奬忠壇 公園
(奬忠壇公園)은
서울
中區
의
南山
北쪽 기슭에 있는
公園
이다. 現在는
南山公園
장충地球의 一部로 管理된다.
東國大學校
와
新羅호텔
사이에 있다. 本來 奬忠壇은 現在 奬忠壇 公園을 包含하여
新羅호텔
,
國立劇場
,
自由센터
,
서울타워호텔
터를 아우르는 큰 規模였다.
淸溪川
의
水標橋
를 옮겨놓았고, 서울市 有形文化財 1號인 奬忠壇碑가 있다. 안쪽으로는 敬老堂과 體育 施設, 野外 舞臺 等이 있으며,
四溟大師
를 비롯하여
李儁
,
이한응
,
柳寬順
의 銅像도 세워져 있다.
이 公園을 素材로 한 歌手
陪扈
의 노래 〈안개 낀 奬忠壇 公園〉李 有名하다.
奬忠壇 公園은
명성황후
가 殺害된
乙未事變
때 殉國한 忠臣, 烈士들을 祭祀하기 위해
1900年
9月
大韓帝國 高宗
이 ‘奬忠壇’이라는 祠堂을 設置한 데서 비롯되었다. 高宗은
御營廳
의 分所로 서울의 南쪽을 지키는 南小營(南小營) 자리에 奬忠壇을 짓고, 봄가을로 祭祀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訓鍊隊 聯隊長
홍계훈
, 領官 염도희, 領官 이경호를 主神으로 제향하고, 김홍제, 이학승, 李鍾九 等 將兵들을 配享했으나, 다음해 宮內府 代身
이경직
을 비롯하여
壬午軍亂
,
甲申政變
때 죽은 文身들도 包含하였다.
[1]
그러나 乙未事變을 일으킨 日本의 勢力이 强盛해지면서
1908年
祭祀는 中斷되었다.
1909年
이토 히로부미
가
安重根
에게 殺害되었을 때 擧國的인
國民大追悼會
라는 行事가 奬忠壇에서 열렸다. 國民大追悼會 推進 勢力들은 奬忠壇에 이토의 祠堂을 짓고 追慕祭를 지냈다.
[2]
韓日 倂合
後人
1919年
에는 奬忠壇 一帶에
벚나무
를 심어 日本式 公園이 造成되었다.
昌慶宮
과 類似하게 歷史的 意味가 있는 場所가 慰樂 施設로 바뀌었다. 日本은 公園에
상하이 事變
때 死亡한 日本軍 肉彈3勇士의 銅像을 세웠고,
이토 히로부미
를 위한 절인
박문사
도
1932年
隣近에 세워졌다.
[1]
[3]
解放 後 日本 軍人들의 銅像과 박문사는 撤去되었으나,
韓國 戰爭
으로 祠堂의 附屬建物이 破壞되었다. 1959年 청계천이 覆蓋되자 水標橋를 撤去하여 이곳으로 옮겼으며, 1969年에는 迎賓館 內에 있던 奬忠壇碑를 水標橋 옆으로 옮겼다.
[1]
1957年
5月 25日
第1共和國
自由黨
의 獨裁에 聲討하기 爲해 野黨의 國民主權擁護 鬪爭委員會 主催로 서울 市民에 約 20萬餘 名이 모인 野黨 時局講演會에서 前無後無한 與黨과 結託한 유지광과 東大門師團이
奬忠壇集會事件
을 일으켰다.
1971年
大韓民國 第7代 大統領 選擧
前 4月 18日 奬忠壇 公園에서 約 100萬 名의 市民이 모인 가운데 김대중 候補와 朴正熙 候補의 遊說對決이 有名하기도 하다.
大韓民國 第7代 大統領 選擧
는
朴正熙
가 大統領에 當選되었지만,
金大中
은 “
朴正熙
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이후락
에게 졌다.”라고 말했다. 以後
維新憲法
이 發效되었다.
[4]
[5]
奬忠壇의 처음 位置는 遺失되었으나, 只今의 奬忠壇 公園 南쪽 끝인 어린이野球場 건너便 近處로 推定되고 있다. 公園 入口에 남아 있는 奬忠壇碑의 ‘奬忠壇’(奬忠壇)이라는 글씨는
大韓帝國 純宗
이 皇太子였을 때 쓴 것이다. 비 뒷面에는
민영환
의 글이 새겨져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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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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