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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日曜日 (1905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피의 日曜日 (1905年)

피의 日曜日 事件 ( Кровавое воскресенье 크로바保乂 보스크레세니에)은 1905年 1月 22日 [1] 帝政 러시아 의 數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서 發生한 流血事態를 말한다. 러시아 帝國 當時의 首都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勞動者들의 歎願 集會였다. 니콜라이 2歲 에게 歎願을 하기 위해 겨울 宮殿 으로 平和的인 請願 行進을 하는 것을 政府 當局에서 動員한 근위군이 發砲하여 多數의 死傷者를 낸 事件이다.

동궁 앞에서 일어난 非暴力 示威
警察과 軍人들의 民衆 示威에 對한 流血 鎭壓

不平等한 社會體制로 억눌린 러시아 民衆 들은 차르 니콜라이 2歲 의 肖像畫와 基督敎 성화상 그리고 勞動者들의 要求를 적은 請願書를 손에 들고 非暴力示威를 벌였는데, 當時 實權者 그리고리 라스푸틴 이 流血鎭壓이라는 苛酷한 彈壓을 加한 事件이다. 죽은 사람만 500∼600名, 負傷者 數千 名이나 된 大規模 流血事態였다. 主動者는 社會改革論者이자 러시아 正敎會 私製 게오르기 가폰 神父였다.

피의 日曜日의 虐殺은 ‘ 1905年 革命 ’을 活性化시킨 局面의 始作으로 看做되고 있다. 게다가 1905年 革命의 始作은 라이오닐 코贊 과 같은 史學者는 그의 著書 《1890-1918年 러시아 革命》( Russia in Revolution 1890-1918 )에서 피의 日曜日 事件을 1917年 러시아 革命 으로 이끈 核心 事件으로 看做하고 있다.

槪要 編輯

1905年 1月 9日 日曜日 에 開催된 請願 行進은 게오르기 가폰 神父의 主導 下에 進行되었다. 가폰은 러시아 正敎會 의 私製이자, 國家 祕密警察의 給與를 받는 工作員이었다고도 傳해지고 있다.

請願의 內容은 勞動者의 法的 保護, 當時 日本에 完全히 劣勢가 있었던 러日 戰爭 의 中止, 憲法의 制定, 基本的 人權의 確立 等으로 搾取, 貧困, 戰爭에 허덕이던 當時 러시아 民衆의 素朴한 要求를 代辯한 것이었다.

當時 러시아 民衆은 러시아 正敎會 의 影響 下에 皇帝 崇拜의 觀念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皇帝의 權力(王權)은 神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러시아 帝國의 皇帝는 東로마 帝國 을 繼承한 基督敎(正敎會)의 守護者이라는 思想이다. 따라서 民衆은 皇帝 니콜라이 2歲 에게 直接 歎願을 하면 情勢가 改善된다고 믿었다.

行進에 앞서 擧行된 罷業에 參加者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의 全體 勞動者 18萬 名 中 11萬 名에 이르렀다고 傳해지며, 行進 參加者는 6萬 名에 達했다. 當局은 軍隊를 動員해 示威隊를 中心街에 進入시키지 않을 方針이었지만, 너무 人員이 많았기 때문에 進入을 막지 못했고, 軍隊는 各地에서 非武裝 示威隊에 發砲를 했다. [2]

發砲로 因한 死亡者 數는 不明確하다. 反政府 運動 側의 報告에서는 4,000名 以上에 이르렀다고 主張한다. 한便, 더 愼重하게 推定한 報告에서도 死傷者의 數는 1,000名 以上이 된다. 事件은 모스크바 市內로 빠르게 퍼졌으며, 市內 곳곳에서 暴動과 掠奪이 이루어졌다.

街폰이 이 事件 以前부터 組織했던 勞動者 集會는 當日 解散되었고, 가폰은 卽時 러시아 帝國을 떠났다. 가폰은 같은 해 10月에 歸國했다가 이듬해인 1906年 4月에 社會革命黨 에 依해 暗殺되었다.

美國 出身으로 20世紀 를 代表하는 댄서 이사도라 던컨 은 이 事件 이틀 後 페테르부르크를 訪問했다가 이 어수선한 狀況을 自敍傳 《나의 生涯》( My Life , 1927年)에 記錄했다.

結果 및 影響 編輯

이 事件의 結果, 皇帝 崇拜의 幻想은 깨어졌고, 以後 ‘ 1905年 러시아 革命 ’이라고 불린 全國 規模의 反政府 運動이 勃發한 것으로 看做되고 있다. 이때 始作된 러시아의 共産主義 運動은 1917年 러시아 革命 ( 2月 革命 , 10月 革命 )의 原動力으로 成長해 간다. 성난 帝政 러시아 民衆들이 社會主義 革命 10月 革命 을 主導하게 됨에 따라 로마노프 王朝 의 沒落은 加速化된다.

各州 編輯

  1. 러시아曆 으로는 1月 9日
  2. 藤沼貴『トルストイ』 第三文明社, 2009年 p555

같이 보기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