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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구 (1564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정구 (1564年)

朝鮮의 文身

이정귀 (또는 이정구 , 李廷龜, 1564年 1635年 )는 朝鮮 의 文身이다. 字는 性徵(聖徵), 號는 月沙(月沙)·保晩堂(保晩堂)·치암(癡菴)·秋愛(秋崖)·濕情(習靜), 諡號는 문충(文忠), 本館 沿岸 .

生涯 編輯

朝鮮前期 學者이자 바둑의 代價 軟性府院君 李錫炯의 5歲손으로 태어났다. 母親이 解産할 때 범이 門밖에 와 엎드려 있다가 先生이 태어난 뒤에야 돌아갔다. 사람들이 모두 神奇해하면서 君子(君子)가 태어나 文明(文明)을 밝힐 象徵이라고 여겼다. 1585年(宣祖 18) 進士가 되고, 1590年(宣祖 23) 文科에 及第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壬辰倭亂이 일어나고 先祖가 蒙塵을 떠나기 前날 光海君의 世子冊封을 위해 宿直을 하던 匠人 禮曹判書 권극지가 急逝하여 蒙塵길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急히 丈人의 葬禮를 치르고 家廟를 쓴 뒤 妻子와 自身의 父親, 장某, 妻弟를 데리고 王을 쫓아 따라갔다.

明나라 송응창 의 要請으로 黃愼(黃愼) 等과 함께 뽑혀서 經書(經書)를 講義하여 學者로서 尊敬을 받았다. 그 後에도 자주 中國 使臣들을 接待하며 말벗이 되었다. 그가 明에 갔을 때, 그곳 文人들의 要請으로 100餘 醬의 紀行文을 모아 《朝鮮 기행록》이란 冊을 만들었다.

1598年 明나라 贊火注射 정응태가 '朝鮮이 倭國을 誘引해 名을 侵略한다'는 武庫를 올려 波瀾이 일었다. 當時 이 誤解를 풀기 위해 朝廷에서는 政丞인 柳成龍 等 同人들을 使臣으로 보내려 했으나 事態收拾에 自身이 없던 柳成龍은 이를 固辭했다. 이에 西人인 百社 李恒福이 情事, 젊은 李廷龜는 府使, 書記官으로 韓호(韓石峯)李 뽑혀 明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월사의 文章力은 이때 빛을 發하는데 정응태의 謀陷에 맞서 武術便茂朱(戊戌辨誣奏)를 지어 정응태(丁應泰)를 罷職시켰다. 以後 同副承旨 , 左副承旨 , 兵曹參知 , 共助參判 , 同知中樞府事, 好調參判 , 戶曹判書 , 禮曹判書 , 右參贊 , 京畿道觀察使, 知義禁府事 , 吏曹判書 等을 지내면서 先祖를 輔弼했다.

1608年 (光海君 卽位) 유영경 의 獄事 直後 정운 原從功臣 1等(定運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以後 兵曹判書 , 大提學 , 禮曹判書 , 刑曹判書 , 戶曹判書 , 知中樞府事로 右賓客, 知春秋館事 等을 겸했다.

1624年 李适의 亂 人組 公州 로 모시었으며, 1627年 丁卯胡亂 때 王을 强化 로 모시었고, 和議하자는 意見에 反對하였다. 申欽 , 長幼 , 移植 과 더불어 朝鮮 中期 4代 文章家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벼슬은 右議政 을 거쳐 左議政 에 이르렀다.

벼슬이 左議政에 이르렀음에도 삶은 儉素하고 質樸했다고 傳해진다. 漢文學의 大家로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申欽ㆍ長幼ㆍ移植과 함께 朝鮮 中期의 4代 文章家로 일컬어진다.

이정구先生墓 및 三世神道碑 》는 京畿道 加平郡 상면 태봉리에 있다. 1984年 9月 12日 京畿道의 記念物 第79號로 指定되었다.

大明外交 編輯

이정귀는 第술에 才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宣祖實錄』 卷105, 31年 10月 12日 (甲子), 內(李恒福) 생각으로는 現在 作文을 잘하는 사람으로 이정구보다 나은 者가 없다. 그의 글을 보건데 마음 속에 있는 뜻을 남김없이 表現하는데 曲盡하고 懇切하며 含蓄性이 있고 우아 莊重하니, 이는 참으로 글을 잘 짓는 선비이다.

그에 對한 몇 가지 事例로 宣祖 26年 11月 2日(1593)에 名으로 보내는 글이 重要하여, 製述 문관중 하나로 이정귀가 哨戒되었다.  『宣祖實錄』 卷44, 26年 11月 2日 (壬子), 글 잘하는 사람들이 함께 議論해서 哨戒, 述作을 專擔케 함으로써 社名을 重하게 하소서, 하니, 床이 따랐다. 哨戒한 製述 文官은 신광필, 이노, 정경세, 申欽, 黃愼, 이정귀, 李儁, 안대진, 이춘영, 유몽인이다.
또한 宣祖 32年 10月 2日에는 이정귀의 官職이 御殿通史로 나오는데,  『宣祖實錄』 卷121, 33年 1月 5日 (庚戌),
中國語 實力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정귀의 履歷은 大明外交에 있어서 꼭 必要한 存在로 浮刻되었으며, 名과 關聯된 불미스러운 일이나, 各種 駐本作業에 參與하였다. 그리고 才能이 빛을 發하던 것이 宣祖 31年(1598年)에 있었던 정응태 問題였다.
정응태가 朝鮮의 實情을 모르고 멋대로 發言한 것이 問題가 되는데, 大略的인 內容은 後날 朝鮮이 叛亂을 일으키지 않으리란 保障이 없다고 指摘하는 말을 하였다. 그 理由는 本人이 搖動을 躁恣해보니 기름진 땅이라는 所聞이 있는데, 朝鮮이 倭奴를 불러 軍事를 일으켜 함께 千組를 侵略함으로써 遼河 東쪽을 奪取하여 高句麗의 옛 地域을 回復하려 하였다고 壬辰倭亂의 發生經緯를 說明하였다. 朝鮮이 以前부터 取해오던 日本과의 交隣政策을 알지 못해 왜와 貿易하고 쌀과 콩을 주고받으며, 熊川, 東萊, 蔚山에 倭人들이 恒常 居住하여, 사이가 좋아서 倭敵을 動員해 옛 땅을 回復하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證明했다.  『宣祖實錄』 卷102, 31年 7月 4日 (丁酉),?;  『宣祖實錄』 卷104, 31年 9月 21日 (庚戌),

이에 이정귀가 정응태의 奏本에 關한 呪文을 만드는데, 정응태의 말이 잘못된 舍利임을 判斷하고, 신숙주 때부터 이어진 朝鮮과 日本의 外交方式을 說明하고, 참으로 朝鮮이 日本과 名을 치려한다면 7年間 戰爭을 할 理由가 없다는 것으로 論駁하는 글을 만들었다.  『宣祖實錄』 卷105, 31年 10月 21日(癸酉),
그리고 李恒福과 같이 陳奏使로 派遣되어, 中國 內部에서 造成된 朝鮮에 對한 不信輿論을 다시 바꾸고 오는데 成功한다.  『宣祖實錄』 卷112, 32年 (尹)4月 13日(辛卯),
정응태 事件 以後 御殿通士가 되어 大明外交에 있어 適任者가 되어 宣祖 32年 (尹)9月 26日에 광해군 世子冊封 奏請使로 參與하기도 하였다.
光海君 卽位 後에도 外交政策에 參與했으나, 광해 5年 金霽南 獄事에 連累되고,  『光海君日記[中草本]』 卷66, 5年 5月 17日(甲戌),
광해 9年 11月 廢妃 問題에 對한 上訴를 論議할 때 豫買한 立場을 보이는 것,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21, 9年 11月 25日 (甲戌),
情請하여 廢母論을 主唱할 때 끝까지 政廳에 參與하지 않으면서,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23, 10年 1月 4日(甲子),
對北勢力들의 主要 目的이 되었다.
이정귀를 비롯한 政廳에 參與하지 않은 人士들을 治罪해야 한다는 上訴가 繼續되었으나, 광해 10年 (尹)4月 15日 中國의 道士(都司)가 왜 謝恩使는 오지 않느냐며, 정응태 事件처럼 倭敵과 消息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다시 疑心하였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27, 10年 (尹)4月 15日(癸酉),
그리고 광해 10年 (尹) 4月 23日에 姜弘立을 都元帥로 出兵한 軍隊가 甚하에서 敗北하고 姜弘立이 捕虜가 되었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38, 11年 3月 12日 (乙未),

이에 明나라는 朝鮮에 對한 疑心과 名分에 立脚한 徵兵 論理가 더욱 剛해졌다. 鑛害 10年 11月 10日 千秋使 이흥주 等이 徐光啓와 葬地發이 올린 奏本의 內容을 보면 朝鮮이 老醜에게 고분고분하게 回答하고, 幣帛이 서로 往來하며 老醜가 朝鮮을 손아귀에 넣었다는 表現을 하였으며, 이러한 事情 때문에 老醜가 마음 놓고 搖動을 攻擊하고, 本國의 乃至까지 威脅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朝鮮은 倭國에게 亡한 나라를 살린 것이니, 朝鮮의 힘을 쓰지 않으면 큰 失策이며, 文治로써 懦弱한 朝鮮을 本人이 直接 찾아가, 監護하여 中國과 關係를 鞏固히하고, 老醜와 생겨나는 關係를 막을 수 있다고 主張했다. 軍事的인 部分에서는 朝鮮을 剛하게 하여 軍事計策을 論議하고 차츰 戰鬪와 守備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葬地發은 只今 朝鮮에서 1萬을 徵發해 直接 훈련시켜 使用해야 하는데, 老醜가 朝鮮을 威脅하여 友好 關係를 맺으려 하고 있어 朝鮮의 君臣들이 두려움에 떨며 自身을 保全하기에 바쁘니 泰然히 몰래 同盟을 맺을 可能性이 없지 않으며 그렇게 된다면 南쪽 바다까지 敵들의 배가 들어올 것이라고 主張했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45, 11年 10月 3日 (壬子),
이러한 認識은 徐光啓나, 葬地發의 境遇가 特秀한 것이 아니라 구경(九卿)李 懷疑하여 皇上에게 올린 글도 이와 같다고 備邊司가 會計하였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45, 11年 10月 3日 (壬子),
이들의 主張은 朝鮮에 立場에서 처음에 보낸 원병의 數가 1萬 以上이었는데,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30, 10年 7月 4日 (庚寅),  平安道 砲手가 1千 名, 全羅道 砲手가 1千 名, 忠淸道 砲手가 1千 名, 黃海道 砲手가 5百 名입니다. 死守(射手)는 3千 5百 名인데, 平安道 射手가 1千 5百 名, 全羅道 射手가 5百 名, 忠淸道 射手가 5百 名, 黃海道 射手가 1千 名입니다. 撒水(殺手)는 3千 名인데, 平安道 살수가 1千 名, 全羅道 살수가 1千 名, 忠淸道 살수가 5百 名, 黃海道 살수가 5百 名입니다. 異常을 통틀어 1萬 名입니다.
 그것을 다시 해야 하는 狀況에 直面하고 名으로부터 派遣되는 監護는 以前에 朝鮮과 明의 關係에 있었던 均衡을 깨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때 이정귀는 廢母에 對한 處罰을 都城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시 復歸되어 使臣으로 派遣하게 되었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45, 11年 10月 3日 (壬子),

陳奏使로 復歸한 이정귀가 祕密로 올린 次子에는 只今이 狀況이 안타깝고 분하지만 現在 中國에 蔓延하게 퍼진 朝鮮에 對한 疑心이 中國에 名臣이라 불리는 徐光啓에 依해 造成되어 많은 大臣들이 그 뜻을 같이하고 있어 葬地발이나 徐光啓의 意見에 直接 부딪히는 것보다 婉曲하게 表現하는 것이 重要하다며 核心을 잡았고, 軍事作戰에서도 直接 參與보다 國境에 軍士를 配置해 名과 함께 兩面에서 對峙하는 것이 老醜로 하여금 섯부른 攻擊이 不可하게 만들 수 있다고 提案했다. 그에 따른 軍糧에 對한 計策度 細細하게 準備하였는데, 湖南, 瓠犀에서 軍糧米를 가지고 오는 것보다 搖動 光榮이 豐年이 잦은 地域이라는 것을 利用해 湖南, 湖西의 軍糧米를 팔고, 下賜받은 은 1萬 兩을 義州로 보내 中講에서 쌀을 사면 3~4倍의 利益을 取할 수 있으며 運送걱정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貿易을 許諾 받기위해 위 計劃을 말하면 中國 쪽에서도 老醜에 對해 積極的인 姿勢로 認知해 當然히 貿易도 可能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光海君日記[中草本]』 卷145, 11年 10月 13日 (壬戌),
이러한 對處가 있었기에 中國에 訪問하여, 問題를 解決하고 皇帝의 졸기와 勅書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이로써 徐光啓를 비롯한 그 一派의 關心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바둑과 關聯한 逸話 編輯

特히 바둑을 좋아했는데 바둑을 두며 詩를 쓴 좋은 逸話가 傳해진다. 하루는 月社가 親舊와 바둑을 두고 있는데 어떤 중이 詩를 받으러 왔다가 大國이 繼續되자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기다렸다. 월사는 밤늦게야 바둑을 마치고 그 中에게 아래의 詩를 써줬다.

四方이 툭 트인 바람 부는 처마 밑에 한낮이 더디 가네 橘 속의 眞짜 즐거움은 바둑 한판뿐이라네 神仙이 바둑 한판 두는 동안 人間世上에서는 도끼자루 썩는다는데 뜰아래 구경하는 스님아 그대는 누구인가?

坦腹風?午景遲 橘中眞樂一枰棋 人間歲月柯應爛 庭下山僧爾是誰

  • 坦腹: 배를 드러냈다는 뜻으로 中國 名筆 王羲之의 故事에서 由來한 말. 여기서는 툭 트였다는 意味이다.
  • 橘中絡: 神仙들이 橘 속에서 바둑을 뒀다는 ‘誘拐錄’의 故事에 由來한 말.

夫人 權氏의 評價 編輯

否認 安東 權氏 亦是 平生을 베옷만 입고 산 賢淑한 女人이었다. 어느 날 정명공주(宣祖임금의 딸)의 집에서 新婦를 맞아들이는데, 나라에서 公主의 집을 빛나게 하기 위해 모든 宰相 夫人들을 잔치에 參席하라는 命을 내렸다.

이에 宰相집 婦女子들은 富貴를 誇示하기 위해 華麗한 服裝에 값비싼 佩物들을 차고 輝煌燦爛하게 잔치에 參席했다. 한데 이날 가장 뒤늦게 한 늙은 夫人이 허술한 가마에서 내리는데 無名 베저고리에 무명치마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는 農村女人의 모습이었다.

여러 婦女子들은 그 老婦人을 보고 “저런 寸 늙은이가 어찌하여 이런 자리에 나오나.”하고 疑訝해하며 업신여겼다.

그 늙은 夫人이 뜰에 올라오자 정명공주는 버선발로 뛰어 내려가 부축하여 極盡히 맞아들여 第一 上席에 앉히고 恭遜하게 待接하는 것이었다.

잔칫床이 들어온 後 그 늙은 夫人이 맨 먼저 일어나 作別을 告하니 公主는 “해가 아직 멀었으니 더 노시다 가시지요.”하고 挽留했다.

이에 夫人이 對答했다. “저희 집 大監은 ‘約員都提調’로 새벽에 入闕하셨고, 큰 아들은 吏曹判書로 庭園에 나가있고, 둘째아들은 承旨로 任職하여 來日 아침에나 돌아올 것인즉, 늙은 제가 돌아가서 저녁食事를 차려 보내야 하므로 不得已 일찍 돌아가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여러 宰相집 婦女子들이 비로소 그 늙은 夫人이 월사의 夫人임을 알고 自身들의 차림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정구를 演技한 俳優 編輯

家計 編輯

큰아들 이명한, 큰孫子 이일상과 더불어 朝鮮 最初의 3代 大提學이라는 文型의 길을 텃다. 李廷龜의 後孫들은 朝鮮 末期까지 堂上官 以上의 벼슬을 無數히 輩出한 名門家로 자리잡게 되었다.

著書 編輯

  • 《月沙集》
  • 《서연강의》
  • 《대학강의》

參考 文獻 編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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