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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州 彈琴臺 戰鬪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忠州 彈琴臺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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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州 彈琴臺 戰鬪 (忠州彈琴臺戰鬪)는 1592年 6月 7日 壬辰倭亂 當時 申砬 이 이끄는 朝鮮 軍이 忠州 彈琴臺 에서 全滅한 戰鬪이다.

忠州 彈琴臺 戰鬪
壬辰倭亂 의 一部
날짜 韓國 날짜 1592年 陰曆 4月 28日 (陽曆 6月 7日 )
日本 날짜 1592年 陰曆 4月 27日 (陽曆 6月 6日 )
場所
結果 日本軍의 決定的 勝利.
交戰國
指揮官
申砬   都巡邊使
便器   조방장
김여물   從事官
이종장   忠州 牧師
이일 輕傷都巡邊使
박안민
고니시 유키나가 中軍
소 요시토視 左軍
마쓰라 시게노部 友軍
고니시 사쿠에몬(유키시게) 先發隊
아리마 하루老父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美하루
兵力
1萬 6千 [1] 1萬 8700名
被害 規模
大部分 江물로 溺死 [2]
3~4名의 生存者 [3]
日本軍에게 사살당한 8千名 [4]
3千 需給 [5]
이일 逃走 [6]
捕虜 數百名 [5]
150餘 名 死傷

背景

壬辰倭亂 이 勃發하고 나서 부산진城 에 이어 동래성마저 陷落 되고 東來府使 송상현 戰死 하자 朝廷에서는 緊急對策을 세우기 위해 東奔西走했다. 그저 몇十名만 이끌고 와서 財物이나 조금 掠奪하고 自己네 땅으로 되돌아갔던 旣存의 倭寇들과는 次元이 다른 戰亂에 直面한 朝鮮에서는 一旦 輕傷都巡邊使 이일 을 派遣해보지만 尙州에서 이일이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으므로 尙州마저 陷落 되었다. 이 前에 宣祖는 當時 朝鮮에서 最高의 名匠 待遇를 받고 있던 申砬 으로 하여금 倭軍을 防禦하는 任務를 附與함과 同時에 上方劍을 하사하여 申砬에게 宣祖 自身과 같은 權限을 附與했다. 이에 申砬은 聞慶 으로 出動하게 되었다.

申砬君의 規模

朝鮮軍의 數字에 對해서는 懲毖錄 에서는 8千 精銳 兵力으로 記錄하고 있으나, 實錄에 傳하는 바는 이와 다르며, 루이스 프로이스 는 그의 著書 ' 日本史 '에 彈琴臺 戰鬪 當時 申砬君의 數字를 8萬이라 적고 戰鬪 狀況을 朝鮮 記錄들과는 달리 詳細하게 記述하였다. 그러나 亂中雜錄의 境遇 野史亞므로 어디까지 飼料 價値가 떨어지는 데다가, 彈琴臺 戰鬪는 關聯 文獻의 主席도 달려있지 않았다. 修正實錄에 나타나는 10萬 亦是 '그만큼 많다'라는 修飾語句 以上의 意味도 없는데다가, 프로이스 日本史亦是 朝鮮兵力에 關해 誇張되게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립의 朝鮮軍은 宣祖實錄 에 나타난 都城 近方에서 募集한 8千名, 以後 懲毖錄, 燃藜室記述 에서 忠淸道에서 合流한 8千名까지 合해 最大 1萬 6千名 까지로 보이지 그 以上은 되지 않을 것이다.

戰鬪準備

1592年 4月 26日 忠州 에 到着한 신립의 數千 騎兵은 단월役 에 駐屯하고 尙州에서 敗戰한 이일 을 만나게된다. 이때 從事官 김여물 이 申砬에게 새재의 높은 언덕에서 弓兵으로 倭軍을 相對하자고 建議하였으나 申砬은 忠州의 넓은 達川 平野로 가서 窮氣甁을 利用하는 平野戰을 펼치자고 했다. [7] [8]

  • 金汝岉의 論旨 - 새재에 있는 바위(높은 언덕)를 防牌삼아 弓兵으로 攻擊하면 勝算이 있다. (記錄에 따라, 이종장, 이일도 이와 같이 主張한다.)
  • 이일의 論旨 - 새재를 守備하기에는 늦었으니, 漢江으로 물러나 漢江 防禦線을 構築하자고 했다.
  • 신립의 論旨 - 우리軍은 騎兵이고 日本軍은 步兵이니 騎兵을 利用한 戰術을 쓰면 步兵만 있는 日本軍을 쉽게 制壓할 수 있으며 따라서 忠州의 넓은 平野(達川 平野)로 敵을 끌여들이면 우리가 반드시 勝利한다. [3] [8] [9]

日本軍 先發隊의 단월役 到着

 
回本態合期의 日本軍이 27日 밤에 當到했다는 急報를 듣고 申砬이 急히 마을로 가는 場面 揷畵

한便 慶尙道를 모두 占領하고 聞慶에 駐屯해 있던 日本軍 第1 先鋒將 고니시 유키나가 는 4月 28日 새벽에 聞慶을 떠나 正午 무렵 忠州에 進入한 것으로 日本側 記錄 抒情日記에 記錄되어있다. 하지만 朝鮮에서는 27日 밤에 最初로 日本軍을 發見했다고 記錄하고 있는데, 日本에서는 이와같은 事實을 記錄하지 않았으나 아무런 事前 準備없이 戰鬪에 臨할 수는 없으므로 先鋒隊의 움직임이었다고 보이는데 朝鮮 記錄은 이들이 檀越驛에 꽉 들어차 埋伏했다고 적고있다. [3] [8]

當時 日本軍이 벌써 27日 밤에 到着했다는 偵察兵의 報告를 들은 申砬은 急히 平伏 차림으로 忠州性을 뛰쳐나가 단월役 마을로 가서 살펴봤지만 日本軍은 보이지 않아 忠州性으로 돌아와 偵察兵을 斬首했다. [3] [8] [9] [10] [11]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는 고니시가 日本 날짜로 陰曆 4月 25日에 聞慶에 到着 後 곧바로 先鋒軍을 忠州로 보내 日本 날짜로 陰曆 4月 26日(韓國 날짜로 陰曆 4月 27日)에 先鋒軍이 當到한다고 적혀있다. [12]

當時 먼저 出發한 先鋒郡의 大將은 고니시 사쿠에몬(유키시게) 이었고 그는 '先發隊'였다고 적혀있다. 고니시 社쿠에몬의 先發隊는 忠州를 向해 가던 途中 忠州 近處 檀越驛에서 가토 기요마사 와 만나 서로 激突할 뻔한 危機 事態를 겪지만 겨우 撫摩된다. 가토 기요마사群 22800名은 고니시 유키나가와는 다른 進軍路를 걸어 單月講 南쪽 風洞에 陣을 친 後 가토 기요마사가 나베緦麻 나오시게와 함께 2000名의 少數 兵力만 거느리고 單越江을 건너 檀越驛으로 進入하다가 고니시 社쿠에몬과 마주쳐 고니시 社쿠에몬에게 더以上의 進軍을 저지당하고 社쿠에몬의 命令에 따라 後方軍으로 뒤따른다. [13] 고니시 社쿠에몬의 先發隊와 가토 기요마사 2000名은 檀越驛에 꽉 차 埋伏하는데 이 때 斥候로 나가있던 忠州 牧師 이종장과 이일이 그곳을 偵探하다가 빠져나가지 못해 申砬에게 報告가 傳達되지 않았다. [3] [8]

戰鬪 場所

忠州의 歷史,文化에 關해 記錄된 鄕土誌 '예성춘秋'에 依하면 申砬과 日本軍의 接戰地는 忠州의 達川平野라고 나온다. [14]

申砬 亦是 騎兵을 利用하여 步兵인 日本軍을 忠州의 넓은 平野(達川 平野)로 끌여들여서 치면 반드시 勝利한다고 朝鮮 記錄들이 적고있다. [8]

루이스 프로이스의 日本史 亦是 申砬과 日本軍의 戰鬪는 언덕,山間,誠意 戰鬪가 아니라 大規模의 騎兵과 步兵의 野戰으로 나온다. [4]

朝鮮 記錄들은 신립의 戰鬪 場所를 논밭이 많았다라고 적고있다. [3] [15] [16]

當時 戰鬪 場所가 단월役 앞의 達川平野에서 이루어졌음은 記錄에서 確認된다. [9] [16] [17]

民間傳說은 신립의 轉寫紙를 彈琴臺라 적고있다. 단월役 앞에서 慘敗하고 彈琴臺에서 戰死한 것이다. 日本 記錄 亦是 同一하게 적고있다. [17]

戰鬪 進行

朝鮮 史料들,프로이스 日本史,抒情日記를 통해 當時의 戰況은 이렇게 復元된다. 4月 28日 正午 무렵, 고니시 유키나가의 中央軍이 단월役 앞 마을(忠州 建國大 캠퍼스)로 進入하였다. [4] [5] [8] [10] 고니시 유키나가와 日本軍은 단월役 앞 마을에서 譯官 경응순과 朝鮮 國王의 降伏 書信을 傳하러 온 朝鮮의 李德馨과 그 外 大臣들을 보리라 期待하며 民家에 불을 질러 朝鮮側에 信號를 보냈다. [4] [15] 그러자 申砬이 卽時 忠州性의 數千 軍士를 이끌고 彈琴臺로 곧바로 出擊했다. [15]

忠州 彈琴臺 松山에 埋伏해있던 [5] 신립의 1萬 6千 軍士들은 申立을 따라 一齊히 彈琴臺 松山을 빠져나와 檀越驛으로 進擊해온다. 當時 戰鬪 場所가 단월役 앞이었음은 記錄에서 確認된다. [9] [16] [17]

日本軍들은 朝鮮軍과의 數字 差異가 너무 克明하게 차이나子 唐慌하고 두려워하였다.반면 朝鮮軍 1萬 6千名은 起兵 數字가 相當部分 많았으며 朝鮮軍은 自身의 數的 優勢를 믿고 勝利를 確信했다. 하지만 고니시 유키나가는 唐慌하지 않고 日本軍에게 演說을 하며 勝利를 確信시켰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聞慶새재에 到着한 以後부터 고니시 유키나가의 命令에 依해 日本軍은 3個의 軍隊로 나뉘어 運用되고 있었다. [18]

  • 中軍 7,000名 - 고니시 유키나가가 指揮. 旗발들을 모조리 내리고 기운잃은척 虛張聲勢로 朝鮮軍을 向해 천천히 進軍. [13]
  • 戴震大陣을 假裝한 機動 兵力 - 고니시 사쿠에몬,고니시 루이스, 留馬淸新(有馬晴信)·大村희전(大村喜前)·誤도순현(五島純玄) 3700名은 防備가 소흘韓 忠州性을 곧장 侵入하여 占領하였다.
  • 左軍 5,000名 - 종의지(소오 요시都市)는 檀越驛에서 달천강을 따라 北上하여 埋伏. 그 後 朝鮮軍의 西쪽을 攻擊했다.
  • 友軍 3,000名 - 마쓰라 시게노部는 단월役 東쪽의 山을 따라 東쪽으로 나와 埋伏, 그 後 朝鮮軍의 東쪽을 攻擊했다. [3] [15] [16] [18] [19] [20]
  • 背後攻擊 部隊 - 忠州性 占領 後 號角소리와 함께 朝鮮軍의 背後를 奇襲. [3] [8] 亂中雜錄</ref> [9]
  • 가토群 22800名 -가토 기요마사 軍隊는 山을 따라 東쪽으로 가며 上流를 따라 南漢江을 건너기까지 천천히 進軍하며 戰場을 觀覽한다. [21] [22]

日本軍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비밀스럽게 進擊하고있었다. [23]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中軍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命令에 依해 모든 旗발을 내리고 기운 잃은 척 虛張聲勢로 朝鮮軍을 向해 천천히 進軍해오자 [24]

申砬 1萬 6千은 日本軍의 左軍,友軍,背後 攻擊 部隊,忠州性 占領 機動部隊의 存在를 까마득히 모르고 日本軍의 中央軍만 보고 勝利를 確信하고 鶴翼陣을 펼쳐 中央軍을 包圍해 그들이 단월役 앞 마을(忠州 建國大 캠퍼스)에서 絶對 빠져나가지못하게하려고하려고하였다. [25]

達川 平野의 드넓은 논밭은 축축히 젖어있는 狀態라서 늪지처럼 되어있어 窮氣病의 히트 앤 런 射擊戰法이 不可能했고 進擊 速度도 甚히 더뎠다. [26] [27] [28] 朝鮮軍 8千名과 日本 中央軍이 마주 치자 갑자기 中央軍의 旗발이 一齊히 無數히 펄럭여서 엄청나게 많은 軍隊인 것 같은 錯覺을 들게한다! 朝鮮軍 8千은 갑자기 數字가 많아 진 것같이 보이는 中央軍을 보고 視角의 混亂을 일으키는 사이 그 때 日本軍의 左軍과 友軍이 一齊히 怪聲을 지르며 일어나 朝鮮軍의 座,우(東東,서西)를 包圍하고 鳥銃을 우레와 같이 퍼붓고 臟弓을 쏴대었다. [29] [30] [31] [32] [33] [34]

中央軍 亦是 鳥銃과 臟弓을 우레,비오듯 퍼부었다. 結局 朝鮮軍은 늪지를 헤쳐 나오지 못하고 鳥銃 射擊만 쳐받아버려서 朝鮮 8千君은 그 猛烈한 飽和를 견디지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그 後 다시 2~3次例 突擊을 試圖하지만 番番이 失敗한다. [35] [36] [37]

그 사이 忠州性이 日本軍의 機動 部隊에 占領을 當했다. [38] 그러자 申砬은 精神이 나가 忠州性을 求하러 가버린다. 總大將이 자리를 떠버리자 軍士들은 唐慌하여 隊列을 이루지못하고 童謠 狀態가 된다. [39] 그러나 忠州性을 求하러 출격한 申砬 軍士는 忠州城 안의 號角 소리 3番과 함께 출격한 日本 精銳軍에게 크게 깨지고 申砬은 急히 도망친다. 그리고 日本軍은 朝鮮軍 8千의 背後를 치며 左軍,友軍,中軍과 함께 朝鮮軍 8千을 完璧히 包圍하며 미친 물결처럼 솟구치듯이 進擊해온다. [40] [41] [42] [43]

그 消息에 놀란 朝鮮軍들은 唐慌하여 日本軍은 60萬이나 된다는 所聞이 입에서 입으로 번져갔다. [42] 日本軍은 鳥銃 飽和 射擊에 더해 2m의 巨大한 日本刀를 든 노다치 사무라이들이 큰 喊聲 소리와 함께 달려들어 마구잡이로 살륙하니 朝鮮 8萬軍은 怯에 질려 모조리 달아나버렸다. [37] 日本軍은 그 氣勢를 놓치지 않고 繼續 追擊하여 朝鮮軍을 4面으로 겹겹이 包圍하여 陸路로 도망칠 길을 하나도 주지 않는다. 結局 朝鮮 8千君은 모두 다 달천강으로 몰려버려 長壽, 兵卒 할 것없이 모두 江물에 몸을 던졌는데. 大部分 溺死해버렸다. 朝鮮軍 中에 生存하여 脫出한 者는 이일을 包含해 겨우 4名에 不過했다. [28] [44] [45] [45] [46] [47] [48] [49] [50] [51] [52] [53]

戰鬪 終結 後 日本軍은 朝鮮軍 屍體들 中 3000球만 목을 베고 朝鮮軍 降伏子 數百名을 받아들였다. [54]

가토 기요마사 는 고니시軍과 朝鮮軍이 싸우고 있을 때 멀찍이서 구경만 하면서 지나갔다. [55]

신립의 죽음 與否

在朝番房지나 燃藜室記述 , 先祖修正實錄 等에 依하면 戰鬪 막판에 申砬 김여물 에게 "살고자 하는가?" 라고 묻자 김여물이 "내 어찌 살고자 하겠소" 라고 答하고 申砬과 김여물이 함께 敵兵을 죽이고 둘다 江물에 뛰어들어 죽은 것이라 記錄되어 있다. 또 自己 조카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江물로 뛰어들었단 記錄도 있다. 申砬이 물에 뛰어든 地點이 彈琴臺의 열두代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記錄에는 月灘에 이르러 뛰었다고 되어있다.

申砬과 김여물이 日本軍의 追擊 끝에 붙잡혀 죽었을 可能性도 提起되고 있다. 프로이스의 [日本史]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생 루이스가 신립의 목을 벤 것이 나오며 [56] 日本의 古典小說 [회본태합기]에는 김여물이 말을 타고 抵抗하다가 斬首되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57] 忠淸道 醴泉郡의 民間 傳承에는 申砬이 日本軍에게 붙잡혀 斬首되었다고 傳한다. [58] 日本側 記錄 '중정日本外使重訂日本外史'에도 申砬이 斬首되었다고 적혀있다. [59]

 
回本態合期의 김여물 揷畵

結果 및 影響

이 戰鬪의 影響으로 인하여 日本軍은 漢陽까지 一瀉千里로 올라갔으며 宣祖 는 어쩔 수 없이 都城을 버리고 北쪽으로 蒙塵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戰鬪에서 장수로서 살아남은 사람은 서너名에 不過하며, 調整에 敗戰 狀啓를 올린 이일 은 平服으로 갈아입고 北上해 御駕行列과 만난다. 忠州의 社民과 官屬들은 申砬軍이 6萬 大君大軍이나 되어서 申立을 믿고 避難하지 않아 戰鬪 終結 後 日本軍에 虐殺당한 것으로 亂中雜錄이 적고있다.

""申砬은 여러 道의 淨甁(精兵)과 無關 2千 名, 種族(宗族) 1百餘 名, 內侍衛(內侍衛)의 軍卒 等 都合 6萬餘 名의 軍士를 거느리고 祖靈으로부터 다시 忠州로 後退하였는데 .... 飛雁(庇安)의 倭敵이 醴泉(醴泉)의 다인현(多仁縣)으로 나가 駐屯하고 中道(中道)의 大部隊 倭敵이 인하여 忠州를 陷落시키니, 牧師 이종장 (李宗長)은 도망쳐 달아나다. 그때 忠州 等地의 사람들은 신립의 大軍만을 믿고 집에 있다가 變亂을 當한 것인데 뜻밖에 신립의 軍隊가 敗하였다. 敵兵이 四方으로 흩어지면서 죽이고 掠奪하고 하는 慘狀이란 더욱 말할 수 없다. 倭敵이 우리나라에 말을 傳해오기를, “ 鄭琢 (鄭琢)과 이덕형 (李德馨)을 내보내라. 云云.” 하다." -亂中雜錄

가토 기요마사 는 偶然히 忠州로 日本軍을 誘引한 張本人 경응순 을 만나 붙잡아 목을 벤다. 경응순을 따라 오던 李德馨은 그걸 보고 놀라 달아난다. [60]

彈琴臺 戰鬪 指揮官

人口 損失

같이 보기

各州

  1. 류성룡 < 懲毖錄 >, 先祖修正實錄 26卷, 25(1592 臨津 / 名 萬曆 20年)4月 14日(癸卯) 6番째 記事, 燃藜室記述 認容 <朝野氣門>
  2. 루이스 프로이스 , 日本史
  3. 先祖修正實錄
  4.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5. 日本 抒情日記 4月27日子
  6. 유성룡, 懲毖錄
  7. 象村선생집 第56卷
  8. 燃藜室記述
  9. 宣祖實錄
  10. 亂中雜錄
  11. 회본태합기
  12.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에 收錄된 히데요시에게 보낸 고니시 유키나가의 便紙
  13. 루이스 프로이스의 日本史
  14. 「예성춘秋」의 '某시레 들'
  15. 在朝番防止
  16. 懲毖錄
  17. 重訂日本外史
  18.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19. 象村集
  20. 宣祖實錄 71卷, 29年 1月 24日(辛卯) 3番째記事
  21. "이튿날 새벽에 敵兵이 길을 나누어 戴震(大陣)은 곧바로 忠州性으로 들어가고, 左軍(左軍)은 達川(達川) 江邊을 따라 내려오고, 友軍(右軍)은 山을 따라 東쪽으로 가서 上流를 따라 江을 건넜는데"-선조수정실록
  22. "마치 監視人처럼 아고스띠뇨(고니시)의 後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觀望하던 아고스띠뇨(고니시)의 宿敵인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部下들의 奮戰과 勇猛함에 感歎하면서 그를 幸運兒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고니시가 뛰어난 戰士로서 빛나는 戰果를 올리는 것을 猜忌하여 自身의 兵士들도 不足하나마 제1진 前方 部隊의 바로 後위後衛에서 進擊하게 해달라고 고니시에게 執拗하게 要請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拒絶했다."-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23. "(倭軍이) 28日에는 길을 나누어 크게 밀려 닥쳤다."-연려실기술
  24. "그곳에서 아고스띠뇨는 兵士들에게 戰鬪 隊列을 갖추도록 命令했다. 게다가 "막상 부딪쳐서는 朝鮮人들을 놀라게 하지 않도록 아무 旗발도 올리지 말고 意氣(意氣)를 잃은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進擊시켜라. 追後에 旗발을 一齊히 펄럭이라는 命令을 내릴 것이다."라고 命했다." -루이스 프로이스의 日本史
  25. "朝鮮軍이 陣을 整備하고 달 模樣(鶴翼陣)으로 戰鬪 隊形을 펼쳤다. 그들은 敵軍이 少數인 것을 보자 敵陣의 中央을 攻擊하면서 한 名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包圍하기 始作하였다."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26. "그 地域은 村落의 距離가 좁고 左右에 논이 많아서 물과 풀이 섞여서 말을 달리기에 不便하였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敵이 우리 軍士의 左右를 包圍해 나오는데 勢力이 風雨(風雨)와 같았다. 한 길은 山을 따라 東쪽으로 오고 한 길은 江을 따라 내려오는데 砲소리가 땅을 振動하고 彈丸이 빗발 같고 먼지는 하늘을 덮었고 고함치는 소리는 山을 흔들었다."-재조번방지
  27. "背水陣을 쳤는데, 앞에 논이 많아 實際로 말을 달리기에는 不便하였다."-선조수정실록
  28. "그러다가 敵이 왔다는 消息을 듣고 풀이 우거진 低濕한 地帶에 布陣하여 敵에게 包圍되어 한 사람도 빠져 나간 者가 없게 되었다." - 박동량(朴東亮)의 寄齋史草 下(寄齋史草 下) 臨津日錄 1(壬辰日錄 一)
  29. "朝鮮軍이 陣을 整備하고 달 模樣(鶴翼陣)으로 戰鬪 隊形을 펼쳤다. 그들은 敵軍이 少數인 것을 보자, 敵陣의 中央을 攻擊하면서 한 名이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包圍하기 始作하였다. 兩쪽 軍隊가 이미 接近 하였을 때 朝鮮軍의 豫想은 어긋났다. 旗발들이 펄럭이고 多數의 日本人 兵士들이 모습을 나타내고서 朝鮮軍의 兩쪽 끝을 노리고서 猛烈한 砲火를 퍼부었다."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30. "敵이 고개를 넘어 들어오니 들에는 번득이는 칼들로 가득 찼다. 그는 部隊를 指揮하여 나가 싸웠다. 몸소 敵陣을 두 番이나 突破하려했으나 敵이 너무 剛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敵이 우리 軍隊의 오른쪽을 돌아 壓倒的인 氣勢로 東西에서 挾攻하여 왔다."- 송시열(宋時烈)의 尤庵集(尤庵集)
  31. "敵이 우리 軍士의 左右를 包圍해 나오는데 勢力이 風雨(風雨)와 같았다. 한 길은 山을 따라 東쪽으로 오고 한 길은 江을 따라 내려오는데 砲소리가 땅을 振動하고 彈丸이 빗발 같고 먼지는 하늘을 덮었고 고함치는 소리는 山을 흔들었다."-재조번방지
  32. "이내 軍事를 거느리고 彈琴臺(彈琴臺) 앞 두 江물 사이에 나가 陣을 쳤는데, 이곳은 왼쪽에 논이 있고 물과 풀이 서로 얽히어 말과 사람이 달리기에 不便한 곳이었다. 조금 後에 敵軍이 단월役(丹月驛)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쳐들어 오는데 그 氣勢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한 길로는 山을 따라 東쪽으로 나오고, 또 한 길은 江을 따라 내려 오니 銃 소리는 땅을 진동시키고 먼지는 하늘에 가득하였다."-징비록
  33. "兵馬兵馬를 둘로 나누어 말이 달리면서 일으키는 먼지를 뚫고 喊聲을 지르며 나아가는데" -회본태합기
  34. "敵이 우리 軍士의 左側으로 돌아 나와 東쪽과 西쪽에서 끼고 攻擊해 오는 바람에 우리 軍隊가 크게 어지러워지면서 敵에게 亂刀질을 當한 結果 屍體가 山처럼 쌓였고 君子(軍資)와 軍紀(軍器)가 一時에 모두 결딴나고 말았다. 逡巡之際,賊?出我軍之左,東西挾擊,我師大亂.被賊亂?,積尸如山,軍資軍器,一時俱盡,砬單騎至江岸,賊縱兵追之- 象村集
  35. "申砬은 어쩔 줄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해서 몸소 敵陣(賊陣)에 突進하고자 두 番이나 試圖했으나, 쳐들어가지 못하고" -懲毖錄
  36. "申砬이 遑汲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말을 채찍질하여 敵陣에 衝突하기를 두세 番 하였으나," -在朝番防止
  37. "兩쪽 軍隊가 이미 接近하였을 때 朝鮮軍의 豫想은 어긋났다. 旗발들이 펄럭이고 多數의 日本人 兵士들이 모습을 나타내고서 朝鮮軍의 兩쪽 끝을 노리고서 猛烈한 砲火를 퍼부었다. 朝鮮軍은 그러한 攻擊에 견딜 수 없게 되어 조금 後退하였다가 이내 態勢를 가다듬어 한두 番 다시 攻擊하기 始作했다. 그러나 日本軍은 매우 計劃的으로 進擊하면서 銃砲에 더하여 臺도大刀의 威力으로써 猛烈하게 攻擊하였기 때문에,"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38. "이튿날 새벽에 敵兵이 길을 나누어 戴震(大陣)은 곧바로 忠州性으로 들어가고, 左軍(左軍)은 達川(達川) 江邊을 따라 내려오고, 友軍(右軍)은 山을 따라 東쪽으로 가서 上流를 따라 江을 건넜는데..조선 軍士들은 隊列을 이루지 못하고 漸漸 흩어지고 숨어버렸다... ." -先祖修正實錄
  39. "新入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主星(州城)으로 向하여 나아가니 軍士들은 隊列을 이루지 못하고 漸漸 흩어지고 숨어버렸다."-선조수정실록
  40. "城中의 敵이 號角 소리를 세 番 發하자 一時에 나와서 攻擊하니 新入의 軍士가 크게 敗하였으며, 敵이 벌써 斜面으로 包圍하므로"-선조수정실록
  41. "敵이 我軍 뒤로 나와 겹으로 包圍하였다." -燃藜室記述 "그러나 敵兵이 이미 我軍의 뒤로 나와 千 겹으로 包圍하자 將兵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亂中雜錄
  42. "倭敵의 軍士는 60萬이라 하였는데 그 形勢가 미친 물결처럼 한꺼번에 솟구쳐 進擊해 왔다." -燃藜室記述
  43. "倭敵이 伏兵(伏兵)을 設置하여 我軍의 後方을 包圍하였으므로 我軍이 드디어 大敗하였다." -宣祖實錄
  44. 그러나 日本軍은 매우 計劃的으로 進擊하면서 銃砲에 더하여 臺도大刀의 威力으로써 猛烈하게 攻擊하였기 때문에, 朝鮮軍은 싸움터를 버리고서 발을 날개처럼 하여 앞다투어 逃亡쳤다. 朝鮮軍들은 그곳을 흐르는 數量이 豐富한 講을 작은 배로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江에는 얕은 여울이 없었기 때문에 大多數의 朝鮮 兵士들은 江으로 溺死하고 말았다. 日本軍은 이 戰鬪에서 8000名에 가까운 敵兵을 殺戮하였다." -프로이스 日本史
  45. "敵이 벌써 斜面으로 包圍하므로 ...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사람들이 다투어 물에 빠져 흘러가는 屍體가 江을 덮을 程度였다..." -先祖修正實錄
  46. "新入이 여물과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아 敵 數十 名을 죽인 뒤에 모두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申砬에게는 누이의 아들로 따라다닌 者가 있었는데, 逃亡하여 謀免하려고 하자 申砬이 怒하여 말하기를 ‘네가 어찌 살려고 하느냐.’ 하며 머리를 붙잡고 함께 빠져 죽었다. 장사(壯士)로서 빠져나온 사람은 두서너 名에 不過했다."-선조수정실록
  47. "나아갈 수 없어... 우리 軍士가 크게 搖亂하여 쌓인 송장이 山과 같고 君子(軍資)와 機械(器械)가 一時에 다 消盡되었다... 모든 軍事도 다 江속으로 뛰어갔는데 흐르는 屍體가 江을 덮어 내려갔다."-재조번방지
  48. "將兵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達川의 물로 뛰어들었다. 倭敵이 풀을 쳐내듯 칼을 휘둘러 마구 찍어대니 흘린 피가 들판에 가득 찼고 물에 뜬 屍體가 江을 메웠으며, ...... 그래서 우리나라의 正兵은 忠州와 尙州 두 戰鬪에서 다 殲滅되었다고 한다."-의병장 조경남의 亂中雜錄
  49. "日本歲의 이런 形勢를 보고 心身이 떨리어 兵卒들은 逃亡하든지 뒤의 責望이나 부끄러움에 江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회본태합기
  50. "我軍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長壽와 卒兵이 怯결에 모두 달래강물에 뛰어들었다. 敵이 칼로 마구 찍어 물에 뜬 屍體가 江을 메웠다." -燃藜室記述
  51. "申砬이 나가 싸우다가 敗하여 죽게 되자, 우리 軍士는 敵에게 밀려 모두 金彈(金灘)에 빠지니, 江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宣祖實錄
  52. "朝廷에서 巡邊使 申立을 보내 防禦하게 했으나, 忠州에서 敗戰하고 모든 軍士가 월락탄에서 모조리 (물에) 빠졌다" (朝廷遣巡邊使申砬禦之, 砬到忠州敗軍, 全軍更沒於月落灘) -宣祖實錄
  53. "여러 軍士들이 모조리 江물에 뛰어들어 屍體가 江물을 덮고 떠내려갔다. 김여물度 混亂한 軍士 속에서 죽었다." -柳成龍의 懲毖錄
  54. "4月28日 맑음 - 대주(종의지)와 攝奏(小西行長) 兵力이 攻擊하여 戰果 斬首 3000級, 捕虜 數百名. 敵 大將 新立席 戰死."- 日本 抒情日記 4月27日子 記錄
  55. "아구스티노(고니시)의 동생 루이스는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敵軍의 목을 벤 것은 그가 最初였다. 戰鬪에 參加했던 몇몇 兵士들의 이야기로는 朝鮮軍의 下級者 中에는 若干 卑怯한 者들이 눈에 띄었으나 上級者들은 매우 勇敢無雙하였다고 한다. 앞서의 젊은이 루이스는 騎馬兵으로 參加했던 朝鮮軍 指揮官 中 가장 重要한 한 사람을 生捕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이 名譽가 걸린 問題이므로 自身은 풀려나 목숨을 扶持하는 것을 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日本人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將帥는 自身의 목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머리를 자르라는 손짓만 하여 日本人들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머리를 베었다. ... 마치 監視人처럼 아구스티노(고니시)의 後方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觀望하던 아구스티노(고니시)의 宿敵인 도라노스케(가토 기요마사)는 고니시 部下들의 奮戰과 勇猛함에 感歎하면서 그를 幸運兒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고니시가 뛰어난 戰士로서 빛나는 戰果를 올리는 것을 猜忌하여 自身의 兵士들도 不足하나마 제1진 前方 部隊의 바로 後위後衛에서 進擊하게 해달라고 고니시에게 執拗하게 要請하였다. 그러나 고니시는 拒絶했다."-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56. "아고스띠뇨(고니시)의 동생 루이스는 20살도 채 되지 않은 젊은이였는데 敵軍의 목을 벤 것은 그가 最初였다. 戰鬪에 參加했던 몇몇 兵士들의 이야기로는 朝鮮軍의 下級者 中에는 若干 卑怯한 者들이 눈에 띄었으나 上級者들은 매우 勇敢無雙하였다고 한다. 앞서의 젊은이 루이스는 騎馬兵으로 參加했던 朝鮮軍 指揮官 中 가장 重要한 한 사람을 生捕하였다. 그리고는 그를 살려주겠다고 하자, 그는 이것이 名譽가 걸린 問題이므로 自身은 풀려나 목숨을 扶持하는 것을 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日本人들이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將帥는 自身의 목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머리를 자르라는 손짓만 하여 日本人들은 마침내 그의 뜻대로 머리를 베었다." -루이스 프로이스 日本史
  57. "이때 群衆에서 키가 七 尺이나 되고 얼굴에 鬚髥을 左右로 갈라 기르고 兩 눈이 둥글고 큰 朝鮮將軍이 全身에 피를 흘리면서 손에는 큰 도끼를 들고 검고 굳센 黃土色 말에 白毯(白淡:喜 白色의 천)을 두른 者가 나타나 ‘김여물이 나다’하고 크게 꾸짖고 小西勢의 中央으로 單마(單馬)로 달려 나와 가까이 있는 甲옷無病(甲衣武兵) 8,9人을 베고는 말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고 싸웠다. 이 싸움은 眞正 놀랄만한 싸움이었다. 큰 窓을 빼어들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김여물, 그는 또한 큰 도끼를 휘두르며 치고 또 치고 했다. 한番 들어가고 한番 나오고 해서 二十餘 合戰을 벌렸으나 빈틈이 조금 생기는 틈을 利用하여 荒御田勘左衛門이 橫窓을 들고 들어가 갑자기 김여물(金汝?)을 말에서 밑으로 끌어당겨 떨어뜨리니 모여들어온 軍卒들이 머리를 醉했다." -회본태합기
  58. "모가지가 똑 떨어졌다는겨. 申砬이 모가지가…" - 1984年에 醴泉郡 용문면 上금곡동에서 調査된 것. <<한국구비문학대계>> 7-17, 518-523面
  59. "祖靈을 넘어 檀越驛에 이르렀다. 兵力을 둘로 나누어 申立을 彈琴臺 아래에서 擊破하고, 參下였다. 乃踰嶺至丹月驛。分兵爲二。擊申砬于彈琴臺下。斬之"-重訂日本外史
  60. "李德馨이 가는 길에 忠州가 이미 陷落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응순에게 먼저 가서 探知하게 했으나, 경응순이 敵의 將帥 加藤淸正에게 殺害되었으므로, 李德馨은 마침내 中路에서 되돌아와 平壤 으로 가서 復命했다."-징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