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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난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하기의 난 (萩の?)은 메이지 政府 初期 일어난 士族 叛亂 中 하나로 1876年 야마구치縣 夏期 에서 發生했다. 메이지 政府 를 打倒하기 위해 존洋파 士族들이 일으켰으며 區 騎兵隊 出身들이 主軸이 됐다. 그 해 10月 24日 구마모토현 신푸렌의 난 10月 27日 후쿠오카현 亞키즈키의 난 에 呼應해, 야마구치縣 士族( 조슈 燔師 ) 出身이자 前 參議 마에바라 잇세이 (前原一誠), 오쿠다이라 켄스케 等 約 200名 [1] 이 일으켰다. 後日 第 26代 日本 總理 다나카 기이치 도 13歲 때 叛亂軍에 參與한 바 있다.

하기의 난
士族 叛亂 의 一部

하기의 叛亂을 그린 우키요에
날짜 1876年 10月 28日 ~ 12月 8日
場所
結果 政府軍의 勝利
交戰國
일본 제국 日本 帝國 陸軍 殉國群(叛亂軍)
指揮官
미우라 고로
세키구치 다카요시
마에바라 잇세이
오쿠다이라 켄스케
兵力

히로시마 진대

  • 步兵 第11聯隊

히로시마 警備

  • 步兵 第12聯隊 1大隊

馬官 警備

  • 步兵 第14聯隊 第2大隊 1個 小隊

오사카 진대

  • 步兵 第8聯隊 第3大隊
  • 砲兵 1個 小隊
約 200名

槪要 編輯

메이지 政府에서 參議를 지냈던 마에바라 잇세이 는 日本軍 解職者 叛亂 [2] 鎭壓 後處理와 徵兵制 實施를 놓고 기도 다카요시 , 야마가타 아리토모 와 激烈한 論爭을 벌인 끝에 辭職 後 落鄕했다. 그는 요시다 쇼인 의 弟子로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의 맏 死刑이었다. 구마모토城 신푸렌 蹶起 消息을 듣고 九 番校 메이린칸 (明倫館)을 據點으로 메이지 新政府에서 疏外된 故鄕 同門 및 不平 士族과 連絡을 取하는 한便 옛 존洋파 同志를 모았다.

10月 26日에는 縣廳을 挾攻하기 위해 스사쵸(須佐町) 育英館長인 사카가미 다다스케(坂上忠介)와 타네 偶爾치(多根卯一), 도쿠야마 의 同志 이마다 나미에(今田浪江) 等에게 擧兵을 促求하는 獅子를 派遣했다.

10月 28日에 마에바라를 大將으로 하는‘순국군’(殉?軍)이 出帆했지만 目標로 했던 현청 襲擊은 政府 側에 事前 感知돼 막힌 後, 일황을 謁見해 自身들의 大義를 呼訴코자 上京하기로 한다. 그들은 후쿠에 寸 [3] 을 出發 스사쵸 [4] 를 經由해 山印度 (山陰道) 루트로 10月 30日에는 스사쵸 出身 兵士 67名과 合流 後 約 300名 軍勢로 地域 軍糧庫를 占據하고 軍糧을 確保했다.

마침내 해로(海路)로 시마네縣 하마다視 行 船舶에 올랐으나 惡天候로 되돌아와야 했다. 그들은 다시 야마구치縣 의 에자키(江崎) 上陸 後 거짓 情報 (함께 교토로 가다가 뒤쳐진 同志 理事하야 모토키요(諫早基?)의 部隊가 夏期 를 奇襲 占據 後 야마구치 現 首腦部(近親者,近親者)'를 處罰하고 있다는 情報를 말함 [5] ) 에 속아 10月 31日 故鄕인 메이린칸 으로 돌아왔다. 속았음을 알게 된 건 埋伏 中이던 政府軍과 市街戰을 치르면서였다.

一旦 어찌어찌 政府軍 擊退엔 成功하나 하시모토쵸 近方 家屋 68채가 불타 地域 民心을 잃었고 雪上加霜으로 備蓄 彈藥은 도쿄 皇宮으로 出發할 때 이미 蓮못에 破棄한 狀態였다. ( 시나가와 야지로 書翰). 彈藥 不足으로 長期戰이 不可能했던 마에바라는 300 軍勢를 오구라 신이치(小倉信一), 유후쿠 준인(有福洵允)에게 맡겨 玉碎시키는 代身 自身 包含 核心 幹部 5名은 도쿄 皇宮으로 가 일황 謁見 後 割腹하려 했다.

오구라 等은 下旗시 에서, 後日 명성황후 를 弑害하는 미우라 고로 所長 麾下 히로시마 진대 운양호 事件 釜山 에도 왔었던 戰艦 某슌(孟春) 湖의 攻擊을 받고 11月 6日頃 全滅한다. 조슈번 劍術 地圖 師範 나이토 사쿠베에(?藤作兵衛)가 誤認 射殺되기도 했다.

以後 編輯

마에바라, 오쿠다이라 等 幹部 5名과 始終 詩라 린조, 마레 모코 等 總 7名은 도쿄 로 가기위해 배로 夏期 의 에츠 港을 出港했으나 또다시 惡天候로 시마네縣 羽類 港에 避難했다. 그나마도 導船士 의 도움으로 겨우 上陸한 그들은 11月 5日 申告를 받고 出動한 시마네 縣令 사토 노부히로와 警察들이 몰려와 對峙 中 疏明 機會 附與를 條件으로 投降했다. 그러나 約束과 달리 그들에겐 어떤 疏明 機會도 주어지지 않았다. 온갖 拷問도 모자라 新政府는 마에바라 에게 前 아이즈 燔師 나가오카 히사시게 (永岡久茂)와 內亂을 共謀했다는 陋名까지 씌웠다. 앞서 나가오카는 10月 29日에 치바현청 襲擊 未遂 事件( 시안바시 事件 ,思案橋事件)을 일으켰었다.

12月 3日 야마구치 地方法院 하기 出張所(裁判長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의 判決에서 마에바라 以下 오쿠다이라를 비롯, 요코야마 도시히코(?山俊彦), 社勢 잇세이(佐世一?,마에바라의 親同生), 야마다 에이타로(山田?太?, 마에바라의 親同生), 유후쿠 준인(有福旬允), 오구라 신이치(小倉信一), 고노 기이치(河野義一)는 卽決 處分(斬首)됐다. (다음날 斬首됐다는 說도 있음) 自己 辯護의 機會조차 剝奪된 채였다. 300 軍勢 中 捕虜들과 그 外 連累者들의 處分은 1876年 (메이지 9年) 法務省 傘下 內亂陰謀 判決 法廷에서 有罪 72名, 無罪 1名, 訓放 299名 等으로 決定됐다. 當時 判決에 對해 다른 事實 記錄이 많아 特定하기 어려운데 다음과 같다.

  • 하기의 亂으로 죽은 이들을 追慕하는 나무 額子의 記錄으로는 懲役 48名, 諸族方面(≒廢庶人) [6] 15名, 方面 388名이라고 돼있다.
  • 하기 出張所 裁判長 이와무라 미치토시(岩村通俊) 判事의 回顧錄에 따르면 懲役이 60餘 名, 方面이 2千 餘名이라고 돼있다.
  • 시미즈 기요打로(?水?太?)의 日記에는 裁判에 오른 暴徒가 無慮 3千5百에 達한다고 記錄돼 있다.

어쨌든 處罰의 法院(法原, 法的 根據 )는 메이지 9年 11月 8日 司法頃(法務省 長官) 誤記 他카토(大木喬任)에 依해 制定된 暴徒處分 臨時 施行令(臨時暴徒?分例)이었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튄 불똥 編輯

叛亂 主謀者 마에바라 잇세이는 쇼카손주쿠 (松下村塾)의 最年長者로 많은 同門들과 스승인 故 요시다 쇼인 의 親族까지 欄에 끌어들였다. 쇼인의 三寸인 다마키 집안, 쇼인 本人의 家族, 쇼인의 元來 성이자 親兄의 家族인 스機(杉) 氏들까지 모두 連累됐다. 쇼인의 親兄인 스機 민지 (杉民治)는 다마키 마사노리(玉木正誼, 怒氣 마레스케 의 親同生이기도 함 )를 데릴사위로 들였고 요시다 코타로는 민지(民治)의 長男 쇼지로의 데릴사위(次女)였다. 다시말해 다마키 마사노리와 요시다 코타로는 妻三寸, 妻조카사위 關係였는데 둘 다 叛亂軍으로 戰死했기 때문에 마사노리의 아들 다마키 마사유키(玉木正之), 그리고 코타로의 손아랫同壻 요시다 舊라조(吉田 庫三,亦是 데릴사위) [7] 가 相續者로서 緣坐制 에 끌려들어갔다. 이런 緣故로 쇼인의 三寸이자 쇼카손주쿠 校長 다마키 분노신 (玉木文之進)은 割腹하고 學校는 廢校됐다.

쇼인의 親兄 스機 민지 는 洪高다이칸(本?代官,洪고무라(本?村) 面書記)을 辭退하고 隱居하지만 1880年(메이지 13年) 쇼카손주쿠 를 再建해 10年 後 일황이 日本 帝國 臣民들의 受信과 道德 敎育에 對해 直接 敎育令 을 내려 다시 廢校되기까지 後進 養成에 힘썼다.

같이 보기 編輯

參考 文獻 編輯

메이지 時代 國土防衛社(『明治期?土防衛史』, ISBN  4-7646-0314-4 ), 하라 타케시(原 剛) 著, 킨세이샤(錦正社) 2002年 2月 發行

各州 編輯

  1. 요시다 張當 文庫 ‘病者 하기사便 裁判 調書’에서는 506名, 이와무라 미치都市 유고에서는 2千餘 名 等 여러 說이 있음
  2. 基헤이타이 의 脫大騷動 或은 脫退騷動을 일컬음.
  3. 후쿠에 寸(福?村): 現 야마구치 縣 北部의 아부 軍(阿武郡)
  4. 스사쵸(須佐町): 야마구치縣 東部에 位置한 都市. 現在 下旗시 에 編入됐다.
  5. 스社 鄕土史 硏究會 發表
  6. 諸族方面(除族放免): 日本에서 貴族이나 無事 身分을 박탈당하는 條件으로 放免되는 일. 日本版 廢庶人 制度.
  7. 日本의 傳統으로 데릴사위는 生活을 妻家에서 할 뿐만 아니라 妻家의 姓을 따라야 하고, 境遇에 따라서는 妻家의 職業까지 繼承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