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陽 다락골 聖地 宣傳物에 따르면,
朝鮮
時代에는 紅酒(只今의
洪城郡
)골에 屬했으나 只今은
忠南
靑陽郡
화성면 농암리라는 行政 區域名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에서
1821年
6男妹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1791年
辛亥迫害
를 被害 祖父인 최인주가 다락골에서 빈 땅을 開拓하여 살았는데, 天主敎 信者들이 모여들면서 敎友村이 되었다 한다. 天主敎 信者들이 많이 사는 漢陽으로 移徙했다가,
安養
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定着한 崔氏 一家는 이곳에 敎友村을 만들고
1836年
에는 崔良業을 神學生으로
마카오
로 떠나보낸다.
忠淸南道
靑陽郡
出生인 崔良業은 아버지
崔敬煥
(
프란치스코
)와 어머니
이성례
(
마리아
)
1839年
己亥迫害
때 모두 여의었다. 天主敎 聖地인 忠北
堤川
배론聖地
에는 崔良業 神父를 記念한 그림이 있는데, 競技도
수리산
에 살던 中에 檢擧되어 최경환은 獄事, 이성례는 斬首刑으로
殉敎
했다. 어머니 이성례는 막내아들이
監獄
에서 아들인
스테파노
가
굶주림
끝에 죽자 마음이 弱해져 信仰을 撤回하여 釋放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天主敎
神學生
이라는 事實이 밝혀져 다시 收監되자 勇氣를 내어 信仰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
朝鮮
에 남아있던 崔良業의 동생
야고보
가 동생들과 거지꼴을 면하지 못했음에도 엄마를 돌보았는데,
斬首刑
前날에는 동냥하여 가져온 돈을 死刑執行人에게 주고,고통을 덜 받게 單칼에 엄마의 목이 떨어지도록 해달라고 付託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曾祖父인
최한일
때부터 天主敎를 믿어 彈壓을 받았으므로 오랫동안 한 곳에 定着할 수 없었으며, 자주 逃避生活을 해야 했다. 最終的으로 崔良業의 집은 當時 京畿道
과천군
수리산
자락에 자리잡게 되었다.
1836年
열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
의
파리 外方傳敎會
所屬의
宣敎師
人
模倣
神父의 薦擧로
김대건
,
최방제
等과 함께 神學生으로 選拔되어 이듬해 1837年
6月 7日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極東代表部에 到着하여
神學
을 工夫하였다.
피에르 模倣
神父는 朝鮮에서 比較的 가까운 北京神學校나 中國人 新婦養成所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留學을 하게 된 것이었다.
[1]
1837年
11月 26日
親舊
최방제
가 風土病(位熱病)으로 숨을 거두자, 金大建과 崔良業은 神學 工夫에 더욱 沒頭하였다.
1844年
崔良業과 金大建은
副題
敍品을 받고 故鄕인
朝鮮
으로 돌아가기 위해
滿洲
와
內몽골
一帶를 떠돌았다.
1845年
親舊이자 그해
中國
상하이
금가港 聖堂에서 天主敎 朝鮮敎區長人
페레올
主敎의
敍品成事
執典으로
私製
敍品
을 받은 金大建 神父는 入國하였으나, 崔良業은
1846年
1月
에 入國을 試圖하다가 失敗하였다. 그는 同年
12月
에 再次 入國하려고 努力하였으나, 金大建 神父의
殉敎
消息을 듣고
홍콩
으로 移轉한
파리외방전교회
極東代表部로 돌아가 朝鮮의
己亥迫害
때 殉敎한
현석문
의
日記
를 編輯하여 《己亥日記》라는
冊
을 著述하고 이를
라틴語
로 飜譯했다.
[2]
崔良業은
1847年
과
1849年
다시 入國을 試圖했으나 失敗했고,
1849年
淸나라
天主敎會의 江南敎區丈人
마레스카
主敎에게
朝鮮人
으로서는 두 番째로 天主敎
私製
敍品을 받았다. 以後
遼寧省
에서
어린이
들에게
敎理
를 가르치는
主日學校
司牧을 하다가 그 해
12月
鴨綠江
을 건너
朝鮮
으로 들어왔다. 當時
天主敎 朝鮮代牧區
腸(現在
天主敎 서울大敎區
)인
莊祖제프 페레올
主敎와
다블뤼
神父를 만나고 本格的인 司牧 活動을 始作한 崔良業은 6個月 동안
三男地方
5千 里를 돌면서 수많은
天主敎
信者들에게
告解聖事
를 주고
미사
를 奉獻하였다. 그 以後에도 每年 129個의
公所
를 돌며 11年 6個月間 司牧하였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傳한다는 信念을 위해 獻身한 聖職者였다.
朝鮮
에 派遣되는 宣敎師들은 派遣되기 前에 朝鮮의 實情과 風習을 익힐 것을 마카오 神學校 先生이자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極東代表部長인 리브와 新婦에게 主張하였다. 天主敎 信仰이 韓民族의 自主的인 信仰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3]
朝鮮 天主敎會에서는
莊祖제프 페레올
主敎가 天主敎 共同體에서 影響力이 있는 兩班 信者들을 감싸고 도는 바람에, 民衆信者들이 疏外되고 있었음을 崔良業 神父는 페레올 主敎에게 批判했다가 葛藤이 생겼다. 崔良業 神父는
神學
을 工夫한
知識人
이었지만, 學問이 없는
平信徒
들을
한글
로 敎理를 가르치는 細心함으로써 配慮했다.
[4]
崔良業 神父는 社會改革家이기도 했다. 그는
民衆
들의 疏外, 兩班階級의 無爲徒食等을 批判함으로써
身分制度
가 廢止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崔良業은
1861年
6月 15日
嶺南
地方의 司牧 活動을 마치고
主敎
에게 報告하기 위해 上京하던 途中에
過勞
와
장티푸스
로 40歲의 나이에
聞慶
에서 病으로 善終하였다. 그 後
堤川市
배론에 安葬되었으며,
日帝强占期
때 碑石과 墓碑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日本의 妨害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年
光復 以後 碑石과 墓碑를 세웠다.
김대건
神父는 '피의 殉敎者'라 하여
1984年
成人
으로 諡聖되었지만, 崔良業 神父는
殉職
이었기 때문에 諡聖名單에서 除外되었다. 그 後에 '땀의 殉敎者'라는 呼稱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年
부터 韓國 天主敎會에서 불기 始作한 韓國 諡福諡聖運動의 一環으로
2004年
崔良業 神父와 124名의
殉敎者
들을
韓國 天主敎 主敎會議
에서
敎皇廳
에 諡福請願을 해놓은 狀態이다.
2016年
5月 8日 로마
敎皇廳
으로부터 公式 認准을 받아
可敬者
로 宣布되었다.
[5]
崔良業 神父의 삶은
가톨릭평화방송
에 依해
2008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主人公 崔良業 神父 役은
원기준
氏가, 崔良業 神父의 어머니 이성례 驛은
박순천
氏가 맡았다. 崔良業 新婦의 獻身的인 司牧과 天主敎 迫害로 父母를 여읜 人間的인 苦惱를 主로 다루었다.
[6]
드라마 出演을 契機로 원기준氏는 天主敎 잡지 생활성서와 가진 인터뷰에서
前例
가 改革된
第2次 바티칸 公議會
移轉이라
라틴語
로
미사
를 執典하는 場面이 第一 힘들었지만, 天主敎 信者로서 自負心은 있었다고 하였다. 평화방송 드라마 聖 金大建에서는
차광수
氏가 崔良業 神父 및 神學生을 演技했는데,
라틴語
로 파리 外方傳敎會 宣敎師들과 이야기하는 等의 場面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