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强占期
朝鮮史 編修會
에서 搜査官保와 囑託으로 參與하였다. 이때의 經歷으로 인해 民族問題硏究所에서 發表한
친일인명사전
에 收錄되었다
[1]
. 李丙燾가 朝鮮史 編修會에 있을 때 韓國史를 歪曲하고 植民史觀을 正立하는데 寄與했다는 主張이 있다.
[2]
1934年
, 日本人을 排除한 民間學術團體人
震檀學會
를 創設하여 韓國史를 硏究했다. 경성제국대학 敎授, 서울대학교 敎授, 서울대학교 大學院長, 學術院 會長, 震檀學會 理事長, 民族文化推進會 理事長, 國防部 戰史編纂委員長, 國史編纂委員會 委員, 문교부 長官 等을 歷任하였다. 《
국사대관
(
1948年
)》을 비롯하여 韓國의 歷史와 思想, 文化에 關한 厖大한 著述을 남겼다. 內務部長官
윤치영
의 妻男이며,
서울大學校
總長
이장무
와 文化財廳長
이건무
는 그의 孫子이다. 實證的·客觀的 方法을 重視하는
實證史學
(實證史學)을 追求하여 韓國近代史學이 成立하는데 크게 寄與하였다고 評價된다.
[3]
出生과 成長
編輯
그는 朝鮮 時代 後期인
1896年
9月 20日
(
陰曆 8月 14日
)에
京畿道
龍仁郡
移動面 千里(泉里)에서
忠淸道
水軍節度使 이봉구와 그의 夫人인
羅州 金氏
사이의 五男으로 出生하였다. 지난날 한때
京畿道
水原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으며 12歲가 되던
1907年
7月
에 家族이 모두
漢城府
로 移住하여 以後
漢城府
에서 成長하였다. 같은 해
1907年
11月
에 父親이 作故하였다.
1907年
이종일 先生이 校長으로 있던 寶光學校에 入學하여 이 學校가 財政難으로 廢校하는
1909年
까지 修學하였다. 15歲였던
1910年
에 陸軍 參將
조성근
의 長女 조남숙과 結婚하였다. 같은 해 3月에 私立 중동學校를 卒業하였다.
1912年
3月
보성전문학교
(現在 수송동 曹溪寺 자리) 法科에 入學하여
1915年
3月에 卒業했다.
1916年
4月에
와세다 大學
史學 및 社會學科(史學及社會學科)에 入學하여
1919年
7月에 卒業하였다.
日帝强占期 活動
編輯
日帝 强占期 初盤
編輯
1919年
10月부터 7年間
中央高等學校
前身인 中央學校에서 地理와 歷史, 英語 擔當 專任敎員으로 勤務했다. 夜間에는 英語講習所에 出講하는 한便, 中央學校의 專任敎員이자 中東學校(夜學) 校長인 崔奎東의 要請을 받고
1920年
4月부터 1年間 이 學校에서 英語를 講義하였다.
1920年
7月에 金億,
남궁벽
, 김혁로, 金榮煥, 나혜석, 민태원, 김찬영, 廉想涉, 吳相淳, 황석우, 김원주 等 12人(後에 변영로 參加하여 13人)과 함께 同人誌
廢墟
(廢墟)를 創刊하였다. 廢墟는 2號까지 出版되었다.
1921年
4月부터 1年間
경신학교
에서도 地理와 歷史를 講義하였다.
1922年
부터는 主로 韓國思想史와 地理圖讖 等 思想史 硏究에 專念하였다.
1925年
8月부터
1927年
까지 朝鮮總督府 傘下의
朝鮮史編修會
에서 搜査官步(修史官補)로 일하였는데 囑託(囑託)으로 있는 金서룡(今西龍,
이마니詩 流
)을 도와 搜査官補로 일했고
[4]
, 以後 朝鮮史編修會에서 退社하고, 臨時職인 囑託으로 解放까지 일하였다. 그러나 實際 朝鮮史編修會 任職員의 證言에 따르면 李丙燾의
朝鮮史編修會
活動, 特히 囑託으로의 活動은 事實上 이름만 올라 있었을 뿐, 實質的인 業務는 맡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5]
1933年
4月부터
1943年
까지
中央佛敎專門學校
講師로서 "조선유학사" 講義를 擔當하였다.
[6]
日帝 强占期 後半
編輯
1934年
5月 7日
에는 韓國과 近隣의 文化 硏究를 目的으로 하여
李相伯
,
趙潤濟
,
김상기
,
李丙琪
,
손진태
,
송석하
,
이희승
,
김태준
等과 함께
震檀學會
를 創立했다. 皇國史觀에 젖어 있던 日本 史學者들에게 對抗하기 위해 韓民族 固有의 國名인 ‘晉(震)’과 檀君의 ‘單(檀)’을 合해 ‘震檀學會’로 하였다
[6]
는 震檀學會 發起式兼 創立總會는 京城府 長谷川町(現 소공동 50番地) "푸라디아느" 茶房에서 開催하였다. 같은해 11月 28日에
震檀學報
創刊號를 刊行하면서 "삼한問題의 新考察(1):진한級삼한고"라는 論文을 投稿하고 그自身은 編輯 兼 發行人으로 活動하였다. 震檀學會의 住所를 "京城府 季冬 98番地" 自身의 집 住所地로 하였다. 또한 위의 震檀學報 創刊號에 "하멜漂流記"를 飜譯하여 連載하기 始作하였다.
1935年
4月 17日 震檀學報 第2號를 發刊했다.
1941年
4月부터 3年間
李花女子專門學校
私學講座 擔當 講師로 出講하였다. 日帝의 彈壓으로
1943年
9月 震檀學報 第14號의 發行을 끝으로 震檀學會가 解散되었다. 그는 創氏改名을 하지 않았다. 1945年 光復으로 震檀學會가 自進解散한 뒤에도
朝鮮史編修會
를 지켰다는 主張이 있다.
[7]
光復 後
編輯
光復 直後
編輯
1945年
8月 解放과 同時에 震檀學會를 再建하고, 臨時敎員養成所를 構成하여 國語와 局社 中等敎員 養成을 圖謀하였다. 또한 親日 御用 歷史學會人 朝鮮史 編修會를 繼續 존속시켜 나갔다. "國史敎本"을 編纂하여 中等敎科用으로 使用하게 하였다. 같은해 12月 同志들과
書誌學會
를 組織하고 機關紙
書誌
를 發刊하였다. 같은 해, 日本人 敎員이 全部 빠져나가고, 朝鮮人만으로 運營되던 경성제국대학의 敎授로 任命되었다.
1946年
9月 국대안의 制定으로
서울大學校
文理科大學 史學과의 敎授로 任命되어 史學과의 創設에 寄與하였다.
1947年
5月에 震檀學報 第15號를 刊行하였다. 그해 10月에
서울大學校
中央圖書館長에 任命되어
1952年
까지 그 일을 맡았다.
1952年
8月에는 서울대학교 大學院에서 "高麗時代의 硏究: 特히 圖讖思想의 發展을 中心으로"라는 論文으로
人文科學
博士
學位를 取得하였다.
1953年
9月 서울大學校 附屬 博物館長에 任命되어
1954年
까지 맡았다.
1953年
10月에
震檀學會
를 社團法人으로 再編成하여 理事長에 就任하였다.
敎育者로서의 삶
編輯
1945年
경성대학의 敎授가 되었다. 以後 경성대학과 다른 官公私立專門學校들이 統合되자 서울대학교 敎授가 되었다.
1954年
5月에 서울대학교 大學院長이 되었고
1962年
까지 서울대학교 文理大 敎授로 在職하면서 後學을 養成하였다.
1950年
에
韓國 戰爭
이 일어나자
國防部
戰史編纂委員長에 任命되어 4年間 服務하였다.
1954年
에는
大韓民國學術院
會員이 되었고,
1959年
에는 終身會員이 되었다.
1955年
부터
1982年
까지는
國史編纂委員會
委員을 지냈다. 또한
1956年
에
김창룡
의 墓碑銘을 썼다.
[8]
1957年
5月 동아文化硏究委員會(Research Council of Havard Yenching Institute)의 理事가 되었다.
高麗大學校
校友會 會長이 되었다.
1959年
3月에 學術院 終身會員이 되었다. 동아文化硏究委員會 會長이 되었다.
1960年
4月
許政
過渡內閣의
문교부
長官에 就任하였다. 學徒護國團을 解體하고 學生團體를 自律化시키는 한便, 大學 總學長의 敎授直選制를 採擇했다. 그해 8月에 辭任하고 9月에 서울대학교大學院腸 兼 서울大學校 行政大學院長에 任命되었다. 또한 같은 해 7月에 大韓民國 學術院 會長에 就任하였다.
1961年
4月에 國民大學 學長에 就任하였다.
1962年
서울大學校 名譽敎授로 推戴되었다.
1963年
6月 동아文化硏究委員會 會長에 再選되었다. 7月에 栗谷記念事業會 理事長에 被選되었다. 10月에 3.1文化相 審査委員長이 되었다. 美國 學術院創立100周年 記念式에 招請받았다. 하바드 엔稱 硏究所의 招請으로 特講하였다. 12月에 美國歷史學會 名譽會員이 되었다.
1964年
4月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諮問委員으로 被選되었고 7月에 學術院 會長에 3線, 11月에 고려대학교 敎友會長을 4線으로 맡았다.
1965年
4月에 成均館大學校 敎授로 就任하였다. 9月에
성균관대학교
大東文化硏究院 院長이 되었다.
1967年
6月
美國
프린스턴 大學校
에서 名譽文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68年
學術院 會長을 5線으로 맡았다. 朝鮮王朝實錄과 儒學者들의 文集 等과 같은 古典의 國譯 事業을 위해 現在
韓國古典飜譯院
의 前身인
民族文化推進委員會
를 이희승, 金斗宗 等과 함께 發足하면서,
1965年
11月 6日 서울大學校 講堂에서 創立總會를 開催하였다. 會長에는 朴鍾和가 推戴되었고 崔鉉培와 함께 副會長에 就任하였다. 以後
1970年
2月에 民族文化推進會를 財團法人으로 改編 發足하면서 理事가 되었다. 1970年 4月에는 '三國遺事領域小委員會'를 構成하고 委員長이 되어 박준선, 성낙훈, 이팔범, 정인섭, 진인숙 等 委員과 함께 三國遺事 領域事業을 始作했다. 民族文化推進會에서는 會報 '民族文化'를 1966年부터 刊行했는데, 그 創刊號에 '古典國譯의 現況과 展望'이란 글을 揭載하였다. 第4號에는 '栗谷집', '事變論', '신증 東國輿地勝覽'에 對한 解除를 揭載하였다. 以後
1977年
5月 11日 古典國譯의 綜合審議機構인 校閱委員會 委員長을 맡았다. 民族文化推進會에서 發行한 古典 飜譯書 中에는 '燃藜室記述1'에 對한 飜譯을 맡았다.
1982年
2月 22日
民族文化推進會 理事長에 就任하여 1988年 4月 1日까지 在任하면서 古典國譯子 養成과 古典國譯 事業을 展開하였다. 古典國譯後援會 結成하였고 民族文化推進會 事業의 長期發展을 爲한 財政的 基盤 마련하기 위해 政府에 財政支援을 促求하여 1986年 7月 民族文化推進會 會館을 종로구 구기동에 마련하였다. '우리苦戰읽기운동'의 推進, 國譯硏修院에 一般人 對象의 漢文講座 開設, 古典國譯上 制定, 韓國文集總刊 編纂의 業績을 남겼다.
1976年
에 學術院 會長 8線이 되었고 以後
1980年
까지 會長을 맡았다.
1981年
에 學術院 元老會員으로 推戴되었다.
1975年
10月 成均館大學校 理事에 就任하였다.
1984年
에는
茶山先生記念事業會
會長에 就任하였다.
1980年
에는
두계學術賞
이 制定되었다.
1981年
國政諮問委員會
委員으로 委囑되었다.
1985年
11月에 民族文化推進會 創立 20周年 및 "두계李丙燾 理事長九旬記念 特輯號"(民族文化 第11輯) 刊行되었다. '두계 이병도 理事長 年譜 및 論著目錄'에서 年譜, 賞勳, 著述, 論文 目錄, 訟壽의 글을 실었다. 特輯號 '卷頭言'에 '古典의 現代化 作業 20周年을 맞으며'를 揭載했다.
1986年
5月 9日 고려대학교 校友會 '敎友의 날' 行事에서 '자랑스러운 古代人'으로 選定되었다.
1986年
10月 9日 "檀君은 神話 아닌 우리 國調 - 歷代王朝의 檀君祭祀 日帝때 끊겼다"라는 題目으로 檀君朝鮮 實在의 可能性을 主張하였다.
[9]
1987年
10月 震檀學會에서 編纂한 "李丙燾博士九旬記念韓國史學論叢"을 奉呈받았다.
1987年
11月 4日
總理公館에서 열린 晩餐에
國務總理
김정렬
의 招請을 받았다.
1989年
8月 14日 새벽, 서울市 종로구에 있는 한국병원에서 永眠했다.
硏究 및 評價
編輯
이병도는
1950年代
以後의 古代史學界를 이끌어 나갔다.
1955年
에는 서울大學校 論文集에 〈南堂高〉를 發表해 合坐制의 原形이 된 南唐(南堂)의 實體를 밝히고,
高句麗
國號 起源 問題를 解明하는 한便,
衛滿朝鮮
의 展開過程을 통해
위만
이 朝鮮系 人物임을 主張하였다. 또한
1930年代
부터 始作한 自身의 硏究 成果를 體系的으로 整理하여 《韓國史 ─古代便─》을 出刊하여 古代史 硏究의 土臺를 마련하였다.
[13]
以後에도 古代史 硏究뿐만 아니라 歷史地理와 國家 起源 및 社會 制度까지 硏究를 擴大하여,
1976年
에는 《韓國古代史硏究》를 出刊하였다.
1977年
에는 《
三國史記
》에 譯註를 달아 《國譯 三國史記》를 出刊하고, 古代史·地理 圖讖과 함께 關心을 쏟고 있던 柳學士를 硏究한 成果는
1987年
에 《韓國柳學士》를 刊行하여 結實을 보았다.
大韓民國
建國 以後 實證主義 歷史學의 代表的인 人物로 實證的·客觀的 方法을 重視하며, 徹底한 文獻 考證에 立脚한 硏究 態度와 嚴格한 學風으로 많은 弟子를 길러냈으며, 文獻을 基本으로 하는 實證主義 歷史學이 뿌리내리는 데에 큰 業績을 남겼다. 죽을 때까지 硏究를 그치지 않았고, 旺盛한 硏究로 많은 著書와 다양한 論文을 남기기도 했다. 解放 以後의 古代史 硏究에 獨步的인 影響力을 끼치면서 大韓民國의 史學界에 職·間接的으로 큰 影響을 끼쳤다. 또한 李丙燾의 弟子들이 古代史學界에서 많은 活躍을 하면서 一部 民族史學界 人士 및 一般人들은 그의 後學이 韓國史學界를 掌握하였다고 批判하고있다.
[14]
日帝 强占期
朝鮮史編修會
에서 搜査官保와 囑託으로 勤務하여 日本 官學者를 도운 經歷이 親日行爲로 批判받았으며, 光復 後
서울大學校
國史學科 敎授로 在職할 때 日本에서
皇國史觀
을 信奉하고 信徒를 代表하는 大學으로 有名한 덴리대學校(天理大學校)에 가서 信徒의 道服을 입고 禮式에 參席했다는 證言이 提起되어 批判을 받았다.
[15]
主要 著書
編輯
- 《朝鮮史》,
朝鮮總督府
, 1922年 ~ 1938年, 總 35卷, 總 24,409페이지
- 《譯註 三國史記》, 박문서館,1943年[初版發行 朴문문고 2冊: 1冊 342(?)쪽, 2冊 479쪽]1945, 1956年(춘조사 再發行), 1965年(동국文化史,468쪽), 1977(을유문화사,國譯本 736쪽, 原文校閱本463쪽).
- 《朝鮮史臺官》, 冬至使, 1948, 1949(修正3板,501쪽).
- 《高麗時代의 硏究: 特히 圖讖思想을 中心으로》, 을유문화사, 1948, 1986(改訂版, 아세아문화사, 446쪽).
- 《새局社 敎本》, 冬至使, 1948(208쪽)
- 《韓國史(古代便)》(金在原 共著), 震檀學會 篇, 을유문화사, 1959, 1965年 修訂版(730쪽). 1980年 16板(70쪽, 附錄 索引 31쪽, 歷代王室系譜外 圖表).
- 《韓國史(中世便)》震檀學會 篇, 을유문화사,1961
- 《
하멜漂流記
(曆書)》, 1939年 박문각(初版), 1946(裁判), 일조각 1954.
- 《中等社會 生活과 우리나라의 生活 (歷史)》, 일조각, 1949(210쪽)
- 《국사대관》, 1954, 1955(寶文閣, 613쪽, 索引 6쪽), 1958, 1959.
- 《國史와 指導理念》, 삼중당(90쪽), 寶文閣, 1954.
- 《이병도隨筆集 두계잡필(斗溪雜筆)》, 일조각, 1956(519쪽).
- 《中學校社會生活과 中等局社》, 을유문화사, 1956(204쪽).1963年版(212쪽), 1964年版(212쪽)
- 《譯註 三國遺事》, 동국文化史, 1956, 1962(裁判, 468쪽)1965(3板, 468쪽), 1976年(狂躁出版社 修訂版), 2000年(명문당,468쪽), 2000年(朝鮮日報,누리미디어 製作 CD)
- 《高等學校 社會科 局社》, 일조각, 195年(197쪽)
- 《資料韓國柳學士草稿(資料韓國儒學史草稿)》, 서울대 文理大史學硏究室 油印物, 1959(鐵筆 謄寫本).
- 《中國語版 韓國史對官(許宇成驛)》, 正中書局, 1963.
- 《韓國史對官》, 寶文閣, 1964, 1969(589쪽).
- 《내가 본 어제와 오늘》, 신광문화사, 1966(289쪽).
- 《人文系高等學校 局社》, 일조각, 1969(274쪽).
- 《나의 人生觀: 풀무間의 쇠망치》, 휘문출판사, 1971, 1974(修正3板, 436쪽).
- 《韓國古代社會와 그 文化》, 서문당, 1973.
- 《韓國社會와 그 文化》, 서문당, 1973.
- 《栗谷의 生涯와 思想》, 서문당, 1973.
- 《斗室여적(斗室餘滴)》,박영사, 1975.
- 《修訂版 逆주화선 濟州島난파기》, 일조각, 1975.
-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2001(818쪽).
- 《日語版 韓國古代史硏究》, 學生社, 1980.
- 《韓國의 留學思想 退溪集/栗谷집(韓國思想全集2,共譯)》, 삼성출판사, 1981.
- 《韓國史對官》, 東方圖書, 1983(538쪽).
- 《性器집(成己集)》, 淨化出版文化社, 1983(318쪽).
- 《韓國史의 理解》, 삼성출판사, 1984.
- 《韓國儒學史略(韓國儒學史略):漢文本》, 아세아문화사, 1986(322쪽).
- 《韓國柳學士》(韓國儒學史略 國譯本), 아세아문화사, 1987(506쪽).
- 두계李丙燾博士華甲記念事業委員會,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일조각, 1956(729쪽).
-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한국사학논총》,지식산업사,1987.
- 震檀學會 篇,《歷史家의 有香: 두계李丙燾先生追念文집》, 일조각, 1991(336쪽).
- 《韓國上古史入門》, 최태영 共著, 고려원, 1989.
家族 關係
編輯
- 高調?: 二刻(李珏)
- 曾祖?: 이호정(李鎬貞)
- 祖父: 이태용(李泰用,
1824年
10月 22日
~
1899年
12月 25日
)
이완용
(李完用)과 生計(生系) 22寸, 養鷄(養系) 36寸 間.
- 아버지: 이봉구(李鳳九,
1847年
10月 15日
~
1907年
10月 22日
), 水軍節度使
- 어머니: 羅州 金氏(
1864年
4月 23日
~
1926年
12月 30日
)
- 査頓:
윤치소
(東野尹致昭,
1871年
陰曆
8月 25日
-
1944年
陽曆
2月 20日
), 조카며느리의 親庭아버지이며, 同時에 妹弟인
윤치영
의 兄, 6寸 兄嫂 尹노덕의 오빠로 겹査頓이다.
- 丈人:
조성근
(趙性根,
1876年
陰曆
3月 12日
~
1938年
5月 15日
)
- 妻男:
조백현
(趙伯顯,
1900年
12月 15日
漢城府
出生 ∼
1994年
7月 13日
死亡. 農學者, 토양학자, 農化學子. 雅號는 化膿(華農). 서울대학교 大學院 農學博士)
- 長男:
이기령
(
1914年
7月 26日
~
2002年
1月 29日
,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生化學敎授)
- 次男:
이춘녕
(
1917年
3月 27日
~
2016年
7月 31日
,
서울大學校
農科大學 學長)
- 三南:
이태령
(
1924年
2月 8日
~
2019年
3月 6日
,
서울大學校
師範大學 化學敎育科 名譽敎授)
- 사남:
이동녕
(
1927年
7月 22日
~ ,
서울大學校
物理學科 名譽敎授)
- 오남:
이본녕
(
1936年
1月 14日
~ ,
사우스캐롤라이나대學校
醫科大學 敎授)
- 長女:
李巡警
(
1920年
9月 3日
~
2022年
8月 18日
)
- 사위:
장욱진
(
1918年
1月 8日
~
1990年
12月 27日
,
畫家
)
- 次女:
이운경
(
1931年
9月 9日
~ ,
이운경內科醫院
院長)
- 사위:
민헌기
(閔獻基)(
1928年
12月 7日
~
2021年
3月 6日
,
서울大學校
醫科大學 內科敎授), 휘문義塾 設立者
민영휘
(閔泳徽)(
1852年
5月 15日
~
1935年
12月 30日
)의 曾孫子이며, 風聞女學校 設立者
민덕기
(閔德基)(
1915年
~
1980年
3月 8日
)의 동생이다.
이완용과의 關係
編輯
李丙燾의 祖父가
이완용
과 行列이 같고 22寸 關係다. 一說에는 할아버지가
이완용
이라는 主張이 巷間에 떠돌고 있으나, 孫子
이건무
의 解明에 따르면 이는 事實이 아니다.
[17]
[18]
이병도는 博物館에 展示되어 있던 李完用의 棺 뚜껑을 ‘賣國奴의 棺 뚜껑을 博物館에 展示하는 것에 反對’한다며 불태웠다.
[19]
윤치영, 윤보선 家門과의 關係
編輯
이병도는 4代
大統領
윤보선
과 査頓이다.
윤보선
의 家門과는 二重으로 査頓關係를 形成했는데, 이병도는
윤보선
의 三寸
윤치영
의 妻男인 同時에
윤보선
의 아버지
윤치소
의 査頓이었다.
이병도,
이병묵
은
윤치소
의 동생
윤치영
의 妻男인 同時에
윤치영
의 兄인
윤치소
의 査頓이었다. 同時에 이병도,
이병묵
의 6寸 兄
이병림
은 윤치소,
윤치영
의 妹弟, 妹兄이 된다.
윤치소
의 女同生이자
윤치영
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
(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寸 兄
이병림
(李丙琳)과 結婚 했다. 또한, 李丙燾의 6寸 女同生인
이을남
은
윤치오
의 아들인
윤승선
과 結婚했다.
以外 履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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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
朝鮮史編修會
囑託委員(1927年 5月 31日)
- 前
民主黨
前任委員(1963年 8月 30日 ~ 1963年 12月 23日)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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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친일인명사전 收錄 對象者 4776名 名單 發表
- ↑
이병도史觀을 總批判한다, 이용림, 月刊 自由, 1976.7
- ↑
韓國民族文化大百科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 ↑
朝鮮總督府職員錄, 1926年, 1927年
- ↑
連續심포지엄 「日本에 있어 朝鮮硏究의 蓄積을 어떻게 繼承할 것인가」 第 6 回, <
朝鮮史編修會
의 事業을 中心으로>, 朝鮮硏究月報 14, 日本朝鮮硏究所,1963, ,
"다만 震檀學會의 主要 멤버의 한 名인 李丙燾氏가 靑丘學會의 멤버이기도 했습니다만 이름뿐이었습니다. 李氏는 우리들이 가기 前부터 朝鮮史編修會의 搜査官補로 있었고, 後에는 囑託이 되었습니다만, 어떤 것도 이름뿐이었습니다." 32페이지, 스에마쓰 카즈요시(末松保和)의 證言 中에서
- ↑
가
나
“韓國의 名家(近代便) 이병도”
. 주간조선. 2011年 7月 18日
. 2012年 1月 10日에 確認함
.
- ↑
이병도史觀을 總批判한다, 이용림, 自由, 1976.7
- ↑
詳細한 것은
김창룡
參照.
정지환 (2004). 《大韓民國 다큐멘터리: 獨立記者 정지환의 歷史追跡機》. 人物과사상사. 31~33쪽쪽.
- ↑
朝鮮日報 1986年 10月 9日 號
- ↑
《오마이뉴스》 (2005.4.7) (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47516
서울大 日帝淸算位, 1次 親日人物 12名 發表)
- ↑
《한겨레신문》 (2005.3.28)
古代 總學 ‘親日行跡’ 10名 發表
- ↑
混沌의 解放空間서 自由民主主義 礎石을 놓다
東亞日報 2008年 8月 22日子
- ↑
문창로, 〈古代史硏究 60年의 動向과 課題〉, 《韓國古代史硏究》 第40卷, 한국고대사학회, 2005年 12月, 351~390쪽.
- ↑
오마이 뉴스 정지환 記者 (2006年 6月 15日).
“親日派 後孫, 서울대 總長 任命 옳은가?”
. 2008年 8月 16日에 確認함
.
- ↑
歷史의 오솔길을 가면서, 김용섭
- ↑
가
나
다
윤치영은 李丙燾의 妹弟인 同時에, 조카며느리 윤계경의 三寸이다.
- ↑
김재범 記者 (2005年 11月 15日).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長, 本誌 報道에 對한 反論”
. 브레이크뉴스. 2007年 9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
民族問題硏究所 (2008年 5月 13日). [李完用-棺뚜껑의-행방 “賣國奴 李完用의 棺 뚜껑은 어디로 사라졌나”]
. 2008年 8月 14日에 確認함
.
- ↑
震檀學會 編, <實證史學과 民族史學> - 두계先生과 정홍준氏의 對談,《歷史家의 遺香》pp.273~276, 일조각, 1991
參考 文獻 및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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