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年 6月 1日
全羅北道
高敞郡
흥덕면
신송리에서 精米業을 하는 富農 집안에서 6男妹의 長男으로 태어나
[1]
경기고등학교
와
서울大學校
法學科를 卒業하였다.
軍事政權 時節 보낸 大學 時節에 高等學校 動機인
孫鶴圭
前
바른未來黨
代表와
김근태
前
民主統合黨
常任顧問,
조영래
와 親하게 지내며 社會問題를 놓고 討論하고 뜻을 함께했다.
[2]
1972年
서울大學校
出身 51名을 包含하여 80名이 合格한 第14回
司法試驗
에 合格하여
司法硏修院
4基를 修了하고 法務官으로 軍 服務를 마치고 1977年 11月
서울地方法院 永登浦支援
判事에 任用되어
서울高等法院
部長判事,
제주지방법원腸
,
水原地方法院腸
,
서울中央地法院長
等을 歷任하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지만 法院 內에서 改革的 人物로 評價받았다.
서울地方法院 判事로 在職하던 1995年 社會民主主義靑年同盟
國家保安法
違反 事件에서 1992年 大法院 少數意見(
李會昌
等)을 引用하여
利敵表現物
條項에 對해 “國家의 存立과 安全을 위태롭게 하거나 自由民主的 基本秩序에 危害를 줄 明白한 危險이 있을 境遇에만 適用해야 한다”며
被告人
에게 無罪를 宣告했던
[3]
이홍훈은 4回에 걸쳐 0順位 大法官 候補로 推薦받았으나 番番이 任命되지 못한 채
[4]
水原地方法院張으로 있던 2005年
盧武鉉
大統領이
이용훈
公職者倫理委院長,
조준희
言論仲裁委員長과 함께
최종영
大法院長
後任으로 有力한 大法院長 候補로 檢討하고
[5]
文在寅
民政首席
이 直接 意思를 打診했으나 "大法官을 거치지 않고
大法院長
이 되는 것은 前例에 없는 일로 바람직하지 않고
大法院長
이 아닌
大法官
에 關心 있다"며 그 提案을 固辭했으며 그 해
박시환
,
김지형
,
김황식
이 大法官에 任命되자 辭退하려했으나
이용훈
大法院長
이 붙잡으며 "한 番만 더 기다려 보라"고 懇曲히 說得했고
[4]
2006年에
大法院長
이 提請하여
盧武鉉
大統領
에 依해
大法官
에 任命되었다.
[4]
大法官
에 對해 "사람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最高 職業이라고 생각하지요. 남에게 干涉 안 받고 獨立的으로 일할 수 있고 國家와 社會가 나아갈 方向을 法의 이름으로 判決文에 담을 수 있으니 世上에 이런 자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일 많이 하고 苦生하는 자리"라면서 "體力 뿐만 아니라 世上을 보는 眼目도 있어야 되는 자리"라고 말하는
[4]
이홍훈은 大法官으로 在職하면서 "勤勞者의 罷業을 無條件
業務妨害罪
로 處罰해서는 안 된다"는 判決로 '單純 罷業도 當然히
業務妨害罪
에 該當한다'고 여긴 大法院 判例를 變更하고 無給休職원을 내고 出産을 했더라도 "
勤勞基準法
上 出産休暇 2個月間의 賃金을 支給해야 한다"며 勤勞者의 基本權을 保護한 判決, 公益을 위해 言論社에 內部 非理를 暴露한 公務員을 國家가 解任한 것은 不當하다는 判決을 하면서 "國民의 基本權과 司法 正義에 重點을 두고 判斷해 基本權 保護에 忠實하면서도 社會的 弱者를 擁護하는 判決을 많이 내렸다"를 評價를 받고 "陪審員團이 一致된 意見으로 無罪 評決을 한 境遇 特別한 事情이 없으면 陪審員團의 意見을 尊重해야 한다"는 判決로 ‘
國民參與裁判
’ 定着에 貢獻, ‘4大江 事業 執行停止 申請’ 全員合議體 事件에서 主審을 맡아 “環境問題가 包含된 이 事件을 處理하면서 未來의 世代인 우리 子孫의 重要한 삶의 터전이 될 環境이 汚染되거나 毁損되지 아니하도록 각별한 注意를 기울일 必要가 있다”며 4大江 事業 中斷의 必要性을 强調하는 等 在職 時節 進步的 少數意見을 많이 낸
전수안
·
김지형
·
金英蘭
·
박시환
과 함께 ‘禿수리 5兄弟’로 불렸다.
[6]
改革 性向이라는 判事라는 評價도 있지만
민정黨舍 占據 事件
法廷에서 口號를 외치거나 노래를 부르고 油印物을 뿌리는 行動이 있자 "法廷 態度에 따라 刑量을 달리하여 法廷 騷亂?冒瀆에 嚴斷한다"는 法院의 方針이 定해진 以後 처음으로 "總選에서
民政黨
候補에 對해 투표하지 말 것"을 煽動하여
集會 및 示威에 關한 法律
違反으로 拘束起訴된 被告人에게 實刑을 宣告
[7]
하면서 "自身들의 行動이 正當하다고 생각되더라도 國法秩序에 違背되는 行爲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
集會 및 示威에 關한 法律
이 憲法에 違背되는지 與否에 對해 判斷할 權限이 自身에게 없다"고 하는 方法으로 여느 判事와 다를 것이 없이 違憲法律審査權이라는 司法權을 가진 憲法機關으로서 權限을 스스로 抛棄하였지만
[8]
1988年 憲法 改憲으로 環境權이 包含된 以後에는 처음으로 1994年에 아파트 棟 間隔이 좁아 訴訟을 提起한 原稿에 對해 日照權 侵害를 認定하는 判決을 하기도 했다.
[9]
2006年 60歲의 나이로 大法官에 任命돼 1985年
이일규
前 大法院長의 大法院 判事 停年退任 뒤 처음으로 記錄한 停年 退任으로
[1]
大法官 任期를 마치는 退任辭 末尾에 '
大法官
이홍훈'李 아닌 '法官 이홍훈'이라고 쓰고 退任한 2011年 "平生 法官職을 遂行해 오면서 國民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면서 "茶山
정약용
先生의 民本과 爲民思想, 淸白과 節儉思想, 德治思想을 公職者의 根本德目으로 삼고 올곧고 올바른 삶을 살려고 努力했으나 能力이 不足한 탓으로 부끄럽고 후회스러운 일도 많은 것 같다"고 自評하며
[1]
故鄕 집에서 85歲의 어머니 채귀례, 夫人 박옥미와 길고양이 11마리, 珍島개 2마리와 함께 살았던 이홍훈은
[4]
2011年 5月 韓國行政判例學會 會長職을 맡아 理論과 實務硏究를 連結하고 9月에
한양대학교
,
전북대학교
法學專門大學院 夕座敎授를 맡아 講義하면서 法曹倫理協議會 委員長, 화우公益財團 理事長, 新聞倫理委員會 委員長, 2017年부터 2年 동안
서울大學校
理事長, 2018年
金命洙
大法院長
이 司法改革 方案을 마련하기 위해 設置한 ‘國民과 함께하는 司法發展委員會’ 初代 委員長을 맡았으며 辯護士로서 顧問으로 있는 法務法人 化雨 業務로 一週日에 折半은 서울에서 지내면서 大法院 上告審 事件 記錄을 檢討해주고 諮問에 應하여
李在明
京畿道知事
의
公職選擧法
違反 上告審을 맡아 無罪 趣旨로 破棄還送하는데 寄與하였다.
[4]
2017年
膽道癌
判定을 받고 10時間이 넘는 大手術을 하여 1年 넘게 抗癌 治療를 했으나 癌은 肝으로 번져 間의 一部를 잘라내는 手術을 받았고 2019年에 다시 肺에서 癌細胞가 發見되었으나 세 番째 手術을 하는 것은 無理라는 診斷에 따라 肺의 癌細胞의 進行 速度를 지켜보면서 3個月에 한 番 免疫 治療를 받았다.
大法官 退任 以後 歸鄕하여 故鄕 집에서 庭園을 가꾼다는 事實이 2021年 5月 6日 放送된
kbs1tv
다큐인사이트
를 통해 알려졌으나
[10]
2021年 7月 11日 3時 49分 稀貴 疾患을 앓는 딸을 包含하여 2男2女의 子女를 두고 死亡했다.
[11]
司法硏修院
時節부터 40年 넘게 해온 마음 工夫 德分에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뜻의 生死一如(生死一如)니 宇宙逸話(宇宙一花)를 좋아하는 이홍훈은 公益 論文集 <宇宙一花>에서
華嚴經
부터 始作해
칸트
의 倫理論을 거쳐 素粒子 物理學까지 擧論하며 直接 쓴 原稿紙 20枚 分量의 序文에서 "生命體의 生成 基盤은 다른 生命體의 죽음으로 마련된 것이며, 나타남과 사라짐,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이 하나로 連結된 全體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