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우는
1633年
(仁祖 11)
3月 1日
이경항
(李慶恒)과 全州李氏의 4男 4女 中 넷째 아들로 漢城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雨季(羽溪)이고 字는 輪寶(潤甫), 號는 송곡(松谷)이다. 黨色으로는
對北
系列의 家門에서 태어났다.
移監
(李戡)의 4代孫으로
李性憲
(李成憲)의 曾孫이며, 할아버지는 이길남(李吉男)이고 아버지는
司僕寺
添丁
으로 事後
增
禮曹
板書
에
追贈
된
이경항
(李慶恒)이고 어머니는
朝鮮
太宗
의 次男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7代孫으로
水軍節度使
이경유
(李慶裕)의 딸이며
이경록
의 조카딸인 全州李氏(全州李氏)이다.
그가 태어날 때 兄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희우(李喜雨)
[3]
와 後日
윤사로
의 後孫인
感謝
(監司)
윤득열
(尹得說)의 後妻로 出嫁한 누나 李氏, 둘째 누나는 腰絶, 그밖에
成宗
의 王子
익양군
會議 後孫 眞사 이서규(李瑞圭)에게 出嫁한 누나 李氏 및 또한名의 누이 等이 있었다. 둘째 兄
이가우
는 同名
김세렴
(東溟 金世濂)의 사위이며 반계
유형원
과는 妻四寸-四寸妹夫間이자 切親한 親舊이기도 했다. 이가우는 初試에 1等으로 合格하였으나, 父親의 3年喪을 마친 뒤 일찍 夭折하고 만다. 磻溪
유형원
이 이가우의 行跡을 記錄한 《利子時前 (李子時傳)》을 썼으나 利子市廛은 失傳되어 現在 傳하지 않는다.
1687年
에 死亡한 兄 이덕우에게는
이일관
(李日觀)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無關(武臣)으로 活動했다. 이일관은
1680年
의 虛榮, 허새의 獄事로 南人이 沒落할 때 武官으로서
保社
原從功臣
에 책록되었다.
[4]
이희우는
司馬榜目
과
효령대군
파 族譜에 이름만 傳하고 行跡은 傳하지 않는다.
그의 집안은 勳舊派와
北人
對北 系列이었으나, 그의 外堂叔人 頑風府院君
李曙
(李曙)는
仁祖反正
에 加擔한 反正 功臣이자,
西人
重鎭 文身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은 妻四寸人
李曙
가 힘을 써주어 不利益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5]
그러나
1642年
할머니 河東鄭氏의 喪을 當한 뒤,
1643年
(仁祖 21) 10歲에 아버지를 잃고
1644年
할아버지 이길남이 죽고,
1646年
에는 둘째 兄 이가우가 死亡하였다. 그밖에 그의 둘째 누이 亦是 일찍 夭折하였다. 그는 홀어머니와 두 兄 膝下에서 苦學을 하다가
南山골
로 獨立하였다.
그의 初期 行跡은 仔細하게 傳하지 않는다. 다만 幼年時節부터 交流하던 親舊로는 오리
이원익
의 曾孫 李相賢(李象賢)이 있었고, 少年時節에 만난 親舊로는 그보다 3年, 5年 年上인
이은진
(李殷鎭)과
이하진
(李夏鎭)이었다. 이 中 이은진은 그와 같이 遊覽, 旅行을 다니며 詩文을 주고 받을 程度로 切親했으나 일찍 죽고, 매산
이하진
, 이상현과 平生 交流하였다. 이서우의 文集 松坡집 中에는 이하진, 이상현과 주고 받은 便紙들, 그가 直接 지어준 少陵공
以上의
墓地門을 비롯한 이하진 집안의 墓誌銘, 信徒鼻紋 等도 收錄되어 있다.
孤山
윤선도
의 門下에서 學問과 詩文을 受學하였고,
이수광
의 아들인 同舟
이민구
의 門下에도 出入하며 受學하였다. 以後 百號
尹鑴
의 門下에도 出入하여 가르침을 請한다. 그 뒤 成人이 된 뒤에는
南山골
에 居住하며 學問에 專念하였다. 나중에는 일찍이 아버지
이경항
과 한 洞里에 살았던 未遂
許穆
(許穆)의 門下에 찾아가 修學하였다. 許穆은 그의 아버지 이경항의 墓碑文을 直接 지어주기도 했다. 後日 그가 官僚生活을 할 때
北人
出身이라는 理由로
허적
,
권대운
等의 攻擊을 받게 되자 그의 스승인
許穆
과
尹鑴
가 나서서 그를 辯護하고 감싸주었다. 特히 스승
尹鑴
로부터는 實學者 芝峯
이수광
과 同舟(東洲)
이민구
(李敏求)의 詩文과 學問을 繼承하였다.
靑年時節 이은진과 같이 遊覽을 다니기도 했고 그와 詩文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은진은 病으로 일찍 죽고 매산
이하진
(梅山 李夏鎭), 李相賢 等과 오래 交流하였다. 靑年時節 만난
박신규
(朴信圭)는 親舊이자 政治的 同志였고 그가 地方官 赴任 時에는 送別詩와 榮轉祝賀 詩를 보냈다.
박신규
의 딸 中 한名은 셋째아들 이홍관과 結婚시켜 査頓이 된다. 그外에도
이하진
의 宗孫뻘 되는 이진휴(李震休)와도 交流하였다. 後에 이서우의 門下生 中에 이정휴(李井休)가 있었는데, 이정휴는
이하진
, 이은진의 넷째 伯父 이지정(李志定)의 曾孫이었다. 이정휴는 그가 지은 그의 祖父 이길남의 墓碑文을 自身의 글씨로 써 주기도 했다.
그밖에 희암
채팽윤
(希庵 蔡彭胤), 창설재
권두경
(蒼雪齋 權斗經) 等과도 交流하며 詩文을 주고 받았다.
1650年(孝宗 1年)
心光位
의 딸 靑松沈氏와 婚姻하였다.
1651年
(孝宗 2年)
生員試
險에 合格하여
生員
(生員)李 되고,
成均館
(成均館)에 들어가
成均館
幼生이 되어 修學하였다.
1653年
孝宗이 親히 主管한 館學製生製述(館學諸生製述) 優秀者 12名 中 9等으로 選拔되어 종이 4張, 붓 4張, 먹 3張을 下賜받았다.
1660年
(玄宗 1年)
9月
成均館
儒生으로 있을 때, 課題(課製)에 1等하여 바로 戰時에 應試할 수 있는 資格이 주어졌으며,
1660年
10月 10日
의
增廣
文科
(增廣文科)에 甲科(甲科)로 及第하였다. 以後
職場
(直長)을 지냈다. 그해
漢城府
參軍
에 任命되었다. 그해
承政院
에 바치는 朔書(朔書)를 專門(篆文, 古代 文字)으로 썼다가
承旨
조윤석(趙胤錫)의 彈劾을 받고 문초받았다.
1661年
北方 國境을 넘다가 逮捕된 罪인 中 聲援(成元)李 獄事瑕疵, 屍身 檢屍 問題에 連累되어
1662年
(玄宗 3年) 個差되었다.
1663年
副司正으로 復歸하고, 이듬해
承政院
事變假注書,
司饔院
職場,
承政院
朱書를 지냈다.
글을 잘 짓는다 하여 稱讚을 받았으며, 以後
남인
의 狙擊手로
淸南
에 加擔하여 活動하였다.
淸南
은
許穆
과
尹鑴
가 領袖로 '
오정창
·
오정위
·
오시수
·
李茂
·
조사기
·
이수경
(李壽慶)을 中心으로
장응일
·
정지호
·
남천한
·이서우 等이 '매와 사냥개'처럼 前衛 役割을 擔當하였다. 이들은 三伏(三福)이라 하여
인평대군
의 세 아들인
복창군
·
복선군
·
복평군
을 끼고 後日을 對備하였다
[6]
' 한다.
1664年
여러番 承政院 假注書로 入直하였다.
1665年
(玄宗 6年) 여름
이하진
같이
漢城府
北西(北署) 地方을 旅行하였다. 그해 말
成均館
戰績이 되었다.
1667年
母親喪을 當했다.
1668年
(玄宗 9)
通訓大夫
行
成均館
全的
을 거쳐 성환驛
察訪
(成歡驛察訪)에 任命되어 赴任하고,
1669年
咸鏡道
고산역(高山驛)의
察訪
으로 發令되었다.
1670年
(玄宗 11) 辭職 後
金剛山
을 遊覽하고 이듬해
11月
京畿道
마전현
의 未遂
許穆
(眉? 許穆)을 찾아가 가르침을 請하였다. 1673年까지 許穆의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떠나올 때
許穆
에게서 五言律詩로 된 8幅의 全書와, 屛風을 膳物로 받았다. 特히 그는 書藝家로서 未遂書體(眉?書體)를 平生 練習하였다.
1673年
平安道
龍岡
縣監
(龍岡縣監)으로 赴任하였다.
1675年
(肅宗 1)
5月
文章에 재주가 있다 하여
競演
에서 스승인
許穆
,
尹鑴
等의 推薦을 받았다. 같은 5月 政言에 薦擧되었으나,
對北
이었던
이경항
의 아들이라는 理由로 一部
남인
들의 反撥이 거셌으나
許穆
이 强하게 貫徹시켜 成事되었다. 그해
7月
허적
,
권대운
等의 反對가 있었지만
許穆
은 自身이 이서우의 아비 이경항과 같은 마을에 살았지만 그가
對北
의 흉論에 물들지 않았다며 그를 辯護하였다.
1675年
(
肅宗
1)
7月
司諫院正言이 되어
仁祖反正
以後 對北家門出身으로는 처음으로 淸直(淸職)에 올랐다. 그러나 1675年 12月에도 허적 等은 이경항이 對北의 黨員이었다는 疑惑을 提起했고,
許穆
,
尹鑴
가 그를 斗頓하여 撫摩되었다.
그가 三社의 請要職에 重用되자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이
광해군
때
對北
人事였음을 들어 反對하였다. 그러나
許穆
과
尹鑴
가 번갈아가며 그를 三四 言官의 適任者로 推薦하였다. 이때 許穆은 "神이 그 아비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가 끝내 흉론(凶論)에 물들지 아니하였음을 압니다"하며 그를 감쌌고, 묵재
허적
은 "神이 듣건대, 그 아비가
이이첨
(李爾瞻)에게 親押(親押)받았다고 하는데, 只今 偶像(右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은 傳해 들은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偶像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偶像의 말이 옳습니다. 偶像이 어찌 한낱 이서우를 위하여 敢히 殿下를 속이겠습니까?"라며 그의 中庸을 反對하였으나,
許穆
의 辯護로 無事하였다.
5月
競演
에서
許穆
의 薦擧를 받았다.
1675年
(肅宗 1年)
7月 22日
司諫院
정언
이 되었다. 그 해
西人
송시열
(宋時烈)의 禮論과 그에 積極 同調한
김수항
(金壽恒)을 攻擊하였으며,
7月
에는
허적
等 大臣을 攻擊하는 이수경을 斗護하다 罷職당하였다. 그러나 그해
8月
부터 王과 請對한
右議政
許穆
의 極力 辯護와 說得으로, 同年
10月 9日
이수경과 함께 곧 復職되었다. 이어
10月 11日
尹鑴
의 推薦으로
弘文錄
에 오르게 되었다.
[7]
이때
허적
이 다시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이
對北
이었던 點을 들어
1623年
以後 對北派, 對北系列인 사람들의 出仕가 禁止되었던 點을 指摘하기도 했다.
[7]
남인
內에서도
허적
等은 그의 아버지 이경항이
광해군
때의 對北 黨員이었다며 疑惑을 提起하였으나,
許穆
,
尹鑴
等이 번갈아가며 그를 擁護하였다. 그해
10月
許穆
,
尹鑴
의 推薦을 받아
弘文錄
에 薦擧되었고,
10月 11日
尹鑴에 依해 都堂錄에 推薦되었다.
1675年
成均館
사예
를 거쳐
1675年
12月 11日
司憲府
地平(司憲府 持平)李 되었으나 여러 番 小敗(召牌)를 어긴 責任을 지고 스스로 辭職을 請한 뒤 물러가서 處分을 기다렸다가. 이때
남인
허적
과
西人
(西人)은
競演
에서 그를 批判하였고 아버지 이경항의 過去까지 問題삼았으나, 未遂
許穆
(許穆)의 辯護로 無事하였다. 以後 그는
許穆
과
尹鑴
의 庇護를 받았으며, 그의 글재주를 높이 산
許穆
과
尹鑴
가 번갈아가며 그를 推薦하여 三社의 要職에 任命되었다.
12月 26日
다시
司諫院
정언
이 되었다.
1676年
(肅宗 2年)
1月
萬과
設置와
종이
號牌
發給의 弊端을 指摘하여 廢止하게 하였다. 萬과 設置 以後
白手
들이 헛된 꿈을 바라는 일이 늘어났으며,
종이
號牌
는 凶年己에 發給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
成均館
社例를 거쳐
兵曹
正郞
으로
備邊司
郎廳이 되었고,
1676年
7月
淸나라
에 派遣되는
進賀使
(進賀使) 兼
仁祖反正
辨誣使로 情事
복선군
以南(福善君 李?), 府使(副使) 定石(鄭晳)이 派遣될 때 이서우는
書狀官
(書狀官)에 選拔되어 燕京에 往還하고
12月 23日
에 歸國하였다.
歸國 後
1677年
初
狼星
郡守(琅城郡守)로 赴任했다가
1677年
10月 4日
司憲府 掌令
이 되었다. 그해
12月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그 뒤 備邊司의 郎官을 거쳐
1678年
(肅宗 4)
3月 8日
成均館直講(成均館直講)으로 그해의 定試(庭試)의 對讀官(對讀官)이 되어 試驗을 主管하였다.
6月 16日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以後
西人
과
남인
에서 여러 番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의 前歷을 問題삼았으나 이때에도
許穆
과
尹鑴
가 번갈아가며 이서우를 斗頓하였다. 이서우는
西人
송시열
,
송준길
,
김수항
等의 禮論이 例를 거슬린다며 批判, 糾彈하였다.
1678年
(肅宗 4) 가을
肅宗
의 名으로
慶尙道
敬差官
(敬差官)의 한 사람에 任命되어 東來에 간 뒤
慶尙道
南部地域을 巡廻하고 되돌아왔다.
漢城
에 왔다가 이듬해
1月
東萊
府使
로 任命되어 내려갔다.
1679年
(肅宗 5) 1月 25日
東萊
府使(東萊府使)로 在職하면서 그는 鄕土誌人 《萇山후지 (?山後誌)》, 《東萊승람후지 (東萊勝覽後誌)》를 編纂, 發刊하였다. 以後
江陵
府使
,
富寧
府使
, 淸州牧師 等을 지내고
西人
송시열
,
김수항
의 禮論을 批判, 攻擊하는데 앞장섰다.
西人
송시열
(宋時烈)의 禮論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金壽恒)을 攻擊하였으며,
7月
에는
허적
等 大臣을 攻擊하는 이수경을 斗護하다 罷職당하였다. 그러나
許穆
의 辯護로 復官하였다. 그 뒤
淸나라
에 派遣되는
冬至使
의 書狀官으로 燕京에 다녀왔다.
以後
남인
으로 生活하다
1678年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1678年
副護軍으로 다시 備邊司郎廳이 되었고, 1679年 1月 25日 東來府使로 나갔다. 東來府使 在職 中
1679年
朝鮮에 歸化한 差倭(差倭)와 함께 倭人 居住地를 測量하여,
朝鮮
內 滯留中인 管矮들에 對한 새로운 步行限界(步行限界)를 條約으로 定하여 出入을 制限시켰다.
[8]
以後
淸州
牧師
로 轉任되었다.
1680年
(肅宗 6年)
3月
庚申換局
이 斷行되고, 그해
4月
김석주
(金錫?) 等으로부터
복선군
男,
복평군
緣과 親하게 지낸다는 理由로 彈劾을 받았다.
庚申換局
以後 西人의 猛攻擊을 받고 그해
6月
東萊
府使에서 免職되었다. 그해
9月
에는
김수항
으로부터 그가
오정창
(吳挺昌)의 心腹인데 홀로 罪를 받지 않았다며 攻擊當하였다.
[9]
그 해
10月
西人
에 依해
洪水의 便
關聯者인
오정창
의 心腹으로 指目되어 咸鏡道
富寧
(富寧)으로 流配되었다가 다시
寧邊
으로 이配當하였는데, 陋名을 쓰고 流配되면서 그는 憂鬱한 心思를 詩로써 달랬다.
富寧 流配 直後 처음 官奴의 집에 居處하다가 部令 청암동으로 配所가 定해졌다. 流配生活 中 親舊 이하진의 訃音을 듣고 葬禮式에 參席하지 못하여 追慕하는 글을 지어보냈다. 流配生活 中 그는 北評事
홍만조
(洪萬朝), 조지석(趙祉錫) 等과 交流하며 詩文을 주고받았다.
1683年
(肅宗 9)
2月
特別히 配所에서 釋放되어 풀려난 뒤
廣州郡
중대면
송파리에 滯留하다가 다시
廣州郡
신원리
로 가서 蟄居하였다.
1687年
(肅宗 13年)부터는 洞里 아이들과 집안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쳤다.
1688年
(肅宗 14年)
5月 2日
特別히
義州
府尹
(義州府尹)으로 赴任하였다. 이서우는 外職에 여러 番 物望에 올랐다. 그러나 搪塞이 南人이었던 까닭에 西人의 줄기찬 反對로 撫摩되었다.
1688年
5月
西人
들이 主管한
備邊司
會議에서 義州府尹에 薦擧되었을 때는 西人들도 反對하지 않아 그해
5月 2日
義州
府尹
으로 就任할 수 있었다. 그러나
義州
府尹
在職 中
義州
로 流配된
복선군
(福善君) 以南(李?)과 詩文을 주고받았다는 理由로 그해
6月 13日
領議政
남구만
,
副提學
최석정
(崔錫鼎) 等의 批判을 받고 바로
免職
되었다.
1689年
(肅宗 15年) 1月 王子 菌의 原子정호 問題로
2月 6日
己巳換局
으로 南人이 政權을 잡자 內職으로 돌아와
兵曹
參議
(兵曺參議)로 登用되었다. 바로
承旨
(承旨)가 되었고,
2月 15日
다시
承旨
로 再任命되었으며 바로
兵曹
參議
가 되었다. 바로 그는 스승
尹鑴
의 祭文을 지어 보냈다.
“
|
虎狼이가 사람을 잡아먹지만 / 虎狼雖食人
사람이 또한 虎狼을 죽인다네 / 人亦殺虎狼
뜬구름이 벌써 사라지고 / 浮雲已消散
太陽이 다시 밝았어라 / 白日重晶光
庚申年에 暴惡하고 殘忍한 무리들 / ?年虎冠輩
오늘날 便安히 지내는 者 누구인가 / 問誰今安康
鬼神과 사람의 誅罰을 받아 / 陰誅與顯戮
잇달아 모두가 죽었구려 / 相續皆淪亡
揶揄하던 者 죽임을 當하자 百姓들이 통쾌히 여기는데 / 揶揄萬姓快
그들에 對한 辱說 千秋에 永遠하리 / ?罵千秋長
이들이 어찌 抑鬱하게 죽은 사람들만 하겠는가 / 豈如寃死人
恩寵의 校紙와 祭文을 내렸어라 / 絲綸下恩章
官職을 회복시키고 祭祀를 내리며 / 復官賜祭奠
子孫들을 記錄하여 朝廷의 班列에 오르게 하였네 / 錄子登朝行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모두가 그지없이 感激하건대 / 幽明交感極
이에서 또 어떠한 所望이 있겠는가 / 毫髮復何望
그 中에서도 百號翁은 / 就中白湖翁
靈魂이 唯獨 애절하여라 / 英魂獨悲傷
그가 論한 例는 임금의 宗統을 引用하였고 / 其禮引聖庶
그가 지닌 뜻은 諸葛亮의 일이었어라 / 其志乃南陽
君臣의 契合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건만 / 契合非偶然
經綸을 다 펴지 못하였네 / 經綸未渠央
뜻을 이루지 못하고 例를 밝히지 못하니 / 志閼禮未明
天運이 어쩌면 그리도 아득한가 / 天運何茫茫
아서라 天運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아서라 天運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
”
|
그해 潤 3月 다른 男인 臣僚들과 合計하여
송시열
을 死刑에 處할 것을 主張하였다. 以後
4月 23日
承旨
가 되었다. 以後
禮曹
參議
가 되었다가 8月 3日 다시 承旨에 再任命되었다.
1689年
10月 3日
司諫院
大司諫,
司憲府
大司憲, 10月 23日 다시 承旨가 되었다. 그 後 咸鏡道 觀察使,
弘文館
大提學
과
藝文館
大提學
,
司憲府
大司憲
等을 두루 지냈다. 이 期間 中 그는
西人
이 잘못된 禮論을 고치지 않는다며
西人
을 攻擊, 聲討하였다.
1690年
(肅宗 16年)
1月 10日
承政院
都承旨
(都承旨), 以後
五衛都摠府
副摠管을 지냈다. 그 뒤
김수항
,
송시열
을 彈劾하면서 김수항, 宋時烈 等의
西人
을 攻擊하는데 앞장섰으며,
인현왕후
閔氏(仁顯王后 閔氏)의 廢黜 때는
承旨
로 있으면서
肅宗
의 뜻을 받들었다.
1690年
5月
咸鏡道
觀察使
兼 兵馬
水軍節度使
(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都巡察使
(巡察使),함흥부尹(咸興府尹) 等을 兼職하였다.
咸鏡道
觀察使
兼 病魔水軍節度使로 在職 中
1691年
4月
人蔘
에 對한 行政處理 잘못과, 人蔘 採取를 目的으로 越境하는 百姓들을 統制하지 못했다는 理由로
備邊司
로부터 彈劾을 받고 削職당하였다.
1691年
(肅宗 17年)
민암
이
大提學
職에서 辭職하자 그 後任者의 物望에 올랐으나 落馬했다. 그는
伽倻山
海印寺
에 들러
최치원
의 市에서 句節 몇字를 바꾸어
송시열
을 批判하는 詩를 남기고 올라왔다.
1692年
10月 2日
議政府
左議政
목래선
의 建議로 서용의 命令이 내려졌다.
1692年
(肅宗 18年)
10月
議政府
左議政
목래선
(睦來善)에 依하여 文章으로 薦擧받아
藝文館
提學
이 되었으며, 同年 10月 5日
共助
參判
이 되었다. 그러나 辭讓하고
10月 14日
까지 繼續 거듭 上疏를 올렸다. 11月 21日 다시
承政院
都承旨
가 되었으나 그해
12月 26日
孫子의 疾病을 理由로
都承旨
職 辭職을 請하여 受諾되었다.
1693年
(肅宗 19)
3月
藝文館
提學
이 되고, 같은
3月
提學
으로 特進官이 되어 그해의 武科 2沼 參試官, 增廣科 司馬試 注視館, 文科 會試 參試官이 되었으며,
6月
承文院
製造가 되었다.
3月 4日
에는 藝文館提學(藝文館提學)으로 式年試 生員進士試 2소의 試驗官이 되었다.
1693年
9月 9日
黃海道
觀察使
(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갔다가,
9月 26日
慶尙道
觀察使
(慶尙道觀察使)로 發令되었다. 다시 工曹 參判에 이르렀으나
1694年
4月 1日
甲戌獄事
로
西人
이 執權하자 罷職, 削黜당하고
4月 16日
門外黜送
(門外黜送)되었다가
1695年
다시 肅宗의 赦免令이 내려졌으나
承旨
이야
(李?) 等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以後 그는
청계산
(淸溪山) 近處에 머무르다가 各地를 遊覽했다. 이때
軍役
의 弊端이 甚하여, 어린아이와 老人에게까지
軍浦
(軍布)를 徵收하여, 男子 아이를 낳으면 죽이거나 산 채로 묻는 慘酷함을 目擊하고 記錄을 남기기도 했다. 그밖에 飢饉과 凶年으로 굶주림과 城밖에 屍體가 쌓이는 것을 몇 首의 詩로 남기기도 했다.
1697年
(肅宗 23年)
4月
에 釋放命令을 받고 풀려나 復官되었다. 그 해
남인
을 登用하는 政策을 펴던
少論
宰相
최석정
(崔錫鼎)에 依하여 淸白함을 認定받아 敍用을 建議하였으며,
1698年
2月
肅宗
으로부터 恕容(敍用)하라는 命令이 내려졌지만 現職에 나가지는 못했다. 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以後 청계산 近處로 落鄕해 生活하였다. 그해
2月 25日
肅宗은
承政院
에 轉校하여 그의 敍用을 命했다.
[10]
그는
송시열
과
김수항
等이 眞理를 糊塗하고 學問의 自由를 가로막고 權力으로 自身들의 사론을 貫徹시킨다고 繼續 批判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西人
의 北伐論에 對해
孝宗
이
송시열
에게 내려준 初球를 개가죽에 빗대어 嘲弄하기도 했다. 그는
備邊司
로부터 여러番 地方官 直擬 物望에 올랐지만 번번히 落馬하고 만다.
1700年
(肅宗 26)
2月 3日
新任 江華府留守 適任者를 薦擧할 때
議政府
右參贊
이현석
이 그를 推薦했지만 거절당했다.
1701年
(肅宗 27年)
8月
희빈 張氏
가
인현왕후
를 詛呪했다는 理由로 逮捕, 投獄되면서
장희재
를 비롯한
남인
人士들이 처형당하고, 그는 禁錮令을 받았다. 그해
10月 8日
희빈 張氏
가 賜死된 뒤 다른
남인
黨員과 함께 赦免되지만, 더以上 官職에 나가지 않았다.
以後
光州
청계산
철曲 近處
신원리
로 落鄕하여 晩年에는 後學에게 學問과 詩文을 가르치는 일로 消日했다.
청계산
東쪽에는 兄
이가우
의 外孫들이 살고 있었다. 詩(詩)에 뛰어나고 서도(書道)로도 알려졌다. 처음에는 洞里 아이들과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남인
靑年들이 찾아왔다. 年初再
오상렴
(燕超齋 吳尙濂), 희암 채팽윤(希菴 蔡彭胤), 藥山
오광운
(藥山 吳光運), 학고 김리만(鶴皐 金履萬), 국포
强迫
(菊圃 姜樸), 이정휴(李井休), 이수대, 권두경, 이병휴 等이 그의 門下에 찾아와 詩와 學問을 배웠다. 창설재
권두경
[11]
, 이정휴 等도 그의 門下에 찾아와 詩文의 指導를 받았다.
星湖 李瀷
亦是 그의 門下에 出入하여 學問을 배웠고, 이는
안정복
,
强迫
,
신후담
,
채제공
等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윤선도
,
이민구
等의 詩文과 學問을 後代에 傳하는 役割을 하였다.
오상렴
(吳尙濂)은
1704年
(肅宗 30年) 스물 다섯 살 때
김리만
(金履萬) 等과 함께 송곡 이서우에게 詩를 배웠다.
[12]
그러나 오상렴은
1707年
이른 나이에 夭折하였다. 晩年에는
星湖僿說
을 지은 實學者
星湖 李瀷
(星湖 李瀷)도 그의 門下에 찾아와 자주 出入했다. 그는 이서우를 찾아 뵌 以後, 工夫하다 모르는 點이 있으면 그에게 자주 묻고 배웠는데,
利益
은 이서우를 '四百'(詞伯)이라 稱하면서, 아버지의 親舊이자 自身의 스승인 이서우를 尊敬하고 가르침을 받았다.『星湖僿說』에는 利益이 이서우에게 가르침을 請하거나 自身이 工夫한 것을 檢證받는 等의 內容을 記述하였다.
[13]
著書로 《松坡文集》(松坡文集) 20卷
[14]
과 《講師》(康史) 2卷, 《萇山후지》 (?山後誌). 《東萊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
虎狼이
에 關한 資料를 便역한 《豪奢》 等이 있으며, 豪奢는 現在 內容이 傳하지 않는다. 作品으로는
金浦
문수사
(文殊寺) 風痰大師碑(楓潭大師碑)의 全額이 遺筆(遺筆), 禮山郡 불山面 本店리
議政府
領議政
이의배
(李義培)
神道碑
의 輸液,
以上의
의 少陵文集 序文 等이 남아 있다.
1705年
(肅宗 31年) 長男 이정관과 셋째 兄 이희우(李喜雨
[15]
)의 죽음을 보았다. 또한 自身이 20餘 年 以上 단골로 다니던 酒幕의 酒母가 60歲를 一期로 死亡하자 7언 律詩를 지어 追慕하였다.
1709年
(肅宗 35年)
10月 14日
에
果川
청계에서 死去했다.
承政院日記
에 依하면 곧 競技監査가 書契를 올려 그의 죽음을 알렸고,
10月 17日
禮曹
에서 調劑와 負扆를 法殿대로 내려줄 것을 上奏하여,
肅宗
이 承認하였다. 그의 나이 享年 76歲였다.
京畿道
廣州郡
언주면
원지리
철曲(現
서울特別市
瑞草區
원지동
산 83-2番地 철曲) 酉坐의 否認 靑松沈氏 墓所 옆에 安葬되었다. 그의 墓所 위에는 從祖父 이명남, 再從祖父로
壬辰倭亂
때 戰死한
이복남
의 衣冠과 甲옷을 묻은 墟墓와 그 夫人 淸州韓氏의 合葬墓, 高祖父
이광식
의 墓所가 연이어 있다. 그의 墓所 南쪽에는
2011年
建立된
서울追慕公園
이 있다. 서초구 원지동 산 83-2番地 철曲 近處에 있던 다른 一家의 墓域은
江原道
原州市
부론면
鍛鋼1里 작실部落, 그의 祠堂 近處로 移葬되었다.
1701年
남인
의 沒落 以後 두 庶子
이익관
,
이순관
과 庶女 사위
민관효
가
1728年
(英祖 4年)
李麟佐의 亂
에 連累되면서 그의 家計는 沒落하였다. 셋째 아들
이홍관
은 처형당하고, 掛書를 돌리는데 加擔한
이익관
,
이순관
兄弟는 陵遲處斬당하고 家産을 籍沒당했으며,
이인좌
를 도운 庶女 사위
민관효
一家 亦是 처형당하고 家産은 籍沒당한다. 이들의 後孫들은 庶孫
이계강
,
이철강
等을 비롯, 極邊의 奴婢로 끌려가게 된다. 그밖에 이정관의 아들 이番 等도 連累되어 極邊에 奴婢로 끌려갔다가 釋放된다.
이서우 亦是 逆謀로 連坐되어 秋脫黨했다. 그의 두 아들
이정관
과
이석관
은 以前에 死亡했으므로 火를 謀免하였으나 그의 敵손들 亦是 뿔뿔이 흩어져
慶尙北道
星州
와
江原道
原州
等으로 흩어졌다.
1745年
(英祖 21)
10月
에는 乙丑 掛書 事件에 그의 孫子이자 이정관의 아들
이심
이 連坐되어 處刑되면서 그의 家計는 沒落했고, 外孫
强迫
, 外曾孫
신후담
等도 連坐되어 出仕에 制限을 받게 된다.
1728年
(英祖 4)
李麟佐의 亂
으로 官爵을 秋脫黨했다가
正祖
때
남인
이 執權하면서
1795年
(正祖 19年)
10月
다시 復權되었다. 外孫子 强迫은 큰아버지 강석番의 養子로 入養되었는데도, 이익관, 이순관에 連坐되어 官職 出仕에 不利益을 받았다. 그의 外曾孫 中에는
天主敎
批判論者人
신후담
도 있고,
발해고
의 著者
유득공
은
홍이석
에게 시집간 그의 딸의 外孫子였다.
그는 死後
남인
學問과 翅脈의 正統이자 南人 文壇의 終場으로 追崇되고 後날
채제공
에 依해
許穆
-이서우-
利益
으로 男인 學問, 詩文의 法統으로 規定되었다. 그의 文集은 外孫 국포
强迫
이 整理했고,
强迫
의 孫子
강세륜
과
강세백
이 再整理하여 刊行하였고, 이서우의 直系 後孫들에게 傳해주었다.
1995年
延世大學校
에서 國役으로 刊行되어 알려졌다.
江原道
原州郡
부론면
단강리 작실에 그를 祭享하는
影幀閣
이 세워졌다. 每年
3月 1日
原州郡 부론면 단강리 影幀閣에 茶禮를 올리고 있다.
1995年
8月
後孫들에 依해 墓碑가 다시 樹立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