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1年
12月 23日
에 美國 太平洋 優先會社(Pacific Mail Steamship Company)의 蒸氣船 ‘아메리카 號’(SS America)를 타고 요코하마 港을 出發하여 太平洋을 건너
캘리포니아州
샌프란시스코
로 向했다. 그 後 美國을 橫斷하여
워싱턴 D.C.
를 訪問했고,
美國
에서 約 8個月間의 長期 滯留를 하게 된다.
그 後
大西洋
을 건너
유럽
各國을 巡訪했다. 유럽에서 訪問國은
英國
(4個月),
프랑스
(2個月),
벨기에
,
네덜란드
,
獨逸
(3週),
러시아
(2週),
덴마크
,
스웨덴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비엔나 萬國博覽會
를 視察),
스위스
等 12個國에 이른다.
프랑스 아돌프 티에르 大統領을 만나는 이와쿠라 使節團, 1872年 12月 26日
귀로는
地中海
에서
수에즈 運河
를 通過하여
紅海
를 거쳐 아시아 各地에 있는 유럽 國家의 植民地(
실론
,
싱가포르
,
사이공
,
홍콩
,
상하이
等)에 對한 訪問도 이루어졌지만, 이곳의 宿泊은 유럽 各國에 비해 짧았다.
當初 豫定보다 크게 遲延되었으며, 出發以後 1年 10個月 後인
1873年
9月 13日
太平洋 優先의 ‘黃金時代 號’를 타고
요코하마 港
에 到着했다. 이들의 不在 中 政府에서는 朝鮮 出兵을 둘러싸고
征韓論
論爭이 加熱되었고, 使節이 歸國한 後에 ‘
메이지 6年 政變
’을 겪게 되었다.
元來
오쿠마 시게노部
가 發議한 小規模 使節團을 派遣할 豫定이었지만, 政治的 意圖 等에 依해 大規模 使節團이 되었다. 한 나라의 政府의 首長들이 모두 나라를 떠나 長期間 外遊한다는 것은 極히 異例的인 일이었다. 그러나 直接 西洋 文明과 思想에 接하고, 게다가 많은 國政을 比較 體驗할 수 있는 機會를 얻은 것이 그들에게 끼친 影響은 컸다. 또한 同行한 留學生도 歸國 後 政治, 經濟, 科學, 敎育, 文化 等 多樣한 分野에서 活躍하여 日本의
文明開花
에 크게 貢獻했다. 그러나 다른 한便으로는 權限을 넘어 條約을 改正하고, 協商을 하려고 試圖하였기 때문에 過渡 政府와의 摩擦을 빗었다. 또한 外遊 期間의 大幅的인 延長과
기도 다카요시
와
오쿠보 도시미치
의 不和 等의 政治的 問題를 惹起했다.
當時 “條約은 마무리되었지만, 돈만 버리고 世間에 大使가 무슨 이와쿠라(世間에 對해 뭐라고 辨明) ”라고 狂歌(狂歌)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使節團의 大部分은 削髮을 하고, 洋裝을 입었다. 이와쿠라는 日本 文化에 對해 自負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상투와
기모노
를 입은 모습으로 渡航을 했다. 이 모습은 美國의 新聞 揷畵에도 남아 있다.(위의 寫眞 參照) 그러나 美國에 留學하고 있던 아들
이와쿠라 圖謀社다
等에게 “未開 國家로 蔑視를 받는다”고 說得당하여,
시카고
에서 削髮하고, 以後는 洋裝을 차려입었다.
이와쿠라 使節團에게 맡겨진 任務는, 旣存에 締結된
不平等條約
을 再協商하는 日課
敎育
,
科學技術
,
文化
,
軍事
,
社會
와 經濟構造 情報를 蒐集하여 日本 近代化를 促進하는 일이었다.
메이지 政府
는 移轉
에도 幕府
와 協約된 各種 條約을 새 政府의 狀況에 따라 代替하기 위해 메이지 첫해부터 順次的으로 協商을 繼續하고 있었다.
1872年
7月 1日
(메이지 5年)을 期해 龜尾 15個國과 修交 條約의 改正 時期를 맞아 以後 1個年 通報로 條約을 改正할 수 있다고 同意했었기 때문에 메이지 政府는 이것을 機會로 不平等 條約의 改正을 試圖한 것이다.
[1]
이들의 첫째 任務는 대단히 遂行하기가 어려워서 相對國에 滯留하는 期間이 늘어났지만, 둘째 任務는 成功했다고 할 만하다.
後에 言論人, 文筆家로 活躍하고
立憲制政黨
의 創黨에도 參加한
後쿠치 겐이치로
後에 外交官으로 活躍하며 1902年
영일同盟
締結 時 駐英 公使였던
하야시 다다스
歸國 後
未久回覽實技
를 펴낸
구메 拘泥다케
세이난 戰爭
에서 죽은
무라타 新派치
以後
도시샤 英語學校
를 열고,
基督敎
宣敎에 平生을 바친
니이지마 兆
使節團 46名, 隨行員 18名, 留學生 43名이었다. 使節은 사쓰마를 中心으로 書記官 等은 以前 幕府의 臣僚들이 選定되었다.
이와쿠라 도모미
와 그 사람을 돕는 部
特命全權大使
3名이 同行하였다. 不特命全權大使는
오쿠보 도시미치
,
기도 다카요시
,
이토 히로부미
로 當時 政權의 長官이었다. 이와 行政家들과 學者들도 帶同하였는데 그 總帥는 48名이었고 함께 데려간 留學生 60名은
美國
과
유럽
에서 留學하고 나서 歸國하여 日本을 指導하는 重要한 사람들이 되었다.
- 特命 全權大使?:
이와쿠라 도모미
- 府使(副使)
- 1等書記官
- 다나베 다이치 (田?太一)
- 가 노리유키 (何?之)
- 後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
- 2等書記官
- 3等書記官
- 4等書記官
- 大使遂行
- 구메 拘泥다케
(久米邦武) - 訪問報告書人 《
未久回覽實技
》(米?回??記)를 編纂했다.
- 나카야마 노부요시(中山信彬)
- 우츠미 다다카쓰(?海忠勝)
- 노무라 야스시
(野村靖)
- 이츠쓰지 야스나카(五?安仲)
- 이사관
- 隨行人
가네코 겐타로 末年 寫眞, 留學 當時에는 初等學生
日本 最初의 美國 留學 女學生
왼쪽부터 나가이 시게(10), 우에다 테이(16), 요시마스料(16) 쓰다禹메(9) 야마카와 스테마츠(12). 1871年. 聲明은 모두 當時
- 英國
- 英國, 프랑스
?:
마에다 都市阿쓰
(前田利同)
- 美國
- 가네코 겐타로
(金子堅太?)
- 單 다쿠마
(團琢磨)
- 마키노 노부아키
(牧野伸?)
- 구로다 나가토모
(?田長知)
- 도리이 다다後尾(鳥居忠文)
- 쓰다 禹메코
(津田梅子) - 女性
- 아야마 스테마쓰(大山捨松) - 女性
- 羽類 시게코(瓜生繁子) - 女性
- 깃카와 조키치(吉川重吉)
- 기도 다카마社(木?孝正)
- 구사카 요시오(日下義雄)
- 야마와키 마사카쓰(山脇正勝)
- 다카기 테이사쿠(高木貞作)
- 미쓰오 街타케誤(三岡丈夫)
- 獨逸
?:
히라打 도스케
(平田東助)
- 러시아
?: 시미즈다니 긴나루(?水谷公考), 마데노코奧地 마사히데(万里小路正秀)
- 기타
- 오구라 스미히로(大村純?)
- 아사나가 陣地로(朝永甚次?)
- 나가오카 지사부로
(長岡治三?)
- 오토里 게이스케
(大鳥圭介)
- 補助 都市아야(坊城俊章)
- 無事老코지 社네요(武者小路?世)
- 니시키코지 라이겐(錦小路?言)
이 旅行 中에 이와쿠라는 各國에서 激烈히 衝擊받았다.
美國
의 近代國家다운 모습은 이와쿠라의 思想을 훨씬 뛰어넘어, 相當히 衝擊스러워서 散調에게 傳한 書信에도 恩傅(殷富)를 振興시키는 思想에, 밖을 나오는 것이 매우 놀랍다’라고 적혀 있다. 그 原因은
鐵道
에 있고 日本의 繁榮은 鐵道에 걸려 있어 日本의 東西를 잇는 鐵道 設置가 急先務가 되었으므로, 이와쿠라는 歸國하고서
日本 鐵道 會社
設立에 積極으로 關與했으며, 英國에서는 日本에서 생각할 수 없는 工業 技術에 壓倒되었다. 이미 使節團은 條約 改正이 아닌 各 國에서의 留學이 主要 目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