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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 (1633年)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이서우 (1633年)

이서우 (李瑞雨, 1633年 3月 1日 ~ 1709年 10月 14日 )는 朝鮮 後期의 文臣, 詩人, 作家, 書藝家이다. 本貫은 雨季 (羽溪), 者(字)는 輪寶(潤甫)·休徵 [2] (休徵), 號(號)는 송곡(松谷)·送波(松坡)·區系(?溪)·鷄雍(溪翁)이다. 1660年 科擧에 及第하여 벼슬은 共助 參判 (工曹參判), 藝文館 提學 (藝文館提學)에 이르렀으며, 禮訟 論爭 當時 남인 (南人)의 論客 中의 한사람이다.

이서우 (1633年)
송곡 이서우 尊影
出生 1633年 3月 1日
朝鮮 漢城府
死亡 1709年 10月 14日
朝鮮 漢城府
死因 兵士(老患)
居住地 朝鮮
性別 男性
國籍 朝鮮
別稱 者(字)는 輪寶(潤甫)·休徵(休徵), 號(號)는 송곡(松谷)·送波(松坡)·區系(?溪)·鷄雍(溪翁)
學歷 1660年 增廣 文科 甲科 及第
職業 文臣, 詩人, 學者, 政治人, 書藝家
宗敎 遊學 性理學
父母 아버지 이경항 , 어머니 全州李氏
配偶者 增 政府인 靑松沈氏, 첩 1名
子女 아들 이정관, 아들 이석관, 아들 이홍관, 딸 李氏, 庶子 이익관 , 庶子 이순관 , 庶女 李氏(민관효 [1] 의 妻)
親戚 兄 이덕우, 兄 이가우, 兄 이희우, 妹兄 윤득열, 妹兄 이서규, 外祖父 이경유 , 外從祖父 이경록 , 外堂叔 李曙

孤山 윤선도 와 白虎 尹鑴 의 門下에서 受學하였으며, 未遂 許穆 (許穆)의 門下에서도 修學하였다. 그는 後日 許穆 · 尹鑴 의 學統을 利益 오상렴 , 채팽윤 , 채제공 等에게로 傳授하였다. 本來 對北 (大北)系列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남인 (南人)으로 轉向했다. 1651年 (孝宗 2) 生員 (生員)李 되고, 1660年 (玄宗 1) 增廣 文科 에 甲科로 及第, 北人 家門의 後裔라는 이름으로 官職 出仕에 制限을 받았으나 文章으로 許穆 尹鑴 의 薦擧로 請要職에 올랐다. 以後 남인 으로서 1675年 ( 肅宗 1) 司諫院 정언 (正言), 1679年 東萊 府使(東萊府使)를 지냈으며 西人 (西人) 송시열 , 김수항 의 禮論을 批判, 攻擊하는데 앞장섰다. 1680年 庚申換局 으로 西人의 攻擊을 받아 寧邊 에 流配되었다.

1688年 (肅宗 14年) 義州 府尹 으로 特別히 任命된 뒤 1689年 己巳換局 으로 남인 이 執權하자 內職으로 돌아와 병조참의로 登用되었다. 1689年 承旨(承旨), 司諫院 大司諫 , 大司憲 等을 지내고 그 後 黃海道 觀察使 咸鏡道 觀察使 로 赴任하였다. 1692年 左議政 목래선(睦來善)의 薦擧로 藝文館 提學 (藝文館提學)에 올랐다. 1693年 그해의 增廣文科를 監督하였고, 共助 參判 (工曹參判)에 이르렀으나 1694年(肅宗 20) 甲戌獄事 (甲戌獄事)로 削職(削職), 1697年 復官되었다. 詩文(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生前 朝鮮 에 流入된 眼鏡 을 目擊하고 眼鏡에 對한 詩를 남기기도 했다.

外職으로는 京畿道 , 黃海道 , 慶尙道 , 江原道 , 咸鏡道 觀察使 를 歷任했고, 청렴하여 江陵 , 富寧 , 東萊 府使 로 在職中 善政을 베풀어 認定비가 세워졌다. 書藝와 글씨에 能하여 여러 名人들의 碑文과 行裝을 찬하였다. 司僕寺 添丁 禮曹 板書 이경항 (李慶恒)의 아들이다. 文人 국포 强迫 은 그의 外孫이고, 利益 의 門下이자 天主敎 批判論者人 신후담 은 그의 外曾孫이다. 발해고 의 著者 유득공 은 그의 崴嵬曾孫이 된다. 윤선도 , 이민구 , 許穆 , 尹鑴 의 文人이다.

生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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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涯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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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과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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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는 1633年 (仁祖 11) 3月 1日 이경항 (李慶恒)과 全州李氏의 4男 4女 中 넷째 아들로 漢城에서 태어났다. 本貫은 雨季(羽溪)이고 字는 輪寶(潤甫), 號는 송곡(松谷)이다. 黨色으로는 對北 系列의 家門에서 태어났다. 移監 (李戡)의 4代孫으로 李性憲 (李成憲)의 曾孫이며, 할아버지는 이길남(李吉男)이고 아버지는 司僕寺 添丁 으로 事後 禮曹 板書 追贈 이경항 (李慶恒)이고 어머니는 朝鮮 太宗 의 次男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補)의 7代孫으로 水軍節度使 이경유 (李慶裕)의 딸이며 이경록 의 조카딸인 全州李氏(全州李氏)이다.

그가 태어날 때 兄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희우(李喜雨) [3] 와 後日 윤사로 의 後孫인 感謝 (監司) 윤득열 (尹得說)의 後妻로 出嫁한 누나 李氏, 둘째 누나는 腰絶, 그밖에 成宗 의 王子 익양군 會議 後孫 眞사 이서규(李瑞圭)에게 出嫁한 누나 李氏 및 또한名의 누이 等이 있었다. 둘째 兄 이가우 는 同名 김세렴 (東溟 金世濂)의 사위이며 반계 유형원 과는 妻四寸-四寸妹夫間이자 切親한 親舊이기도 했다. 이가우는 初試에 1等으로 合格하였으나, 父親의 3年喪을 마친 뒤 일찍 夭折하고 만다. 磻溪 유형원 이 이가우의 行跡을 記錄한 《利子時前 (李子時傳)》을 썼으나 利子市廛은 失傳되어 現在 傳하지 않는다. 1687年 에 死亡한 兄 이덕우에게는 이일관 (李日觀)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無關(武臣)으로 活動했다. 이일관은 1680年 의 虛榮, 허새의 獄事로 南人이 沒落할 때 武官으로서 保社 原從功臣 에 책록되었다. [4] 이희우는 司馬榜目 효령대군 파 族譜에 이름만 傳하고 行跡은 傳하지 않는다.

그의 집안은 勳舊派와 北人 對北 系列이었으나, 그의 外堂叔人 頑風府院君 李曙 (李曙)는 仁祖反正 에 加擔한 反正 功臣이자, 西人 重鎭 文身이었다. 따라서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은 妻四寸人 李曙 가 힘을 써주어 不利益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5] 그러나 1642年 할머니 河東鄭氏의 喪을 當한 뒤, 1643年 (仁祖 21) 10歲에 아버지를 잃고 1644年 할아버지 이길남이 죽고, 1646年 에는 둘째 兄 이가우가 死亡하였다. 그밖에 그의 둘째 누이 亦是 일찍 夭折하였다. 그는 홀어머니와 두 兄 膝下에서 苦學을 하다가 南山골 로 獨立하였다.

그의 初期 行跡은 仔細하게 傳하지 않는다. 다만 幼年時節부터 交流하던 親舊로는 오리 이원익 의 曾孫 李相賢(李象賢)이 있었고, 少年時節에 만난 親舊로는 그보다 3年, 5年 年上인 이은진 (李殷鎭)과 이하진 (李夏鎭)이었다. 이 中 이은진은 그와 같이 遊覽, 旅行을 다니며 詩文을 주고 받을 程度로 切親했으나 일찍 죽고, 매산 이하진 , 이상현과 平生 交流하였다. 이서우의 文集 松坡집 中에는 이하진, 이상현과 주고 받은 便紙들, 그가 直接 지어준 少陵공 以上의 墓地門을 비롯한 이하진 집안의 墓誌銘, 信徒鼻紋 等도 收錄되어 있다.

苦學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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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山 윤선도 의 門下에서 學問과 詩文을 受學하였고, 이수광 의 아들인 同舟 이민구 의 門下에도 出入하며 受學하였다. 以後 百號 尹鑴 의 門下에도 出入하여 가르침을 請한다. 그 뒤 成人이 된 뒤에는 南山골 에 居住하며 學問에 專念하였다. 나중에는 일찍이 아버지 이경항 과 한 洞里에 살았던 未遂 許穆 (許穆)의 門下에 찾아가 修學하였다. 許穆은 그의 아버지 이경항의 墓碑文을 直接 지어주기도 했다. 後日 그가 官僚生活을 할 때 北人 出身이라는 理由로 허적 , 권대운 等의 攻擊을 받게 되자 그의 스승인 許穆 尹鑴 가 나서서 그를 辯護하고 감싸주었다. 特히 스승 尹鑴 로부터는 實學者 芝峯 이수광 과 同舟(東洲) 이민구 (李敏求)의 詩文과 學問을 繼承하였다.

靑年時節 이은진과 같이 遊覽을 다니기도 했고 그와 詩文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은진은 病으로 일찍 죽고 매산 이하진 (梅山 李夏鎭), 李相賢 等과 오래 交流하였다. 靑年時節 만난 박신규 (朴信圭)는 親舊이자 政治的 同志였고 그가 地方官 赴任 時에는 送別詩와 榮轉祝賀 詩를 보냈다. 박신규 의 딸 中 한名은 셋째아들 이홍관과 結婚시켜 査頓이 된다. 그外에도 이하진 의 宗孫뻘 되는 이진휴(李震休)와도 交流하였다. 後에 이서우의 門下生 中에 이정휴(李井休)가 있었는데, 이정휴는 이하진 , 이은진의 넷째 伯父 이지정(李志定)의 曾孫이었다. 이정휴는 그가 지은 그의 祖父 이길남의 墓碑文을 自身의 글씨로 써 주기도 했다.

그밖에 희암 채팽윤 (希庵 蔡彭胤), 창설재 권두경 (蒼雪齋 權斗經) 等과도 交流하며 詩文을 주고 받았다.

官僚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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科擧 及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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未收 許穆 肖像
(스승이자 政治的 後見人이었다.)

1650年(孝宗 1年) 心光位 의 딸 靑松沈氏와 婚姻하였다. 1651年 (孝宗 2年) 生員試 險에 合格하여 生員 (生員)李 되고, 成均館 (成均館)에 들어가 成均館 幼生이 되어 修學하였다. 1653年 孝宗이 親히 主管한 館學製生製述(館學諸生製述) 優秀者 12名 中 9等으로 選拔되어 종이 4張, 붓 4張, 먹 3張을 下賜받았다.

1660年 (玄宗 1年) 9月 成均館 儒生으로 있을 때, 課題(課製)에 1等하여 바로 戰時에 應試할 수 있는 資格이 주어졌으며, 1660年 10月 10日 增廣 文科 (增廣文科)에 甲科(甲科)로 及第하였다. 以後 職場 (直長)을 지냈다. 그해 漢城府 參軍 에 任命되었다. 그해 承政院 에 바치는 朔書(朔書)를 專門(篆文, 古代 文字)으로 썼다가 承旨 조윤석(趙胤錫)의 彈劾을 받고 문초받았다. 1661年 北方 國境을 넘다가 逮捕된 罪인 中 聲援(成元)李 獄事瑕疵, 屍身 檢屍 問題에 連累되어 1662年 (玄宗 3年) 個差되었다. 1663年 副司正으로 復歸하고, 이듬해 承政院 事變假注書, 司饔院 職場, 承政院 朱書를 지냈다.

글을 잘 짓는다 하여 稱讚을 받았으며, 以後 남인 의 狙擊手로 淸南 에 加擔하여 活動하였다. 淸南 許穆 尹鑴 가 領袖로 ' 오정창 · 오정위 · 오시수 · 李茂 · 조사기 · 이수경 (李壽慶)을 中心으로 장응일 · 정지호 · 남천한 ·이서우 等이 '매와 사냥개'처럼 前衛 役割을 擔當하였다. 이들은 三伏(三福)이라 하여 인평대군 의 세 아들인 복창군 · 복선군 · 복평군 을 끼고 後日을 對備하였다 [6] ' 한다.

1664年 여러番 承政院 假注書로 入直하였다. 1665年 (玄宗 6年) 여름 이하진 같이 漢城府 北西(北署) 地方을 旅行하였다. 그해 말 成均館 戰績이 되었다.

1667年 母親喪을 當했다. 1668年 (玄宗 9) 通訓大夫 成均館 全的 을 거쳐 성환驛 察訪 (成歡驛察訪)에 任命되어 赴任하고, 1669年 咸鏡道 고산역(高山驛)의 察訪 으로 發令되었다.

官僚 生活 初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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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0年 (玄宗 11) 辭職 後 金剛山 을 遊覽하고 이듬해 11月 京畿道 마전현 의 未遂 許穆 (眉? 許穆)을 찾아가 가르침을 請하였다. 1673年까지 許穆의 門下에서 受學하다가 떠나올 때 許穆 에게서 五言律詩로 된 8幅의 全書와, 屛風을 膳物로 받았다. 特히 그는 書藝家로서 未遂書體(眉?書體)를 平生 練習하였다. 1673年 平安道 龍岡 縣監 (龍岡縣監)으로 赴任하였다.

1675年 (肅宗 1) 5月 文章에 재주가 있다 하여 競演 에서 스승인 許穆 , 尹鑴 等의 推薦을 받았다. 같은 5月 政言에 薦擧되었으나, 對北 이었던 이경항 의 아들이라는 理由로 一部 남인 들의 反撥이 거셌으나 許穆 이 强하게 貫徹시켜 成事되었다. 그해 7月 허적 , 권대운 等의 反對가 있었지만 許穆 은 自身이 이서우의 아비 이경항과 같은 마을에 살았지만 그가 對北 의 흉論에 물들지 않았다며 그를 辯護하였다. 1675年 ( 肅宗 1) 7月 司諫院正言이 되어 仁祖反正 以後 對北家門出身으로는 처음으로 淸直(淸職)에 올랐다. 그러나 1675年 12月에도 허적 等은 이경항이 對北의 黨員이었다는 疑惑을 提起했고, 許穆 , 尹鑴 가 그를 斗頓하여 撫摩되었다.

그가 三社의 請要職에 重用되자 그의 아버지 이경항 광해군 對北 人事였음을 들어 反對하였다. 그러나 許穆 尹鑴 가 번갈아가며 그를 三四 言官의 適任者로 推薦하였다. 이때 許穆은 "神이 그 아비와 더불어 같은 마을에 살았으므로, 그가 끝내 흉론(凶論)에 물들지 아니하였음을 압니다"하며 그를 감쌌고, 묵재 허적 은 "神이 듣건대, 그 아비가 이이첨 (李爾瞻)에게 親押(親押)받았다고 하는데, 只今 偶像(右相)의 말이 이와 같으니, 신은 傳해 들은 것에 지나지 아니하고 偶像은 눈으로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偶像의 말이 옳습니다. 偶像이 어찌 한낱 이서우를 위하여 敢히 殿下를 속이겠습니까?"라며 그의 中庸을 反對하였으나, 許穆 의 辯護로 無事하였다. 5月 競演 에서 許穆 의 薦擧를 받았다.

1675年 (肅宗 1年) 7月 22日 司諫院 정언 이 되었다. 그 해 西人 송시열 (宋時烈)의 禮論과 그에 積極 同調한 김수항 (金壽恒)을 攻擊하였으며, 7月 에는 허적 等 大臣을 攻擊하는 이수경을 斗護하다 罷職당하였다. 그러나 그해 8月 부터 王과 請對한 右議政 許穆 의 極力 辯護와 說得으로, 同年 10月 9日 이수경과 함께 곧 復職되었다. 이어 10月 11日 尹鑴 의 推薦으로 弘文錄 에 오르게 되었다. [7] 이때 허적 이 다시 그의 아버지 이경항 對北 이었던 點을 들어 1623年 以後 對北派, 對北系列인 사람들의 出仕가 禁止되었던 點을 指摘하기도 했다. [7]

官僚 生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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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虎 尹鑴
(스승의 한사람이자 淸南의 領袖로 그를 後援하였다.)
 
묵재 허적
(濁南의 領袖로 그의 아버지가 對北 家門인 것을 問題삼았다.)

남인 內에서도 허적 等은 그의 아버지 이경항이 광해군 때의 對北 黨員이었다며 疑惑을 提起하였으나, 許穆 , 尹鑴 等이 번갈아가며 그를 擁護하였다. 그해 10月 許穆 , 尹鑴 의 推薦을 받아 弘文錄 에 薦擧되었고, 10月 11日 尹鑴에 依해 都堂錄에 推薦되었다.

1675年 成均館 사예 를 거쳐 1675年 12月 11日 司憲府 地平(司憲府 持平)李 되었으나 여러 番 小敗(召牌)를 어긴 責任을 지고 스스로 辭職을 請한 뒤 물러가서 處分을 기다렸다가. 이때 남인 허적 西人 (西人)은 競演 에서 그를 批判하였고 아버지 이경항의 過去까지 問題삼았으나, 未遂 許穆 (許穆)의 辯護로 無事하였다. 以後 그는 許穆 尹鑴 의 庇護를 받았으며, 그의 글재주를 높이 산 許穆 尹鑴 가 번갈아가며 그를 推薦하여 三社의 要職에 任命되었다. 12月 26日 다시 司諫院 정언 이 되었다.

1676年 (肅宗 2年) 1月 萬과 設置와 종이 號牌 發給의 弊端을 指摘하여 廢止하게 하였다. 萬과 設置 以後 白手 들이 헛된 꿈을 바라는 일이 늘어났으며, 종이 號牌 는 凶年己에 發給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 뒤 成均館 社例를 거쳐 兵曹 正郞 으로 備邊司 郎廳이 되었고, 1676年 7月 淸나라 에 派遣되는 進賀使 (進賀使) 兼 仁祖反正 辨誣使로 情事 복선군 以南(福善君 李?), 府使(副使) 定石(鄭晳)이 派遣될 때 이서우는 書狀官 (書狀官)에 選拔되어 燕京에 往還하고 12月 23日 에 歸國하였다.

歸國 後 1677年 狼星 郡守(琅城郡守)로 赴任했다가 1677年 10月 4日 司憲府 掌令 이 되었다. 그해 12月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그 뒤 備邊司의 郎官을 거쳐 1678年 (肅宗 4) 3月 8日 成均館直講(成均館直講)으로 그해의 定試(庭試)의 對讀官(對讀官)이 되어 試驗을 主管하였다. 6月 16日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以後 西人 남인 에서 여러 番 그의 아버지 이경항 의 前歷을 問題삼았으나 이때에도 許穆 尹鑴 가 번갈아가며 이서우를 斗頓하였다. 이서우는 西人 송시열 , 송준길 , 김수항 等의 禮論이 例를 거슬린다며 批判, 糾彈하였다.

1678年 (肅宗 4) 가을 肅宗 의 名으로 慶尙道 敬差官 (敬差官)의 한 사람에 任命되어 東來에 간 뒤 慶尙道 南部地域을 巡廻하고 되돌아왔다. 漢城 에 왔다가 이듬해 1月 東萊 府使 로 任命되어 내려갔다.

2次 禮訟 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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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年 (肅宗 5) 1月 25日 東萊 府使(東萊府使)로 在職하면서 그는 鄕土誌人 《萇山후지 (?山後誌)》, 《東萊승람후지 (東萊勝覽後誌)》를 編纂, 發刊하였다. 以後 江陵 府使 , 富寧 府使 , 淸州牧師 等을 지내고 西人 송시열 , 김수항 의 禮論을 批判, 攻擊하는데 앞장섰다. 西人 송시열 (宋時烈)의 禮論과 그것을 따르는 김수항(金壽恒)을 攻擊하였으며, 7月 에는 허적 等 大臣을 攻擊하는 이수경을 斗護하다 罷職당하였다. 그러나 許穆 의 辯護로 復官하였다. 그 뒤 淸나라 에 派遣되는 冬至使 의 書狀官으로 燕京에 다녀왔다.

 
政敵 김수항

以後 남인 으로 生活하다 1678年 다시 司憲府 掌令이 되었다. 1678年 副護軍으로 다시 備邊司郎廳이 되었고, 1679年 1月 25日 東來府使로 나갔다. 東來府使 在職 中 1679年 朝鮮에 歸化한 差倭(差倭)와 함께 倭人 居住地를 測量하여, 朝鮮 內 滯留中인 管矮들에 對한 새로운 步行限界(步行限界)를 條約으로 定하여 出入을 制限시켰다. [8] 以後 淸州 牧師 로 轉任되었다.

 
尤庵 송시열

1680年 (肅宗 6年) 3月 庚申換局 이 斷行되고, 그해 4月 김석주 (金錫?) 等으로부터 복선군 男, 복평군 緣과 親하게 지낸다는 理由로 彈劾을 받았다. 庚申換局 以後 西人의 猛攻擊을 받고 그해 6月 東萊 府使에서 免職되었다. 그해 9月 에는 김수항 으로부터 그가 오정창 (吳挺昌)의 心腹인데 홀로 罪를 받지 않았다며 攻擊當하였다. [9] 그 해 10月 西人 에 依해 洪水의 便 關聯者인 오정창 의 心腹으로 指目되어 咸鏡道 富寧 (富寧)으로 流配되었다가 다시 寧邊 으로 이配當하였는데, 陋名을 쓰고 流配되면서 그는 憂鬱한 心思를 詩로써 달랬다.

富寧 流配 直後 처음 官奴의 집에 居處하다가 部令 청암동으로 配所가 定해졌다. 流配生活 中 親舊 이하진의 訃音을 듣고 葬禮式에 參席하지 못하여 追慕하는 글을 지어보냈다. 流配生活 中 그는 北評事 홍만조 (洪萬朝), 조지석(趙祉錫) 等과 交流하며 詩文을 주고받았다. 1683年 (肅宗 9) 2月 特別히 配所에서 釋放되어 풀려난 뒤 廣州郡 중대면 송파리에 滯留하다가 다시 廣州郡 신원리 로 가서 蟄居하였다.

1687年 (肅宗 13年)부터는 洞里 아이들과 집안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쳤다. 1688年 (肅宗 14年) 5月 2日 特別히 義州 府尹 (義州府尹)으로 赴任하였다. 이서우는 外職에 여러 番 物望에 올랐다. 그러나 搪塞이 南人이었던 까닭에 西人의 줄기찬 反對로 撫摩되었다. 1688年 5月 西人 들이 主管한 備邊司 會議에서 義州府尹에 薦擧되었을 때는 西人들도 反對하지 않아 그해 5月 2日 義州 府尹 으로 就任할 수 있었다. 그러나 義州 府尹 在職 中 義州 로 流配된 복선군 (福善君) 以南(李?)과 詩文을 주고받았다는 理由로 그해 6月 13日 領議政 남구만 , 副提學 최석정 (崔錫鼎) 等의 批判을 받고 바로 免職 되었다.

復官과 인현왕후 廢位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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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年 (肅宗 15年) 1月 王子 菌의 原子정호 問題로 2月 6日 己巳換局 으로 南人이 政權을 잡자 內職으로 돌아와 兵曹 參議 (兵曺參議)로 登用되었다. 바로 承旨 (承旨)가 되었고, 2月 15日 다시 承旨 로 再任命되었으며 바로 兵曹 參議 가 되었다. 바로 그는 스승 尹鑴 의 祭文을 지어 보냈다.

虎狼이가 사람을 잡아먹지만 / 虎狼雖食人

사람이 또한 虎狼을 죽인다네 / 人亦殺虎狼
뜬구름이 벌써 사라지고 / 浮雲已消散
太陽이 다시 밝았어라 / 白日重晶光
庚申年에 暴惡하고 殘忍한 무리들 / ?年虎冠輩
오늘날 便安히 지내는 者 누구인가 / 問誰今安康
鬼神과 사람의 誅罰을 받아 / 陰誅與顯戮
잇달아 모두가 죽었구려 / 相續皆淪亡
揶揄하던 者 죽임을 當하자 百姓들이 통쾌히 여기는데 / 揶揄萬姓快
그들에 對한 辱說 千秋에 永遠하리 / ?罵千秋長
이들이 어찌 抑鬱하게 죽은 사람들만 하겠는가 / 豈如寃死人
恩寵의 校紙와 祭文을 내렸어라 / 絲綸下恩章
官職을 회복시키고 祭祀를 내리며 / 復官賜祭奠
子孫들을 記錄하여 朝廷의 班列에 오르게 하였네 / 錄子登朝行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모두가 그지없이 感激하건대 / 幽明交感極
이에서 또 어떠한 所望이 있겠는가 / 毫髮復何望
그 中에서도 百號翁은 / 就中白湖翁
靈魂이 唯獨 애절하여라 / 英魂獨悲傷
그가 論한 例는 임금의 宗統을 引用하였고 / 其禮引聖庶
그가 지닌 뜻은 諸葛亮의 일이었어라 / 其志乃南陽
君臣의 契合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건만 / 契合非偶然
經綸을 다 펴지 못하였네 / 經綸未渠央
뜻을 이루지 못하고 例를 밝히지 못하니 / 志閼禮未明
天運이 어쩌면 그리도 아득한가 / 天運何茫茫
아서라 天運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아서라 天運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그해 潤 3月 다른 男인 臣僚들과 合計하여 송시열 을 死刑에 處할 것을 主張하였다. 以後 4月 23日 承旨 가 되었다. 以後 禮曹 參議 가 되었다가 8月 3日 다시 承旨에 再任命되었다. 1689年 10月 3日 司諫院 大司諫, 司憲府 大司憲, 10月 23日 다시 承旨가 되었다. 그 後 咸鏡道 觀察使, 弘文館 大提學 藝文館 大提學 , 司憲府 大司憲 等을 두루 지냈다. 이 期間 中 그는 西人 이 잘못된 禮論을 고치지 않는다며 西人 을 攻擊, 聲討하였다.

1690年 (肅宗 16年) 1月 10日 承政院 都承旨 (都承旨), 以後 五衛都摠府 副摠管을 지냈다. 그 뒤 김수항 , 송시열 을 彈劾하면서 김수항, 宋時烈 等의 西人 을 攻擊하는데 앞장섰으며, 인현왕후 閔氏(仁顯王后 閔氏)의 廢黜 때는 承旨 로 있으면서 肅宗 의 뜻을 받들었다. 1690年 5月 咸鏡道 觀察使 兼 兵馬 水軍節度使 (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가 되어 都巡察使 (巡察使),함흥부尹(咸興府尹) 等을 兼職하였다. 咸鏡道 觀察使 兼 病魔水軍節度使로 在職 中 1691年 4月 人蔘 에 對한 行政處理 잘못과, 人蔘 採取를 目的으로 越境하는 百姓들을 統制하지 못했다는 理由로 備邊司 로부터 彈劾을 받고 削職당하였다.

1691年 (肅宗 17年) 민암 大提學 職에서 辭職하자 그 後任者의 物望에 올랐으나 落馬했다. 그는 伽倻山 海印寺 에 들러 최치원 의 市에서 句節 몇字를 바꾸어 송시열 을 批判하는 詩를 남기고 올라왔다. 1692年 10月 2日 議政府 左議政 목래선 의 建議로 서용의 命令이 내려졌다.

生涯 後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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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戌換局과 復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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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2年 (肅宗 18年) 10月 議政府 左議政 목래선 (睦來善)에 依하여 文章으로 薦擧받아 藝文館 提學 이 되었으며, 同年 10月 5日 共助 參判 이 되었다. 그러나 辭讓하고 10月 14日 까지 繼續 거듭 上疏를 올렸다. 11月 21日 다시 承政院 都承旨 가 되었으나 그해 12月 26日 孫子의 疾病을 理由로 都承旨 職 辭職을 請하여 受諾되었다. 1693年 (肅宗 19) 3月 藝文館 提學 이 되고, 같은 3月 提學 으로 特進官이 되어 그해의 武科 2沼 參試官, 增廣科 司馬試 注視館, 文科 會試 參試官이 되었으며, 6月 承文院 製造가 되었다. 3月 4日 에는 藝文館提學(藝文館提學)으로 式年試 生員進士試 2소의 試驗官이 되었다.

1693年 9月 9日 黃海道 觀察使 (黃海道觀察使)로 나아갔다가, 9月 26日 慶尙道 觀察使 (慶尙道觀察使)로 發令되었다. 다시 工曹 參判에 이르렀으나 1694年 4月 1日 甲戌獄事 西人 이 執權하자 罷職, 削黜당하고 4月 16日 門外黜送 (門外黜送)되었다가 1695年 다시 肅宗의 赦免令이 내려졌으나 承旨 이야 (李?) 等의 反對로 霧散되었다. 以後 그는 청계산 (淸溪山) 近處에 머무르다가 各地를 遊覽했다. 이때 軍役 의 弊端이 甚하여, 어린아이와 老人에게까지 軍浦 (軍布)를 徵收하여, 男子 아이를 낳으면 죽이거나 산 채로 묻는 慘酷함을 目擊하고 記錄을 남기기도 했다. 그밖에 飢饉과 凶年으로 굶주림과 城밖에 屍體가 쌓이는 것을 몇 首의 詩로 남기기도 했다.

1697年 (肅宗 23年) 4月 에 釋放命令을 받고 풀려나 復官되었다. 그 해 남인 을 登用하는 政策을 펴던 少論 宰相 최석정 (崔錫鼎)에 依하여 淸白함을 認定받아 敍用을 建議하였으며, 1698年 2月 肅宗 으로부터 恕容(敍用)하라는 命令이 내려졌지만 現職에 나가지는 못했다. 詩文에 뛰어나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以後 청계산 近處로 落鄕해 生活하였다. 그해 2月 25日 肅宗은 承政院 에 轉校하여 그의 敍用을 命했다. [10]

그는 송시열 김수항 等이 眞理를 糊塗하고 學問의 自由를 가로막고 權力으로 自身들의 사론을 貫徹시킨다고 繼續 批判하였다. 그밖에도 그는 西人 의 北伐論에 對해 孝宗 송시열 에게 내려준 初球를 개가죽에 빗대어 嘲弄하기도 했다. 그는 備邊司 로부터 여러番 地方官 直擬 物望에 올랐지만 번번히 落馬하고 만다. 1700年 (肅宗 26) 2月 3日 新任 江華府留守 適任者를 薦擧할 때 議政府 右參贊 이현석 이 그를 推薦했지만 거절당했다.

萬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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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年 (肅宗 27年) 8月 희빈 張氏 인현왕후 를 詛呪했다는 理由로 逮捕, 投獄되면서 장희재 를 비롯한 남인 人士들이 처형당하고, 그는 禁錮令을 받았다. 그해 10月 8日 희빈 張氏 가 賜死된 뒤 다른 남인 黨員과 함께 赦免되지만, 더以上 官職에 나가지 않았다.

以後 光州 청계산 철曲 近處 신원리 로 落鄕하여 晩年에는 後學에게 學問과 詩文을 가르치는 일로 消日했다. 청계산 東쪽에는 兄 이가우 의 外孫들이 살고 있었다. 詩(詩)에 뛰어나고 서도(書道)로도 알려졌다. 처음에는 洞里 아이들과 집안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남인 靑年들이 찾아왔다. 年初再 오상렴 (燕超齋 吳尙濂), 희암 채팽윤(希菴 蔡彭胤), 藥山 오광운 (藥山 吳光運), 학고 김리만(鶴皐 金履萬), 국포 强迫 (菊圃 姜樸), 이정휴(李井休), 이수대, 권두경, 이병휴 等이 그의 門下에 찾아와 詩와 學問을 배웠다. 창설재 권두경 [11] , 이정휴 等도 그의 門下에 찾아와 詩文의 指導를 받았다. 星湖 李瀷 亦是 그의 門下에 出入하여 學問을 배웠고, 이는 안정복 , 强迫 , 신후담 , 채제공 等에게로 이어진다. 그는 윤선도 , 이민구 等의 詩文과 學問을 後代에 傳하는 役割을 하였다.

오상렴 (吳尙濂)은 1704年 (肅宗 30年) 스물 다섯 살 때 김리만 (金履萬) 等과 함께 송곡 이서우에게 詩를 배웠다. [12] 그러나 오상렴은 1707年 이른 나이에 夭折하였다. 晩年에는 星湖僿說 을 지은 實學者 星湖 李瀷 (星湖 李瀷)도 그의 門下에 찾아와 자주 出入했다. 그는 이서우를 찾아 뵌 以後, 工夫하다 모르는 點이 있으면 그에게 자주 묻고 배웠는데, 利益 은 이서우를 '四百'(詞伯)이라 稱하면서, 아버지의 親舊이자 自身의 스승인 이서우를 尊敬하고 가르침을 받았다.『星湖僿說』에는 利益이 이서우에게 가르침을 請하거나 自身이 工夫한 것을 檢證받는 等의 內容을 記述하였다. [13]

著書로 《松坡文集》(松坡文集) 20卷 [14] 과 《講師》(康史) 2卷, 《萇山후지》 (?山後誌). 《東萊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 虎狼이 에 關한 資料를 便역한 《豪奢》 等이 있으며, 豪奢는 現在 內容이 傳하지 않는다. 作品으로는 金浦 문수사 (文殊寺) 風痰大師碑(楓潭大師碑)의 全額이 遺筆(遺筆), 禮山郡 불山面 本店리 議政府 領議政 이의배 (李義培) 神道碑 의 輸液, 以上의 의 少陵文集 序文 等이 남아 있다.

1705年 (肅宗 31年) 長男 이정관과 셋째 兄 이희우(李喜雨 [15] )의 죽음을 보았다. 또한 自身이 20餘 年 以上 단골로 다니던 酒幕의 酒母가 60歲를 一期로 死亡하자 7언 律詩를 지어 追慕하였다. 1709年 (肅宗 35年) 10月 14日 果川 청계에서 死去했다. 承政院日記 에 依하면 곧 競技監査가 書契를 올려 그의 죽음을 알렸고, 10月 17日 禮曹 에서 調劑와 負扆를 法殿대로 내려줄 것을 上奏하여, 肅宗 이 承認하였다. 그의 나이 享年 76歲였다.

事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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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道 廣州郡 언주면 원지리 철曲(現 서울特別市 瑞草區 원지동 산 83-2番地 철曲) 酉坐의 否認 靑松沈氏 墓所 옆에 安葬되었다. 그의 墓所 위에는 從祖父 이명남, 再從祖父로 壬辰倭亂 때 戰死한 이복남 의 衣冠과 甲옷을 묻은 墟墓와 그 夫人 淸州韓氏의 合葬墓, 高祖父 이광식 의 墓所가 연이어 있다. 그의 墓所 南쪽에는 2011年 建立된 서울追慕公園 이 있다. 서초구 원지동 산 83-2番地 철曲 近處에 있던 다른 一家의 墓域은 江原道 原州市 부론면 鍛鋼1里 작실部落, 그의 祠堂 近處로 移葬되었다.

1701年 남인 의 沒落 以後 두 庶子 이익관 , 이순관 과 庶女 사위 민관효 1728年 (英祖 4年) 李麟佐의 亂 에 連累되면서 그의 家計는 沒落하였다. 셋째 아들 이홍관 은 처형당하고, 掛書를 돌리는데 加擔한 이익관 , 이순관 兄弟는 陵遲處斬당하고 家産을 籍沒당했으며, 이인좌 를 도운 庶女 사위 민관효 一家 亦是 처형당하고 家産은 籍沒당한다. 이들의 後孫들은 庶孫 이계강 , 이철강 等을 비롯, 極邊의 奴婢로 끌려가게 된다. 그밖에 이정관의 아들 이番 等도 連累되어 極邊에 奴婢로 끌려갔다가 釋放된다.

이서우 亦是 逆謀로 連坐되어 秋脫黨했다. 그의 두 아들 이정관 이석관 은 以前에 死亡했으므로 火를 謀免하였으나 그의 敵손들 亦是 뿔뿔이 흩어져 慶尙北道 星州 江原道 原州 等으로 흩어졌다.

1745年 (英祖 21) 10月 에는 乙丑 掛書 事件에 그의 孫子이자 이정관의 아들 이심 이 連坐되어 處刑되면서 그의 家計는 沒落했고, 外孫 强迫 , 外曾孫 신후담 等도 連坐되어 出仕에 制限을 받게 된다. 1728年 (英祖 4) 李麟佐의 亂 으로 官爵을 秋脫黨했다가 正祖 남인 이 執權하면서 1795年 (正祖 19年) 10月 다시 復權되었다. 外孫子 强迫은 큰아버지 강석番의 養子로 入養되었는데도, 이익관, 이순관에 連坐되어 官職 出仕에 不利益을 받았다. 그의 外曾孫 中에는 天主敎 批判論者人 신후담 도 있고, 발해고 의 著者 유득공 홍이석 에게 시집간 그의 딸의 外孫子였다.

그는 死後 남인 學問과 翅脈의 正統이자 南人 文壇의 終場으로 追崇되고 後날 채제공 에 依해 許穆 -이서우- 利益 으로 男인 學問, 詩文의 法統으로 規定되었다. 그의 文集은 外孫 국포 强迫 이 整理했고, 强迫 의 孫子 강세륜 강세백 이 再整理하여 刊行하였고, 이서우의 直系 後孫들에게 傳해주었다. 1995年 延世大學校 에서 國役으로 刊行되어 알려졌다. 江原道 原州郡 부론면 단강리 작실에 그를 祭享하는 影幀閣 이 세워졌다. 每年 3月 1日 原州郡 부론면 단강리 影幀閣에 茶禮를 올리고 있다. 1995年 8月 後孫들에 依해 墓碑가 다시 樹立되었다.

著書와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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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作品 中에는 失傳되어 傳하지 않는 것도 있다. 茶山 정약용 은 自身의 詩(詩)에서 이서우의 不幸을 言及했는데, "이서우는 禹書堂과 비슷한 이로 精密하고 곱기는 優勢했건만 不幸困窮 死後까지 이어졌기에 남긴 草稿 大部分 傳하지 않는다.(松谷似西堂,工緻勝濃姸.厄窮逮身後,草藁多不傳.)" 하였다. [16] 1

그의 一部를 모은 小冊子로 《前提 (筌蹄)》(朝鮮 末期, 刊行年代 未詳)李 傳한다.

著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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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의 詩
  • 《松坡文集》(松坡文集) 20卷
  • 《講師》 2卷
  • 《萇山후지(?山後誌)》 [17]
  • 《東萊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 [17]
  • 詩文 모음집,《전제 (筌蹄)》

編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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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豪奢》 1卷
  • 《萇山후지 (?山後誌)》
  • 《東萊승람후지 (東萊勝覽後誌)》

作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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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수사 風痰大師碑(文殊寺 楓潭大師碑)
  • 오리 이원익 墓碣銘
  • 奴主 김태일 墓碣銘
  • 이하진 墓碣銘(李夏鎭墓碣銘)
  • 少陵文集 序文(少陵文集序文 [18] )
  • 백곡집 序文(柏谷集序) (1686)
  • 삭녕郡守(朔寧郡守) 李相賢(李象賢) 墓碣銘, 京畿道 光明市 所在
  • 충장공 李福男의 시호 尙州(上奏) 市場(諡狀)
  • 解冤群 이건 指紋(海原君李健誌文)
  • 證左贊成 行戶曹判書 耳鳴 神道碑(李溟神道碑)의 글씨 (1673), 長湍郡 판부리 所在, 信徒碑文은 許穆 이 짓고 글씨는 尹心(尹深)李 썼는데, 이서우가 碑石에 새겼다.
  • 心緖墓碣銘(沈?墓碣銘), 京畿道 安城市 금광면 오흥리 山 31-1番地 審서 墓域 內
  • 眞사 강석훈 [19] 墓碣銘(進士姜碩塤墓碣銘)
  • 强戰(姜琠) 墓碣銘, 京畿道 坡州市 광탄면 鎔巖 해좌 所在
  • 超連載文集 序文(超燕齋文集序文)
  • 권황 墓碑, 통진 名月山 所在
  • 김정회 墓碣銘, 現在 實戰

逃亡後奇夢 (悼亡後記夢)

玉貌依?看忽無 玉某依稀間홀무 / 곱던 모습 稀微하게 보일 듯 사라지고

覺來燈影十分孤 覺來等英十分고 / 깨어보니 燈불만 외롭게 타고 있네

早知秋雨驚人夢 조지추우경人몽 / 가을비 내 꿈 깨울 줄 알았더라면

不向窓前種碧梧 佛享昌廛宗甓誤 / 窓 앞에 碧梧桐 심지 않았을 것을

單徒弟 追慕 만시 (輓詩)

單徒弟(檀道濟)가 죽어지니 將星이 무너진 듯

이촬(李 (系最))이 죽으니 짧은 팔의 支撐을 뉘 밝히리.

새 무덤을 바라고자 西湖로 낯을 돌리니

물빛이랑 山빛에도 슬픔을 못 理氣네

眼鏡 - 眼鏡을 처음 끼워보고 지은 詩

둥그렇게 다음은 修正 알 한 雙

눈에 끼면 가는 글씨 파리 대가리만하네

우습다. 玉淚(玉樓. 코) 끼여 괴로우니

香爐에서 나는 香氣를 맡을 수 없네.

評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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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 北人 內에서는 구경(九經)에 通達한 거유(巨儒)로서 道學君子로 稱頌받기도 했다. 當代에 받는 淸白吏로 到處에 인정비(仁政碑)가 세워져 選定恤民한 治績을 禮讚하는 稱頌이 藉藉하였다.

그의 詩는 主로 過去 試驗 때 짓는 誇示를 잘 지었다. 채제공 은 그를 男인 翅脈의 終場으로 보면서도 遠大한 韻致는 없다는 評을 남기기도 했다.

정약용 은 그의 作品性에 對해 '우리들(男인)의 翅脈은 濠洲 채유후(湖洲 蔡裕後)·同舟 이민구 (東州 李敏求) 以後로 오직 송곡 이서우가 그 正統을 얻었으나, 聲曲의 시논 精巧하고 緻密하기만 할 뿐, 遠大한 韻致가 적다 [20] 고 評하였다.

家族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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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松沈氏 夫人 外에도 妾이 2名 더 있었다. 同名 김세렴 은 그의 셋째 兄嫂의 親庭아버지로, 김효원 家門과도 姻戚間이었다. 한便 外家쪽으로는 이경록 의 外從손이고, 仁祖反正 의 功臣인 西人 頑風府院君 李曙 는 그의 外堂叔이었다.

  • 첩?: 이름 未詳(無名氏,?? -??)
    • 庶子?: 이익관 (李翼觀,?? - 1728年 3月 28日 )
    • 鉏며느리: 受惠(守惠) [26]
      • 鉏孫子?: 이금강(李今剛, 1712年 ~ 1728年 3月 29日 )
      • 庶孫女?: 이두혜(李斗惠) [27]
      • 鉏孫子?: 이철강(李鐵剛,?? ~ 1745年 11月 28日), 이순관의 아들
    • 庶女?: 이순관 (李順觀,?? - 1728年 )순애(順愛)
    • 鉏며느리?: 신순애((愼順愛 [28] , [29] )
      • 鉏孫子?: 이철강(李鐵剛), 叔父 이익관의 養子로 出系
      • 鉏孫子?: 이계강(李戒剛)
    • 庶女?: 李氏(李氏)
    • 庶女사위?: 민관효(閔觀孝,?? - 1728年 , 민종도 의 庶子, 민암 의 鉏孫子)
    • 庶子?: 이현관(李顯觀,?? - 1728年 以前 死亡)
    • 庶子?: 이관상(李觀上)
      • 鉏孫子?: 異術(李述)
      • 鉏孫子?: 吏部(李富)
      • 鉏孫子?: 이자득(李自得)
  • 丈人?: 心光位(沈光胃, 本貫은 靑松)
  • 査頓?: 강석番]]((姜碩蕃), 사위 강석훈의 동생
  • 査頓?: 민종도 (閔宗道, 1633年 - 1693年 , 庶女사위 민관효의 아버지)
  • 査頓?: 민점 (閔點, 1614 ~ 1680)
  • 査頓 민암 (閔?, 1636 - 1693)
  • 査頓?: 神光源(愼光遠, 妾며느리 申氏의 動機)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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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號는 松谷으로 문집은 松谷文集이라 하였으나, 肅宗 以後 남인 이 沒落하면서 世人의 耳目을 避하기 위해 松坡文集으로 이름을 바꾸어 刊行하였다. 松坡文集은 그의 外孫子인 국포 强迫 이 自身의 百部 강석番 의 養子로 出系하였는데, 强迫이 이서우의 文集을 整理했으며, 뒤에 强迫의 孫子인 강세륜과 강세백 [30] 兄弟가 整理하여 出刊하였다.
  • 1728年 그의 庶子 이익관, 이순관이 李麟佐의 亂 에 加擔하여 掛書를 돌렸다가 母斑 嫌疑로 處刑되면서 그의 一族들度 連坐되었다.
  • 後에 金삿갓 은 自身의 詩集에 실린 詩 '羅府(懶婦)'라는 題目의 7언 律詩를 지었는데, 이는 송곡 이서우의 詩를 自救만 바꾼 것이었다. [31] [32]
  • 그는 이규보 와 목은 異色 , 退溪 李滉 , 同舟 이민구 를 높이 評價하였다.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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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민점(閔點)李 文型(文衡)을 推薦할 때, 勸誘(權愈)와 이서우(李瑞雨)두 사람을 놓고 얼른 選擇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名士들이 모인 자리에서 韻을 내어 재주를 試驗瑕疵, 그가 卽席에서 詩를 지어 座中을 놀라게 하여 文型에 올랐다고 한다. [33]

嶺南 按察使 송곡 이서우는 歸任길에 太學士 勸誘(權愈)를 만나 말하기를, 〈嶺南 70週에 옛 道理대로 百姓을 돌보는 이는 宜寧의 이사군(李使君) 숭일(이숭일, 이현일 의 동생) 뿐이라〉하였다. [34]

그의 生前에 眼鏡 朝鮮 에 처음 流入되었는데, 그는 眼鏡의 생김새를 놀라워하며 이를 描寫한 詩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 [35]

그는 다양한 스승에게서 學問을 배워 윤선도 , 許穆 , 尹鑴 , 이민구 의 學統을 繼承했다. 그 中 갈암 이현일 이 지은 몇篇의 그의 追悼文 中 한 篇에는 이서우의 學問 淵源이 退溪 李滉 에서 由來했음을 强調하기도 했다.

萬張(輓章) [이서우(李瑞雨)]

淵源은 멀리 退溪에서 왔고 / 淵源遙自退溪來
風雲처럼 界合하여 草野에서 일어났네 / 契合風雲起草萊
尺地의 經綸으로 宰相의 자리에 다가갔으나 / 尺地經綸台象逼
老年의 蹤跡은 鬼門에서 돌아왔네 / 暮途?跡鬼門回
막 鬚髥과 毛髮이 父老와 같다고 들었는데 / ?聞?髮同?老
忽然히 音容이 野大로 드셨다고 하네 / 忽報音容隔夜臺
오래도록 성남에서 離別할 때의 말씀을 記憶하노니 / 長記城南臨別語
東쪽으로 靈歌를 바라보매 슬픔을 禁할 길 없네 / 永嘉東望不勝哀

그의 學問的 淵源은 스승 中 許穆 尹鑴 가 漢江 庭球 의 學統을 繼承했고, 漢江 庭球는 退溪 李滉 의 文人이면서 南冥 曺植 의 文人이었다.

詩文은 主로 晩唐, 송, 元나라의 詩와 朝鮮의 考試를 배우는 한便 二百 等의 詩를 模範으로 삼으려 했다. 이규보 , 異色 의 詩에서도 影響을 받았고, 윤선도 , 이민구 의 詩에서도 影響을 받았다. 그밖에 아버지 이경항이 임숙영 의 文人인 點으로 임숙영 의 詩에도 關心을 가졌고, 交遊하던 親舊 新鮮함의 아버지 辛酉(申濡)의 詩에서도 影響을 받았다. 그 中 이서우는 同舟 이민구 를 가장 높이 評價하였다.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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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는 젊어서 바둑 을 둘 줄 몰랐다. [36] 그러나 바둑 을 둘줄 몰라 여러 番 敗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스스로 獨學하여 바둑을 익혔다.

그는 처음에 바둑을 잘 두는 者를 찾아가 바둑을 두었는데 열여섯 집 差로 졌다. 세 판을 두었는데도 不拘하고 한판도 이기지 못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종이에 바둑板을 그려 들보에 매달아 놓고 누워서 쳐다보았다. 이틀만에 다시 바둑을 잘 두는 者를 찾아가 도리어 열여섯 집 差로 이겼다. [36] 그 뒤로 그는 바둑의 達人이 되었다 한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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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考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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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肅宗實錄
  • 國朝榜目
  • 국조인물지
  • 燃藜室記述
  • 名地록

參考 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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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문열, 《選擇》(민음사, 1997)
  • 정민, 《미쳐야 미친다:조선 知識人의 내면 읽기》 (푸른역사, 2004)
  • 이街園, 《李朝名人列傳》 (을유문화사, 1965)
  • 不유섭,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의 삶과 詩〉, 韓國漢詩學會, 《韓國漢詩作家硏究, 第12卷》 (韓國漢詩學會, 2008) pp.?171~204
  • 임미정, 《송곡 이서우의 詩文學 硏究》(연세대학교 大學院, 2007)
  • 李鍾贊, 김갑기 共編, 《朝鮮後期 限時 作家論 1》(이회문화사, 1998)
  • 신봉승, 《朝鮮王朝 500年:19. 張禧嬪》 (금성출판사, 2010)
  • 牛溪李氏判書共派宗中, 《松坡집 上, 下》 (牛溪李氏判書共派宗中, 2005)
  • 김달진 驛, 《韓國 漢詩 2》 (민음사, 1989)
  • 안대회, 《韓國 漢詩의 分析과 視角》 (연세대학교出版部, 2000)
  • 안대회, 《古典 散文 散策: 朝鮮의 文章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467페이지
  • 韓國漢詩學會, 《韓國 漢詩作家硏究 12》(太學士, 2008)
  • 강석근, 〈송곡 이서우(松谷 李瑞雨)의 流配詩 硏究(流配詩 硏究)〉, 한서대學校 東洋古典硏究所, 《東方學 第42輯》 (한서대學校 東洋古典硏究所, 2020)
  • 권경록, 〈松谷李瑞雨의 「赤壁賦集字各體四十首」에 나타난 流配의 再現과 그 意味〉, 東洋漢文學會, 《東洋漢文學硏究 48輯》 (東洋漢文學會, 2017)
  • 심경호, 〈18世紀 中?末葉의 南人文壇〉, 서울대학교 國文學硏究回, 《國文學硏究》 (太學士, 1997)

各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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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종도의 庶子
  2. 疑怪資料
  3.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시스템” . 2018年 4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4月 7日에 確認함 .  
  4. 이서우가 自身보다 앞서 죽은 조카 이일관의 墓地門이나 行長 等을 지은 記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그가 짓지 않은 것인지, 지었는데 失傳된 것인지는 確認되지 않는다.
  5. 人組 實錄 第 19卷, 6年(1628年 無盡 / 名 天界(天啓) 8年) 12月 25日(신해) 3番째記事 "右承旨 이경용을 黃海 監司로 삼다"
  6. 이근호, 이야기 朝鮮王朝史 (청아출판사, 2005) 431
  7. 肅宗實錄 4卷, 肅宗 1年(1675 乙卯 / 靑 康熙(康熙) 14年) 10月 11日(乙丑) 1番째記事 "祝聖에 對해 論議하고, 尹鑴가 이수경·신선온·이후항이 都堂錄에서 빠졌음을 아뢰다"
  8. 釜山文化院 學藝硏究室, 《2010 釜山文化觀光解說師 保守敎育》 (釜山文化院 學藝硏究室, 2010) 189페이지
  9. 肅宗實錄 10卷, 肅宗 6年(1680 更新 / 靑 康熙(康熙) 19年) 9月 13日(무진) 2番째記事 "淸나라 使臣의 接見·都城 歷史·御營廳 等의 軍事 訓鍊·江華島의 時在·功勳 等을 論議하다"
  10. 承政院日記 承政院日記 377冊 (脫抄本 20冊) 肅宗 24年 2月 25日 경오 3/6 記事 1698年 康熙(淸/聖祖) 37年, 吳始復 等을 收用하고 洪重夏 等은 論하지 말라는 全校
  11. 그가 이서우를 찾아와서 詩文을 指導받은 것을 李縡가 권두경의 行長을 쓰면서 一部 言及하였다.
  12. 이용휴, 《慧환 이용휴 詩全集》 (조남권 外 옮김, 소명출판, 2002) 179
  13. 《星湖先生全集 卷55》,『韓國文集總刊』199卷, 519面
  14. 後에 外孫子 국포 强迫에게 傳해졌다가, 强迫의 孫子인 강세륜, 강세백이 整理하여 刊行하였다. 그의 두 庶子가 1728年 (英祖 5年) 李麟佐의 亂 에 連累되어 禍를 입은 關係로, 文集은 그의 號인 송곡 代身 送波로 바꾸어 刊行하였다.
  15. 牛溪李氏 族譜에는 둘째 兄 이가우(李嘉雨)가 1705年에 死亡한 것으로 記錄되었으나, 이가우는 채유후 가 지은 李君墓碑文에 1646年에 死亡했다고 記載되었다.
  16. 丁若鏞,〈古詩二十四首〉,『國譯 茶山詩文集 Ⅱ』, (民族文化推進會, 1994)
  17.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1687_1_0016162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8. 少陵文集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그의 사위이다.
  20. 編輯部, 多散文選 (두산동아, 2010) 1176
  21. 濠洲文集 7卷 李君墓碣銘
  22. 익양군 回-龍川郡 履修한(龍川君 李壽朋+鳥)-旣成群 耳峴(箕城君 李俔)-評林群 이지윤(平林君 李祉胤)-이후석(李後奭)-이서규
  23. 承政院日記 英祖 4年 무신(1728) 4月 2日(壬午) 맑음 "逆賊 이문저(李文著) 等에게 適用할 連坐率에 對해 報告하는 義禁府의 界"
  24.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C%9D%B4%ED%99%8D%EA%B4%80&keyword=%EC%9D%B4%ED%99%8D%EA%B4%80
  25. 94歲까지 長壽하여 男便의 作爲와는 關係없이 特別히 淑夫人으로 封해졌다.
  26. 承政院日記 英祖 4年 무신(1728) 4月 2日(壬午) 맑음 "逆賊 이문저(李文著) 等에게 適用할 連坐率에 對해 報告하는 義禁府의 界"
  27. 承政院日記 英祖 4年 무신(1728) 4月 2日(壬午) 맑음 "逆賊 이문저(李文著) 等에게 適用할 連坐率에 對해 報告하는 義禁府의 界"
  28. 承政院日記 英祖 4年 무신(1728) 4月 2日(壬午) 맑음 "逆賊 이문저(李文著) 等에게 適用할 連坐率에 對해 報告하는 義禁府의 界"
  29. 神光源(愼光遠)의 누이
  30. 이서우에게는 證外高손이 된다.
  31. 안대회, 韓國 漢詩의 分析과 視角 (연세대학교出版部, 2000) 258쪽
  32. 이응수, 金笠市집 (漢城圖書株式會社, 1944) 135~140
  33. 勸誘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4. 李文烈, 選擇 (민음사, 1997) 193
  35. "새해 富者되세요" Archived 2011年 10月 10日 - 웨이백 머신 朝鮮日報 2006.11.28日子
  36. 안대회, 《古典 散文 散策: 朝鮮의 文章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467페이지

外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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