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子 時節 및 卽位
編輯
文宗은
世宗
과
소헌왕후
의 莊子로 出生하여
1421年
7歲의 나이에 王世子로 冊封되었다.
1429年
(世宗 11年) 家禮를 올렸으나 첫 番째 世子嬪
諱祕 金氏
는 世子의 사랑을 얻으려 呪術을 利用하다가 發覺되어 廢位되었고, 두 番째 世子嬪
순빈 奉氏
는 暴力的인 性品에, 나인 小雙과 同寢하는 等
同性愛
氣質을 보여 廢位되었다. 以後 後宮이었던
承徽 權氏
를 世子嬪으로 맞이하였으나 世子嬪 權氏는
1441年
斷種
을 낳은 지 하루만에 産後病으로 죽고 말았다.
[1]
文宗은 世子 時節
世子師
(世子師)
河演
을 스승으로 삼고 學問을 닦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人品이 寬大하고 厚하여 누구에게나 좋은 소리를 들었으며 學問을 무척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世界 最初의 定量的 降雨量 測定器인 測雨器를 發明
[2]
할 程度로 天文學과 算術에 뛰어난 能力을 보였다.
[3]
1421年
부터
1450年
까지 29年間 王世子로 지내는 동안, 아버지 世宗의 政治를 補筆하였다. 文身과 武臣을 골고루 登用하였으며,
言官
의 言論에 對해 寬大한 政治를 폄으로써 言論을 活性化해 民心을 把握하는 데 힘썼다.
1442年
(世宗 24年) 世宗이 病床에 누워 國情을 다스릴 수 없게 되자 世宗을 代身하여 8年間의
代理淸淨
期間 동안 國事를 處理하다가
1450年
陰曆 2月에 世宗이 昇遐하자 王으로 卽位하였다. 이미 代理淸淨을 한 德分에 空白期間 동안 情事 處理에 問題가 없었다. 世宗은 生前에 문종을 念慮하여 病席에서도 自身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當時 世子였던 文宗 亦是 病弱하였기 때문에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豫想을 하고
集賢殿
學士들을 불러 世孫의 앞날을 付託하였다.
在位 期間
編輯
1450年
3月
에 卽位하여 바로
明나라
에 冊封 奏請使를 보냈고, 그해
陰曆 5月
明나라
로부터 冊封 誥命을 받아 正式 國王으로 卽位하였다. 文宗은 在位 期間 동안 言論의 活性化와 歷史冊 編纂, 兵法의 整備 等의 業績을 남겼으며, 悠然함과 剛함을 竝行하는 政治를 實施하려고 했다.
文宗은 6品 以上까지 輪對를 許諾하는 等 下級 官吏들의 말도 빠짐없이 傾聽하는 等 열린 政策을 펴는 한便, 《
東國兵鑑
》, 《
高麗史
》, 《
高麗史節要
》 等을 編纂하였다. 文宗은 歷史와 兵法을 整理함으로써 社會 基盤을 정착시키고 制度를 確立하고자 하였다.
文宗은 王世子 時節에 進法을 編纂했을 만큼 國防에도 關心이 많아서 兵力 增大를 통해 兵法의 整備와 國防의 安定을 꾀하려 하였다. 또
太宗
때 만들었던
火車
를 새롭게 開發하여 或是나 있을 戰爭과 國防에 對備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世宗과 어머니의 三年喪을 連續的으로 치르는 바람에 健康이 急速度로 惡化되어 世宗의
顧命大臣
이었던
김종서
가 暫時 攝政을 맡았다. 그러다가 結局 卽位한 지 2年 3個月 만인
1452年
陰曆 5月에 37歲를 一期로
景福宮
천추전에서 昇遐하였다.
文宗의 御眞에 關한 逸話
編輯
死亡으로부터 180餘 年이 흐른 뒤인 1636年(仁祖 14年)
丙子胡亂
이 끝난 뒤의 일이었다. 大臣들이
璿源殿
에서 어떤 王의 肖像畫를 發見했는데 肖像畫 속의 그 王은 길고 짙은 턱鬚髥이 描寫되어 있는, 風采가 크고 堂堂해 보이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이 일을 두고 朝廷 大臣들은 肖像畫 속의 人物이 朝鮮 第 12代 임금인
人種
이라고 主張하는 代身들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大臣들 사이에 論爭이 벌어졌다. 그러다 한 大臣이 그 肖像畫의 뒷面에 있는 褙接을 뜯어보니 '文宗大王御眞(文宗大王御眞)'이라 적혀 있었다 한다.
家族 關係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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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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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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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沒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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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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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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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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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왕후
權氏
顯德王后 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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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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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年 - 144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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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山府院君
권전
花山府院君 權專
해령夫婦인
崔氏
海寧府夫人 崔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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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祖 3年(1457年) 廢庶人
中宗 8年(1513年) 復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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肺世子嬪
編輯
爵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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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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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沒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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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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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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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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肺諱祕
金氏
廢徽嬪 金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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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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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年 -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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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문
金五文
淸州 鄭氏
淸州 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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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 9年(1427年) 王世子빈 冊封
世宗 11年(1429年) 廢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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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子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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肺순빈
奉氏
廢純嬪 奉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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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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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4年 - 沒年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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蓬廬
奉礪
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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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宗 11年(1429) 왕세자빈 冊封
世宗 18年(1436年) 廢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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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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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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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沒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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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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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偶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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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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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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端宗大王
端宗大王
魯山君
魯山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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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
弘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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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年 - 1457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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顯德王后 權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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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
宋氏
定順王后 宋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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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6代 國王
世祖 3年(1457年) 廢位
肅宗 24年(1698年) 復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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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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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君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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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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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容 鄭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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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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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君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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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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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宮 張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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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宗이 登場하는 作品
編輯
- 《
파천무
》 (
KBS
, 1980, 俳優:
백윤식
)
- 《
설중매
》 (
MBC
, 1984, 俳優:
임정하
)
- 《
파천무
》 (
KBS
, 1990, 俳優: 홍승일)
- 《
한명회
》 (
KBS
, 1994, 俳優:
송승환
)
- 《
王과 비
》 (
KBS
, 1998, 俳優:
전무송
)
- 《
大王 世宗
》 (
KBS
, 2008, 俳優:
李相燁
,
江빛
,
오은贊
)
- 《
公主의 男子
》 (
KBS
, 2011, 俳優:
정동환
)
- 《
仁粹大妃
》 (
JTBC
, 2011, 俳優:
선우재덕
)
- 《
蔣英實
》 (
KBS
, 2016, 俳優:
한정우
,
최승훈
)
- 《
大君-사랑을 그리다
》(
TV조선
, 2018, 俳優:
송재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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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編輯
- ↑
[1]
世宗 23年(1441) 7月 23日 1番째 記事. 왕세자빈 權氏가 元孫을 낳아 對赦免令을 내리다. ,
[2]
世宗 23年(1441) 7月 24日 1番째 記事. 왕세자빈 權氏가 卒하여 條例(弔禮)를 行하다
- ↑
[3]
, 世宗實錄 世宗23年(1441年) 4月乙未(陽曆 5月 19日), '近年 以來로 世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젖어 들어 간 푼수[分數]를 땅을 파고 보았었다. 그러나 的確하게 비가 온 푼수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宮中(宮中)에 두어 빗물이 그릇에 怪人 푼수를 實驗하였는데'라는 測雨器에 關한 첫 技術이 나옴.
- ↑
[4]
,
東亞日報
1957年 2月 8日, 政府가
1957年
2月 第19次 國務會議에서 5月19日을 發明의 날로 定한 것은 文宗이 測雨器를 發明했다는 技術이 陰曆 4月29日(陽曆 5月19日)에 처음으로 登場했다는 點에서 由來函.
- ↑
《
世宗實錄
》 45卷, 世宗 11年(1429年 名 선덕(宣德) 4年) 7月 20日 (甲子)
勤政殿에서 賃金이 諱祕 金氏의 肺빈에 對해 下校하다
- ↑
《
世宗實錄
》 75卷, 世宗 18年(1436年 名 正統(正統) 1年) 10月 26日 (戊子)
두 番째 世子嬪 奉氏를 廢黜시키다
- ↑
《파평尹氏世譜》
- ↑
가
나
〈소헌왕후 영릉 指紋〉
王世子嬪權氏, 贈議政府左議政專之女, 生元孫及平昌郡主而早卒。 司則 楊氏生一女, 宮人張氏生一男, 鄭氏生一男, 皆幼
왕세자빈 權氏(
현덕왕후
)는 增 議政府 左議政
前
(專)의 딸인데, 元孫(
斷種
)과 平昌郡週(
경혜공주
)를 낳고 일찍 卒(卒)하였고,
四則 양氏
는 딸 하나를 낳았고, 宮人 張氏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鄭氏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 ↑
《
世宗實錄
》 59卷, 世宗 15年(1433年 名 선덕(宣德) 8年) 3月 3日 (丙辰)
東宮의 딸이 죽었다.
卷 承徽
(權承徽)의 몸에서 낳았는데 禮曹로 하여금 염장(斂葬)하게 하였다. 賃金이 知申事 안숭선에게 묻기를,
"장사한 뒤에 무덤을 지키는 種을 定할 것인가."
하니, 숭선이 아뢰기를,
"나이가 한 살이 차지 못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무덤을 지키오리까. 3年을 한하여 朔望(朔望) 및 俗節(俗節)에만 前(奠)을 行함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 ↑
1482年 以前
- ↑
《
世宗實錄
》 106卷, 世宗 26年(1444年 名 正統(正統) 9年) 12月 4日 (己酉)
承徽 洪氏
(承徽 洪氏)의 딸이 죽으니, 나이 4살이었다.
- ↑
《
文宗實錄
》 9卷, 文宗 1年(1451年 名 경태(景泰) 2年) 8月 12日 (丁丑)
王女(王女)가 卒(卒)하였다. 나이는 2世인데
宮人 양氏
(宮人 楊氏)의 所出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