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生과 家計
編輯
1785年
(正祖 9)
4月 29日
(
陰曆 3月 21日
)
은언군
의 9男 1女 中 6男이자 庶子(庶子)로 誕生하였다. 元來 이름은 快得(快得)이었고, 뒤에 풀려난 뒤에 解凍(海東)으로 고쳤으며, 뒤에 滄江으로 이름을 고쳤다가 다시 광으로 改名하였다. 嫡母에게서 태어난 赤字인 이福 兄
상계군
담,
풍계군
黨, 그밖에 이福 庶兄들人
이성득
,
이철得
等 아버지의 또다른 庶子들이 있었다.
思悼世子
의 鉏孫子이며,
正祖
의 서조카이고, 純祖의 서 四寸兄이며,
哲宗
의 私親이다.
아버지는
思悼世子
의 서장남
은언군
(恩彦君)이며, 어머니는 그의 小室인 전주인(全州人) 이덕희(李德喜)의 딸로
電算郡夫人 李氏
(全山郡夫人 李氏)이다. 그의 위로 冬服 親兄이 한名 있었지만, 일찍 夭折했다.
[1]
아버지
은언군
, 三寸
은신군
이 少年時節 商人들에게 진 負債가 曾祖父
英祖
에게 알려져
1771年
(英祖 47) 稷山에 流配되고, 다시 濟州島 대정현에 安置되었다가
1774年
에 은신군이 죽으면서 풀려났다.
電算郡夫人 李氏
의 存在는
1970年
代 以後에 알려지게 되었고, 一部 歷史書는 그를
上山郡夫人 宋氏
의 子女인 것으로 誤解하였다. 또한 그의 墓碑文이
國史編纂委員會
等에 依해 判讀된 것도 1970年代 무렵이었다.
後날
김문근
이 쓴 그의 어머니
電算郡夫人 李氏
의 墓誌銘을 통해 電算群夫人은 그가 태어나기 前에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일찍 死亡했고, 그가
電算郡夫人 李氏
에게는 둘째 아들인 것이 確認되었다. 異腹 兄弟들 中
풍계군
으로 推定되었던
이철得
이 풍계군과 生年이 달라 다른 人物인데,
이철得
이
電算郡夫人 李氏
의 일찍 죽은 첫 아들인지 與否는 確認되지 않았다
李珖은 王族이었으나 아버지
은언군
이
상계군
事件과 宋氏, 신氏 事件 그리고 繼續된 彈劾으로 유배당한데다가, 李珖은 다시
은언군
의 庶子였으므로 爵位가 내려지지 않았다.
[2]
1797年
아버지
은언군
이 鬱火病이 치밀어 兄 或은 異服兄인
이철得
과 함께 江華島를 脫出하려다가 喬桐島가 보이는 海邊에서 逮捕되었다.
江華島
內에서 다시 아버지
은언군
이 逮捕된 그 곳으로 一家族이 모두 옮겨졌다.
江華島 살이
編輯
幼少年 時節과 或은 書堂을 다녔는가, 獨先生을 招聘했는가 與否는 알려져 있지 않다.
哲宗
卽位 後
순원왕후
의 名으로
은언군
,
상계군
關聯
日省錄
,
承政院日記
,
朝鮮王朝實錄
等을 大量으로 洗草, 湮滅하여 그의 初期 行跡에 對한 內容은 알 길이 없다.
1805年
8月 27日
江華島
에 이철得, 이성득, 이쾌득이 감금당한 집에 불이 나
江華府
留守 오재소(吳載紹)가 調整에 狀啓를 올려 보고하였다.
[3]
本夫人은 전주인(全州人) 學生 增
議政府
領議政(領議政)
최수창
(崔秀昌)의 딸로
羱羊部隊夫人 崔氏
(完陽府大夫人 崔氏)이고, 妾으로 용담人(龍潭人) 學生 增
議政府
領議政(領議政) 염성화(廉成化)의 딸로
용성府大夫人
廉氏(龍城府大夫人 廉氏)가 있었다. 용성部隊夫人은 羱羊部隊夫人이 살아있을 때 들인 狀態이다. 또한 그에게는 妾室人 李氏(李氏)가 있었다.
한便, 이福 白兄(伯兄)
상계군
이담
(常溪君 李湛)은
1786年
에
홍국영
等의 推戴를 받았다는 理由로 음독사했으며, 嫡母
上山郡夫人
宋氏(宋氏)와 兄嫂 신氏(申氏: 상계군 담의 妻)는
1801年
(純祖 1)에
天主敎
信者인 것이 當局에 摘發되어 賜死되면서, 아버지 은언군도 賜死되었다. 이와같이 그는 父母와 嫡兄·적兄嫂의 罪로 連坐되어
江華府
교동
으로 쫓겨나 不遇한 一生을 貧農으로 生活하였다. 아버지
은언군
四史 後에는
栫棘罪
를 받고,
江華島
내 그의 居住地에 가시울타리가 쳐지게 되었다. 以後 그는 强化도 내 圍籬安置된 집과 움幕 等에 居住하며 남의 집 머슴살이에서 一日 雜役夫 等으로 生計를 維持해나갔다.
1812年
(純祖 12)
8月
司饔院
奉仕
박종일(朴鍾一)과 한광우(韓光友), 이진채(李振采) 等의 謀逆事件이 摘發되자,
은언군
의 아들들 中 한名을 推戴하려 했다 하여 兩社로부터 彈劾을 받았지만
順調
가 事件을 撫摩시켜
이黨
,
이성득
,
이철得
等 다른 異腹兄弟들과 함께 死刑 危機를 謀免하였다.
그뒤
江華島
內로의 移住가 許容되어 李珖은
江華郡
强化邑內로 移住하였다. 移住한 哲宗의 家族은
江華島
에 살았는데, 哲宗의 잠저는 現在의
江華郡
강화읍
관청리 441番地에 있다.
[4]
[5]
元來는
草家
였으나, 哲宗 4年(1853)에
强化
留守
정기세
가 現在와 같은 기와집을 세우고
용흥궁
이라 하였다.
[5]
이광의 家族은 赴任해오는
江華府
有數의 監視 및 住民들의 蔑視를 當하기도 했다. 哲宗實錄의 哲宗 行長에 依하면 그가
江華島
에 있을 當時, 한番은 그가 살던 洞里에 惋愕하고 悖戾한 自家
술
에 醉해 그의 집 門밖에서 騷亂을 부리며 傲慢한 말과 侮辱을 加했지만, 後日 아들
哲宗
이 王位에 오른 後에도 그를 問題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江華府
留守로 赴任한 어떤 有數가 防禦 및 지킴(방수)를 目的으로 그의 一家를 監視하는 것이 너무 苛酷하므로 집사람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여겼지만, 王位에 오른 아들
哲宗
은 그 流水를 오히려
承政院
承旨
에 임명하였다한다.
1817年
(純祖 17)
3月
홍경래
와 奇脈이 닿던
채수영
이
은언군
仁義 아들 中 한 名(
이철得
)을 推戴하기로 하고
채수영의 난
을 일으켰다. 그는 이때에도 죽을 고비를 넘겼다.
1820年
(純祖 20)
順調
는 은언군의 生存한 아들들을 모두 석방시켜주었다. 이때 그는
漢城
으로 갔지만 어떤 理由인지 알 수 없는 理由로 다시
江華島
로 보내졌다.
哲宗
卽位 以後,
哲宗
때와
高宗
때
은언군
과 은언군 一家,
상계군
一家 等에 關聯된 資料는 大部分 洗草, 各自, 먹漆, 湮滅해버려 전계大院君의 生涯에 對한 仔細한 狀況은 確認하기 힘들다. 곧 江華島로 보내졌지만 그는
1822年
(純祖 22)
2月
다시 釋放되었다.
전계大院君의 墓碑文과 信徒碑文에 依하면
1822年
2月
의 어느 時點에
順調
는 壬午年을 다시 맞이했다는 理由로 그를 풀어주었는데, 그해
陰曆 潤 3月
그는 그때에 비로소 그는 成人食人 冠禮를 올렸다 한다. 以後 이름을 改名한 것으로 推定되지만, 그가 이름을 快得에서 解凍으로 바꾼 時點, 解凍에서 다시 滄江으로 바꾼 時點, 滄江에서 광으로 이름을 바꾼 時點은 알려져있지 않다.
生涯 後半
編輯
그러나 그는 알 수 없는 理由로 다시 收監되고 奴婢가 되었다.
1826年
(純祖 26) 그는 갑자기 奴婢가 되어
忠淸南道
溫陽
으로 옮겨졌다.
[6]
1826年
5月 2日
刑曹
의 建議로 罪囚들을 釋放할 때 그도 釋放되었다.
[6]
1830年
(純祖 30)
順調
의 特命으로 은언군의 子孫들을
江華島
에서 一時 方面, 都城에서 居住했고 庶子 哲宗은
1831年
漢城
警行方 향교동 司祭에서 出生할 수 있었다. 王族으로서의 禮遇와 爵號, 官職 等은 받지 못했으나 晩年에는 妾도 두는 等 어느程度 餘裕있는 生活을 하게 되었다.
1836年
한때
京畿道
驪州
로 내려가서 生活하였으나, 어느 時點에 다시
漢城府
警行方 私邸로 되돌아왔다.
1841年
(憲宗 7)
12月 14日
(
陰曆 11月 2日
)
漢城府
警行方 향교동 私邸에서 原因 모를 病에 걸려 享年 57歲로 死亡하였다.
1844年
(憲宗 10)
8月
沒落한
老論
家門 出身인 민진용(閔晉鏞)李 中인 이원덕(李遠德), 이종락(李鍾樂) 等과 謀議, 이광의 長男
이원경
(李元慶)을 王位에 推戴하려는 謀反을 꾀하다 事前에 發覺되어 陵遲處斬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生前에 그와 가깝게 지냈던 이원덕과 이원덕의 또 다른 知人으로
老論
政丞
민응수
(閔應洙)의 4代 손이지만 沒落한 민진용 等은 不滿 勢力을 糾合했고, 그의 아들 遠景을 擇軍 對象으로 內定해두었다. 理解 遠景(元慶)도 亦是 賜死되고 그의 남은 家率들은 다시
江華島
로 流配되었다. 죽은 지 8年 만에 妾이었던 廉氏에게서 얻은 아들 원犯이,
순원왕후
에 依해
順調
의 養子로 指名되어 王으로 卽位 하게 된다.
가까운 王族이 死亡했을 때 下賜되는 藝場 等에 對한 記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屍身은
京畿道
楊州郡
新穴面
진관리(現
서울特別市
恩平區
진관동
) 은언군의 墓 아래인 해좌院에 藝場하였다가 다시
江華郡
으로 移葬되었으며,
璿源譜略
에 依하면 以後 또다시
驪州
(廳州)로 移葬되었다고 한다. 後에 다시
1856年
(哲宗 7年)
3月 26日
京畿道
抱川郡
주내면
선단리(現,
抱川市
선단동
) 산11-13번지
海龍山
壬坐에 이장하였다. 이때 本部인
羱羊府大夫人
의 墓所도 移葬하여 合掌하였고, 새로 移葬된 墓所 東쪽 100m 地點에는 長男
이원경
의 墓所도 弛張되어 왔다. 現在 墓域과
神道碑
는
1986年
4月
以後
抱川市
鄕土遺跡 第1號로 指定保護되고 있다.
1849年
憲宗
이 後嗣없이 昇遐하자, 그의 셋째 아들 원犯이
순원왕후
에 依해 落點되어 純祖의 養子 資格으로
哲宗
으로 登極하였다. 이때 그는 爵位가 없어서
1849年
6月 17日
먼저
議政府
左議政
김도희
(金道喜) 等의 建議로
상계군
, 풍계군의 界磁 돌림을 考慮하고,
忠淸南道
全義
의 地域名에서 따서 전계군(全溪君)에 皮封되었다가, 逐戶와 私食을
宋나라
複簧
(?皇)과
獸王
(秀王) 및 本朝
덕흥大院君
(德興大院君),
庭園大院君
(定遠大院君)의 前例에 따라 다시 電界大院君(全溪大院君)으로 秋捧하고, 墓(墓)도 다시 整備하고, 墓 앞에
神道碑
를 세우게 하고,
家廟
(家廟, 前計窮)를 重建하여 神主는
不遷之位
로 定하고
영평군
과 그 後孫으로 奉仕
[7]
하게 하였다. 한便 肅宗 때의 王族 中에도 같은 作號인 전계군(全溪君)의 爵位를 받은 二泊(李溥)이라는 王族이 있었다.
처음 그의 丈人과 처兆, 처曾祖父를
增
領議政
,
增
左贊成
,
增
板書
로 各各 追贈하는 일을 놓고도 이름있던 家門인 그의 本妻 全州崔氏의 親庭만 贈職하자는 論議가 나왔다가, 生家도 追贈해야 한다는 反論이 나와 첩 용성廉氏의 親庭 3代도 贈職이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