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조용만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조용만

大韓民國의 英文學者, 記者, 文學家 兼 隨筆家

조용만 (趙容萬, 1909年 3月 10日 ~ 1995年 2月 6日 )은 大韓民國 의 英文學者, 記者, 文學家 兼 隨筆家이다. 號는 아능(雅能)이다.

조용만
趙容萬
作家 情報
出生 1909年 3月 10日
{大韓帝國 漢城府 鍾路
死亡 1995年 2月 6日 ( 1995-02-06 ) (85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國籍 大韓民國
職業 小說家, 飜譯文學家, 영문학자
學歷 경성제국대학교 英語英文學科
經歷 高麗大學校 名譽敎授
延世大學校 招聘敎授
活動期間 1932年 ~ 1995年
장르 小說
父母 조재혁(簿)
親知 오세창 (外從祖父)

生涯 編輯

조용만은 서울 出生이다. 父親 조재혁은 大韓帝國의 外國語 敎育機關인 司譯院 判官이었고 조용만이 태어날 무렵 韓日合邦으로 일자리를 잃었다. 外曾祖父 오경석 은 19世紀 中盤 譯官으로 北京과 天津을 十數次例 오가며 開化思想을 김옥균 等에 傳播한 初期 開化派였다. [1]

이런 家族 背景으로 인해 조용만은 外國文化와 英語에 關心을 가졌다. 京城第一高普(現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교 英文科를 나왔다.

1932年 大學 나온 後 1年 間 無職으로 지내다 1933年 《 每日申報 》 學藝部(오늘날의 文化部) 記者로 就職했다. 以後 解放때까지 10餘年 間 學藝部 記者로 일하며 當代의 文段, 美術界, 映畫界, 音樂界 等 文化藝術人들과 交友하고 그들의 作品을 新聞에 揭載했다. 1933年 에는 異常(李箱), 박태원, 鄭芝溶, 金起林, 이효석, 李泰俊 等과 함께 純粹文學을 標榜하는 具仁會 를 組織해 活動하기도 했다. 1945年 무렵에는 學藝部長을 지냈다. 新聞社에서 일하는 同時에 1933年부터 1942年까지 서울驛 앞 세브란스醫學專門學校 에서 醫大 學生들을 對象으로 英語를 가르쳤다.

조용만이 일했던 每日申報는 大韓帝國時節인 1904年 英國人 排設(Bathel)李 만들었으나 韓日合邦 以後 朝鮮總督府 에 買入돼 機關紙 役割을 했다. 1940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總督府에 依해 强制廢刊된 後 남은 唯一한 韓國語 新聞이었다. 조용만은 學藝部 記者生活 當時 文化藝術, 家庭面을 擔當했다. 1942年 2月 中日戰爭에 反對하는 反戰思想을 담은 隨筆家 金晉燮의 글 <아즉은 念慮없다>를 每日申報에 揭載한 것이 日本 軍部에 發覺되어 總督府에 依해 해임당했다. 같은 해 6月에 囑託(契約職)으로 再入社해 寫眞 畫報集인 《매신寫眞旬報》編輯을 맡았다. [2]

그런가하면 總督府 機關紙 職員으로 親日的인 行步도 보였다. 2次大戰 勃發 以後인 1939年엔 문학인 250餘名이 이름을 올린 親日團體 朝鮮文人協會 에 參與했다. 또 日本語로 쓴 戱曲 《鑛山의 밤( 日本語 : 鑛山の夜 )》(1944)을 親日 文學雜誌 《 國民文學 》에 發表했다.

조용만은 解放 後인 1945年 9月 23日 '《 每日申報 》는 總督府 機關紙로서의 過去를 反省한다'는 內容의 反省文을 直接 쓰고 從業員 一同 이름으로 新聞에 실었다. [3]

그는 또 解放 後 出刊한 言論 寄稿와 隨筆集 <30年代의 文化藝術人들> 等에서 每日申報에서 일했던 데 對해 '몸을 팔았다'는 뜻의 '매신'이라는 말로 自身과 同僚들을 批判하고 謝過했다.

625事變 前後로 조용만은 京鄕新聞, 英字新聞 《 코리아타임스 》, 國道新聞의 主筆과 《 서울新聞 》의 論說 委員을 지냈고, 서울대와 중앙대에서 英語를 가르쳤다. 1953年 부터 1975年 停年退職때까지는 高麗大學校 英文學科 敎授로 在職했다. 圖書館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退任 後 洞 大學 名譽敎授로 있다가 1995年 老患으로 死亡했다.

조용만은 스스로 創作 活動을 하기도 했다. 京城帝國對 在學 中 雜誌 《동광》에 東學運動을 다룬 戱曲 〈가보세〉를 發表하면서 文壇에 登壇했다. 그는 作品數는 많지 않으나 知識人을 主人公으로 삼은 小說을 主로 썼다. 625事變 直前에 첫 創作集을 내기 위해 原稿를 印刷所에 맡겼으나 戰爭 中 消失되었다는 逸話가 있다. 이 事件의 餘波로, 또 切親하던 具仁會 時節의 同僚들인 정지용 , 박태원 , 이태준 이 戰爭 中 越北한 以後로는 創作에 消極的이 됐다. 老年엔 젊은 時節 學藝部 記者로 일하며 보고 듣고 겪었던 日帝時代 韓國 文化藝術界의 모습을 詳細히 敍述한 《젊은 藝術家들의 肖像》《30年代의 文化 藝術人들》, 《京城野話》, 《九人會 만들 무렵》等 에세이集을 飼料로 남겼다.

그는 韓國의 初期 英文學者 中 한 名으로 多樣한 영미文學을 韓國에 처음 紹介했다. 飜譯物로 《셜록 홈즈》《피글위글 아주머니》《막다른집 1番地》《두時線驛(杜詩選譯)》 《人間의 굴레》 《砲 短篇小說》《타고르視線》《近代英國戱曲選》, 기타 著書에 《文學槪論》 《六堂 崔南善》 《日帝下의 文化運動》 等이 있다.

獨立運動家이자 書畫家인 葦滄 오세창 이 그의 外從祖父다.

事後 編輯

2002年 公開된 親日 文學인 42人 名單 2008年 民族問題硏究所 가 選定한 친일인명사전 收錄豫定者 名單 에 選定됐다. 2002年까지 밝혀진 親日 作品 數는 小說 3篇과 其他 寄稿文 5篇, 總 8篇이었다. [4] 2005年 高麗大學校 校內 團體 日帝殘滓淸算委員會가 發表한 '高麗大 100年 속의 日帝殘滓 1次 人物' 10인 名單에 들어 있으며 [5] 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 가 發表한 親日反民族行爲 705人 名單 에도 包含되었다.

參考資料 編輯

  • 권영민 (2004年 2月 25日). 《韓國現代文學大辭典》.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909쪽쪽. ISBN  8952104617 .  
  • 反民族問題硏究所 (1994年 3月 1日). 〈조용만?: 親日 人事에서 文壇 ?言論界의 元老로 (김윤재)〉. 《淸算하지 못한 歷史 3》. 서울: 청년사. ISBN  9788972783145 .  

各州 編輯

  1. “韓半島 百年(15) 譯官 吳慶錫” . 京鄕新聞. 1972.  
  2. 鄭鎭奭 (2007). 《極祕 朝鮮總督府의 言論檢閱과 彈壓》 . 《커뮤니케이션북스》.  
  3. 鄭雲鉉 (2010). “慶南道民一步 ‘反省文’ 契機로 본 言論社 反省文” . 《보림再》.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 김재용 (2002年 8月). “親日文學 作品目錄” . 《실천문학》 (67號): 123~148쪽.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7年 9月 1日에 確認함 .  
  5. “古代 總學 ‘親日行跡’ 10名 發表” . 한겨레. 2005年 3月 28日 . 2008年 5月 4日에 確認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