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入團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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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마가쿠인 大學
時節 1學年때부터 主戰 選手였고(입학할 當時 팀의 主張은
고쿠보 히로키
) 그의 同期生인
사와子키 都市카즈
,
시미즈 마사優美
,
구라노 신지
, 1學年 아래인
多카스 요스케
等과 함께 前日本 大學野球 選手權 大會에서 優勝을 包含한 많은 大會에서 훌륭한 實績을 남겼다. 1番·遊擊手로서 ‘푸른 核彈頭’(
?い核?頭
)라는 別名이 붙여질 程度의 猛活躍하는 等
陶土 大學 리그
3冠王과 리그 新記錄이 되는 1시즌 8個의 홈런을 記錄했다. 大學 通算 101競技 出張, 103安打, 打率 2割 8푼 1里, 24홈런, 61打點을 記錄했는데 그 中 홈런 個數는 24個이며 現在도 깨지지 않은 리그 記錄이다. 게다가 最高 殊勳選手 2次例, 베스트 나인에 4次例나 選定되기도 했다. 1996年에는
애틀랜타 올림픽
日本 代表팀 選手로 出戰하여 팀의 銀메달에 獲得에 寄與했는데 이 때
쿠바 代表팀
이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衝擊을 받아 以後의 메이저 리그 挑戰을 自覺하는 契機가 되었다고 한다.
프로 野球 各 球團의 迎入 競爭限 끝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를 逆指名했고
[2]
以後 드래프트 會議에서는 다이에가 1順位 指名으로 交涉權을 얻어 契約金 1億 엔, 成果給 支給 5,000萬 엔, 年俸 1,300萬 엔(금액은 指定)으로 入團했다.
[3]
등番號는
7
番.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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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年 ~ 1998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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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997年 3月의 示範 競技에서 오른쪽 발목에 負傷당했지만 시즌 開幕에 있어서는 별다른 影響은 없었고 5月 3日에
후쿠오카 돔
에서 열린
긴테쓰 버펄로스
前(4次戰)에서 2番 遊擊手로 첫 出戰해 1回 첫 打席에서 첫 安打를 記錄한 것을 包含해 4回에서 滿壘 홈런을 記錄하는 等 成功的인 데뷔를 했다. 外國人 選手를 除外하면 新人 選手의 데뷔 競技에서 滿壘 홈런을 記錄한 것은 日本 프로 野球 史上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순조로운 始作과는 正反對로 以後 다음 競技에서는 打率이 2割 대로 떨어지면서 不振을 겪는 等 景氣面에서 主로 下位 打線으로 起用되는 境遇가 있었다. 프로 2年次인 1998年에는 시즌 21個의 홈런을 記錄하면서 廣角에 칠 수 있는 長打力이 向上돼 ‘恐怖의 9番 打者’(
恐怖の9番打者
)라는 愛稱이 붙여질 程度로 有名해졌다.
199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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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幕 以後부터 3番을 맡았지만 以後에는 打擊 感覺이 갈수록 떨어지면서 슬럼프에 빠지는 等 昨年과 똑같이 下位 打者로 뛰는 境遇가 種種 있었다. 그러나 팀이 優勝을 놓고 競爭을 하고 있는 渦中에 끝내기 홈런을 세 次例나 記錄하는 等 勝負의 힘을 發揮하기도 했고, 9月 8日에는 팀의 先頭 자리를 놓고 競爭하는
세이부 라이온스
前(26次戰)에서
니시자키 유키히로
로부터 끝내기 滿壘 홈런을 때려냈고, 9月 25日
닛폰햄 파이터스
前(26次戰)에서도 닛폰햄 選拔
가네무라 사토루
로부터 決勝 홈런을 때려내는 等 다이에의
퍼시픽 리그
優勝을 寄與함과 同時에
日本 시리즈
人
주니치 드래건스
와의 맞對決에서도 팀의 優勝을 이끌었다.
2000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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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途中 왼쪽 어깨 負傷으로 手術을 위해 팀 戰力에서 長期 離脫되었고 以後
日本 시리즈
에는 復歸했지만 負傷과 守備 位置가 變更된 것에 依해 2000年 시즌에는 뚜렷한 活躍을 보여주지 못했다.
200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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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다 마코토
코치의 助言으로 그 해에 盜壘王 타이틀을 目標로 두면서 3番 打者로 出戰해 프로 데뷔 以後 처음으로 2割 6푼 1里의 打率, 30홈런, 그리고 40個의 盜壘를 達成하며 個人 最多 成跡을 記錄했고, 시즌 最多인 44個의 盜壘를 記錄하면서 盜壘王 타이틀을 席卷했다. 빠른 발을 살린
遊擊手
의 수비면에서도 높게 評價되는 等
베스트 나인
과
골든 글러브賞
(遊擊手 部門)을 同時에 選定되었다. 以後 11月에는
臺灣
에서 開催된 第34回 IBAF(
國際 野球 聯盟
) 월드컵 日本 代表로 出戰하면서
다카하시 요시노부
,
이바타 히로카즈
等과 함께 3番·2窶籔로 出戰했다.
200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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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年은 시즌 打率 2割 5푼 9里에 끝났지만 오프 시즌에는
조지마 겐지
와 함께 다이에의 戰力分析員
街나모리 에이지
로부터 指導를 받아 ‘보다 끌어당겨 치는 타법’으로 變更했다.
2003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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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에는 只今까지의 엉성한 이미지를 바꾸면서 5競技 連續
猛打上
, 1競技 4個의 2壘打를 日本 프로 野球 타이 記錄을 達成했고 1番
무라마쓰 아리히吐
, 2番
가와사키 무네노리
와 함께 盜壘를 記錄했고 시즌 막판에 무라마쓰가 負傷으로 離脫한 적도 있어 結局 시즌 最多인 42個의 盜壘를 記錄해 2001年 以後 2年 만에 盜壘王 타이틀을 席卷했다. 正規 시즌에서 이구치를 包含한
마쓰나카 노부히코
,
조지마 겐지
,
페드로 발데스
等 네 名이 시즌 100打點 以上을 記錄하는 等 日本 野球 史上 最初의 記錄을 樹立했다. 3年 만에 팀은 리그 優勝을 制霸함과 同時에 以後
韓信 타이거스
와의
日本 시리즈
맞對決에서 팀은 4年 만에 日本 시리즈 優勝을 制霸, 이구치는 日本 시리즈 優秀 選手賞을 受賞했다.
오프 시즌에는 一時的인
포스팅 시스템
에서의
메이저 리그
異跡을 球團으로부터 承認되고 있었지만 고쿠보 히로키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로 移籍한 것에 依해 否認했다. 契約 更新에서는 “
나카우치 다다시
球團主의 經營體制가 刷新했을 境遇, 或은 多카즈카 代行이 退任했을 境遇에는 自由 契約의 選擇權은 이구치에게 있다”라는 內容의 覺書를 주고 받았다.
200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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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割 3푼 3里의 打率, 24個의 홈런, 89打點을 記錄하면서 팀의 正規 시즌 1位 達成에 寄與했지만 팀은 그 해에 導入된
플레이오프
에서 세이부(當時 正規 시즌 成跡 2位)에 敗해 結局 리그 優勝을 놓치는 不運을 겪게 되었다. 시즌 終了 後에는 自由 契約 選手로 公示되어 메이저 리그 進出을 公式 表明했다.
MLB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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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화이트 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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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2005年
시카고 화이트 삭스
와 2年 間 470萬 달러로 契約(3年째는 年俸 330萬 달러의 球團 옵션)을 맺었고 4月 4日의 開幕展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戰에서 2番 他者 兼 2窶籔로 첫 出場했다. 4月 6日의 亦是 클리블랜드 인디언스前에는
케빈 밀우드
로부터 메이저 리그 進出 以後 첫 安打를 2壘打로 記錄(李 競技에서는 첫 盜壘도 記錄), 5月 3日의
캔자스시티 로열스
戰에서는
브라이언 앤더슨
으로부터 左側 觀衆席을 向해 移籍 後 첫 홈런을 때려냈다. 그 後에도
스콧 포드세드닉
과 함께 화이트 삭스의 ‘
스몰 볼
’을 牽引해 팀의 5年 만에 地球 優勝 達成에 寄與했다.
10月 5日의 포스트 시즌에서는 前年度 월드 시리즈 優勝팀인
보스턴 레드삭스
와의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ALDS) 2次戰(
U.S. 셀룰러 필드
)에서 決勝打人 逆轉 3點 홈런을 記錄하여 메이저 리그 移籍 1年次에 팀은
월드 시리즈
에 進出했다. 日本人 選手로서는
新潮 쓰요시
,
마쓰이 히데키
,
다구치 소
에 뒤를 잇는 4番째로 월드 시리즈 出戰 選手가 되었다. 以後 팀은 월드 시리즈 優勝에 成功했고, 日本人 選手로는 처음으로 日本 시리즈와 월드 시리즈의 兩쪽 모두를 制霸한 選手가 되었다. 그 後 이 시즌에 對해서는 自己 犧牲을 강요당하는 役割에 不滿이 있었다고 말했지만
아지 기옌
監督은 “이구치만큼 野球를 깊게 理解하고 있는 選手는 없다. 그가 있었기 때문에 화이트 삭스는 월드 시리즈를 制霸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오프 시즌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日本 代表팀 選手로 拔擢되었는데 애初에는 WBC 出戰을 積極的으로 檢討하고 있다는 發言을 했지만 WBC 出戰 表明 後
日本 野球 器具
로부터 어떠한 連絡도 없는 것에 對한 不信感과 메이저 리그에서 클린업을 친다는 꿈을 갖고 調整을 하고 싶다는 意志를 가지면서 出戰을 抛棄했다. 이구치 代身에
미야모토 晨夜
가 拔擢되었다. 日本의 WBC 優勝에 對해서는 “發言할 資格은 自身에게는 없지만 日本人으로서 기쁘다”라고 말했다.
2006年 開幕展에는 長打力을 살리기 위해 打順을 6番으로 變更하는 計劃案이 나왔지만 2番의 適任者는 이구치 밖에 없었기 때문에 昨年과 마찬가지로 主로 2番 打者로 起用되었다. 5月 20日의
시카고 컵스
戰에서 1競技 6打點을 記錄했고, 6月 25日의
휴스턴 애스트로스
戰에서는 1競技 7打點을 記錄하는 等 最終的으로 리그에서 2壘手 最多인 18個의 홈런을 날리면서 아지 기옌 監督은 “打點을 벌 수 있는 强打者가 될려고 渡美했는데 2年 동안 只今까지 했던 적이 없는 일을 잘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2007年 4月 20日에 있은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戰에서 2號 홈런을 記錄하며 通算 250號 홈런을 記錄했다. 같은 해 7月 27日에는 트레이드로
필라델피아 필리스
에 電擊으로 移籍,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는
체이스 어틀리
의 復歸까지는 選拔 멤버로 2窶籔를 맡았지만 語틀리의 復歸 後
찰리 매뉴엘
監督으로부터 3壘手의 轉向을 勸誘받았지만 이를 辭讓했고, 그 때문에 主로 代打로서의 出戰이 繼續되는 等 필라델피아 移籍 後 3割 4푼의 打率을 남겼다. 포스트 시즌 終了 後에는 “現在 永住權을 申請中이며, 다음 시즌은 2壘手의 主戰으로서 起用해 줄 수 있는 球團을 中心으로 이嫡妻를 찾는다”라는 趣旨의 發言을 했다. 12月 18日에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와의 1年 385萬 달러로 契約을 맺었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編輯
2008年 4月 中旬에 32打席 連續 無安打를 記錄하는 等 不振에 시달렸지만 4月 26日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戰에서 日本人 選手로서는 史上 두 番째인 끝내기 홈런을 記錄했다. 5月 16日의
시애틀 매리너스
前(
세이프코 필드
)에서는 다이에 時節의 同僚인 조지마 겐지와 2004年 10月 1日의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2스테이지 競技인 세이부와의 競技(5次戰, 후쿠오카 돔) 以後 1,313日 만에 홈런을 記錄했다. 그 後에도 主戰 2壘手로서 出戰해 있었지만 3安打를 날린 6月 5日의
뉴욕 메츠
와의 競技에서는 酒樓 플레이 途中에 넘어지면서 오른쪽 어깨 負傷을 當했다. 6月 6日에는 메이저 리그 進出 4年 만에 처음으로
負傷者 名單
에 올랐고 以後 8月 2日에 復歸했지만 오른쪽 어깨 負傷의 影響 때문에 結局 9月 1日附로 放出 通報를 받았다. 9月 5日 옛 所屬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契約을 맺으면서 이구치는 플레이오프 出戰 選手 登錄 期間이 지나 플레이오프 出戰 資格은 없었지만 팀은 월드 시리즈 優勝에 制霸하여 그의 팀 先輩인
다구치 소
와 함께 두 番째 팀의 優勝을 經驗하게 되었다.
지바 롯데 마린스 時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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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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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年 11月 15日에 自由 契約 選手로 公示, 復讐 年度의 契約을 提示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始作으로 그 外의 메이저 리그 球團으로부터 3壘手로서의 提議가 있었지만 家族의 生活 環境과 2壘手로서의 提議를 優先해 結局 이듬해인 2009年 1月 19日에 다시 日本 舞臺로 復歸하여
지바 롯데 마린스
에 入團했다. 年俸 1億 8千萬엔의 3年 契約을 맺었고 등番號는 6番으로 配定받아 이 등番號가
오치아이 히로미쓰
,
下쓰시바 기요시
等이 現役 時節에 붙였던 등番號였다. 이구치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
偉大한 番號를 받을 수 있게 되어 正말로 榮光이다. 이 番號에 對해 부끄러워하지 않는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努力하겠다.
|
”
|
그 해에는 開幕展부터 4番 打者로 活躍하는 等 2009年 4月 7日에 思想 7番째가 되는
전타순 홈런
을 達成했는데 이 홈런은 自身의 日本 通算 150號 홈런이었다.
2010年
編輯
3番·2窶籔로 活躍하여 시즌 打率 2割 9푼 4里와 得點圈打率 3割 4푼을 記錄하는 等 리그 2位인 104打點을 記錄했다. 四四球 個數는 112個로 44個의 2壘打는 모두 리그 最高 成績이었다. 그 外에 美日 通算 1500安打를 達成하는 等 지바 롯데의 主軸打者로서 猛活躍을 했다.
2011年
編輯
打擊 成跡은 昨年에 비해 若干 떨어졌지만 팀內 1位가 되는 73打點을 記錄하는 等 健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2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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