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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최한기

朝鮮 後期의 儒學者

최한기 (崔漢綺, 1803年 10月 26日 ~ 1879年 6月 21日 )는 朝鮮 後期의 實學者이자 地理學者, 哲學者, 思想家, 著述家이다. 本貫은 삭녕 (朔寧)이고, 字는 운로(芸老) 또는 知로(芝老), 號는 惠岡(惠崗)·浿東(浿東)·명남루(明南樓)이다. 哲學論과 基 優位論을 提唱하였고, 김정호 等과 함께 地圖 製作에 나서기도 했다.

최한기
崔漢綺
作家 情報
出生 1803年 10月 26日 ( 1803-10-26 )
朝鮮 京畿道 開城府
死亡 1879年 6月 21日 ( 1879-06-21 ) (75歲)
朝鮮 漢城府
國籍 朝鮮
職業 哲學者, 地理學者, 實學者
宗敎 儒敎 ( 性理學 )
筆名 者(字)는 운로(芸老)·知로(芝老)
號(號)는 惠岡(惠崗)·浿東(浿東)·명남루(明南樓)
活動期間 1825年 ~ 1872年
장르 哲學 著述
地理學 著述
實學 著述
父母 최광현(양부)
최치현(生父)
子女 최병대(長男)
親知 최윤행(孫子)
최윤항(孫子)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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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開城 兩班 家門에서 태어나 親아버지 최치현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한경리 , 김헌기 , 김정희 의 門下에서 글을 배웠다. 그밖에 徐坰德 의 學問을 私宿하기도 했다. 1825年 (純祖 25年) 進士 試驗에 及第한 일이 있지만 平生 官職에 나가지 않고, 學問과 讀書, 著述 活動에 沒頭하였다. 家勢가 넉넉한 養父의 德澤으로 中國 에서 發行한 冊들을 輸入하여 이를 바탕으로 硏究하고 글을 쓰는 데 平生을 보냈다.

그는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地動說 을 朝鮮에 紹介하며 地球는 둥글고, 太陽 周圍를 돈다고 力說하였지만 市中에서는 詭辯, 虛言으로 取扱하였다. 일찍이 朝鮮의 知識人들이 接하지 못한 科學 思想을 받아들여, 이를 바탕으로 東洋 哲學 西洋 科學 을 椄木해 自身만의 獨創的인 氣哲學 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의 學問은 自然科學 敵 事由를 社會科學 人文學 의 領域에까지 두루 適用하고자 했다. 그는 가난에 對해서도 無能力한 者들의 自己 辨明, 自己 慰安이라고 批判하였다. 그는 安貧樂道 란 何等(下等) 人間들의 自己 慰安”이라며 自己 弟子들에게 商業 , 醫術 , 手工業 의 技術을 익히라고 가르쳤다. [1] 1872年 (高宗 9年) 通政大夫 中樞府 僉知事에 올랐고, 死後 司憲府 大司憲 成均館 濟州 追贈 되었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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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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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과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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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岡 崔漢綺는 1803年 (純祖 3年) 10月 26日 京畿道 開城 (開城)에서 出生하였으며 아버지는 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淸州 韓氏(淸州韓氏)이다. 최치현(崔致鉉)의 次男(次男)으로 出生한 그는 어린 時節에 아들이 없던 5寸 堂叔 최광현(崔光鉉)의 養子로 들어가 漢城府 南大門 近處 倉洞(倉洞)에서 生活하였다. 生父 최치현은 詩集 10卷을 남긴 詩人이었고, 養아버지이자 5寸 堂叔인 최광현은 雅號는 귀경헌으로, 武官이었지만 書藝家이며 1卷의 書帖이 傳한다. 이규경 에 依하면 그의 養아버지 최광현이 書籍 蒐集癖이 있었다 한다. 그의 養父가 中國의 옛 書帖에 壁이 있어, 여러 書帖에서 自體別로 分類하여 손수 模刻해 두고도 印刷해내기가 어려워서 그대로 두었고, 惠岡의 代에 와서도 미처 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2]

近來에 無人 최광현이란 사람이 있는데 中國의 옛 書帖을 몹시 좋아하여 여러 書帖의 自體(字體)를 손으로 베껴 自轉(字典)처럼 分類하고는 손수 板刻하여 備置해두었다. 그러나 印刷해내기가 어려워 아직도 流布되지 못하고 있으니 加席한 일이다. 그 아들 上司 崔漢綺에게서 들으니 刻版이 只今도 그 집에 所藏되어 있는데 아직도 印刷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 [3]

養아버지 최광현은 書冊과 書帖 蒐集이 趣味였으나, 그는 書冊을 보는 것이 趣味였다. 이우성 에 依하면 惠岡의 代에 와서도 印刷해내기가 어려웠다는 것은 技術的인 問題가 아니라 經費 問題였다고 생각된다 하였다. [2]

時代의 悲運에 휩쓸리지도, 窮乏하지도 않은 環境에서 지낸 崔漢綺는 領議政 을 지낸 바 있는 崔沆 의 傍系血族(傍系血族)이며, 최蛇廉(崔士廉)의 後孫이다. 그러나 以後 그의 家計는 沒落하였고, 京畿道 開城 으로 내려가서 살다가 1800年代 初에 다시 漢城府 로 移徙왔다. 崔漢綺의 8代祖 최의정 淫書 制度 司憲府 監察職을 지냈으며, 曾祖할아버지 崔地菘 武科 에 及第하여 다시 加勢를 일으켰다. 養아버지이자 堂叔이었던 최광현 亦是 1800年 武科 에 及第하여 內禁衛 長과 昆陽 郡守 를 歷任한 官僚였다.

그가 태어날 當時 그의 堂叔母이자 養어머니인 安東金氏가 胎夢을 꾸었다 한다. 최광현이 아들이 없어 夫人 安東金氏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天地神明에게 오랫동안 祈禱를 드렸다. 그런데 어느 날 男便이 꿈에 나타나 四寸동생 최치현의 집 담牆 밑에다가 소나무 를 심고 있었다. 金氏夫人이 어째서 우리 집에 심지 않고 그 집 뜰 가에 심느냐고 하니 男便이 여기에 심어 뿌리가 確固해지면 우리 집에 그림자를 비추어서 그 蔭德이 커질 것이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安東金氏 夫人은 男便에게 꿈을 말하였고, 그때 崔漢綺가 태어났다. 최광현은 四寸동생 최치현에게 付託하여 四寸동생의 첫 아들을 養子로 들이게 됐다.

집안의 環境은 豐足하였는데 이건창 은 崔漢綺의 電氣를 쓰면서 가(家) 所有라 하여 그의 집안이 넉넉했다고 記錄하였다. [4] 그는 平生 學問에 盡力하였고, 夫人 반남 朴氏(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男 5女를 두었다. 큰아들 최병대(崔柄大)는 1862年 文科에 及第하여 高宗 의 始終에 올랐으나 後孫의 存在는 알려져 있지 않다.

幼年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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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은 中人으로 알려졌지만 그 自身의 回顧에 依하면 沒落한 兩班이되, 自身의 家門이 兩班임을 立證할 家門들이 있었고 그 根據로 自身의 집안과 代代孫孫 婚姻關係를 形成한 집안이 몇몇 있다고 한다.

내 비록 韓美하여 名族의 班列에 끼어들지 못하지만, 代代로 婚姻하는 집들이 있어 내 집의 性向이 모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5]

일찍이 讀書를 좋아하였으며, 어려서 親아버지 최치현과 外할아버지 한경리 로부터 글과 性理學 을 배웠다. 그밖에도 그는 冊 읽기와 혼자 思索하기를 좋아하였는데, 後날 自身의 回顧에 依하면 '每番 奇書(奇書)를 얻으면 즐거워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다. 이건창 에 依하면 "어려서 남달리 英特하여 글을 읽다가 깊은 뜻을 만나도 문득 스스로 解讀했다. [5] "한다.

少年 時節 秋史 金正喜 의 門下에 나가 글을 배우고 學問을 배웠으며, 김헌기 (金憲基)의 門下에서도 性理學 을 修學하였다. 이어 北學派 燕巖 朴趾源 (朴趾源)을 私淑하였고, 그의 影響으로 西學 (西學)을 受容하였다. 讀書를 즐기고 김정희 朴智元 의 影響을 받은 그는 수많은 著作을 통해 經驗主義 的 認識論(認識論)을 確立하여, 直接 經驗으로 얻는 것이 正答이라는 結論에 導出하게 된다. 一切의 先驗的(先驗的) 理論이나 學說을 排擊하고 直接 經驗한 것과 實證할 수 있는 知識이 正答이라 主張하여 韓國 思想史에 近代的 合理主義를 싹트게 했다.

靑年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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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史 김정희 의 門下에 드나들면서 박제가 燕巖 朴趾源 의 學問을 師事하는 한便, 秋史의 門下에서 흥선大院君 過度 만나게 되었다. 김정희 박제가 , 燕巖 朴趾源 의 學問을 接한 그는 利用厚生 實事求是 , 實利主義 等의 學問觀을 쌓아간다. 그밖에 그는 花潭 徐坰德 의 氣哲學에도 關心을 두어 徐坰德 의 著述들을 耽讀하며, 師事하였다.

좋은 冊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厚한 값을 아끼지 않고 購入했다. 읽기를 오래하면 歇값으로 팔았다. 이 때문에 나라 안의 冊將帥들이 몰려와 그에게 冊을 팔려고 했다. 年庚 의 房國에서 새로 刊行된 冊이 우리나라에 오자마자 惠岡이 閱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4]

冊을 살 때는 비싼 값을 아끼지 않고 그 冊을 읽을 만큼 읽은 뒤에는 歇값으로 팔아버리니 이 때문에 國內 鉏快들이 앞다투어 惠岡에게 와서 사고 팔았다. 그리하여 北京 書店街의 新刊들이 서울에 들어오면 一次的으로 최한기에게 먼저 入手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4] 그러나 冊에 沒頭하여 지내는 동안 崔漢綺의 經濟 形便은 漸次 어려워졌다. 그에 依하면 '惠岡의 집 또한 이 때문에 기울어져 옛집을 팔고 都城 門밖에서 살았다. [2] ' 한다 1823年 (純祖 23年) 漢城府 회현방 (會賢坊) 章動(長洞)에 집을 마련했다가 數個月 後, 漢城府 南大門 房 南村 倉洞(창골)로 移徙하였다.

서울 生活이 窮乏해지자 그의 親知들 中에는 시골로 돌아가기를 勸하는 말도 있었다. [6]

시골로 돌아가 農事를 지으라고 勸하면 惠岡은 "이것은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바라는 바가 이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나의 見聞을 넓히고 지려를 열어주는 것이 오직 모든 冊의 德澤인데 冊을 求하기가 서울보다 便利한 곳이 없다. 飢餓의 苦痛을 避하기 위해 寡聞, 陋習에 빠져 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6]

시골로 돌아가 農事를 經營하라는 말에 對하여 惠岡은 완곡히 拒絶하였다. [6] "農事를 짓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더 큰 바람이 冊을 入手하는 일이다. 나의 見聞을 넓히고 지려(智慮)를 열어주는 것이 오직 모든 冊의 德澤인데 冊을 求하기가 서울보다 便利한 곳이 없다. 飢餓의 苦痛을 避하기 위해 寡聞, 陋習에 빠져 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冊 때문에 끝내 서울을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6] 그는 學童들에게 글과 詩文을 가르치는 한便으로 그 自身도 틈틈이 讀書를 통해 知識을 補完하고, 學問을 硏究하였다.

過去 斷念과 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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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5年 (純祖 25年) 生員 試驗에 合格하고, 이어 眞사 試驗에 合格하였으나, 以後 過去 制度 의 弊端을 보고 官職 出仕를 斷念하고 學問 硏究, 讀書에 專念하였다. 이우성 에 依하면 그가 中年에 科擧를 廢止한 것은 그에게 使喚의 길이 열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5] 보았다. 以後 그는 수많은 冊을 읽고, 또 수많은 冊을 著述하였으며 그 가운데 相當數가 只今까지 傳해지고 있다.

中年에 大過를 斷念하여 使喚의 뜻을 버리고 經典에 크게 힘을 쏟았다. 間或 東南의 山水를 遊覽하며 그 胸襟을 넓혔다. [5]

官職을 斷念한 그는 한때 各處를 流浪하였다.

그런데 厖大한 著述에도 不拘하고 같은 時代의 다른 學者들조차 그의 이름을 거의 言及하지 않았다. 그는 이규경 (李圭景), 김정호 等과 交流하였고, 秋史 김정희 의 文人들과도 交流하였다. 또한 當代의 地理學者 김정호 (金正浩)와도 親分이 두터웠고, 일찍이 김정호 와 함께 中國 에서 나온 世界地圖를 대추나무에 새기기도 하였다.

그의 집안은 沒落하여 代代로 벼슬과는 別 因緣이 없는 殘飯으로 轉落하였다. 그러나 多幸히 堂叔이자 養아버지인 최광현은 武科에 及第한 官僚로, 家産이 넉넉하여 그는 平生 벼슬에 關心을 두지 않고 學問에 專念할 수 있었다. 그는 冊을 좋아했기 때문에 東西洋의 많은 書籍을 蒐集하였다. 또, 그는 어려서부터 經學(經學), 私學(史學), 禮學(禮學), 數學(數學), 지리(地理) 等 多方面에 걸친 讀書를 통해 두루 뛰어난 識見을 쌓았다. 스승 김정희 의 死後에도 그는 獨自的으로 多方面의 書籍을 耽讀하여 自身만의 學問 世界를 構築하였다.

迎入 要求 拒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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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1年 (憲宗 8) 憲宗 의 外從祖父人 조인영 이 그의 名聲을 듣고 여러番 迎入을 提議했지만 拒絶하였다. 趙寅永은 憲宗 卽位 後 7年 만에 領議政이 되자 그에게 사람을 보냈다. 平素 崔漢綺는 人脈과 緣줄로 사람을 採用하는 朝鮮 社會는 썩고 곪을대로 곪았다고 反復해서 指摘했고, 自身을 迎入하려는 試圖들에 對해 모두 拒絶로 和答했다.

相國 조인영 이 張差 유일사를 選拔하려고 사람을 시켜 惠岡에게 "왜 서울 밖 郊外로 옮겨 살지 않는가?"라고 勸誘했다. [7]

趙寅永의 勸誘에 對해서 그는 "名譽를 훔쳐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7] "라며 拒絶했다.

스승들 中의 한 사람인 김정희 를 통해 박제가 燕巖 朴趾源 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學統을 이어받았다. 思潮(師祖) 朴趾源은 老論 北學派 로서 非主流였지만 朴智元의 집안은 老論의 重鎭들이 있었다. 鳶을 對面 老論의 重鎭들로도 이어질 수 있었으나, 老論 主流의 學統을 履修하지 않은 關係로 崔漢綺는 自身이 좋은 待接을 받지 못하리라 斟酌하고 여러 迎入을 모두 拒絶하였다.

조인영 은 次善策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어 過去에 應試할 수 있는지의 與否를 물었다. [8] 그는 惠岡에게 過去에 應試할 意思가 없느냐고 打診하였다. 그러나 惠岡은 그것마저 뿌리쳤다. [8]

學問 硏究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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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問, 讀書 活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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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年 (純祖 34年) 親舊 김정호 가 《靑邱圖 靑丘圖》를 만들자 崔漢綺는 여기에 祭를 써주기도 하였다. 少數의 學者들과 交流한 탓에 그의 行跡에 對한 言及은 極히 드물다. 그에 對한 言及은 主로 그의 切親한 親舊의 한 사람인 이규경 의 著書 《五洲衍文長箋散稿》에 그에 關한 記錄이 몇 次例 言及된다. 이규경 은 그를 뛰어난 學者로서 많은 著述을 남겼다고 紹介하였고, 또한 그가 中國에서 나온 많은 新刊書籍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歌詞에 疏忽했던 그는 主로 古書籍 蒐集과 讀書, 解釋, 硏究 等으로 나날을 보냈다.

1836年 (憲宗 2年) 스승의 한 名이자 本家의 外할아버지인 한경리 (韓敬履)의 文集인 《技曲잡기 (基谷雜記)》를 英人, 刊行하였다.

이규경 , 地理學者 김정호 (金正浩)와 交分이 두터웠으며, 이들은 그의 平生 親舊가 되었다. 名色만 兩班이었고 實際로는 貧窮한 形便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不遇한 環境에 介意치 않고 主로 讀書에 專念하였다. 그를 紹介받은 當代의 政丞들로부터 調整에 出仕하라는 勸告를 받았지만 모두 拒絶하였다. 代身 그는 中國 의 古書籍을 求하고 그것을 밤새 읽는 것으로 平生 消日하였다.

그는 氣學(氣學)을 提唱하였으며, 이와 朞 中에 눈에 드러나는 것, 實質的으로 取할 수 있는 것이 기라 하여 氣가 이보다 優位의 立場에 섰음을 主張하였다. 同時에 實際的으로 取할 수 있는 것을 選擇하자는 實證主義 的인 見解를 펼쳤다. 그는 "學問이 生活에 있으면 失(實)의 學問이 되고, 生活에 있지 않으면 虛(虛)의 學問이 된다"며 實用的 도움이 되는 學問의 必要性을 力說하였다.

地動說과 宇宙, 物理론 紹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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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子胡亂 丁卯胡亂 以後로 西洋에 희고 코가 큰 털북숭이 野蠻人이 存在한다는 것을 朝鮮 朝廷에서는 認識하고 있었다. 그러나 朴智元 박제가 는 西洋의 野蠻人에게서도 배울 點은 배워야 한다고 力說했고, 崔漢綺는 1850年 까지 西洋의 冊들을 漢文 으로 飜譯한 淸나라 의 書籍을 읽고는, 1850年 頃에 이르러 西洋人들은 絶對 野蠻人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西洋人을 함부로 野蠻人으로 깔보고 無視할 것은 아니라고 力說했다.

그는 中國 漢字로 飜譯된 中國의 西洋 天文學, 地理學 書籍 等을 入手, 耽讀하고 地球가 둥글며 太陽 의 周圍를 돈다고 主張하였다. 1857年 그가 지은 《地球典要》에서 그는 中國에 紹介된 西洋天文學, 地理學科 西洋事情 等에 對하여 大略的으로 紹介하였다. 홍대용 이 地球가 太陽을 돈다고 主張하였다가 터무늬없는 소리로 취급당한 以後 다시 地球가 太陽 周邊을 돈 다는 見解가 市中에 擴散되었다. 그는 地球의 字典과 空轉을 다시 主張했고, 世界 各國의 事情에 對한 것이 收錄되어 있어 比較的 說得力을 얻게 되었다.

1851年 (哲宗 2年) 漢城府 송현(솔고개) 近處 南大門 房 상동 尙正承骨(現 남대문로 3街)로 移徙하였는데, 그는 이곳에서 餘生을 보냈다. 1858年 人事行政 을 論한 書籍 認定 을 完成하였다.

1858年 中國 에서 飜譯된 윌리廉 허셜 (W. Herschel)의 天文學 書籍을 1860年 初 入手, 이것을 耽讀한 뒤 1867年 허셜 의 冊들의 要點을 拔萃하고, 自身의 意見을 簡略하게 添加한 冊 《성가운火》라는 冊을 펴냈다. 이를 통해 그는 西洋의 天文學 을 國內에 本格的으로 紹介하였다. 1836年 의 《樞軸론》과 《신기통》을 써 西洋 의 物理學을 紹介하였다. 樞軸論과 신기통은 다시 그의 生前에 《基側提議》란 題目으로 함께 묶여져서 다시 再刊行되었으며, 朝鮮 에 西洋의 近代的인 物理學을 처음 紹介한 著書들 中의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海國圖志 (海國圖志)》와 《瀛環志略 (瀛環志略)》을 入手하여 耽讀하기도 했다.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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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常 開港, 開放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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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敎育을 科學技術 發展은 勿論 文化的 啓蒙을 위해서도 重要한 手段이라고 보았다. 그는 過去 制度 의 弊端을 指摘하는 한便, 敎育이 어느 特權 階層의 獨占物, 出世와 富의 相續 手段이 되어서는 안 되며, 庶民과 女性에게까지도 널리 敎育의 惠澤이 實行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그는 敎育 內容으로 主로 性理學 과 같은 學問 以外에도, 數學, 物理, 商術, 天文學, 力學, 醫學을 비롯한 實用的인 學問의 敎育을 力說하였으며, 그 밖에도 農業, 工業, 商業, 紡織 等을 奬勵, 督勵할 것과 强調하고 中國 의 書籍을 통해 西洋 에 機械 技術이 存在함을 主張하며, 朝鮮 에도 機械 技術을 받아들일 것을 力說했다.

1863年 (哲宗 14年) 10月 그는 陽明學 을 稱頌하고, 朱子學 만이 眞理라는 것은 잘못이라 指摘했다. 事物의 眞實을 分別하려면 이쪽의 말도 듣고, 저쪽의 말도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主張에 性理學 者였던 奸才 戰友 (田愚)는 그를 聲討하는 詩(詩)를 지었다.

1863年 高宗 卽位 直後부터는 西歐 資本主義의 存在를 接하고, 通商開放論을 主張하였으며 朝鮮의 開化政策 方向을 提示하였다. 그는 量理論을 主張하는 老論 酒類 學者들로부터 批判을 받았으나 그는 開港論을 굽히지 않았다. 또한 少數 門閥 家門의 獨占하다시피 한 過去 制度 의 弊端 批判을 筆頭로 現實問題를 批判, 果敢한 改革을 부르짖었으며, 外國과의 對等한 交流를 主張하는 等 實學派 學者들의 傳統을 繼承하여, 뒤이어 登場하는 開化思想家들의 先驅가 되었다. 當時 朝鮮 의 學界에서는 崔漢綺의 思想을 理解하지 못했고, 旣存의 理氣二元論 , 理氣一元論 과는 달리 이보다 機가 優越하다는 見解는 旣成 學界의 甚한 攻擊, 비토의 對象이 되기도 했다.

그는 開港論을 主張했고, 朴智元 박제가 가 貿易, 文物을 開放하고 北學을 受容해야 한다는 見解를 다시 發表하였다. 그의 見解는 박규수 , 오경석 , 劉大致 等 少數 人士들만이 呼應, 同調하였고 흥선大院君 은 그를 불쾌히 여겼다.

1871年 (高宗 8年) 辛未洋擾 가 勃發하자 强化振武社(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은 최한기에게 諮問을 求하는 便紙를 보낸 뒤 直接 찾아왔다. 정기원은 國家가 危機를 當했다며 그에게 도움을 請했다. 정기원은 최한기에게 書信을 보내기 前에 흥선大院君 에게 報告하고, 흥선大院君 에게 崔漢綺의 諮問을 받으라는 許諾까지 받았다는 內容의 便紙도 보냈다. 當時 사람들과의 交流를 끊고 讀書와 門下生 養成에 專念하던 그에게 定期원이 도움을 請하였고, 그는 西歐의 兵士들이 火砲와 火繩銃 보다도 작고 堅固한 銃砲類를 使用하는 點과 大兵力을 이끌고 올 수도 있으니 그 點도 對備해야 한다고 答했다. 그는 以後로도 積極的으로 諮問에 和答할 것을 約束했고, 江華島 의 軍營에 가서 諮問에 應하는 것보다는 漢城府 에 있으면서 冊을 參考하며 隨時로 展示의 狀況報告를 받으면서 仔細하게 對應하는 것이 좋다고 答했다. 그는 또 自身의 이러한 意見이 大院君에게도 반드시 傳達되기를 希望하였다.

最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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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性理學 의 排他性과 閉鎖性, 偏狹性을 批判하고 經驗, 實證 爲主의 學問, 實用的인 學問을 해야 함을 主張하였다. 그는 天文, 地理, 農學, 醫學, 數學 等 人文學 知識 前半에 박학하여 1千餘 卷의 著書를 남겼는데 現在는 15種 80餘 卷이 現傳한다. 著書로는 《농정회요 (農政會要)》, 《陸解法 (陸海法)》, 《請求徒弟 (靑丘圖題)》, 《萬國警衛地區도 (萬國經緯地球圖)》, 《推測錄 (推測錄)》, 《講官論 (講官論)》, 《신기통 (神氣通)》, 《氣測體義 (氣測體義)》, 《감坪 (鑑平)》, 《衣裳里數 (儀象理數)》, 《心氣圖說 (心器圖說)》, 《小車流竄 (疏箚類纂)》, 《습산진벌 (習算津筏)》, 《宇宙冊 (宇宙策)》, 《地球典要 (地球典要)》, 《氣學(氣學)》, 《認定 (人政)》, 《명남루집 (明南樓集)》 等을 남겼다. 特히 그는 《 氣測體義 》와 《 認定 》에서 사람의 氣質과 性向, 容認法 等을 論하였다.

老年에는 自身의 冊을 抵當 잡혀 먹고살았다. [9] 晩年에 이르러 그는 가난과 窮乏으로 苦生하였지만 屈하지는 않았다. 그는 兩班도 돈을 벌어야 된다는 自身의 말처럼 글과 書畫, 作品 販賣로 生計를 維持하였다. 그러나 自身이 버는 돈의 大部分을 冊을 사서 읽는데 投資하여 窮乏은 繼續되었다. 冊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同類 社會에서는 失敗한 男性으로 보지는 않았다. [9] 1872年 (高宗 9年) 아들 최병대(崔柄大)가 高宗의 始終이 되자 侍從官의 70歲 以上된 父親에 對한 特別 銀錢으로, 1872年 7月 12日 通政大夫(通政大夫) 中樞府僉知事(中樞府僉知事)의 벼슬을 받았다.

1875年 (高宗 12年) 2月 6日 五衛將 과 中樞府僉知事에 任命되고 2月 20日 病으로 職任을 맡을 수 없다며 辭職 上疏를 올리고 물러났다. 한便 開港의 必要性을 節減하면서도 1876年 (高宗 13年) 아들 최병대에게 斥邪上疏를 올리게 했다. 아들 최병대가 斥邪 上疏를 올렸다가 流配를 가게 되자 오히려 그는 아들이 壯한 일을 했다며 激勵하였다. 1879年 6月 21日 에 死亡하였다. 한때 그가 1877年 에 死亡했다는 說과 1875年 에 死亡했다는 說이 돌기도 했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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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行으로 1892年 (高宗 29年) 1月 特別히 (贈)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 義禁府 冬至使 成均館 濟州 追贈 되었다. 그의 思想은 生前에는 배척당하거나 批判, 論難의 對象이 되다가 中國 等 外國에서 높이 評價되어 그의 執筆한 著書들이 中國에서 刊行 ·紹介되었다. 그의 學問은 1910年 (隆熙 4年) 朝鮮 이 滅亡한 後부터 照明되기 始作, 20世紀에 들어와 그에 對한 硏究書가 發表되기 始作되었다.

1960年 初부터 박종홍 , 정성철, 김철앙, 이우성 等에 依해 그의 學問에 對한 硏究가 始作되었다.

그의 行跡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年 初에 그의 一代記가 英才 이건창 의 著書 中에 있는 것이 確認되었다. 英才 이건창 의 美發刊 筆寫本인 명미당遺稿 第 10卷 [10] 中에 惠岡최空轉 이 실려 있었다. 이건창 의 美刊行 著書를 찾던 中에 發見된 崔漢綺의 一代記는 後에 國史編纂委員會 에 保管되었다. 1979年 부터 國史編纂委員會 에서 그의 著書 氣測體義 , 認定 (人政) 等을 한글로 飜譯하였다. 1999年 3月 4月의 文化人物 로 選定되었다.

思想과 信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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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無能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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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난을 無能力한 者들의 自己 辨明이라며 嘲笑하였다. 崔漢綺는 安貧樂道 或은 殮殯(廉貧)이란 傳統的 캐치프레이즈를 차라리 詛呪했는데, 그것에 훨씬 앞서서 人間 삶의 向上(福祉厚生)을 말하고, 朝鮮의 改革開放을 외친 것이다. [1]

그는 “ 安貧樂道 란 何等(下等) 人間들의 自己 慰安”이라며 自己 弟子들에게 商業 , 醫術 , 手工業 의 技術을 익히라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1]

實事求是 精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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順調 25年 司馬試(司馬試)에 及第했으나, 벼슬을 斷念하고 學問 硏究에 專心했다. 그가 살던 19世紀 實學 의 特色은 經世致用(經世致用)이라든가 利用厚生(利用厚生) 代身 金石(金石)·考證學을 中心으로 한 이른바 實事求是(實事求是)의 思潮가 主流를 이루던 때이다. 그는 實際的으로 取할 수 있는 것, 實際的으로 利益을 줄 수 있는 學問이 眞正한 學問이라 力說하였다. 그의 哲學 思想은 바로 이러한 實事求是의 實證 精神을 이어받고 이루어진 것으로서, 朝鮮 後期 實學 思潮의 마지막 結實이라 할 수 있다.

經驗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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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經驗主義 哲學을 바탕으로 無實思想(務實思想)을 主張하였으며 先賢의 말씀 만을 强調하는 性理學 의 排他的, 閉鎖的, 保守的 立場을 批判했다. 崔漢綺는 "經驗을 통해서 正答을 얻어내는 것이다"고 力說하였다. 그에 依하면 事物에 對한 正確한 答은 認識을 통해서 얻어지며, 外部事物과 人間의 感覺 器官 이 接觸할 때에 비로소 發生하며 經驗이라는 것이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는 經驗에 依하지 않은 先驗的인 知識은 本來 存在할 수 없다고 力說하였다.

그는 性理學 者들이 主張하는 先賢의 말씀 亦是 先賢들이 直接 接하고 體得한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時代, 社會에 따라서 環境은 달라질 수 있으므로 變化한 社會, 環境에 對한 硏究, 探究가 隨伴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徹底한 經驗主義的인 科學哲學을 基盤으로 無實思想을 展開하였다. 또, 교도主義的(敎導主義的)인 方法論을 主張하였고, 敎育思想에 있어서도 글工夫 外에 職業敎育을 할 것을 主張하기도 했다.

迎入 提議 拒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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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 은 張差 唯一(遺逸)을 薦擧할 참인데 惠岡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서울에 살고 있는 것이 마땅치 않아, 사람을 시켜 惠岡에세 서울을 떠나 校基地外로 移徙를 가서 살라고 했다. [7] 都市가 아니고 山林에서 살라는 것이었다. [7] 그가 都市 속에 一般 世俗 市民들과 섞여서 살면 아무리 學德이 있는 선비라도 山林으로서의 位相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7]

朝鮮 後期부터 執權層이 山林陽德志士로서 一帶의 名聲과 權威가 있는 이를 유일로 薦擧하여 自己 政權의 尊顯崇儒의 名分을 꾸미는 手法을 取해왔다. 그런데 유일로 받들자면 반드시 山林에 있는 儒者라야 하였다. 한番 유일로 薦擧된 사람은 어떠한 官職이 주어지더라도 '山林'이라는 呼稱을 그대로 지니고 國王으로부터 瀕死知禮의 隆崇한 待遇를 받았다. [7] 그러나 그는 억지로 官職을 얻기 위해 都城에서 먼 곳으로 移徙해야 할 理由가 있느냐며 反問하였다.

그는 當時 유일로 薦擧된 老論系 遊子들이 山林이라는 形式的 禮遇를 받으면서 執權層의 御用學者 노릇이나 하는 存在임을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理由 外에도 그 自身 當時의 執權層과 搪塞이 같지 않아, 自己에게 돌아오는 것이 '山林'이 아니고 山林의 亞流인 '男大(南臺)'에 該當되는 事實이 더욱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8]

人材 登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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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人材를 取하는데 있어서 그 사람의 재주와 才能만을 볼 것을 主張했다. 그는 人材의 登用에 있어서 門閥, 學閥 等으로 差別하는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崔漢綺는 人事·行政에 關한 冊 <認定>에서 어떤 障礙人이라도 “배우고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强調했다. [11]

그는 또 崔漢綺의 <講官論(講官論)>에서 特別히 經筵官의 資質에 對해서 言及하였다. [12] “經筵官을 뽑아 쓰거나 내치는 것이야말로 君主의 學問이 發展하고 衰退하는 것, 政治와 敎育의 水準이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과 結付된다. 그러므로 큰일을 하려는 君主는 먼저 經筵官을 잘 뽑아야 한다. (中略) 그러나 經筵官이 職責을 遂行함에도 優劣이 없지 않다. 氣色이 溫和하고 말이 簡單하면서도 條理가 분명하고 王에 對한 忠誠과 사랑이 넘치는 自家 으뜸이다. 能爛한 말솜씨로 辯論에 힘쓰고 以前의 言說을 갖다 붙여서 談論을 즐기는 것을 바탕으로 삼는 者가 그 다음이다. 지나치게 自重하여 狀況에 따라 適切하게 對處하지 못하고 오로지 才能과 德을 숨기는 것만 일삼는 者가 그 다음이다. [12] ”라며 經筵官에 어떤 人材를 取하느냐 與否에 따라 學問의 隆盛과 衰退가 決定된다고 봤다.

氣에 對한 觀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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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認識 對象인 이(理)를 '氣質의 이', '天地運行의 이'라고 하고, 人間이 느끼고 認識하는 이(理)를 '自得(自得)의 이', '人心推測(人心推測)의 이'라고 規定하여 兩者를 區別하였으며 人間이 體得하여 느끼는 이는 電子의 '飜譯'(飜譯)이라고 하였다.

그는 飜譯이라는 單語를 통해 이 亦是 그것을 느끼고 接하는 '推測子', '飜譯者'의 能力 如何에 따라 過誤가 犯해진다고 보았다. 그는 '理學(理學)의 이', '太極의 이' 等, 모든 理論上의 이(理)는 '推測의 이'라고 하여, 그 限界를 뚫고 끊임없이 遲刻ㆍ記憶ㆍ推測 等 感性에 依據한 後天的 能力을 開發함으로써 '天地運行의 이'를 把握하는 것을 志向해야 할 것을 力說하였다.

基優位論과 實證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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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漢綺는 理와 氣는 다른 것이지만 機가 賤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實證 精神은 于先 實感할 수 없는 이(理)보다는 實感할 수 있는 氣(氣)를 擇한다. 그는 理氣論 (理氣論)에서 有機(唯氣)의 立場을 取하고 있다. "이는 無形(無形)하고 기는 遺跡(有跡)한 것이어서 그 敵(跡)을 따르면 이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니 이는 氣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唯氣論의 立場으로부터 그는 空虛한 名目(名目)에 얽매이지 않고 알찬 內實(內實)에 着眼하는 一種의 唯名論(唯名論)의 思想을 싹트게 했다. 卽 그는 "눈(目)이라는 이름과 귀(耳)라는 이름을 서로 바꾼다면 눈을 귀라고 부르고 귀를 눈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지만, 보고 듣는 實用에 있어서는 바뀌는 法이 없다. 귀로 본다고 하며 눈으로 듣는다고 하더라도 보고 듣는 實用에 있어서야 무슨 해(害)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으니, 이 有名論的 思想이 모든 名分論(名分論) 乃至 形式主義에서 벗어나게 하는 基盤인 것이다. 그런 點에서 實利主義(實利主義)·實用主義 나아가 實證을 重要視하는 經驗主義度 唯名論의 産物이라 할 수 있다. 그는 經驗論 을 아래와 같이 披瀝한다.

鐘을 치면 소리가 난다는 것을 萬一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다면, 鐘을 치기 前에 치면 소리가 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理論을 바탕으로 그는 朱子學 에서 말하는 先天的인 異性 (仁義禮智)의 能力을 否認한다. 이와 같이 經驗 에 依한 知識 그리고 어디까지나 實用性이 있는 知識의 擴充을 위하여 人間은 끊임없이 努力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實用을 힘쓰는 者가 結局 이기고 허문(虛文)을 崇尙하는 者가 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東·西洋은 서로를 알아야 하며, 알기 위하여 門戶를 開放하고, 서로를 위하여 通商의 길까지 터야 한다는 것을 그는 力說하였다.

事實 이와 같은 그의 主張은 그의 氣(氣)의 形而上學 의 歸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經驗論者다운 氣의 形而上學이 있다. 그 形而上學은 두 가지로 集約할 수 있으니 '待機운화(大氣運化)'論과 '桶민운화(統民運化)'論이 그것이다. 前者는 宇宙 · 自然 에 關한 理論이며 後者는 人間事에 關한 理論이다. 待機운화論이란 宇宙 自體가 氣의 運動 變化로 自然의 理法(理法)을 具現하여 간다는 것이며, 桶민운화論이란 期數(氣數)에 依하여 人間 또는 人類의 興亡 盛衰가 決定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待機운화'와 '桶민운화'는 窮極에 가서 잘 調和 一致해야 하는 것으로 그는 생각한다. 結局 '桶민운화'가 '待機운화'에 調和 一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人間은 그러한 結果를 가져올 수 있도록 興亡 盛衰를 결정짓는 機首를 克服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騎手 克服의 思想 속에 바로 그의 進步主義的 歷史觀이 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예나 只今이 같다 하더라도 例를 버리고 只今을 擇하겠다"고 그는 主張했다. 經驗 知識의 擴充, 實利·實用을 위한 門戶 開放 및 通商論이 모두 이 進步主義的 思想과 關聯된 것으로 보아야겠다.

기와 빛의 屈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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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世上이 온갖 形態의 基로 가득찬 것으로 보고, 소리는 그것이 振動하여 四方으로 퍼져나가는 것이라고 說明했다. 그리고 어떤 物體에 부딛쳐서 기와 소리는 모두 反射된다고 主張하였다. 이런 소리와 氣의 波動을 그는 自身의 著書에서 聖訓 이라고 명명하고 이를 市中에 紹介하였다. 또한 그는 소리와 基 뿐만 아니라 냄새와 色깔에도 이와 비슷한 波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 빛의 屈折現象에 對해서도 렌즈 以外의 다른 例를 들어 說明했다.

崔漢綺는 溫度計 를 다시 國內에 紹介하였는데, 그는 溫度計를 冷熱氣, 濕度計를 음청醫라고 명명하였다.

崔漢綺와 西洋科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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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東西 科學 分野의 長短點을 理解하고 西洋의 發展된 思想, 科學을 朝鮮의 救助에 選擇的으로 受容한다는 생각으로 一貫된 著述을 하였다. 朝鮮의 鎖國은 沈滯된 無發展의 原因이 됨을 指摘하며 個國通常의 必要性을 勇氣있게 論하기도 했다. 基督敎 思想의 侵入도 客과 主人의 자리를 賢明하게 지키면 오히려 德이 된다 하였다.

그는 家門이 沒落하고 平凡한 鄕班으로 安東 金氏 의 勢道에 밀려 벼슬을 持續해 나갈 수 없게 되자 中인 들과 어울리며 視野를 넓혀 나갔다. 서울 로 舞臺를 옮긴 後 譯官 · 庶子 · 平民 出身들과 交流하며 김정호 大東輿地圖 板刻을 돕는 한便 旣存의 觀念論 을 脫皮하고 經驗哲學의 基盤을 닦았다. 그가 提示하는 思考의 方法은 經驗한 바를 基礎로 아직 經驗하지 못한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누구나 自身의 生活 環境과 習慣에 따라 推測하면서 그 삶을 營爲할 수 있다는 推測論이었다.

北京人和黨에서 出版되어 中國人 사이에서도 읽혔던 《 氣測體義 (氣測體義)》는 東洋의 傳統的인 形而上學을 西洋의 發展된 科學 技術과 融合하여 話題를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基側提議》는 그의 著書 <신기통>과 <推測론>을 合쳐 엮었는데 北京에서 刊行된 正確한 經緯는 알 수가 없다. 이 冊은 旣存의 冊과 比較해 特異한 面이 있는데 活字가 豪華판이고 體制가 매우 高尙하게 編輯되어 있다. 《 心氣圖說 (心器圖說)》에선 科學 書籍을 接하며 器具의 改良에 힘썼고, 宇宙觀이나 地球의 自轉論이 根本的으로 變化를 보인 《 地球典要 (地球典要)》는 코페르니쿠스 自轉 空轉 의 內容을 傳하고자 하였지만 中國에 紹介된 冊을 編輯하는 것이 大部分이었다. 그는 얻으려면 옛 것에만 執着해선 안 되며 저마다의 價値가 있으므로 所重히 하며 人事(人事)의 바른 登用度 促求했다.

平坦한 生活에서 1千餘 卷의 冊을 執筆하며 多福한 삶을 살았던 崔漢綺의 끊임없던 著述 活動은 1970年 以後 새로운 視角으로 硏究되어 그의 삶을 통해 歷史의 背景을 배울 수 있으나 現實에 適用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歷史 發展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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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人類의 歷史 는 人間의 主體的, 能動的 努力에 依해 發展하는 것으로 보았다. 變化를 두려워하고 不條理를 改善할 意志가 없다면 發展할 수가 없다고 봤다. 또한 制度와 風俗은 나라와 時代에 따라 當然히 달라지며, 變하는 것이 當然하다고 보고 생각해 事大的·復古的 態度를 反對하였다. 그는 道德的 善惡의 基準은 一部 學者들의 理念, 以上으로 決定되는 것이 아니라, 그 時代의 百姓들이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與否에 따라 決定된다고 하여 民權思想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百姓들의 意識이 成熟되지 못한 社會에서는 少數의 知識人들이 弄奸을 부려서 民心을 造作, 眩惑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그밖에도 封建的 王權을 認定하되, 無條件的인 隸屬에 反對하고 代議制를 志向할 것을 조심스럽게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外國과도 文物交流를 통해 西歐의 좋은 것은 우리도 받아들이고, 攝取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文章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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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漢綺는 文章力, 筆力, 글쓰는 能力 亦是 一種의 타고난 能力으로 解釋하였다. 그는 “文章은 神奇(神氣)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한便 이 신기는 經驗을 통해서도 獲得된다고 보았다. 신기는 知覺하고 經驗하는 活動의 主體로 본 것이다. 그에 依하면 現實에 對한 經驗이 蓄積되어 現實 自體의 生動하는 모습을 表現方法으로 삼는 것이 마땅한 文學이라는 것이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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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年 에서 1867年 까지 飜譯하거나 지은 冊이 無慮 1千餘 卷이나 된다고 記錄되어 傳해지고 있으나, 現在 남아 있는 冊은 20餘 種 120餘 卷이다. 이들은 명남루全集(明南樓全集) 3冊으로 影印本 이 나와 있다.

  • 氣測體義 (氣測體義)》(1836)
  • 講官論 (講官論)》(1836)
  • 《감坪 (鑑平)》(1839)
  • 氣學 (氣學)》(1857)
  • 《농정회요 (農政會要)》
  • 心氣圖說 (心器圖說)》(1842)
  • 氣學 (氣學)》(1857)
  • 《명남루집 (明南樓集)》
  • 認定 (人政)》(1860)
  • 神奇天險 (身機踐驗)》(1866)
  • 《신기통 (神氣通)》(1836)
  • 性器운화 (星氣運化)》(1867)
  • 《小車流竄 (疏箚類纂)》
  • 《습산진벌 (習算津筏)》(1850)
  • 《心氣圖說 (心器圖說)》(1842)
  • 《陸解法 (陸海法)》
  • 《衣裳里數 (儀象理數)》(1839)
  • 《請求徒弟 (靑丘圖題)》
  • 《推測錄 (推測錄)》(1836)
  • 《橫결》
  • 《승순사무(承順事務)》
  • 《향약추인(鄕約抽人)》
  • 《再校(財敎)》

地理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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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萬國警衛地區도 (萬國經緯地球圖)》
  • 《宇宙冊 (宇宙策)》(1857)
  • 地球典要 (地球典要)》(1857)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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養아버지 최광현은 本來 그의 堂叔이었다. 그의 스승 中의 한 名인 한경리는 生家의 外할아버지였다.

  • 曾祖 할아버지?: 崔地菘
  • 할아버지?:??
  • 量 할아버지?:??
  • 親 아버지?: 최치현(崔致鉉)
  • 친 어머니?: 淸州 韓氏(淸州韓氏)
  • 양 아버지?: 최광현(崔光鉉)
  • 孃 어머니?:??
  • 否認?: 반남 朴氏(潘南朴氏)
    • 아들?: 최병대(崔炳大)
      • 孫子?: 최윤행(崔允行)
      • 孫子?: 최윤항(崔允恒, 眞사)
    • 아들?:??
  • 外할아버지?: 한경리(韓敬履)
    • 外從祖父?: 韓經소(韓敬素)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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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길에 나서라는 領議政의 勸告도 拒絶하고, 財産을 圖書 購入에 다 쏟아부어 老年에는 自身의 冊을 抵當 잡혀 먹고살았다. [9] 그러나 그는 歌詞에는 超然하였다. 그렇지만 冊을 얻기만 하면 밤새도록 읽어 잠도 못 이뤘던 그를 同類 社會에서는 失敗한 男性으로 보지 않았다. [9] 그처럼 떠돌이 生活을 하면서 詩를 쓰고, 最新의 中國 著書를 모으는 壁에 빠진 이들도 朝鮮 社會에서는 眞正한 男性으로서의 待接을 받았다. [9] 삶은 困窮하였지만 當時의 사람들은 그를 敗北者라고 烙印찍지는 않았다.

崔漢綺의 思想은 비록 儒敎 倫理 自體를 否定하는 水準까지는 나가지 못하였으나, 性理學 에 對한 盲目的 追從에서 벗어나 實學 의 哲學的 意味를 完成해 實學思想과 開化思想의 橋梁役割을 한 것으로도 評價되고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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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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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00年前에 朴齊家는 經濟民主化의 虛構를 보았다 데일리안 2015.06.21.
  2.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3페이지
  3.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2페이지
  4.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1페이지
  5.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0페이지
  6.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4페이지
  7.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5페이지
  8.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206페이지
  9. 박노자 敎授 (2006年 5月 18日). “‘男子’ 노릇하는 다양한 方法” . 《한겨레21》 . 2015年 5月 11日에 確認함 .  
  10.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198페이지
  11. [冊과 삶] 등 굽은 政丞·애꾸눈의 畫家…固定觀念을 깬 障礙의 歷史 京鄕新聞 2011.11.25
  12. [冊과 삶] 朝鮮 王들에게 ‘權力의 公共性’을 일깨우다 京鄕新聞 2011.08.19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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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한기, 《認定》 (권정안, 이이화 外 驛, 韓國古典飜譯院, 1980)
  • 이우성, 《實施學士産苦:韓國學의 底邊》 (創作과 批評史, 1995)
  • 황경숙, 《惠岡 崔漢綺의 社會思想 硏究》 (聖神女子大學校 出版部, 1992)
  • 이현구, 《氣學의 成立과 體系에 關한 硏究:西洋 近代科學의 流入과 朝鮮 後期 儒學의 變容》(성균관대학교 出版部, 1993)
  • 이건창, 《惠岡최空轉》
  • 이우성, 〈崔漢綺의 家計와 年表〉, 혜암유홍렬박사화갑기념사업위원회, 《유홍렬博士華甲記念論文總》(探究當, 1971)

읽을 距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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氣學 , 氣測體義 , 운화側險 等이 現代語로 飜譯되어 있다.

  • 崔漢綺 硏究서
    • 박희병, 《운화와 近代:최한기 思想에 對한 吟味》
    • 金容沃, 《惠岡 崔漢綺와 儒敎》
    • 임부연, 《丁若鏞 & 최한기》
    • 이종란, 《崔漢綺의 운화와 倫理》
    • 김인석, 《崔漢綺에 길을 묻다》
    • 권오영/손병욱, 《惠岡 崔漢綺》
    • 권오영, 《崔漢綺의 學問과 思想 硏究》
    • 김용헌 外, 《惠岡 崔漢綺》
    • 이현구, 《崔漢綺의 氣哲學과 西洋 科學》
    • 채석용, 《崔漢綺의 社會哲學》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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