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5年
朝鮮
太祖
4年, 都邑地
漢陽
에는 漢城府 東部 숭교방
[17]
地域을 基盤으로 하여 새롭게
成均館
을 만들 計劃을 세우고
成均館
을 着工하여
太祖
7年(1398) 7月에 竣工하게 되었는데
成均館
에는 文廟, 明倫堂을 비롯하여 동서재, 正錄所, 養賢庫, 食堂 等의 建物이 있었다.
朝鮮
初期의
成均館
職制는
高麗
의 制度를 그대로 踏襲하여
大司成
1人, 祭酒
[18]
1人, 惡政
[19]
2人, 直講 1人, 全部
[20]
1人, 博士 2人, 直學
[21]
2人, 學諭
[22]
4人 等 都合 22人의 敎授職을 두었다.
그 後
1401年
太宗
元年 7月의 管制 改革 때, 職名 一部를 改正하여 祭酒는 四星(司成)으로, 惡政은 사예(司藝)로, 全部는 主婦 等으로 바꾸었는데,
成均館
官員은 成均館 儒生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가운데 一部는 四部學堂 敎授, 訓導를 겸하여 私學生徒들도 가르쳤고, 또 종학博士를 겸하여 宗親을 敎育하는 일도 맡았다.
成均館
의 職制는
世祖
12年(1466) 1月의 管制 警正(官制更定) 때 縮小되어 ≪
經國大典
≫에 따르면,
成均館
의 丈人 知成均館事는
大提學
이 예겸하고, 그 아래
冬至使
2人은 兼官이었으며, 大司成 1人, 四星 2人, 사예 3人, 直講 4人, 全的 13人, 博士 3人, 虐政 3人, 學諭 3人, 학록 3人 等 38人의 官員으로 文廟의 釋奠祭와 儒生의 敎育을 맡았다.
한便
成均館
儒生의 庭園은 生員, 進士 1百 人, 記載 1百 人 都合 2百 人이었으며, 當時 이들의 經費는 養賢庫와
成均館
에 주어진 電池 및 이를 耕作하는 奴婢로 充當되었다.
成均館
은 이렇듯 舊韓末
甲午更張
(1894) 때까지
朝鮮
의 最高 敎育機關이었는데
1910年
8月 國權피탈로
大韓帝國
의 國權을 日帝가 빼앗자
1920年
6月 100餘 名의
獨立運動家
들이 財團法人 《朝鮮敎育會》를 勃起하고 '
朝鮮民立大學設立運動
'을 展開하여 綜合大學의 設立을 推進하였다.
이에 日帝가
韓國人
의 高等敎育機關을 막을 目的으로
1924年
日本 政府가 서울(當時 京城府) 연건동에 綜合大學으로 《
경성제국대학
》을 세웠다. 後에
경성제국대학
이 서울과 그 近郊 9個 專門學校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綜合大學校로 設立한다는 內容의
1946年
7月 13日
에 發表된 國立
서울大學校
設置 方針으로 觸發한 '國立
서울大學校
設置案(
국대안
) 波動을 겪게 되면서
1946年
8月 22日
을 設立일로 하여 國立
서울大學校
로 다시 誕生하였다.
또한 예부터 이 地域에 鄕校 가 있어 ‘교동’으로 불렸던 종로구는
1908年
西北 出身의
박은식
,
李甲
,
이동휘
,
안창호
等이
西北學會
를 만들고 募金을 통한 會館 建立을 計劃, 着手하여 33名의 共同 所有로
낙원동 282番地
에 建物을 지었다.
當初
西北學會
는 日帝의 强壓策으로 國權回復運動이 어려워짐에 따라
관서지방
(평안남북도·黃海道)의 서우學會(西友學會)와
關北地方
(함경남북도)의 漢北興學會(漢北興學會)가 統合해
1908年
1月 組織한 愛國啓蒙運動 團體로, 國權을 回復하고 人權을 伸張하여 立憲共和國을 樹立하는 데 目的을 두었다.
當時
서우學會
는
박은식
(朴殷植)·김병희(金秉熹)·신석하(申錫廈)·장응량(張應亮)·김윤옥(金允玉)·김병일(金秉一)·김달하(金達河)·김석환(金錫桓)·金明俊(金明濬)·곽윤기(郭允基)·김기주(金基柱)·김유탁(金有鐸) 等이 勃起하였다.
漢北興學會
는 오상규(吳相奎),
李儁
(李儁), 幽眞號(兪鎭浩), 설태희(薛泰熙), 이동휘(李東輝), 이종호(李鍾浩), 강용구(康瑢九), 윤익선(尹益善), 이재성(李載聖), 태명식(太明軾), 주우(朱瑀), 김주병(金炳), 양효건(楊孝健), 강윤희(姜玧熙), 정진홍(鄭鎭弘) 等이 設立하였다.
組織은 서우學會와 漢北興學會를 土臺로 서울에 總事務所를 두고, 31個 地域에 支會를 設置하는 한便 69個 地域에 學校를 두었다. 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黃海道의 新興市民層을 中心으로 構成되었으며, 會員은 2,500餘 名이었다.
西北學會
의 建物은
淸나라
技術者를 불러들여 지었고 當時에는 보기 드문 現代式 建築物이어서 長安의 話題가 되기도 했다. 또한 33名의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 색다르다.
[23]
工事期間을 거쳐
1908年
11月 2日
에 竣工되었다.
낙원동
敎師는 3層 洋屋이었는데 3層이라지만 1層은 半地下다. 延建坪 395坪였으니
1886年
서울
中區
貞洞
에 建坪 200坪 規模의 韓式 기와집에서 始作된 草創期
梨花學堂
보다는 훨씬 컸다. 여기서
檀國大
와
建國大
(設立認可 順)가 胎動하고
國民大
는 設立 期成會의 臨時 事務室로 썼다.
이보다 例로 더 거슬러 올라가면
高麗大學校
의 前身인
보성전문학교
와
西北協成學校
도 한 때 이 建物에서 배우고 가르쳤는데 '鍾路 낙원동 敎師'로 불리면서
서울大學校
가 있었던 혜화동 大學路(
마로니에 公園
)와 더불어 大學街에서 꽤 알려졌던 곳이다. 由緖 깊은 '鍾路 낙원동 敎師'로 新興 私學의 産室이었기 때문이었다.
[23]
以後 '鍾路 낙원동 敎師'였던 西北會館은 以後 百貨店의 박흥식이 理事長으로 있으면서 運營하다 민중병원을 運營하던
咸鏡南道
端川 出身의
建國大
設立者 유석창에게 建物의 所有가 넘어갔다. 以後
1977年
建物은 都市計劃으로 撤去·解體,
1985年
建國大學校
校庭안으로 移轉·復元되어 現在 군자동
建國大
內의 尙虛記念館으로 活用하면서
登錄文化財
第53號 '西北學會會館(西北學會會館)'으로 登錄되어 있다.
參考로
大學
50年史
[24]
를 보면 大學設立의 祕事를 어느 程度 살펴볼 수 있는데 解放後 새롭게 定立한 '民族正氣'로
1946年
8月 22日
을
서울大學校
의 '開校日'로 잡아 只今까지 記念해 오고 있듯이 設立 認可書를 基準으로 2年制
專門大學
形式이던
李花女子專門大
가 申請日子가
1946年
6月 24日
로 記錄된 第1號 認可書를,
演戱專門大
는
1946年
7月 31日
部로 記錄된 第2號 認可書를 美軍政廳 學務局으로부터 받았고
寶城專門大
는 申請日子가
1946年
8月 5日
部로 記錄된 第3號 認可書를 받아
8月 15日
,
高麗大學校
라는 綜合大學 昇格의 法律的 土臺를 마련했다는 記錄이 남아있다.
亦是
專門大學
의 形態로 運營되던 鍾路區
惠化洞
의
혜화專門學校
(惠化專門學敎)가
1946年
9月 20日
,
東國大
로 設立認可를 받았고 鍾路區
명륜동
의
명륜專門學校
(明倫專門學敎)는
1946年
9月 25日
,
成均館大
로 設立認可를 받았는데, 鍾路區
낙원동
의
檀國大
는
1947年
11月 1日
에
光復
最初 4年制 大學으로 正式 設立認可를 받았다.
1948年
에는
淑明女大
,
中央大
,
漢陽大
,
國民大
,
1949年
에는
建國大
,
弘益大
가 設立認可를 받았으며
1949年
에 가인가를 받았던
慶熙大
는
1952年
에 正式 設立認可를 받았고 日帝때
平壤
에 있다가 廢校되었던
崇實大
는
1954年
4月 15日
, 當時
문교부
로부터 正式 設立認可를 받았다.(
韓國大學新聞
의
光復
以後 正規大學 設立認可 現況(
1946年
~
1954年
) 參照)
[24]
[25]
[26]
敎育機關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