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權 辯護士 出身. 고려대 法大 3學年때
3選改憲
反對 全國非常學生總會張으로 活動해 强制徵集됐으며 5共時節 82年 光州地法 判事 在職中 國家保安法 違反事件人 '횃불會'
[1]
, '아람回'
[2]
事件 關聯者의 令狀을 棄却하고 法服을 벗었다.
入學한지 11年餘만에
1976年
고려대학교 法科大學 法學科에서 學士 學位 取得을 한 그는
1982年
부터 人權辯護士로 活動, 85年 韓國勞動相談所를 開設하고 86年
富川署 性拷問 事件
主任辯護士,
建大抗爭
辯護人,
大韓辯護士協會
人權委員,
YMCA
市民權益保護辯護人團 辯護士,
天主敎
正義平和委員會 中央委員,
MBC
勞動組合 法律顧問을 歷任하는 等
이돈명
,
조영래
,
洪性宇
辯護士 等과 함께 當時 代表的 人權辯護士로 活潑히 活動했다. 86年 創立되어 조준희, 황인철, 홍성우 辯護士가 會長을 맡은 이러한 人權辯護士들의 모임인
正義實踐法曹人會
(정법회)는 以後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 모임
(民辯)으로 發展하게 된다.
1987年
에는 7~8月 勞動者大鬪爭 當時 檢察은 그가 大宇造船 勞組設立과 關聯해 催淚彈에 맞아 숨진 大宇造船 勞動者
이석규氏 葬禮式
에 參席한 것이 勞動爭議調整法 3者介入禁止 嫌疑라며 拘束 起訴, 1달餘間 獄살이를 하게 된다. 當時 그는 이석규 勞動者의 辯護人이었으며 '
대우조선소 이석규 死亡事件
對策委員長' 身分이었다.
1987年
全斗煥
軍部獨裁政權을 물러나게 한
6月 民主抗爭
때
民主憲法爭取國民運動本部
人權委員長과 常任執行委員을 歷任. 같은 해 12月 치르게 된 大統領 直選制 選擧에서는
公正選擧監視運動全國本部
常任執行委員長으로 活動했다. 當時 '民主主義와 民族統一을 위한 社會運動' 共同代表로도 活動했다.
1988年
在野 迎入
平和민주당
候補로 公薦되어 서울
中浪區
에서 13代 國會議員에 出馬. 當選된 뒤
平和민주당
代辯人과 人權委員長을 歷任했다. 88年
盧武鉉
,
李海瓚
國會議員과 함께 國會 勞動委員會에서 活動하며 `勞動委 3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1992年
서울 중랑구에서
民主黨
候補로
14代 總選
에 出馬했으나 落選하다. 以後
1993年
環境運動聯合
指導委員과 官權選擧를 暴露한 한준수 郡守 主任辯護士를 지냈으며,
1995年
南北民間交流協議會 常任理事로 活動했다.
1996年
서울 중랑구에서
새정치국민회의
候補로 15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 當選 以後
새정치국민회의
地方自治委員長과 勞動委員長을 지냈으며,
1997年
4月 國會
한보그룹非理事件 國政調査 特別委員會
幹事로 活動했다.
1999年
에는
새정치국민회의
政治改革特別委員會 幹事, 第1政策調整委員長을 지냈으며,
2000年
國會 政治構造改革立法特別委員會 選擧法小委員會 委員長을 歷任했다.
2000年
서울 중랑구에서
새千年民主黨
候補로 16代 國會議員 選擧에 出馬. 當選 뒤 2000年
새千年民主黨
第1政策調整委員長, 國會
한빛은행대출관련의혹사건등의 眞相調査를 위한 國政調査 特別委員會
委員長, '人權法制定 小委員會' 委員長을 지냈다. 2001年에는
새千年民主黨
院內總務로 選出되어
國家人權委員會
法, 腐敗防止法, 돈洗濯防止法 等 이른바
改革3法
을 통과시키다. 또 院內總務로서 住宅賃貸借保護法, 商家賃貸借保護法, 枯葉劑휴遺贈關聯法, 時局事件 關聯 敎員任用除外體用에 關한 特別法, 醫療保險法, 勤勞者福祉基本法, 男女雇傭平等法改正, 勤勞基準法改正(母性保護關聯條項), 雇傭保護法改正(母性保護關聯條項) 等의 이른바 改革 法案이 國會에서 通過되는데 與野 協議를 이끌어냈다.
[3]
2002年
大韓民國 第16代 大統領 選擧
에서
새千年民主黨
盧武鉉
候補 中央選擧對策委員會 總務本部長을 맡았다.
2003年
새千年民主黨
事務總長,
民族和解協力汎國民協議會
(민화협) 共同議長을 지냈으며, 以後
열린우리당
創黨過程에서 總務委員長과 地區黨創黨審議委員會 委員長으로 活動했다.
그러나
2004年
2月
檢察은, '2002年 大統領 選擧'에서
새千年民主黨
이 募金한 企業後援金 가운데 韓華그룹 10億, 錦湖그룹 6億의 選擧後援金에 對해 領收證을 發給하지 않은 點, SK그룹 10億, 현대자동차그룹 6億 6千萬원의 選擧後援金에 對한 領收證을 該當企業 任職員 名義로 發給한 點을 問題삼아 '中央選擧對策委員會 總務本部長'을 맡았던 그에게 政治資金法 違反 責任을 물어 拘束 起訴했다. 結局 그는
2004年
7月
抗訴審 法院에서 '懲役 1年 執行猶豫 3年' 判決을 받는다. 하지만 當時 裁判部는 “過去 慣行이었다는 點에서 抑鬱한 點이 있다.”며 判決文에서 밝히고,
새千年民主黨
選擧캠프가 현대자동차에서 任職員 名義로 받은 6億 6千萬원에 對해서는 “(이상수)被告人이 便法 處理 事實을 알았다고 보기 어렵다”며 無罪를 宣告했다.
2004年
8月
美國
워싱턴
조지타운 大學에서 招聘硏究員으로 硏修 生活을 始作하여 4個月餘間 美國에 머물렀다.
2005年
8月
, 光復節 特別赦免 措置 되었으며,
2005年
10月
富川 원미 甲에서 17代 國會議員 再補闕 選擧에
열린우리당
候補로 出馬했다.
2006年
2月
勞動部
長官에 就任했다.
[4]
勞動部
長官 任命 當時 勞動界에서는 歡迎하는 雰圍氣였으나
한나라黨
에서는 '盧 大統領의 報恩人事'라고 批判했다.
2008年
4月
, 서울 중랑구에서 18代 國會議員 選擧에 無所屬 出馬했다. 當時
統合민주당
公薦審査 過程에서 黨 公薦審査委員會의 '禁錮刑 以上 刑 確定者 公薦排除' 方針에 따라 黨 候補로 公薦되지 못하고 落選했다.
2008年
7月
統合민주당
全黨大會에 最高委員 候補로 出馬했다가 落選하였다.
2009年
서울
中浪區
에 辯護士 事務室을 열고 辯護士로 活動 中이다.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