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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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과 家計
編輯
全琫準은
1855年
全羅北道
高敞郡
죽림리 黨村 沒落 兩班 出身인
전창혁
(全彰赫, 一名
전승록
, 다른 이름은 전형호(全亨鎬))와 金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天安 全氏 族譜에 依하면 族譜上 이름은 英俊(永準)이요, 奉遵(琫準)은 어릴적 이름이며 綠豆(綠豆)는 그 體軀가 작아서 불린 別號라 한다.
[2]
그의 어린 時節에 對한 資料는 正確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어머니 金氏는 언양 金氏 說과 鑛山 金氏 說이 있다.
沒落한 兩班이었으나 아버지 전창혁은
고부군
鄕校의 醬의(掌議)를 지낸 적이 있는
[3]
地域의 名詞이자
性理學
者였다. 그러나 그의 집안은 平素 가난한 生活을 하였으며, 藥을 팔아 生計를 이어나갔다. 少年期의 全琫準은 記憶力이 총명한 少年이었는데 5歲 때에
漢文
을 數學 했고 13歲 때에는 '白鷗詩'(白鷗詩)라는
限時
를 짓기도 했다.
[3]
靑少年期
編輯
書堂에서 勳章으로도 活動했으며, 同時에 接主(接主)
[4]
일도 하고, 止觀으로 墓자리도 점지해 주었다고 한다.
[5]
또한 市場에서 商人으로 活動하며 장사에 從事하기도 했다.
1893年
그의 아버지
전창혁
(全彰赫, 一名
전승록
)은
貪官汚吏
고부郡守
조병갑
의 貪慾에 抵抗을 하다가
조병갑
의 母親喪 때 扶助金 2千 兩을 안 거둬 줬다는 理由로 모진 棍杖을 맞게 되어
[6]
몸이 허약해지더니 이내 死亡에 이르게 되는데, 이 일이 全琫準의 東學農民運動과 社會改革에 對한 생각에도 影響을 주지 않았을까 推測한다. 스스로를 선비라고 稱하며, 農民이기도 하였다.
東學 入校
編輯
全琫準은 30代 前後에
東學
에 몸을 담고, 以後 古阜 地方의 東學接主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7]
그러나 當時 崔時亨이 그를 만나 直接 임명하지 않았고, 또한 崔時亨이 初期에 全琫準의 蜂起에 反感을 나타냈기 때문에 反論이 있다.
[8]
20, 30代에 朝鮮社會는 極히 어수선했는데, 開港을 契機로 하여 外勢는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3]
, 終末論 等 流言蜚語等이 나돌고 貪官汚吏들의 搾取가 極에 達하면서 危機的 狀況은 날이 갈수록 加重되었다. 이러한 狀況 속에서 전봉준 亦是 나라의 將來에 對해 苦悶했으며, 그러한 苦悶의 過程에서 1888年(高宗 25) 무렵 손화중(孫和中)과 接觸했다.
[3]
1890年
무렵 전봉준 自身의 表現에 依하면 "그의 用武之地(用武之地)로서 東學 校門이 있음을 發見하고", 서장옥(徐璋玉)의 幕僚인 황하일(黃河一)의 紹介로 東學에 入敎했다. 뒷날
東學 農民 運動
의 失敗로 官軍에 逮捕된 뒤
1895年
日本 領事館에서 있었던 第2次 裁判에서 "東學은 水深(守心)하여 忠孝(忠孝)로써 根本을 삼고 輔國安民(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東學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道(道)였다. 때문에 나는 東學을 極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東學에 入敎하게 된 經緯를 밝혔다.
大院君가 食客 生活과 東學 入島 初期
編輯
1890年
全琫準은 雲峴宮을 찾아갔다. 以後
1890年
代 初盤 全琫準은
雲峴宮
에서
흥선大院君
의 門客 生活을 하였다.
[9]
1892年
初 全琫準은
雲峴宮
門客 生活을 淸算하고 다시 故鄕인
全羅北道
고부군으로 내려와 農事를 지으며 洞里 書堂의 訓長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便 그가 東學敎徒가 아니라는 疑惑이
東學 農民 運動
當時부터 東學軍 內部 사이에 돌고 있었다. 當時 隱密히 貰를 불렸으며, 東學 農民運動 當時 隱居 中인 興宣大院君과도 接觸하기도 했다.
[7]
이는 그가 한때
1890年
初 暫時 大院君의 食客으로 있었던 因緣 때문이었다.
東學
入敎 初期인
1890年
에 雲峴宮에 찾아가 大院君의 食客 노릇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東學 內部에서는 그의 正體나 目的을 疑心하는 敎徒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1892年 무렵에 敎主 崔時亨(崔時亨)에 依하여 高部地方의 接主(接主)로 任命되었다.
[3]
이로써 그의 正體에 對한 疑惑과 疑心은 一旦 不文律에 부쳐졌다.
1892年
4月
고부 郡守로 赴任한
조병갑
이 農民들에게 무거운 稅金을 내게 하고 良民의 財産을 收奪하는 行爲를 다시 일삼았다.
조병갑
은 다시 自身의 아버지의 頌德碑를 세운다는 名目으로 稅金을 거두었고, 不應하거나 稅金을 낼 餘力이 없는 百姓들을 잡아다가 拷問하거나 솥단지까지 빼앗아갔다.
1893年
초에는 고부군에서 物稅를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萬石洑 밑에 다시 報(洑)를 築造하여 不法으로 勢를 徵收하자 農民 代表와 함께 連名 上疏를 고부郡守에게 보내 그 是正을 陳情했으나 拒否當했다. 全琫準은 上訴의 小斗의 한사람이었는데, 郡守
조병갑
은 全琫準 等 署名限 郡民代表들을 잡아다가 供招를 하고 棍杖을 쳐서 내쫓았다.
1893年
2月
全琫準은
漢城府
로 올라가
흥선大院君
을 訪問하였다.
[3]
大院君은 暫時 食客으로 있었던 全琫準을 厚하게 待接하였다. 이때 全琫準은
흥선大院君
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人民을 위하여 한番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3]
이로부터 世間에는 全琫準과 大院君 사이에 무슨 密約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3]
흥선大院君
과의 面談을 마친 뒤 全琫準은 다시 길을 떠나
全羅北道
古阜
로 내려간다. 漢城에서 故鄕으로 돌아온 全琫準은 同志를 糾合했다.
[10]
全琫準은 講演을 다니며 人間이 平等하다는 것과, 貪官汚吏를 處罰하고 새로운 世上이 일어설 것이라는 것과,
흥선大院君
이 自身들을 一部 도와줄 것을 約束했다고 했다. 全琫準은 사람을 모았고, 그가
흥선大院君
過度 連結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傳해지면서 수많은 靑年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893年
3月
무렵
全羅北道
沃溝郡 금구현 水流面 원평리에 場所에는 한 무리의 東學 農民勢力을 形成·領導하게 되었다.
[10]
以後 그는 自發的인 支援과 寄附를 통해 이들의 宿食을 解決하였다.
동도門變
(東徒問辨)에 記錄된 것에 依하면 그 勢力은 1萬餘 名으로 武裝하고 있었다고 한다.
[10]
1893年
3月 11日
부터 始作되었던 東學의 보은취회에 參加하여 그 集會를 反封建·反腐敗·反侵略의 政治的 運動으로 擴大시키기 위해,
1893年
3月
末頃에
忠淸北道
報恩
으로 向했으나, 報恩 集會가
4月 3日
해산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10]
報恩郡은 當時 東學의 敎祖인
최시형
李 種種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東學徒들의 一部는 그보다 앞선
2月
警
漢城府
로 올라가
景福宮
앞에서 複合 上疏를 올렸다.
[11]
2月 11日
부터
2月 13日
까지 繼續된 上訴의 內容은 廢井 改革과 腐敗 官吏 處罰 等이었다. 全琫準은 이들의 上疏가 成功하면 呼應하기로 計劃했다. 그러나 이들과 呼應하기로 한 報恩集會가 取消되면서 漢城府에 올라간 示威隊도 解散되었다. 1萬 餘 名 以上의 많은 人波의 大規模 示威는 漢城府의 百姓과 朝廷의 官僚들에게 깊은 印象을 심어주었고, 全琫準이 떠난 直後 일어난 이 示威를 接한
흥선大院君
은
1893年
2月
의 東學徒들과 農民들의 集會를 注目하게 된다.
興宣大院君과 連帶
編輯
全琫準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흥선大院君
은 이들의 示威를 注目했다.
1893年
初
흥선大院君
은 東學徒들이 上京하여
景福宮
앞에서 複合上疏運動을 벌이는 機會를 利用하여
이준용
을 王으로 推戴하려 하였다.
[11]
精巧
는 1893年
2月 11日
부터
2月 13日
까지 3日間 박광호를 小斗로 하는 約 50名의 東學敎徒들이 上京하여 宮闕 앞에서 敎祖 身元을 歎願하며 連坐示威를 벌인 事件을 大院君이 시킨 일이라고 主張하였다.
[11]
이때
精巧
는 大院君이 隱密히 東學黨 數萬 名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張差 不軌를 圖謀하여 그의 孫子 이준용을 (王으로) 推戴하려 했으나 結局 失敗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11]
東學
의 敎主
최시형
은 全琫準 等이
흥선大院君
等과 謀議하는 것을 否定的으로 評價했다. 大院君에 依해 이용당하리라는 것이 崔時亨의 主張이었다. 그러나 全琫準은 이 뒤로도 東學農民軍에 對한 支援을 約束하는
흥선大院君
의 말을 信賴하고 그와 連結을 繼續 하였다.
1893年 겨울 農民들은 政府에 腐敗官吏 處罰을 上疏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때에 東學敎徒들 亦是 敎祖
최제우
의 身元을 上疏했으나 亦是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1893年 12月부터 94年 1月에 올린 東學徒 및 農民軍의 상소 中
최시형
의 彈劾 上疏에 依해 慶尙道 觀察使
조병식
(趙秉式), 令狀(營將)
윤영기
(尹泳璣) 等이 罷職되긴 했으나 以後 高官들은 農民들의 上疏文을 檢閱하였고, 事態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
은 全琫準과 그의 一家를 잡아들이고, 全琫準의 父親에게 刑問을 加害 죽게 한다.
東學 農民 革命
編輯
고부 農民 蜂起
編輯
1894年
3月 21日
(
陰曆 2月 15日
) 그는 擧兵을 宣言하고 全琫準은 先頭로 나서 數百 名의 東學敎徒를 이끌고 萬石洑를 破壞하고 고부 官衙를 攻擊하게 되며, 이를 고부 蜂起, 第1次 놀란 郡守 趙秉甲은 줄行廊을 놓았고, 全琫準은 官衙의 武器를 奪取하고 稅金을 가난한 農民들에게 나누어주며, 腐敗한 官吏들을 붙잡았다. 收奪에 앞장섰던 衙前들을 處斷하고 不法으로 徵收한 稅穀을 奪取하여 貧民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便 感情이 격해 罪없는 官吏들도 管理라는 理由로 處罰하려는 東學農民軍을 挽留하여 진정시키기도 했다. 이 報告를 받은 朝鮮 政府에서 조병갑 等 腐敗한 管理를 處罰하고 後任 郡守로 박원명을 내려보냈다. 그러나 農民들은 事後의 計劃을 세워놓지 않아 곧 新任 郡守 박원명의 溫乾한 撫摩策에 解散하였다.
1894年
봄
東學農民運動
發生 當時 全琫準과 一部 東學軍 指導者들은
흥선大院君
과 結託하였다는 見解가 있다.
[7]
그에 依하면 東學軍 中 穩健派 指導者들이 그를 攝政으로 復位시킬 것을 約束했다는 것이다.
第1次 農民 蜂起
編輯
이에 ‘全琫準은 槍과 칼을 맞지 않고, 銃口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라는 所聞도 퍼져나갔다. 朝鮮 朝廷은
이용태
(李容泰)를
按覈使
로 보내어 善處를 確約하자 全琫準은 一旦 農民軍을 解散하고 事態를 觀望하기로 했으나, 이용태 亦是 貪虐이 甚했으며 農民軍에게 모든 責任을 돌리고 無慈悲한 彈壓·處罰을 敢行했다. 이에 裁縫機를 決意하고, 이 機會에 國家 政治와 社會制度의 全面 改革을 斷行하고 輔國安民의 東學思想을 펼 뜻을 굳혔다.
全琫準을 總大將,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
차치구(車致九)
를 掌令(將領)으로 삼은 農民軍은
1894年
陰曆 3月 初 同志 정익서(鄭益瑞)·김도삼(金道三) 等과 協議하여 東學의 組織을 利用하여, 東學敎徒를 主導 勢力으로 하고 農民大衆의 呼應을 얻어 陣容(陳容)을 整備하고 고부의 白山(白山)을 根據로 8千餘의 兵力으로 隊伍를 編成하였다. 陰曆 3月 下旬에 白山에 모여 다음과 같은 農民軍의 4代 綱領과 蜂起를 알리는 檄文을 發表하고, 百姓의 蹶起를 呼訴했다.
- 사람을 죽이지 말고 物件을 해치지 말라.
- 忠孝를 穩全히 하여 世上을 救濟하고 百姓을 便安히 하라.
- 왜襄(倭洋)을 軸滅하고 聖君의 度를 깨끗이 하라.
- 甁을 거느리고 서울로 進擊하여 捲歸(權貴)를 滅하라.
이에, 정읍시 態인·김제시금구(金溝)·부안 等地에서도 農民들이 合勢하여 그 數가 數千에 到達했다. 東學軍의 蜂起는 이로부터 本格化하였다. 以後 農民軍은 全州城 陷落을 目標로 陰曆 4月 初 금구 원평에 陣을 쳤다. 實際로는 農民軍의 構成員은 大部分 一般 農民이었고, 東學敎徒는 比較的 적었다. 農民軍은 貪官汚吏의 除去와 租稅 收奪 是正을 主張하였으며, 均田使(均田使)의 廢止를 促求하였다.
그와 함께 全琫準은 東學軍 남接의 指導者 中 한사람이자 동도大將이 되어 斥倭(斥倭)·斥洋(斥洋)과 腐敗한 支配 階級의 打破 等 師大 綱領을 내세우고 附近의 고을로 進擊하여 官軍(官軍)을 무찔렀다. 中央에서 官軍을 이끌고 온 兩湖 招討使
홍계훈
(洪啓薰)을 황토현(黃土峴)에서 大破하고 이어
扶安
·
井邑
·
高敞
·
武裝
(茂長) 等을 掌握하고, 이어
陰曆 4月 28日
에는
全州
(全州)를 占領했다.
電柱를 占領한 直後 全琫準은
홍계훈
에게 歎願書를 보낸다. 全州和約을 맺기 前 官軍 最高司令官 洪啓薰에게 보낸 이 歎願書에는
大院君
을 다시 權座에 復歸
[12]
시키라는 內容이었다.
그러나
홍계훈
은 이를 反駁하는 答狀을 보냈다. 全州 火藥 直前인
5月 4日
에 다시
홍계훈
에게 보낸 密書에서는 '太公을 받들어 나라를 減毒토록 함은 그 理致가 甚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不軌라고 합니까?'라 하였다. 全琫準과 홍계훈 間의 攻防戰이 오가는 가운데 外部 勢力의 介入이 明確해지자 그는 一旦 農民軍의 改革 條項을 官軍에서 一部 受容하는 條件에서 火藥을 締結하기로 한다.
火藥과 休戰
編輯
그러나 朝鮮 政府의 要請으로 淸軍이 오고 同時에 톈진조약을 憑藉하여 日本軍도 入國하여 壓迫함으로써 나라가 위태로운 狀況에 處하자, 12個의 項目을 들어 改革할 것을 要求하는 代價로 休戰 提議를 받아들이는데, 主要 內容은 이러하다.
- 不良한 兩班의 罪를 調査하여 벌줄 것
- 奴婢 文書를 燒却할 것
- 賤民의 待遇를 改善하고 白丁이 쓰는 패랭이를 없앨 것
- 不法的으로 거두어들이는 稅金을 없앨 것
- 日本人과 內通한 者를 嚴重하게 處罰할 것
이 火藥은 電柱에서 締結되어 全州和約이라 부른다.
白山에서
全羅
監査에게 내놓은 改革要求書에는 全琫準에 意志에 依해 改革 條項 外에도
흥선大院君
의 甘菊을 要求하는 項目을 집어넣었다.
[12]
第2次 農民 蜂起
編輯
그 後 20餘 名의 幹部를 引率하여 各地로 다니며 敎徒를 激勵하고
執綱所
를 全國에 設置하는 等 組織 强化에 힘썼다. 한便 政府의 官憲들과 對等한 處地에서 施政을 監視하고 新任 觀察使 김학진(金鶴鎭)과 道政(道政)을 相議하는 等 强力한 權限을 차지했다. 그러나 腐敗한 支配 階級의 根絶과 根本的인 施政 改革이 實現되지 않아 再蹶起를 計劃하던 中
淸日戰爭
이 自己들에게 유리하게 進展됨에 따라 漸次 朝鮮에서의 侵略 行爲를 더해가는
日本
의 凶計에 激忿하여 다시 蜂起했다.
[7]
第1次 蜂起의 休戰은 東學軍에 不利하여 政府는 强化 條件을 履行하지 않는 한便, 淸軍은 勿論 日本軍도
陰曆 5月 6日
(陽曆
6月 9日
)부터 1萬의 軍隊로 仁川에 上陸하였다. 日本은
1894年
7月 23日
(
陰曆 6月 21日
)를 일으켜 親日 政權을 세우고
이노우에 가오루
를 새 工事로 임명했다.
7月 25日
(
陰曆 6月 23日
) 드디어
淸日戰爭
을 일으키는 等 險惡한 情勢를 調整하였다.
第2代 敎主
최시형
이 이끄는 東學은 姑婦接主였던 全琫準의 騎兵을 탐탁지 않게 여겨 왔다. 當時에 東學의 主要 指導者였던 오지영의 陳述에 따르면, 崔時亨은 湖南의 全琫準과 湖西의 서장옥은 나라의 逆賊이고 斯文亂賊이다 라 規定하고, 同時에 湖南의 農民軍을 칠 豫定이었다.
[13]
當時 남接의 指導者인
김개남
等은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스스로 개남國王(開南國王)이라 稱하였다.
최시형
은 전봉준 亦是 朝鮮 政府를 否定하고 새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 아닌가 疑心하기도 했다.
그러나 日本軍이 官軍과 함께 農民軍을 壓迫하자, 崔時亨 等은 처음에는 協商論人 畫展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現實狀況의 急迫함을 認識하여 스스로 自身의 主張을 抛棄하고 東學軍을 全琫準의 武裝鬪爭 路線에 同參시켰다.
[13]
人心이 卽 天心이고 이는 天運이 이르는 바이다. 故로 너희들은 途中(道衆)을 動員하여 全琫準과 協力, 이로써 敎主의 怨恨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道의 큰 뜻을 實現시키라! 이로써 孫秉熙 等이 이끄는 東學軍이 全琫準과 힘을 합쳐 蜂起
[13]
에 加擔했다. 朝鮮 朝廷은 農民軍이 밀고 들어오자
日本
과
淸나라
에 도움을 要請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
손화중
,
손병희
,
최경선
,
김덕명
,
최시형
,
성두환
,
김낙삼
,
김두행
,
손천민
,
김봉득
,
김봉년
,
유한필
,
차치구
等이 다시 2次 蜂起를 일으켰다. 日本軍의 王宮 占領에 憤激한 農民軍은 이 해 陰曆 9月 斥倭(斥倭)를 口號로 내걸고 再起하였다. 이제는 內政 改革을 目標로 하지 않고 日本을 相對로 抗爭하고자 하는 反外勢가 擧兵의 主要 目標였다.
9月
忠淸南道
公州에서 官軍과 싸웠다. 그런데 忠淸觀察使 박제순은 9月 蜂起後 全琫準이 이끄는 農民軍이 論山(論山)으로 進擊하여 公州監營이 危急해지자 敎主
최시형
이 거느리는 다른 東學의 10萬 大軍을 막는 일보다도 全琫準의 軍士를 防禦하는 일이 더 火急하다며 天安에 머물고 있는 討伐隊長 이규태에게 急轉을 보냈다. 이규태가 이끄는 軍士가
박제순
軍과 加勢하면서 公主싸움에서 敗退, 隱身하게 된다.
逮捕後 어떻게 되었는가?
編輯
옛 部下의 密告와 逮捕
編輯
全琫準은 陰曆 9月 三禮(三禮)에서 남접 接主가 되어 12萬 名의 兵力을 動員·指揮하여 북도 接主
손병희
의 10萬 名의 兵力과 動員하였으며, 最高 敎主
최시형
의 總指揮를 받으며 抗日 救國의 抗日戰을 展開하였다. 한때 中部·南部의 全域과 咸南·平南까지 抗爭의 規模가 擴大되었고, 特히
利川
(利川)·
목천
·
公州
等地에서 熾烈한 戰鬪를 벌였다. 그러나 優秀한 武器와 組織的인 訓鍊을 받은 日本軍의 大大的인 反擊으로 敗北하였고,
陰曆 11月
의 금구(金溝) 戰鬪를 最後로 粉碎되고 말았다.
11月 27日
태인싸움에서 敗北한 뒤 全琫準은 隨行 몇몇과 11月 29日 입암산성(笠巖山城)으로 들어가 隱身하였다. 이때 南下(南下)하는 日本軍 모리誤 部隊와 이규태의 官軍이 井邑郡 입암면 千원(川原)에서 전봉준 一行을 追擊해 온다는 情報를 듣고
11月 30日
다시 입암산성에서 東쪽 藥8km에 떨어진
內藏山
의 白羊寺(白羊寺)로 移動했다. 白羊寺에 隱身할 때 사람을 통해
김개남
(金開南)李 태인軍 산내면 종성리(現, 井邑市 산내면 종성리)에 隱身해 있다는 消息을 接하고 隨行員들과 함께 태인으로 가던 中
12月 1日
저녁
淳昌郡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部下 김경천을 찾았다.
김경천은 全琫準을 맞이해 놓고 淳昌의 한 民家에 隱身하도록 勸告했다. 그 뒤
前主婦
(全州府) 監營 退校(退校)이자 同志이며 이웃에 사는
한신현
을 使嗾하여 前主婦 官家에 告變했다. 김경천의 付託을 받은 한신현은 김영철, 정창욱 等 外에 9名의 피노리 마을 壯丁들을 動員하여 埋伏하고 있었다. 民家에서 全琫準은 同志 몇 名과
淳昌
으로 避해 다시
擧事
를 일으킬 準備를 했으나, 懸賞金을 노린 옛 部下
한신현
과
김경천
等의 背信으로 疲勞里(避老理)에서 官軍에 逮捕되었다.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 外에도 김영철, 정창욱 等의 提報와 마을사람 9名의 提報가 있었다.
1894年
12月 28日
(
陰曆 12月 2日
) 새벽 한신현과 김경천의 밀고 事實을 알고 危機에 處하자 담을 뛰어넘어 逃避하려다 피노리 住民이 던진 몽둥이에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혔다. 淳昌郡 官衙에 갇혔다가 潭陽郡 官衙에서 朝鮮 官軍에게 引繼되어 나主婦와 前主婦로 옮겨졌다가 1895年 1月 13日(1894年
陰曆 12月 18日
)
漢城府
에 到着하여
義禁府
監獄에 收監되었다.
1895年
陰曆 3月
, 그의 同志들인
손화중
·
최경선
·
김덕명
·
성두환
과 함께 逮捕되어
漢城府
로 押送되었다.
義禁府의 獄에 갇힌 全琫準 等에게는 無數한 拷問이 加해졌다. 그러나
義禁府
의 空超 中에는 그가
흥선大院君
과 內通한 事實 與否의 追窮이었다. 그러나 全琫準은 大院君과 만났느냐는 追窮에 한마디 言及도 없었다. 拷問은 繼續되었으나 自白이 없자 日本 領事館 監獄으로 移監되었다. 以後 陰曆 2月 9日, 陰曆 2月 11日, 陰曆 2月 19日, 陰曆 3月 7日, 陰曆 3月 10日 5次에 걸쳐 日本 領事館에 設置된 憲兵의 審問을 받았으나 亦是 目的이나 同志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다가
4月 24日
(
陰曆 3月 30日
)
義禁府
에서
絞首刑
에 處해졌다. 그는 法廷에서 死刑宣告를 받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이다. 그런데 反逆罪를 適用한다면 千古에 遺憾이다.'라고 慨歎하였다. 當時 傷處가 아물지 않아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가 없어 아리(衙吏)가 그를 안고 死刑場으로 갔다. 이때 그의 兄弟들도 連坐되어 死刑당했고, 그의 後妻 廬山宋氏는 끌려가 奴婢가 되었다. 當時 全琫準의 나이는 享年 41歲였다.
그는 죽음에 다달아 다음 幼時(遺詩)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때가오니 天下가 모두 힘을 같이 했건만)
運去英雄不自謀 (運이 다하니 英雄도 스스로 할 바를 모를 내라.)
愛民正義我無失 (百姓을 사랑하는 正義일 뿐 나에게는 過失이 없나니)
爲國丹心誰有知 (나라를 위하는 오직 한마음 그 누가 알리.)
全琫準을 官衙에 密告했던
한신현
은
衿川
軍需에 除授되었으며, 賞金은 한신현 1千兩, 김영철 300兩, 정창욱 200兩, 마을사람 9名 200兩 그리고 200兩은 피노리 貧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空超 過程에서의 大院君 辯護
編輯
日本 領事館으로 옮겨진 뒤에도 이노우에 公使와 우치다 領事, 그리고 法部大臣 徐光範 等 審問官들로부터 5次例 以上 取調가 繼續되었다.
[12]
審問官들은
흥선大院君
이나
이준용
이 그를 使嗾했는가 與否를 集中 追窮하였다. 大院君에게 보내려던 便紙가 發見됐고, 그가 大院君의 食客으로
雲峴宮
에 있었다는 陳述까지 나오면서 형문은 酷毒해졌다. 그러나 그는 拷問을 當하면서도 大院君이 介入했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審問의 焦點은 그가 農民軍을 일으킨 것이 大院君의 指示 乃至 使嗾에 依한 것인지 與否를 캐내는 데 맞춰졌다.
[12]
日本
側은 겉으로는 協助하는 체하면서 뒤로 反日 工作을 펼친 大院君을 暗殺하려 했다. 그러나 갖은 拷問에도 不拘하고 그는 大院君과의 關聯性을 頑强히 否認했다.
[12]
拷問 過程에서 審問官들이
흥선大院君
을 批判하자 그는 興宣大院君을 辯護하였다.
“
|
大院君이 國政에 干與하는 것이 民心이 바라는 바이다.
[12]
|
”
|
“
|
大院君을 받들어 나라를 監督하게 함은 그 理致가 甚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逆賊질이라고 하느냐.
[12]
|
”
|
그는 死刑당하는 瞬間까지도
흥선大院君
關聯說을 否認했다. 審問官이나
日本
人 領事官員들이
흥선大院君
을 非難하면 그를 辯護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後日
慶熙大學校
敎授
허동현
은 白山에서 全羅監司에게 내놓은 改革要求書에도, 全州和約을 맺기 直前 官軍 最高司令官 洪啓薰에게 보낸 歎願書에도 大院君을 다시 權座에 복귀시키려는 熱望이 넘쳐흐른다.
[12]
고 評하기도 했다.
두 딸 전옥례(全玉禮)는 査察에 숨어 있었고, 다른 딸도 近處에 隱身해 있다가 成人이 된 뒤에 出家했다. 딸 전옥례는 15歲의 나이로 禍를 避하여
全羅北道
鎭安
馬耳山으로 들어가 김옥련으로 이름을 고치고, 寺刹인 金塘寺의 供養主로 있다가 23歲에 이영찬과 結婚했다. 東學 農民 運動이 民亂에서 農民運動으로 昇格된 뒤,
1970年
甲午 東學 革命 記念文化制를 開催하자 나타나 비로소 그 동안의 事實을 밝힘으로서 世上에 알려지게 되었다. 전옥례는
1970年
91歲의 나이로 死亡했다.
本妻 崔氏에게 얻은 두 아들은 夭折했고, 後妻 여산 宋氏에게 얻은 아들도 셋째 아들 전용규(全龍圭)는 일찍 死亡했다. 넷째 아들 전용현은 結婚하였으나 後嗣가 없어서 조카뻘 되는 親戚 전만길(全萬吉)을 데려다가 養子로 삼아 後嗣를 이어오고 있다.
1954年
天安全氏 門中에서 이평면 組소리에 全琫準을 追慕하는 寺跡碑를 建立하였고
[2]
,
1960年
부터 復權 努力이 推進되었다.
大統領
朴正熙
가 東學 農民 運動을 東學亂으로 敍述하던 것을 農民 運動으로 고쳐서 싣도록 하면서 東學亂은 農民運動으로 格上되었고, 全琫準에게 씌여졌던 逆賊 陋名 亦是 벗겨졌다.
[14]
1981年
韓國靑年會議所가
全州
덕진공원에 全琫準의 追慕碑를 세웠다.
1983年
大統領
全斗煥
의 特別 諭示로 '全琫準將軍 遺跡淨化事業'李 始作되었다.
[15]
이어 전봉준 記念館이 建立되었다. 建立된 記念館의 中心 施設物은 全琫準 將軍 銅像이다.
[15]
施行廳이 '全羅北道'이고, 彫刻한 사람이 김경승(金景承)이며, 施工된지 4年만인
1987年
10月 1日
完工되었다.
[15]
2005年
에는
大韓民國
에서 全琫準이 逮捕되어 끌려가는 寫眞을 실은 最初의 전봉준 記念 葉書가 發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