 만나 그에게 春秋 를 지은 大義와 그의 生死觀에 對한 이야기를 나누고 깨어난 뒤 그 感興으로 한원을 著述하게 되었다고 적었다. [2]

《翰苑》의 文章 構成은 4字씩 8者가 對句를 이루어 16者가 1韻으로 構成되는 正門(正文)과, 大邱 뒤에는 典據를 提示하는 協奏(週期)가 있다. 株(注)에는 그 出典이 작게 적혀 있다. 《翰苑》에는 場草琴이 撰하고 옹工藝家 主席한다(張楚金撰雍公叡注)고 되어 있는데 이에 對해서는 正門과 周忌 모두 腸草琴에 依해 이루어졌으며 宋代에 옹工藝家 一部 內容에 簡單하고 平易한 內容만을 짧게 補註하였다고 보는 見解와 [1] , 장초金보다 한 世代 뒤의 人物인 高例를 옹工藝로 보고 주기는 全的으로 그에 依해 作成되었다는 見解가 [3] 있다(다만 윤용구는 유아사의 설을 反對하고 場草琴에 依해 正門이 編纂된 時期와 거의 비슷하게 週期가 作成되었을 것으로 보면서도, 전해종처럼 特定 人物을 옹工藝로 非情하려는 說에 對해서는 懷疑的인 視角을 비쳤다). [4]

全體 卷數에 對해서는 《 舊唐書 》(舊唐書) 장도원(張道源) [5] 의 列傳에는 30卷、《 新唐書 》(新唐書) 藝文志(芸文志)에는 7卷과 20卷이라는 두 설이 倂記되어 있고, 《崇文銃목》(崇文總目) 遺書部에는 7卷, 《 訟事 》(宋史) 藝文志에는 11卷으로 되어 있다. 日本의 동양사학자 나이토 苦難 (?藤湖南)에 따르면 30卷으로 보는 것이 正確하다고 한다. 875年 ~ 891年 에 作成된 《일본국現在鉏目錄》(日本?見在書目?)에는 《翰苑》李 30卷으로 되어 있는데, 이 記錄은 한원에 關한 가장 오래된 記錄이며, 《新唐書》가 編纂되던 時點에서는 이미 《翰苑》 轉質이 흩어져 一部만 남은 狀態였음을 보여준다. [4]

《일본국現在鉏目錄》 外에도 9世紀 시게노 사다누시(滋野貞主)가 쓴 《比附略》(秘府略)과 헤이안 末期의 《向藥草》(香?抄) 等에서 《翰苑》을 引用하고 있다. [4] 그 뒤에는 記錄에 사라졌으나, 1917年 에 후쿠오카의 多子以後덴만구 所長 寶物들을 調査하는 過程에서 구로이打 가쓰미(?板勝美)에 依해 再發見된다.

多子以後 덴만구 所長 寫本 《翰苑》은 나이토 苦難의 解說로 1922年 에 日本 교토대학 (京都大?)에서 英人 譯註本이 出刊되었으며 [6] (中國에서도 1934年 譯註本이 나왔다). 1954年 에는 該當 寫本이 日本의 國寶로 指定되었다. 1977年 에는 多子以後덴만구의 諸神(祭神)이기도 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菅原道?) 1075週期를 記念하는 事業의 一環으로써 다케우치 吏曹(竹?理三)에 依해 解釋門 ? 訓讀文이 붙은 飜譯本이 刊行된다.

오자와 脫門이 相當히 많이 發見되기는 하지만, 이제는 失傳되어 이름만 남은 司書들인 御患(魚?)의 《偉略》(魏略), 《高麗技》(高麗記) 等의 文獻을 多數 引用하고 있는 데다 現存하는 文獻과 對照해 보아도 本文과는 다른 部分이 多數 發見되고 있어 貴重한 史料로 取扱된다. 特히 御患의 《偉略》은 韓國이나 日本 關聯 記事에서 자주 引用되고 있다. [7]

構成 編輯

韓國語 飜譯 編輯

韓國에서는 1974年 아세아문화사에서 影印本을 出刊하였으며, 2019年 東北亞歷史財團 韓國고중세史硏究所에서 譯註本을 出刊하였다.

各州 編輯

  1. 湯淺幸孫(1983), '前言' 《翰苑校釋》 東京, 國書刊行會
  2. 윤용구는 《翰苑》의 자서 가운데 孔子가 장초金에게 말했다는 "때로 程度(政道)가 이지러지고 禮樂(禮樂)은 없어지기도 한다. 故로 示唆(時事)에 따라 線(善)을 드러내고 허물을 나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日王(一王)의 法(法)을 드러내려는 것이지 어찌 린(麟)에만 있다고 하랴(于時政道陵夷 禮樂交喪 故因時事 褒善貶過 以示一王之法 豈專在於麟乎)"라는 臺詞에 비추어 高句麗 等 異民族 社會를 皇帝의 一元的 世界秩序 아래 構築하려던 黨 初期의 事情과 關聯하여 살펴보아야 한다고 指摘하였으며, 아울러 該當 著述이 '番移部' 條目과 引用文獻에서 사이(四夷) 卽 中國 周邊 異民族 모두를 網羅한 듯하지만 考慮(高句麗)와 百濟, 新羅, 그리고 倭國을 除外하면 660年 찬술 時點에서 모두 사라진 이民族인데다 隋 王朝 時節부터 頻繁하게 交涉하던 突厥 (突厥) · 거란 (契丹) · 薛延陀 (薛延陀) · 말갈 (靺鞨) 等의 存在에 對하여는 說明이 없고, 構文(句文)의 分量에서도 東이 地域이 70句로 全體 165個 區의 折半 가까이 차지하는 데다 構文과 實際 記錄의 分量에서 匈奴 다음으로 많은 分量을 차지하는 國家가 考慮(高句麗)라는 點에서 《翰苑》 番移부는 中國 周邊 異民族 가운데서도 東이 地域, 特히 高句麗를 매우 重視하였음을 볼 수 있으며, 當代 高句麗와의 紛爭으로 汨沒하던 當時의 事情을 反映한다고 解釋하였다(윤용구(2011) '翰苑 番移富의 注文構成에 對하여' 《백제文化》45輯, 공주대학교 百濟文化硏究所, 157~158쪽).
  3. 全海宗, 1980, '魏略에 對한 豫備的 考察' 《東夷傳의 文獻的硏究》 서울, 一潮閣, pp.44-46
  4. 윤용구(2011)
  5. 著者인 장초金의 先祖이다.
  6. ' 翰苑勸第3 ' 《교토제국대학문학부영인구초본 第1輯》 1922年.
  7. 다만 《翰苑》에 引用된 《偉略》의 內容은 大部分 《 三國志 》, 《 後漢書 》 韓電의 內容과 大同小異하기에, 翰苑 삼한전에 引用된 資料를 가지고는 삼한의 社會相에 對한 새로운 考察을 試圖할 만한 與件이 아니라는 指摘도 있다(김병곤 '《翰苑》 贊者의 삼한전에 對한 敍述과 理解' 《韓國史學史學會》18卷 18號, 2008年 12月,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