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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來 -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以來

高麗와 朝鮮의 文身

以來 (李來, 1362年 ~ 1416年)는 高麗 末期와 朝鮮 初期의 文臣으로 初名은 以內(李徠), 者는 樂補(樂甫)·安國(安國), 諡號는 경절(景節), 本貫은 競走이다.

生涯 編輯

1362年에 高麗 時代에 右正言(右正言)을 歷任한 이존오 (李存吾)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1371年에 이존오가 死亡하면서 佃客祿仕(典客錄事)에 特任되었다. 어린 時節에는 우현보 (禹玄寶)의 文人으로 活動했고 1383年에는 文科에 及第했다. 공양왕 時節에는 右司議大夫(右司議大夫)에 올랐지만 1392年에 정몽주 가 被殺되면서 桂林에 流配되었다.

流配 生活에서 풀려난 以後에는 忠淸道 公州에 隱居했고 1399年에는 左諫議大夫(左諫議大夫)로 登用되었다. 1400年에는 회안대군 (李芳幹)李 일으킨 第2次 王子의 亂 을 鎭壓한 功勞를 認定받아 太宗 (李芳遠)으로부터 秋衝 佐命功臣 (推忠佐命功臣) 2等에 올랐고 나중에 左軍同志冢弟(左軍同知摠制), 계림군(鷄林君) 稱號를 받게 된다.

1402年에는 尖鼠승추부사(僉書承樞府事), 司諫院 大司諫(大司諫)을 거쳐 共助 (工曹) 判書로 任命되었다. 1404年에는 正朝使(正朝使) 資格으로 明나라 를 訪問했고 나중에 司憲府 大司憲 으로 任命되었다. 1405年에는 藝文館 大提學, 1407年에는 經筵官(經筵官), 左賓客(左賓客)으로 任命되었으며 1408年에는 지의정府使(知議政府事) 兼 판頃勝負師(判敬承府事)로 任命되었다. 1416年에 死亡한 以後에 宗廟 에 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