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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기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억기

朝鮮 中期의 武臣 (1561 - 1597)

이억기 (李億祺, 1561年 9月 3日 ~ 1597年 8月 27日 )는 朝鮮 중기의 王族 出身 무신, 政治家로 本貫은 全州 (全州), 는 경수(景受), 시호 는 義民(毅愍)이다. [1] 경흥부사, 溫性府使 等을 지내며 北方의 國防을 맡았으며, 壬辰倭亂 當時에는 全羅右道 水軍節度使를 맡으며 李舜臣 을 도와 倭軍과 싸웠다. 以後 1597年 元均 , 最好 等과 함께 漆川梁 海戰 에 出征 中 戰死했다. 事後 資憲大夫 (正2品) 兵曹 板書 追贈 되고 완興群(完興君)에 追封 되었다.

완興群
完興君
軍(君)
이름
이억기
李億祺
別號 者: 경수(景受), 號: 송봉(松峯)
시호 義民
毅愍
身上情報
出生日 1561年 9月 3日
出生地 朝鮮 漢城府
死亡日 1597年 8月 27日 ( 1597-08-27 ) (35歲)
死亡地 朝鮮 慶尙道 巨濟郡 七川島
學歷 宣祖朝 武科
其他 親姻戚 立部 李舜臣 (12寸 兄)
宗敎 儒敎 ( 性理學 )
軍事 經歷
服務 朝鮮 官軍
服務期間 1578年 ~ 1597年
最終階級 種2品 嘉善大夫
指揮 전라우도 水軍節度使(종2品級)
主要 參戰 壬辰倭亂
徐薰 資憲大夫 (正2品) 兵曹 板書 (正2品)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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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기는 1561年 定宗 의 10째 아들 덕천군 의 後孫인 心柱群(沁州君) 이연손(李連孫)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武藝가 뛰어났으며 17歲 때 司僕寺內乘(司僕寺內乘)李 되고 以後 武科에 及第한 後 경흥부사(慶興府使), 溫性府使 等 國防相의 要職을 歷任하여 北方의 女眞族 을 擊退하는 데 큰 功을 세워 武人으로서의 能力을 인정받게 된다.

1592年 壬辰倭亂 때는 전라우도 水軍節度使가 되어 全羅左道 水軍節度使 李舜臣 , 慶尙右道 水軍節度使 元均 과 연합艦隊를 構成한 뒤 日本 艦隊와의 여러 海戰에서 크게 勝利하였다.

1597年 丁酉再亂 때 朝鮮 政府의 無理한 攻擊 命令을 받 最好 金完 等과 함께 元均 麾下의 艦隊를 이끌고 日本軍을 攻擊하다가 漆川梁 海戰 에서 敗하여 元均, 最好 等과 함께 戰死하였다.

死後에 宣武功臣 2等이 되어 資憲大夫 兵曹 板書 에 追贈되고 완興群(完興君)으로 追封되었다. 義民(毅愍)이라는 시호 가 내려져 醫민공(毅愍公)李 되었다. 1600年 麗水의 충민사(忠愍祠)에 李舜臣 과 함께 祭享되었다. 以後 2000年에 進水된 大韓民國 海軍 場보고級 潛水艦 SS 071에 그의 이름이 附與되었다.

大衆 文化에서의 이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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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年 KBS 드라마 《 不滅의 李舜臣 》에서 俳優 최성준 이 이억기를 延期했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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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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