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만   중국   일본 
전주종합경기장 野球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전주종합경기장 野球場

전주종합경기장 野球場 (全州綜合競技場 野球場 Jeonju Baseball Stadium)은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德津區 덕진동 1街에 位置한 전주종합경기장 내 野球場이다. 줄여서 全州 野球場 으로 부르기도 한다.

전주종합경기장 野球場
原語 名稱 Jeonju Baseball Stadium
位置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德津區 덕진동 1街 1220-1
氣功 1963年 3月 18日
開場 1963年 9月 25日 [1]
保守 1987年
撤去 2022年 12月
所有 全北特別自治道 全州市
建設 費用 1億 225萬원(1963年 當時)
表面 天然잔디
規模 左右 98m, 中央 110m
펜스 높이 = 2.1m (鐵網設置 後 5.8m)
收容 人員 10,000名
使用處 해태 타이거즈 (1982年~1989年)
쌍방울 레이더스 (1990年~1999年)
Map

過去 해태 타이거즈 가 第2 홈구장으로 使用했고, 全北特別自治道 地域 緣故 팀이었던 쌍방울 레이더스 의 메인 홈구장으로도 使用되었다. 이 곳은 月明綜合競技場 野球場 과 더불어 全羅北道 地域에 存在하는 野球場이다.

光州廣域市 , 全羅南道 , 全羅北道 를 緣故로 하던 해태 타이거즈 1982年 創團 時節부터 광주무등경기장 野球場 을 제1 홈구장으로, 錢主野球場을 第2 홈구장으로 設定하여 홈경기를 分散 開催했다.

해태 쌍방울 레이더스 가 創團하기 前인 1989年 까지 錢主野球場을 第2 홈구장으로 쓰면서 좋은 成跡을 거뒀는데, 電柱에서 總 65競技를 치러 40勝 1無 24敗, 勝率 6割 2푼 3里의 成跡을 거뒀다. 特히 1987年 에는 光州廣域市 에서 全國體育大會 가 開催되는 關係로 이 곳에서 플레이오프 가 열렸는데, 해태 타이거즈 는 電柱에서 OB 베어스 를 물리치고 韓國시리즈 에 進出했다.

1987年 에 照明塔이 設置되어 夜間 競技가 可能하게 되었다.

1989年 韓國 野球 委員會 (KBO) 는 當時 프로 野球가 7個 球團으로 運營되어 問題點이 相當하다는 點을 들어, 新生 第 8球團 創團을 推進한다. 이 中 第 8球團으로 創團을 推進하던 企業은 慶尙南道 마산시 를 緣故로 하는 한일합섬 全羅北道 全州市 를 緣故로 하는 쌍방울 · 味源 컨소시엄이었다. 쌍방울 全羅北道 益山市 에서 그룹의 中樞 事業인 內의 製造業을 出發했다는 根據를 들어 全北 緣故의 新生 球團 創團을 推進했다.

結局 KBO는 協議를 거쳐 쌍방울 을 제 8球團의 運營 企業으로 落點하고, 全北 地域을 緣故로 하는 新生 球團 創團 節次에 들어간다. 이 때부터 全州 野球場의 使用權은 해태 타이거즈 에서 쌍방울 로 넘어가게 된다.

쌍방울 레이더스 1991年 부터 1軍 홈 競技를 치르기 始作했으나, 不振한 成跡 때문에 홈 觀衆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해태 타이거즈 가 全州에 遠征 競技를 오면 해태 를 應援하러 온 팬들이 더 많을 程度였다.

1991年 부터 1995年 까지의 쌍방울 레이더스 의 팀順位는 6(共同)-8-7-8-8로 1980年代의 仁川 팀들과 2000年代의 롯데 자이언츠 같은 正말 暗鬱한 時節을 보내며 1986年 에 1群 舞臺에 오른 後 不過 2年 後에 韓國시리즈 霸權에 挑戰한 빙그레 이글스 와는 對照的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작은 球場크기와 劣惡한 投手陣으로 因해서 김성근 監督 赴任 後 펜스를 5.8m로 높이기 前까지 같은 期間 동안 5年 連續 被홈런 1位의 困辱을 치렀다.

1996年 쌍방울 레이더스 와 全州 野球場의 最高의 全盛期였다. 김성근 監督이 赴任하면서 팀이 變化를 맞게 되었고, 萬年 弱體 팀으로 놀림 받던 쌍방울 이 一躍 突風의 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면서 正規 시즌 2位를 마크하였다. 이 해 쌍방울 은 錢主野球場과 群山野球場 에서 열린 홈 競技에서 16番을 연달아 勝利하게 되는데, 이는 歷代 KBO 리그 홈 競技 最多 連勝 新記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홈 觀衆 數字도 크게 늘어, 全羅北道 地域에 野球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1997年 에는 前年의 勝數에 1勝을 더해 正規시즌 3位를 記錄하면서(71승 2無 53敗), 1996年 의 突風이 決코 偶然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2年 連續 포스트 시즌 1回戰 脫落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1997年 12月 4日 에 벌어진 IMF 事態의 餘波로 쌍방울 그룹이 不渡를 맞으면서, 쌍방울 레이더스 는 팀의 核心 選手들을 팔아 근근히 팀 運營을 하는 地境에 이르고 만다. 1998年 에는 6位로 墜落한 後, 1999 年에는 3年 後 백인천 監督이 이끈 롯데 와 같은 97敗를 記錄하였다. 쌍방울은 1999年 10月 8日 에 열린 LG 트윈스 와 마지막 홈경기를 치른 뒤 解體의 길을 걷게 되었다. 參考로 이날 열린 마지막 競技는 쌍방울 이 18連霸를 끊는 競技로 남았다.

現在

編輯

現在 錢主野球場은 社會人 野球 同好會와 靑少年 野球 選手들이 主로 利用하고 있다. 特히, 社會人 野球團의 活用 幅이 높은 便이다. 이는 全州市 에 社會人 野球團이 많지만 野球를 할 수 있는 區長은 別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쌍방울 레이더스 가 解體된 後 體系的인 管理가 이뤄지지 않아, 그라운드 狀態 및 施設 等이 老朽化되었다. 特히 電光板과 外野 펜스, 化粧室 等 全般的인 施設이 매우 落後되어 있어서 프로 野球 競技를 치르기는 힘든 狀況이다. 實際로 2004年 全羅北道 KIA 타이거즈 의 緣故地로 다시 還元되었을 때, 예전 해태 時節처럼 電柱에서 홈 競技를 分散 開催하는 것을 檢討했으나, 錢主野球場이 落後한 點을 들어 群山野球場 으로 方向을 틀었다.

예전 KBS2 藝能 프로그램인 天下無敵 野球團 의 八道 遠征 中 全羅北道 篇의 撮影場으로 쓰였었다.

各州

編輯
  1. 着工 欄과 建設費度 이 出處에서 引用하였다. [1] - 京鄕新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