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版籍奉還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版籍奉還 ( 日本語 : 版籍奉還 韓세키號칸 [ * ] )은 1869年 7月 25日 日本 메이지 時代 初期에 行해진 措置로, 다이묘 들이 日本 天皇 에게 自身들의 '影池(領地)'와 '英敏(領民)', 卽 '版籍'을 返還하였던 일이다.

槪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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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幕府 의 消滅과 함께 메이지 新政府는 旣存의 막번 體制를 고쳐 새로운 地方制度를 樹立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1868年 4月, 다이묘 들의 領地를 이라는 公式 名稱으로 부르게 되었고, 다이묘를 知事에 임명하여 그 統治를 繼續 委任하였다. 그리고 幕府 直轄領은 新政府의 統制下에 들어가 部와 縣으로 再編됨으로써, 不繁絃 三部制 가 確立되었다. 10月에는 番 政治를 中央에서 統制하고 家臣들의 政治 參與를 막았다. 이듬해인 1869年 1月, 메이지 維新 에 功이 컸던 사쓰마번 , 조슈번 , 道士番 , 히젠 番 다이묘 들이 가진 番에 對한 權利를 天皇에 歸屬한다는 版籍奉還의 建議書를 提出하였고, 같은해 5月 공의소에서 諮問과 論議가 이루어진 뒤 施行에 옮겨지게 되었다.

新政府는 權力基盤이 아직은 脆弱한 까닭에 各 番에 對한 强制力도 갖지 못했고, 法的인 根據도 그리 탄탄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랜 時間 동안 主君과 家神의 主從關係, 世襲으로 이어져 온 番의 權力을 다이묘들이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點에서 抵抗이 充分히 豫想되었다. 따라서 新政府 側은 공의소에서의 論議를 통해 번주 側의 同意와 諒解를 求했고, 補身 戰爭 에서의 功勳에 對한 銀賞 內譯을 定함으로써 번주와 番의 家臣들의 反撥을 撫摩하고자 하였다. 또한 當時의 많은 番들이 慢性的 財政難을 겪고 있던 터라 番의 維持에 希望을 갖고 있지 않았고, 幕府가 沒落하면서 그 役割을 天皇이 代身한다는 思考가 자리잡았기 때문에 版籍奉還의 節次는 큰 抵抗 없이 比較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結局 版籍奉還을 발板 삼아 폐번치현 이 이루어졌고, 不玄帝 가 確立될 수 있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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