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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협우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협우 (李協雨, 1921年 ~ 1987年 8月 11日 )는 日帝 强占期의 官僚이자, 大韓民國의 政治人이다. 第2代~第4代의 3選 國會議員을 歷任하였다.

이협우
出生 1921年
日帝强占期 朝鮮 慶尙北道 慶州郡
死亡 1987年 8月 11日 ( 1987-08-11 ) (66歲)
國籍 大韓民國
議員 選手 3
議員 臺數 2·3·4

日帝 時代때 高等係 刑事로 勤務했으며 [1] 大韓靑年團 내남면 誤團副團長, 自由黨 月城郡當 委員長, 내남水利組合長, 2~4代 國會議員을 지냈다.

生涯 編輯

慶州郡 내남면 망성리(現在 慶州市 내남면 )에서 태어났다. 大邱農林學校 (現 대구자연과학고等學校)를 卒業하고, 日帝强占期 末期 高等係 刑事, 내남면 書記로 勤務하였다.

光復 以後 大韓靑年團 내남면 誤團副團長, 自由黨 慶州郡當 委員長, 내남水利組合腸을 지냈다. 1949年 慶州郡 내남면 에서 명계리 마을 里長 김원도와 그의 親戚 4家口 22名과 孫氏 家族 8名 等 모두 30名을 虐殺하는데 앞장섰다(속칭 이협우 事件). 이 事件으로 4·19革命 以後 逮捕 돼 1961年 死刑을 判決받았으나, 5·16 軍士政變 以後 無罪로 釋放되었다. [2] 한便 間諜으로 몰렸던 遺族會는 2010年 12月 14日 無罪判決을 받았다. [3]

1950年 6.25街 勃發하자 靑年團 活動으로 앞장서서 無辜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다. [ 出處 必要 ] 6月28日 새벽 50名 以上 推定되는 망성리1里 11家口의 一家族을 虐殺했다. 비슷한 時期에 網性2里의 뒷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沒殺하였다. 이협우는 내남면 網性 2里 出身으로 平素 마음에 들지않았던 周邊 部落과 이웃을 마구잡이로 죽였다. 證言에 따르면 이협우의 靑年團이 날마다 몇 트럭씩의 사람들을 태워와서 南山(金烏山)의 골짜기에서 虐殺하였다고 한다.

1950年 第2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하여 當選되고, 第3代 國會議員 選擧에 當選되었으며, 自由黨 에 入黨하였다. 1960年 第4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出馬하여 當選되었으나 1961年 5.16 軍事 政變으로 國會가 解散되었다. 1960年 4.19 革命 以後 住民 虐殺 事件으로 拘束 起訴되었고 1審에서 死刑을 宣告받았으나, 5.16 軍士政變 以後 革命裁判에서 減刑 後 1963年 初 釋放되었다. 1963年 第6代 國會議員 總選擧에 民主공화당 候補로 立候補하였으나 [4] , 落選하였다.

1975年 10月 維新에 反對하여 民主回復국민회의 에 參與하고, 民主回復국민회의 競走支部 常任代表委員으로 活動하였다. 1987年 8月 11日 새벽 0時頃 慶北 慶州市 성건동 薔薇아파트 2棟 102號 自宅에서 死亡하였다. 屍身은 慶尙北道 月城郡 건천읍 화천리 先山에 安葬되었다.

家族 關係 編輯

  • 否認?: 김기원(金基瑗)
    • 3男 4女
  • 동생?: 이한우(李漢雨)

歷代 選擧 結果 編輯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0年 總選 2代 國會議員 慶北 慶州郡 을 大韓靑年團 7,825票
16.60%
1位   初選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慶北 慶州郡 을 無所屬 9,305票
19.38%
1位   再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慶北 月城郡 甲 自由黨 13,088票
42.81%
1位   3選

參考資料 編輯

各州 編輯

外部 링크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