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歲에 讀書를 始作하여 12歲에 信書(申?) 밑에서 《
春秋左氏傳
》과 《
主役
(周易)》을 익혔다. 14歲에 아버지 賞을 입고 代父頃(大僕卿) 林泉部(林天敷)의 아내(外家 大姑母
[4]
)인 北元郡夫人(北原郡夫人) 元氏(元氏) 밑에서 養育되었다.
[5]
그 後
몽골의 高麗 侵入
으로 高麗 政府가
遷都(遷都)
한 江華島로 들어가서 落成再(樂聖齋) 都會所(都會所)에서 授業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交友 關係를 맺게 된다.
[5]
29歲가 되는
1252年
(高宗 39年)에 過去 試驗에 及第했다.
[5]
[6]
科擧 及第 後 홀어머니가 있는 三陟으로 錦衣還鄕했으나, 蒙古의 侵入으로 還都夏至 못하고 頭陀山 驅動(龜洞)에서 農事를 지으며 홀어머니를 奉養했다.
[5]
[2]
1273年
(元宗 14年)
元나라
에서 皇后와 皇太子를 冊封한 事實을 알려오자 元나라에 가서 冊封을 賀禮했다. 元나라에서 올린 그의 表文(表文)은 元 世祖(世祖)와 囊裏(?吏)들의 歎服을 받았다. 同行했던 송송례度 “文章이 中國을 감동시킨다는 말은 임자를 두고 하는 말이오.”라고 歎服했다.
[7]
歸國 後 벼슬이 右司諫(右司諫)을 거쳐 箋中御史(殿中御史)가 되었다. 하지만 貪官汚吏 7名의 罪狀을 밝혀 家産을 沒收한 일로 洞主婦社(東州副使)로 左遷되었으며, 이 時期에 動安居士(動安居士)라고 스스로 號를 지었다.
[2]
1280年
(忠烈王 6年)에 殿中寺社(殿中侍史)가 된 李承休는 監察侍史(監察侍史) 瀋陽(沈?), 雜端(雜端) 進陟(陳倜), 示唆(侍史) 문응(文應) 等과 함께 國王의 實情 및 國王 側近 人物들의 專橫을 들어 10個組로 諫言했다가 罷職되었다.
[8]
그 後 한동안 벼슬을 떠나 容顔當(容安堂)
[9]
에서 《
帝王韻紀
》와 《내전록》을 著述하였다.
[2]
1300年
(忠烈王 26年) 10月 2日(陽曆 11月 13日)에 77歲를 一期로 고단한 生을 마쳤다.
[2]
[1]
性質이 正直해 世上 사람과 달리 어떤 것도 要求하지 않았으며, 佛敎를 篤實하게 믿었다.
[2]
李承休가 登場한 作品
編輯
參考 資料
編輯
韓國語 飜譯
編輯
- 진성규 옮김, 《動安居士집》, 지만지, 2009年 1月 23日(初版)/2020年 7月 15日(改訂版)
- ↑
가
나
《高麗史》 卷31, 〈勢가〉31, 충렬왕 26年(1300) 10月 2日(戒喩)
- ↑
가
나
다
라
마
바
《高麗史》 卷106, 〈列傳〉19, 이승휴
- ↑
《前古代房》 卷1, 慢性時調(萬姓始祖), “ 加利 李氏 始祖 李承休”
- ↑
정구복, 〈李承休의 資料 檢討-‘村居自誡文’을 中心으로-〉, 《韓國史學史學報》 45, 韓國史學史學會, 2022年, 23面.
- ↑
가
나
다
라
《動安居士집》 卷1, 兵科視(病課詩) 序文
- ↑
《高麗史》 卷73, 〈地〉27, [選擧1], 科目1, 船長, 高宗 39年(1252) 4月
- ↑
《動安居士집》 卷4, 빈王錄 序文
- ↑
《高麗史》 卷29, 〈勢가〉29 , 忠烈王 6年(1280) 3月 14日(乙卯); 《高麗史》 卷106, 〈列傳〉19, 瀋陽
- ↑
龍안당은 오늘날의
江原道
三陟市
미로면 내미로리 頭陀山 아래의 泉隱寺(天恩寺)에 있다.
같이 보기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