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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生浦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長生浦 (長生浦)는 韓半島 蔚山灣 沿岸에 있는 浦口이다. 所在地는 大韓民國 蔚山廣域市 南區 長生浦洞이다. 過去 고래잡이 로 有名했던 浦口이다.

長生浦 고래博物館

長生浦의 고래잡이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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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生浦 沿岸은 鬼神고래 가 많이 棲息하는 바닷가라고 하여 蔚山 極頃 懷柔 海面 이라는 이름의 天然記念物로 指定되어 있으며, 또한 밍크고래 , 참고래 等 다양한 고래 種이 多數 棲息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韓國人 에게는 고래고기 를 먹는 風習이 없었고, 交通의 未備로 고래고기의 流通 亦是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 고래잡이에 나서는 境遇는 없었다. 韓半島에서 고래잡이가 처음 始作된 것은 1848年 美國 에 依해서이다.

長生浦에서 고래잡이가 始作된 것은 1899年, 러시아 의 太平洋漁業 株式會社에 依해서였다. 이 會社는 大韓帝國 政府로부터 包莖 許可權을 讓渡받아 操業을 始作하였으며, 長生浦를 고래 解體 作業場으로 利用하였다. 이 때부터 長生浦는 包莖의 前進基地로 照明받기 始作하였다.

1905年의 러일戰爭 以後에 捕鯨 許可權은 日本 으로 넘어갔으며, 以後 日帝 强占期 가 끝날 때까지 長生浦의 고래잡이는 日本 捕鯨船에 依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特히 1915年에 韓半島 各地의 包莖基地가 整備되면서부터는, 長生浦가 고래잡이의 中心項이 되었다. 이 때에 生産된 고래고기의 大部分은, 消費量이 많은 日本으로 輸出되었다.

1945年 光復을 맞이하면서, 韓半島의 고래잡이는 韓國人들에 依하여 스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韓國人이 設立한 最初의 捕鯨會社는, 日帝 强占期 當時 捕鯨船에서 操業을 한 經驗이 있는 韓國人 200餘名이 出資하여 設立한 朝鮮包莖株式會社이다. 이 會社는 日帝 强占期 當時에 이들 韓國人 從業員들에 對한 滯拂賃金과 退職金 몫으로, 日本水産株式會社로부터 木造 捕鯨船 두 隻을 讓渡받아 長生浦를 中心으로 操業을 始作했다.

1970年代 末 고래잡이가 全盛期를 이룬 時期에 長生浦는 20餘隻의 捕鯨船과 1萬 餘名의 人口가 상주하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1980年 지나친 捕獲으로 인하여 個體數가 減少하자 捕獲量 亦是 함께 줄어들었고, 一部 種은 滅種에 이르렀다. 이윽고 1986年 國際捕鯨委員會 (IWC)에서 商業捕鯨禁止를 決定하면서 고래잡이는 中斷되었다. 以後 隣近에 工業團地가 造成되면서 大部分의 住民들이 移住하였고 마을은 衰退하였다.

長生浦의 고래잡이와 蔚山의 地域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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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山廣域市에서는 長生浦의 고래잡이가 蔚山을 代表할 수 있는 象徵이라고 判斷하여, 이를 蔚山의 地域文化와 연계시키려는 여러 가지 努力을 하고 있다. 蔚山廣域市의 詩(市) 캐릭터인 解鬱이는 고래를 擬人化시킨 形態이며, 이를 利用한 캐릭터 商品이나 모바일 바탕畵面이 提供되고 있다. 또한 蔚山廣域市 南區廳에서는 長生浦 海洋公園 에서는 每年 5~6月 頃에 蔚山고래祝祭 를 開催하여, 長生浦의 고래잡이 歷史를 되새기고 있다.

한便 2005年 5月에는 第57次 國際捕鯨委員會 年例會議를 蔚山에서 誘致하는 成果도 있었다. 이 會議를 記念하며 設立된 長生浦 고래博物館은, 고래잡이 歷史에 關聯한 다양한 資料와 함께 捕鯨船 模型, 고래 뼈 等을 展示하고 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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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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