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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洞等處行中書省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貞洞等處行中書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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貞洞等處行中書省 ( 韓國 漢字 : 征東等處行中書省)는 元나라 韓半島 高麗 를 對象으로 設置한 特需 行中書省 이다. 줄여서 征東行省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元나라의 다른 行中書省과 달리 征東行省의 次官은 高麗 國王이 兼任했기 때문에, 高麗는 이를 통해 獨立을 維持할 수 있었다. [1] 1271年 몽골 帝國 南宋 을 征服한 以後 日本 征服을 위해 設置했다.

變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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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遠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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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가 元나라와 强化하여 復屬된 後에 當한 첫 試鍊은 日本 征伐 이었다. 일찍부터 元나라는 考慮를 利用하여 日本에게 朝貢(朝貢)받기를 願하였다. 한便 南宋 攻掠에 對한 戰略으로서 海上을 利用하여 宋나라와 交通이 頻繁한 高麗와 日本을 利用하려 한 듯하다.

第1次 遠征은 1274年 ( 충렬왕 卽位年)에 行해졌다. 高麗의 김방경 은 中軍將(中軍將)이 되어서 援軍과 함께 出戰하였으나 이 遠征은 失敗하였고 1281年 (忠烈王 7年)의 第2次 遠征마저 颱風 탓에 失敗했다. 두 次例에 걸친 遠征은 高麗를 莫大하게 해롭게 했고 農民들이 이 새로운 動員으로 입은 慘狀은 形言키 어려웠다.

高麗 王室의 變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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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보다 重要한 것은 元나라로 말미암아 招來된 高麗 王室의 變質이었다. 當時 元宗은 兵力을 빌려 林衍(林衍) 富者를 打倒하고 三別抄의 大夢 抗爭 을 鎭壓하였고 王權을 强化하려고 元나라 帝室(帝室)의 公主를 整備(正妃)로 삼았고 그 비의 몸에서 난 아들을 原則으로 王을 삼았다. 말하자면 高麗는 元나라의 駙馬國(駙馬國) 卽 屬國(屬國)이 되었다. 그 後에 歷代 王은 世子로 있을 때에는 禿顱火(禿魯花, 볼모)로서 北京에 머물다가 卽位하게 되었다. 또한 王은 몽골式 이름을 갖게 되고 몽골式 辮髮(?髮)과 衣服을 입었으며, 일상샐활에서 몽골語를 使用하였다. 元나라 皇帝가 高麗 王을 卽位하게 하거나 廢位하게 하였고 死刑하거나 귀양 보내기도 했다.

이제 高麗의 王은 獨立된 國家의 統治者가 아니라 帝國 원의 一介 諸侯가 되었고 이것에 따라서 高麗 王室도 그 格이 낮아졌다. 王은 組(祖)나 종(宗)을 붙여서 廟號(廟號)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 代身 ‘왕(王)’字를 使用하게 되었다. 게다가 元나라를 向한 忠誠心의 뜻으로 ‘衝(忠)’字를 덧붙였다. 짐(朕)은 故(孤)로, 陛下(陛下)는 殿下(殿下)로, 太子(太子)는 世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格下되었다. 王位의 敝笠(廢立)을 元나라가 左右하는 일이 잦았다. 官制도 많이 縮小·改編·廢合되어, 忠烈王 때는 3星(三省)李 統合되어서 僉議府 로, 都兵馬使가 都評議使司 로 改稱되었다. 또 吏部(吏部)·禮部(禮部)를 합쳐서 典理司(典理司)로, 戶部(戶部)는 判圖司(版圖司), 兵部(兵部)는 軍簿司(軍簿司), 兄夫(刑部)는 典法司(典法司)로 하였으며, 工夫(工部)는 없앴다. 한때 충선왕 은 이 官號(官號)를 復舊시키려고 하였으나 失敗했다.

王朝의 維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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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變化에도 高麗朝는 元나라의 屬國으로서 維持 可能했다. 元나라는 征東行省 을 利用하여 高麗를 直接으로, 間接으로 干涉하기도 했으나 高麗 君臣의 反對로 效果는 적었다. 또 元나라는 高麗의 領土에 雙城摠管府 , 東寧府 를 두었고 濟州에 耽羅摠管府 를 設置했는 바 考慮는 雙城摠管府를 除外하고는 이것을 나중에 되돌려 받았다.

朝貢 要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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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은 여러 名目을 붙여서 高麗에 金·銀·포백(布帛)·穀物·人蔘·海東靑(海東靑, ) 等 經濟에 관계되어 徵求(徵求)하였고 甚至於 處女·宦官(宦官)을 要求하기도 하였다. 海東靑의 徵求에 應하여 널리 設置된 鷹坊 (鷹坊)은 여러 가지 弊端을 낳았다. 이리하여 農民은 高麗와 元나라에 義務와 責任을 二重으로 負擔했다. 그 結果 農民은 流民이 되어 笑劇으로 反抗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 高麗의 貴族은 莫大한 農場을 所有하고 遺民을 모아다가 이것을 耕作시켰다.

瀋陽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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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과의 사이에 惹起된 새로운 政治 問題는 南滿洲 一帶를 管轄하는 瀋陽王 과의 關係였다. 이러한 高麗 王族의 瀋陽王 任命은 그 地方에 居住하는 考慮民의 統制에 便할 뿐만 아니라 高麗를 牽制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 結果 高麗 王과 瀋陽王 사이에 對立이 發生하였다. 이러한 것은 元나라가 바라던 以夷制夷(以夷制夷) 政策이 그 目的을 達成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元나라의 對高麗 政策에서 注目되어야 할 點의 하나이다.

元나라로부터 主權 回復과 改革 推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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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社會의 問題를 바로잡으려는 改革은 元나라 勢力을 逐出하기 前에도 試圖되었으나 成果를 거둘 수 없었다. 1298年 에 忠烈王으로부터 線위 를 받은 충선왕 은 卽位 敎書를 利用해 人事 行政과 土地 兼倂 問題 等 國政 全般을 한 改革하려는 意志를 闡明하였다. 그는 정방 을 廢止하고 詞林院(詞林院)을 設置하여 改革을 推進하는 一邊, 管制를 全般에 걸쳐 改正하였다. 그러나 部員 勢力이 中心이 된 旣得權 勢力의 策動과 元나라의 干涉에 따라 그 사람이 廢位되고 忠烈王이 再卽位해서 改革 政治는 失敗하고 官制 改革도 原點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충목왕 (忠穆王) 卽位( 1344年 ) 後에는 改革 專擔 部署인 整治都監 (整治都監)이 設置되어 改革이 推進되었으나( 1347年 ) 이것도 部員 勢力의 妨害와 元나라의 干涉으로 失敗하고 말았다.

中央 朝廷의 政治는 漂流하였지만, 社會像으로는 새로운 社會 主導層인 新興 士大夫層(新興 兩班)李 成長하고 있었다. 加重되는 收奪에서 살아남으려는 農民들의 自救 努力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新興 士大夫들의 새로운 農書(農書)의 編纂 等에 힘입어 農業 技術이 發達되어 農業 生産이 增加하였다. 地方에 生活 基盤을 둔 소 豪族 地主層이었던 新興 士大夫들은 農業生産力 增加로 새로운 經濟力을 갖추었다. 新興 士大夫들은 先代가 地方의 鄕吏 出身인 때가 잦았다. 그 사람들은 過去에 及第하거나 軍功(軍功)을 쌓아 文武品 管理職을 獲得하였고 思想으로는 新儒學(新儒學), 卽 朱子學의 素養을 갖춘 知識層이었다. 이 사람들은 漸次 中央에 進出하여 勢力이 擴大되었고 社會問題의 改革을 熱望하였다.

元나라에 統治받은 지 70餘 年이 지난 1351年 공민왕 이 卽位하여 원 勢力을 逐出하면서 改革은 本格化하였다. 恭愍王은 政房을 革罷하여 人事 行政을 正常化하고 新興 士大夫들을 起用하였다. 또한 그 사람은 田民辨正都監(田民辨整都監)을 設置하여 土地 兼倂과 良民의 不法에 토대한 奴婢化를 是正하는 改革에도 着手하였다. 恭愍王 5年( 1356年 )에는 기철 (奇轍) 等의 部員 勢力들이 處斷되고 征東行省의 이문소(理問所)가 革罷되었으며, 雙城摠管府 地域이 武力으로 收復되었다. 또한 元나라의 壓力으로 變更된 官制의 大部分이 3星·6部 等 本來 管制로 一旦 復舊되었다. 恭愍王은 이처럼 元나라에 正面으로 맞서는 一邊, 元나라에 反旗를 들고 새로이 일어난 明(明) 나라에 使臣을 派遣하여 親命 政策을 推進하였다.

親元 勢力은 逐出됐지만, 土地 兼倂과 良民의 不法 奴婢化 等을 相對로 삼은 改革은 權門勢族이 反撥해서 失敗했고 이 時期에 高麗는 元나라에서 叛亂했다가 敗退한 紅巾賊(紅巾賊)의 두 次例에 걸친 寢具( 1359年 · 1361年 )를 擊退하고 元나라의 侵攻도 물리치긴( 1363年 ) 했지만, 恭愍王이 改革을 推進하는 데는 亦是 負擔스러웠다.

恭愍王은 在位 14年( 1365年 )부터 旣得權層과 連結되지 않은 寒微한 出身의 僧侶 辛旽 (辛旽)을 起用하여 改革을 果敢히 推進하였다. 權臣들이 政權에서 逐出되고 新興 士大夫 出身들이 大擧 起用되었다. 또한 再設置된 田民辨正都監이 活性化해 權門勢族이 奪取한 土地들이 元 主人에게 返還되고 奴婢로서 抑鬱한 事情을 呼訴하는 사람들이 良民으로 解放하기 始作했으나 改革을 이끌던 辛旽이 權門勢族들의 反撥과 自身의 失策으로 除去당하고 공민왕마저 疑問의 詩該當하여(1374) 이 改革도 失敗로 끝났다. 이처럼 恭愍王의 內政 改革은 失敗했지만, 그 過程에서 新興 士大夫들이 中央 政界에 大擧 進出하여 勢力을 키움으로써 다음 段階 改革의 基礎가 되었다.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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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臺朝鮮半島征東行省硏究》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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