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敎(仙敎)는
桓因
을 神으로 모신 것에서 始作되어,
桓雄
(桓雄)의
新詩
배달국의
堤川
(祭天),
檀君朝鮮
(檀君朝鮮)의 建國理念인
弘益人間
(弘益人間)으로 繼承되었다.
[11]
그 後
扶餘
(夫餘)의
迎鼓
(迎鼓),
高句麗
(高句麗)의
同盟
(東盟),
예
(濊)의
무천
(舞天) 等
祭天儀式
과
[12]
新羅
花郞
의 名山大川 祈禱와
八關會
,
高宗
34年에 세운
圜丘壇
(圓丘壇), 太白山
천제단
(天祭壇), 摩尼山
塹城壇
(塹星壇),
大韓民國 臨時政府
가
國慶日
로 定한
開天節
(開天節)은 모두 宣敎(仙敎)의
旋風
(仙風)을 이은 것이다. 이렇듯 上古時代의 하늘 敎化와 古朝鮮의 建國理念 以後, 旋風으로 이어진 韓國 古代宣敎(古代仙敎)의 歷史(仙史)는 現代에 이르러
桓因
(桓因)을
韓民族
의
하느님
으로 섬기며
先導
를 遂行하는 宣敎宗團(仙敎宗團)으로 繼承되었다.
[13]
- 文獻으로 確認하는 韓國 宣敎의 歷史
"우리나라의 歷史를 살펴보면
宣敎
仙敎는 우리 古代에 盛行하였던 것이다.
當時의 書籍들이 흩어지고 없어져서 그 源流(原流)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或者는 이를 中國의
道敎
(道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으로 認識하고 있지만. 여러 方面으로 參考하여 보건대, 이것은 우리나라에 本來부터 있었던 것이지 中國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는 證據들은 事實 매우 많다. 天璇(天仙), 國選(國仙), 大選(大仙) 等의 名稱이
三國
移轉 및 三國 初에 여러 番 나타나는데,
道敎의 經典
(經傳)은
高句麗
영류왕
(榮留王)때에 처음 傳來된 것이 그 하나一이다. 道敎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佛敎가 들어온 以後이지만,
宣敎
(仙敎)는 佛敎가 輸入되기 以前부터 있었다는 것이 그 둘二이다.
道敎
는
路資
(老子)로부터 始作되었는데,
紀年兒覽
(紀年兒覽)
이만운
(李萬運) 1736~?
朝鮮 英祖
때에 兒童敎育用으로 編纂한 歷史冊* 이란 冊에서는
檀君
(檀君)을 天璇(天仙)이라 稱하였으며, 三國史에서는 檀君을 線인(仙人)이라 稱하였으니, 檀君과 老子의 先後(先後)를 한番 計算해 보라,
檀君
은 千 數 百年 以前 사람이고
路資
는 千 數 百年 以後 사람인데, 千 數 百年 以前 사람이 어찌 千 數 百年 以後 사람이 창교(創敎)韓 校(敎)를 輸入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語不成說(語不成說)이라는 것이 그 셋三이다.
宣敎
(仙敎)가 萬一 三國時代의 賃金(人君)李 中國으로부터 輸入한 것이라면,
동명성왕
과
대무신왕
(大武神王)도 저 中國의
한 武帝
(武帝), 先制(宣帝)와 같이
放射
(方士)(:道敎에서 神仙술神仙術을 修鍊하는 사람)를 바다로 보내어 不死藥不死藥을 求하였을 것이며,
明臨答夫
(明臨答夫)와
김유신
(金庾信)도 저
丈量
(張良), 吏批(李泌)처럼
辟穀
(?穀)(:手練法의 하나로, 穀食은 먹지 않고 솔잎, 대추, 밤 等을 生食하며 사는 것)을 하고 道人術(導引術)(:道가道家에서 神仙이 되기 위한 養生法의 하나)을 배웠을 텐데,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이 그 넷四이다.
道敎
에는 天使(天師), 眞人(眞人)과 같은
封爵
(封爵)이 있지만, 이것은 唐(唐), 宋(宋) 以後부터 비로소 始作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但只 再醮(齋醮)(:佛敎나 道敎의 祭祀) 等을 主管 할 뿐이고 政治上 어떤 實權도 없는 것이지만, 高句麗, 백제의 弔意(?衣), 大選(大仙) 等은 그 權力이 當時 王과 類似하여 西洋 古代의
예수교
의
大司祭
(大司祭)와 같았다는 것이 그 다섯五이다. 中國의
道敎
는 世上을 避하여(避世) 사는 것을 崇尙하는 敎(敎), 죽음을 겁내어(畏死) 오래 사는 길을 追求하는 道(道)이다. 그러므로 帝王의 자리에 있는 者가 이 校를 믿으면 萬乘(萬乘)의 자리를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밝은 대낮에
昇天
(昇天)하기를 追求하며, 社民(士民)이 이 校를 믿으면 山에 들어가
禁斷
(金丹)(:船團仙丹. 神仙이 만든다고 하는
長生不死
의 靈藥)을 硏磨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宣敎
(仙敎)는 그렇지 않았다.
明臨答夫
는 大選(大仙)이었지만 暴君(次大王)을 廢하고 외구(外寇)(:공손도)를 物理 쳤으며, 바보溫達(愚溫達)은 大型大兄(:卽 仙人)이었으나 선비(鮮卑)를 물리쳐 疆土를 開拓하였고, 또 新羅와 싸우다 죽었으며,
김유신
(金庾信)은
國選
(國仙)이었으나 中岳(中岳)에 들어가 나라를 위하여 祈禱하고 高句麗, 백제를 滅하였으며,
김흠순
(金欽純),
김인문
(金仁問)은
先導
(仙徒)였으나 모두 戰爭터에 나가서 싸웠던 名匠(名將)들이었으며, 官昌(官昌), 김영윤(金令胤), 김흠운(金歆運)도 亦是 先導(仙徒)였으나 나라를 위하여 죽는 것을 當然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이 그 여섯六이다.
최고운崔孤雲
(:
최치원
)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이르기를 “우리나라에는 玄妙(玄妙)韓 道(道)가 있었으니, 宣敎(仙敎)(:風流)가 그것이다 國有玄妙之道, 仙敎(風流)是已” 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 校를 創設한 來歷은 船社(仙史)에 仔細히 밝혀져 있다 設敎之源 詳備於仙史” 라고 하였다. 아, 슬프다. 萬若 禪師가 只今까지 傳해오는 것이 있다면 民族 進化(進化)의 原理를 硏究하는 데 큰 材料가 될 뿐만 아니라, 東洋 古代의 여러 나라에는 普通의 歷史만 있고 宗敎, 哲學 等 專門士(專門史)는 없는데, 唯獨 船社(仙史)는 우리나라만 가지고 있는 宗敎史 이므로 私學(史學)上 一帶 光彩(光彩)를 낼 수 있었을 텐데, 哀惜하구나, 그 冊이 只今까지 傳해지지 못함이.
고기古記에서는 記錄하기를,
桓因
桓因이 그 아들
桓雄
桓雄을 내려 보내어, 그가 따르는 무리 3千名을 거느리고
太白山
太白山에 내려오니, 이가 곧
桓雄天王
桓雄天王이다. 桓雄天王이 人間世上의 吉凶禍福을 主宰主宰하며 아들
檀君
檀君을 낳았다고 하였다.
紀年兒覽
(紀年兒覽)에서는 이르기를
桓因
(桓因)은
하늘
天이요,
桓雄
(桓雄)은
新
(神)이라고 하였다. 桓因, 桓雄, 檀君은 所謂
三神
(三神)(:또한 三星이라고도 한다)이고, 三神(三神)은 卽 宣敎(仙敎) 創立의 鼻祖이다. 그 意義는 大略
예수교
의
三位一體
(三位一體)나
佛敎
의 三佛女禮(三佛如來)와 같은 것이다.
妙香山
(妙香山)에는 檀君窟(檀君窟)이 있고, 錦繡山(錦繡山)에는 東明王의 기린굴(麒麟窟)이 있으며, 석다산(石多山)에는 을지문덕굴(乙支文德窟)이 있으며, 重惡山中岳山에는 김유신굴(金庾信窟)이 있으니, 檀君時代는 文獻이 없고 매우 오랜 옛날이어서 考察하기 어렵지만, 三國時代라면 決코 우리 民族이 穴居穴居하던 時代는 아닐 것이다. 또한
을지문덕
,
김유신
陽孔兩公은 經天緯地經天緯地의 臺人物이거늘 무슨 理由로 굴에서 지낸 일이 있는가? 생각건대. 이는
釋迦
(釋迦)의 靈山(靈山)과
마호메트
의 洞窟(洞窟)과 같이 宣敎도(仙敎徒)가 心術(心術)을 修鍊할 때 반드시 窟속에 들어가서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大抵 이
宣敎
(仙敎)는 三國時代에는 佛敎와 激烈한 競爭을 하였었다. 그러므로 佛敎가 처음 輸入되자 新羅의 君臣(君臣)들이 모두 그것을 이도(異道)라고 排斥하였으며 新羅 末 高麗 初에 佛敎가 大聲(大盛)하게 되자 마침내 宣敎(仙敎)는 滅絶(滅絶)하였다. 이는 中古(中古)의 歷史上 一帶 硏究해 볼만한 價値가 있는 것이거늘, 이를 모두 模糊하게 看過해 버렸기 때문에 順菴(順庵)
안정복
(安鼎福)은
東史綱目
(東史綱目)에서
宣敎
(仙敎)의 詩말(始末)의 알기 어려움을 歎息하였던 것이다. 古書籍(古書籍)의 흩어지고 없어짐을 한恨하며 옛 史家들이 老妄(魯莽)을 안타깝게 여겨 이에 關한 記錄들을 各 書籍들 中에서 뽑아 歷史를 읽는 者들이 參考할 수 있도록 提供하는 바이다.
[14]
"古記云 昔有桓因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遺往理之"
고기
(古記)에 이런 말이 있다. 옛날에
桓因
(桓因)ㅡ
帝釋
(帝釋)을 이른다ㅡ의 庶子(庶子)
桓雄
(桓雄)李 계셔 天下에 자주 뜻을 두고. 人間世上을 탐내어 救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三位 太白山(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人間世界를 얼리 이롭게 할 만했다. 이에
天符印
(天符印) 세個를 주어, 내려가서 世上 사람을 다스리게 했다."
[15]
"後桓雄氏繼興奉天神之詔降于白山黑水之間鑿 子井女井於天坪劃井地於靑丘 持天符印主五事在世理化弘益人間 立都神市國稱培達 擇三七日祭天神忌愼外物閉門自修呪願有功"
後에 桓雄氏가 繼續하여 일어나
天神
(天神)의 뜻을 받들어 白山(白山)과 黑手(黑水) 사이에 내려왔다. 사람 모이는 곳에 千坪을 마련하고 請求에 停止를 定했다.
天符印
을 지니시고 다섯 가지 일을 主管하시며 世上에 계시면서 敎化를 베푸시니 人間을 크게 有益하게 하였다. 또
新詩
(神市)에 都邑을 세우시고 나라를
配達
(倍達)이라 稱했다.
三七日
三七日을 擇하여
天神
께
祭祀
지내고 밖의 物件을 꺼리고 謹愼하며, 門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 呪文을 외우며 몸을 닦아 공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라고 하였다.
[16]
"遵尙仙風. 昔新羅, 仙風大行, 由是, 龍天歡悅, 民物安寧. 故祖宗以來, 崇尙其風久矣. 近來, 兩京八關之會, 日減舊格, 遺風漸衰. 自今八關會, 預擇兩班家産饒足者, 定爲仙家, 依行古風, 致使人天咸悅."
旋風(仙風)을 遵守하고 崇尙하라. 옛날 新羅에서는 旋風(仙風)이 크게 行하여져서 이로 말미암아 龍泉(龍天)李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百姓과 萬物이 安寧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祖宗(祖宗) 以來 그 旋風을 崇尙한 지가 오래되었다. 近來에 陽經(兩京)의 八關會(八關會)가 날로 예전의 格을 잃어 遺風(遺風)李 漸次 衰하고 있다. 只今부터는 八關會에서, 兩班(兩班)으로 家産(家産)李 豐足한 者를 미리 골라 定하여 禪家(仙家)로 삼고 古風(古風)대로 行함으로써 사람과 하늘로 하여금 모두 기쁨을 다 누리도록 하라.
[17]
"우리 民族의 固有宗敎는 宣敎이다. 宣敎는 우리
韓民族
의
시원
(始原)을 함께 하는 根源種(根源宗)으로써... 宣敎(仙敎)는 古朝鮮 以後 우리 韓民族의 뿌리가 되어온 韓民族 固有宗敎固有宗敎이며, 이러한 宣敎의 歷史를 빼놓고는 歷史를 論할 수 없는 것이다"
[18]
"韓民族은
桓因
上帝의 直系子孫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섬기는 天孫民族(天孫民族)이다.
韓民族
의
傳統
과
儀禮
風俗과
民間信仰
속에는
桓因
上帝님의
敎化
와 至極한 마음으로 사람이 하늘을 섬기던 古代로부터의 信仰意識이 담겨있다.
우리
韓民族
은 本來 하느님思想을 本源으로 한다. 一萬年에 達하는
韓民族
의 歷史 속에
桓因하느님
을 섬기는 믿음이 뜨거운 핏줄을 타고 살아 있다. 宣敎(仙敎)는
桓因
喪制(桓因上帝)를 敬畏하는 아버지로 信仰하는 天孫信仰의 脈을 繼承하였다."
[19]
"仙人思想은 古朝鮮의 思想이었는데, 그것이 泰帝國이나 그보다 조금 앞선 時代에 中國에 傳達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古朝鮮의 仙人思想은 中國의 三國時代 以後 道敎가 宗敎로 성림되면서 中國의 傳來思想과 混合되어 神仙思想으로 그 名稱과 內容이 變貌되어 道敎의 重要한 要素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韓國이나 中國의 옛文獻에 古朝鮮의 宗敎는 仙을 追求하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래서 이를 遂行하는 사람을 仙人이라 불렀던 것이다. 따라서 仙을 追求하는 길을 仙道라 했을 것이며 그 가르침을 仙敎라 하였을 것이니 宗敎의 名稱으로는 <仙敎>라 함이 마땅할 것이다."
[20]
"宣敎(仙敎)는 千日(天一) · 至日(地一) · 人日(人一)의 三神一體(三神一體) 卽 도불有一體(道佛儒一體)의 宗敎(宗敎)이다. 三神一體(三神一體)가 萬事萬物(萬事萬物)에 共同作用(共同作用)하면 도불有一體(道佛儒一體)의 宣敎(仙敎)가 되고 나누면 各各 道敎(道敎) · 儒敎(儒敎) · 佛敎(佛敎)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三神一體(三神一體)를 집일合三(執一合三) 회삼귀일(會三歸一) 한다고 풀이한다."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