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安南道
大同郡(現
平壤直轄市
) 胎生으로, 어려서 孤兒가 되어 어렵게 자랐다.
숭실學校
를 卒業한 以後,
1905年
하와이
로 移民을 떠났고
1906年
샌프란시스코
로 移住했다.
張仁煥은 獨立運動을 위해 美國 샌프란시스코의 獨立運動團體인
大同譜國會
(大同保國會)의 會員이 되었다.
1908年
親日派
美國人으로
조선통감부
와 密着해 있던 大韓帝國 外交顧問
더럼 스티븐스
(d.w.stevens)가 샌프란시스코에서 記者들에게 乙巳勒約을 庇護하고 韓國을 批判하는 發言을 하였고 美國의 各 新聞社에 發表되었다. 이에 隣近 地域에 居住하던 美洲 韓人 代表들이 스티븐스를 만나 抗議하였으나 스티븐스는 李完用을 忠臣이라 하고 韓國의 人民이 愚昧하여 獨立의 資格이 없다는 等 詭辯을 하여 韓人들에게 暴行을 當했다. 스티븐스의 親日 發言을 傳해들은 張仁煥은 激忿하여 그를 狙擊하기로 決心했다.
3月 23日
샌프란시스코
에서
워싱턴 D.C.
으로 떠나는 길의 스티븐스를 攻擊하려 하던 中 같은 目的으로 待機하던
전명운
이 먼저 스티븐스와 格鬪를 벌였다. 그는 拳銃 洗髮을 發砲하였는데, 한발은 전명운의 어깨에 잘못 맞았고 나머지 두發을 맞은 스티븐스는 重傷을 입어 이틀 後 死亡했다.
韓人 社會에서 選任해 준, 當時 그의 裁判을 맡은
네이선 코플런
(Nathan Coughlan)
辯護士
는 哲學者
쇼펜하우어
의
愛國的 精神病
(patriotic insanity) 理論을 根據로, "이 事件은 一種의 精神 疾患 狀態에서 저지른 것이므로 犯罪가 될 수 없다" 고 抗辯했다.
[3]
그는 警察과 法廷에서 다음과 같은 陳述書를 提出하였고, 自身의 行動이 正當했다고 主張하였다.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아야 할 理由가 뭐요? 數十萬名이 그의 計劃 때문에 죽어갔소. 그러니 나는 내 祖國을 위해 그를 쏜 것이요.
나는 投獄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殉國하고 싶소. 나는 祖國에 對한 나의 義務를 다했고 法이 나를 어찌할지는 關心이 없소.
裁判 結果 禁錮 25年型을 宣告 받았으나 10年 만인
1919年
假出獄하였다.
1927年
歸國하여 平壤에서 結婚도 하였으나 日帝의 監視로 혼자 美國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病苦에 시달리다가
1930年
自殺하였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