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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定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豫定 (豫定, 英語 : predestination )은 미리 定하거나 豫想을 의미하며, 組織神學 에서 豫定論의 位置는 "新論"과 "救援論"과 關聯 깊다. 特別히 基督敎 神學에서는 救援論 과 關聯하여 成道에 對한 하나님 이 創世前에 미리 選擇하는 것에 關한 用語이며, 바울 書信書에서 나타나며, 어거스틴 以後 發展해서 루터도 强調했다. 좁은 意味로 改革主義 卽, 長老敎會 改革敎會 의 選擇과 遺棄를 包含하는 이중예正論을 의미하기도 한다. 章 칼뱅 에 依해서 體系化되었다. 豫定說에서는 舊怨 은 人間의 行爲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救援할 能力이 없는 人間을 選擇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說明함으로써 救援에 對한 하나님의 慈悲와 主權을 强調한다. "豫定"은 舊怨 과 關聯되는데, 恩惠로 어떤 사람들을 永遠한 救援으로 選擇하였고 反面에 自身들의 罪때문에 그리고 ? 原罪 로 인해 永遠한 審判을 받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셨다는 것이다. 前者에 對해서는 無條件的인 選擇이라고 부르고 後者에 對해서는 有機라고 부른다. 칼뱅주의 에서는 電子들은 하나님에 依해서 믿음으로 中生 하도록 有效的인 召命으로 豫定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칼뱅주의 二重豫定論 이다.

改革主義 二重豫定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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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革主義 豫定論은 人間의 全的 腐敗 와 救援에 關한 全的 恩惠 를 그 背景으로 하고 있다. 理解를 돕기 위해 簡略히 整理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사람에게는 자유로운 選擇權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犯罪로 墮落한 까닭에 悔改하기를 拒否한다는 것이다. (戰績 墮落; 루터 는 이를 보고 '人間의 意志는 의 奴隸'라고 하였다.)
  2. 이러한 人間의 拒否와 不順從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은 人間의 良心이나 努力이 아닌 하나님의 恩惠 밖에 없다. (오직 恩惠)

이러한 背景 속에서 改革主義 豫定論은 하나님께서 天地創造를 하시기 以前, 곧 時間조차 創造되지 않은 하나님의 領域에서, 創造 後 人間의 滅亡을 아시사 그 가운데서 一部를 아무 條件 없이 選擇下士 救援하시기로 作定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누구를 放置하실 것인가에 定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二重豫定論 이라고 불린다.

運命論과의 差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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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예正論과 運命論의 差異는 運命論의 境遇 過去의 어떤 時點에서 未來의 일을 결정지었다는 理論이지만, 이중예正論은 過去-現在-未來라는 時間의 軸을 超越한 神의 領域에서의 決定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이렇게 時間을 超越하여 決定된 事實은 時間에 갇혀있는 사람의 立場에서는 時空間이 創造되기 前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表現할 수밖에 없게 된다.

神學的인 體系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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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이중예正論은 일찍이 어거스틴 이 主張하여 '어거스틴注意'라는 別名이 붙어있다. (仔細한 것은 어거스틴-펠라기우스 論爭 參照.) 그러나 神學的으로 體系化 된 것은 宗敎改革 때 改革者들에 依해서였다. 特히 마르틴 루터 의 《老禮儀持論(Bondage of the Will)》은 이에 對한 辨證書로 有名하다. 그래서 이중예正論은 改革主義 神學의 한 特徵이 되었다. 特히 改革主義에서 얘기하는 칼뱅주의 5代 綱領 과 不可分의 關係에 있다.

이중예正論은 칼뱅주의 5代 綱領 中 無條件的인 選擇(unconditional election)의 첫 番째 項目에 明文化되어있다. 卽, 救援은 사람의 어떠한 行爲에 對한 補償이 아니라 하나님의 無條件的인 恩惠로만 받는 것이라는 主張이다. 그러나 이것이 滅亡 받는 사람의 責任을 없애지는 못하는 것은, 豫定論은 모든 人類가 滅亡 가운데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中 몇몇을 救援하기로 하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救援 받은 사람들은 自身의 救援을 자랑하지 못하며, 滅亡 받은 사람들은 自身의 罪에 對한 責任을 면하지 못한다. 루터는 이에 對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萬一 [救援 받을] 資格 없는 사람에게 賞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當身의 마음에 든다면, [救援 받을] 資格 없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滅亡시키실 때 當身은 不平하면 안 됩니다." [1] 더 仔細한 것은 아래 "自由意志와 이中豫定論"을 보라.

이중예正論에 對한 根據로 改革主義者들이 내세우는 聖經 句節로 다음이 있다:

  • "그 아들들이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고, 따라서 線이나 惡을 行하기도 前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兄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善行을 보시고 불러주시는 것이 아니라 當身의 뜻대로 불러주시며 選擇의 原理에 依해서 當身의 計劃을 이루십니다." (로마書 9:11, 共同飜譯)
  • "하나님의 選擇을 받고 안 받는 것은 人間의 意志나 努力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로마書 9:16, 共同飜譯)
  •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當身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慈悲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頑固하게도 하십니다. (로마書 9:18, 共同飜譯)
  •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當身의 子女로 삼으시기로 미리 定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恩寵에 對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讚揚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페소 1:5-6, 共同飜譯)
  •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各各 쓰임에 맞게 만드셨으니 不義한 사람은 災殃이 내리는 날에 災殃받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箴言 16:4, 共同飜譯)

自由意志 및 自由選擇에 對한 二重豫定論의 見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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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예正論과 關聯된 흔한 誤解 中 하나는 이중예定論이 人間의 자유로운 選擇權을 否定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豫定論은 人間의 選擇權에 對한 理論이 아니라 人間의 靈魂의 狀態에 對한 理論 이다---즉, 자유로운 選擇權은 疑心할 나위 없이 人間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原罪 로 인하여 墮落한 自然人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心性 때문에 自身의 자유로운 選擇權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選擇을 하지 않는다 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心性을 바꾸고 새롭게 만들어 주실 때까지 繼續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自然人은 自身의 자유로운 選擇으로 恒常 罪의 종노릇 하는 길을 取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중예正論은

  • 自然人은 自身이 "願하는" 選擇을 할 수 있다는 自由選擇權 을 認定하되
  • 自然人의 "所願하는 바", 卽 그 "意志"는 罪의 支配를 받는다는 老禮儀持論 을 가르친다.

이와 關聯하여 基督敎 歷史에서 크게 두 가지 對蹠的인 立場이 있어 왔다:

  • 合力설 ( synergism ): 하나님이 救援의 길을 마련하시지만, 사람이 그것을 取하느냐의 與否는 人間에게 달려있다. 卽, 救援은 하나님과 사람의 合作이라는 것이다.
  • 單獨설 ( monergism ): 하나님이 救援의 길을 마련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取하는 것도 그리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셔야만 可能하다는 것이다. 卽, 救援은 하나님께만 달려있다는 것이다.

에라스무스 改革主義 의 單獨설에 對해 "그렇다면 누가 努力하며 自己 삶을 改善하려 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2] 이에 對해 루터 는 다음과 같이 答했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當身과 같이 自己改善을 하려는 사람을 對하실 時間이 없는 것은 그들이 僞善者이기 때문이다. 選擇 받은 者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이, 聖靈에 依해 改善될 것이다. 나머지는 改善되지 못하고 滅亡할 것이다". [2] 에라스무스 는 또 "누가 하나님께서 自身을 사랑하신다고 믿겠는가?"하고 물었다. [2] 이에 對해 루터 는 "아무도 없다! 아무도 할 수 없다! 오직 擇함 받은 者들 만이 믿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믿지 못하고 滅亡할 것이다; 當身의 表現처럼, 火를 내며 神聖冒瀆하면서." [2]

合力說을 主張하는 神學思想을 넓게는 알미니按酒의 라고 하며, 單獨說을 主張하는 神學思想은 넓게 어거스틴注意 라고 한다. 豫定論은 勿論 어거스틴主義에 該當한다. 오늘날 어거스틴注意 를 主張하는 敎派는 長老敎會 改革敎會 가 있으며, 이 外의 宗派들은 大槪 알미니按酒의 를 따르고 있다.

普通 協力說을 主張할 境遇 救援이 사람의 決定에 달려 있으므로 한 番 救援을 얻었던 사람도 後날 救援을 잃어버리거나 取消될 수 있다고 主張한다. 그러나 單獨說을 主張할 境遇 救援은 하나님의 選擇에 依해 始作하고 또 하나님에 依해 完成되므로 한 番 始作된 救援의 歷史가 取消되거나 失敗할 수 없다고 主張한다.

이중예正論과 救援의 方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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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革主義 豫定論의 또 한 가지 特徵은 救援에 對한 擇定과 遺棄 外에도 救援의 方道까지 다 豫定하셨다는 것이다. 仔細한 것은 言約神學 을 보라.

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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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合力說과 單獨說의 論爭 敎會에서 불거진 事件이 4~5世紀에 있었던 어거스틴-펠라기우스 論爭 이다. 어거스틴은 單獨說을 主張하였고 펠라기우스는 合力說을 主張하였는데, 카르타고 會議 에서 基督敎會는 어거스틴의 理論을 採擇하였고, 이리하여 單獨설에 어거스틴主義라는 別名이 붙게 되었다.

그러나 곧 로마敎會 는 알미니안主義로 回歸하게 되는데, 다시 어거스틴主義가 登場하게 된 것이 宗敎改革者들을 통해서였다. 宗敎改革 當時 이러한 어거스틴주의식 原罪論에 反對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心性을 따로 바꾸어 주시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만들 수 있다'고 主張한 사람 中 代表的인 사람이 에라스무스 다. 여기에 反駁하고 '戰績 墮落'說을 主張한 것이 루터 의 《老禮儀持論(Bondage of the Will)》이다. 에라스무스 의 主張은 合力설에 該當하며, 루터 의 主張은 單獨설에 該當된다. 合力說과 單獨說의 論爭은 基督敎 草創期에 이미 있었고, 잘 알려진 것이 4~ 5世紀 에였 있었던 英國 神學者 펠라기우스 와 交付 어거스틴 主敎 와 論爭이다. 펠라기우스 는 合力說을 主張하

宗敎改革 以後로는 17世紀에 알미니우스 를 따르는 알미니按酒의 者들이 合力說을 主張하였다. 이때 알미니按酒의 者들의 主張에 反駁하면서 도르트 總會 에서 作成된 것이 ' 칼빈主義의 5代 綱領 '이다.

18世紀 에는 聖公會 私製 利子 監理敎會 創始者인 웨슬리 가 合力說을 主張하였다. [3]

關聯된 聖書 句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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豫定論의 根據로서 자주 引用되는 聖書 句節들로 다음이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者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者는 내가 決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者 中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者마다 永生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福音서 6:37,39,40,44)

위 句節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과, 한 番 그리스도를 믿고 나온 者는 救援을 잃어버릴 수 없다는 理論의 根據로 자주 登場한다.

"곧 創世 前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擇下士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欠이 없게 하시려고" ( 에베소서 1:4)

위 句節은 하나님의 選擇은 世上이 創造되기 前에 이루어진 것이란 理論의 根據로 種種 쓰인다. 이때 "創世 前"이란 時間조차 創造 되기 前, 卽 時間을 超越한 神의 領域에서의 決定이란 뜻으로 主로 解釋된다. 그러므로 時間이란 軸 위에서 過去의 어떤 時點에 未來의 일이 決定되었다는 運命論과는 差異가 있다.

"迎接하는 者 곧 그 이름을 믿는 者들에게는 하나님의 子女가 되는 權勢를 주셨으니 이는 血統으로나 毓精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者들이니라" (요한福音 1:12,13)

위 句節은 하나님의 選擇은 사람의 意志나 選擇에 相關 없이 無條件的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理論의 根據로 種種 쓰인다.

자주 引用되는 其他 句節로 다음이 있다:

"主께서 사랑하시는 兄弟들아 우리가 恒常 너희에 關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感謝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擇下士 聖靈의 거룩하게 河心과 眞理를 믿음으로 救援을 받게 하심이니" ( 데살로니가후서 2:13)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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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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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틴 루터, "老禮儀持論", pp.235
  2. 마틴 루터, "老禮儀持論", p.99
  3. 성기호 聖潔신학대學校 總長 (1992). “칼빈의 豫定論과 웨슬리의 自由意志論” (PDF) . 웨슬리는 豫定論이 말하는 바 하나님은 全能하신 暴君(Almighty Tyrant)으로 人間의 意志나 性向에 關係없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一方的으로 人間의 滅亡을 決定하는 神으로 描寫된다고 批判한다. 하나님께 罪人의 滅亡을 一方的으로 決定하신다면 罪人의 滅亡이 하나님께 原因이 있게되며 따라서 하나님은 罪의 根源이 된다고 말하게 되는 矛盾을 招來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