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涯 初盤
編輯
윤광선은
1898年
11月 17日
京畿道
開城府
松島面에서 啓蒙運動家 兼 敎育자, 政治人 佐翁
윤치호
와 그의 두 番째 夫人인 中國人
磨崖房
(馬愛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兄은 政治人 兼 社會事業家
윤영선
이고, 둘째 兄은 윤봉성인데 夭折하였다. 누나로는 윤봉희, 윤용희가 있었다. 異腹 동생은 샌프란시스코 總領事館 副領事와 總領事를 지낸 外交官
윤장선
, 피아니스트 兼 大學敎授
윤기선
, 윤정선 等이 있다. 異腹 女同生으로는 윤문희, 윤무희, 윤은희, 윤명희, 윤영희, 윤정희 等이 있다.
大韓民國의 第4代 大統領
윤보선
은 1年 年上으로 그의 6寸 兄이다.
兄弟 政丞인
윤두수
,
윤근수
兄弟의 後孫으로
倒載 尹昕
의 9代孫이며, 할아버지
윤웅렬
은 軍部大臣과
議政府
撰定
을 歷任했다. 獨立運動家인
南宮 億
의 딸
남궁자頃
(다른 이름은 남궁삼人)과 結婚하였다. 딸 윤성희는 火가
원석연
과 結婚했고 딸 윤정희는 약학자, 서울大 敎授인
채동규
와 結婚했다.
아버지 尹致昊는 그의 兄弟 姊妹에게 英文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윤광선의 英文名은 캔들러(Candler), 리드 캔들러(Reid Candler)이다. 幼年 時節 그는 아버지
윤치호
의 坪에 依하면, 散漫하고 恒常 注目을 끌고 싶어 하지만 强靭한 性格이었다 한다.
젊은 時節
編輯
實業人과 技術, 農業人을 育成해야 된다는 아버지
윤치호
의 信念에 따라 그는
京城
의 有名한
高等普通學校
進學을 抛棄하고
한영서願
에 入學하여 酪農業과
木工
, 漁業, 機械 組立, 制度, 建築術 等을 배웠다. 學窓 時節부터 윤광선은
運動
選手
로도 活動하여 이름을 날렸다. 한영서원을 卒業한 後 아버지 尹致昊의 援助로 開城에 農場과 牧場을 經營하였다.
1917年
1月
天安郡
운산리로 가 粗暴(組苞) 販賣를 하였다. 또한 아버지
윤치호
의 구리 鑛山 일에 參與하기도 했다.
1917年
3月 17日
午前 11時
서울
宗敎敎誨
에서
南宮 億
의 딸 남궁자頃(다른 이름은 남궁삼人)과 結婚하였고, 아버지 尹致昊의 親舊이자 누이 윤용희의 養아버지 하디 博士(Dr. Hardie)가 主禮를 섰다. 尹致昊日記에 依하면 結婚式 披露宴은 午後 1時에 簡素하게 명월관에서 敎會 親舊들, 女性 70名과 男子 100餘 名을 待接했다 한다. 尹致昊日記에 依하면 그해
2月 11日
남궁억(南宮檍)과 子女의 結婚式을 相議했다 한다.
日本
으로 留學갔다가
1923年
11月
美國
으로 留學,
에모리 大學校
文科를 卒業한 뒤
링컨 大學校
農科에 編入學하여 修學하였다.
歸國과 農場 經營
編輯
1922年
5月 14日
一時 歸國,
開城 考慮靑年會
에서 開催한 市民大運動會에 參與, 15마일 마라톤 競走에서 優等을 차지하였다.
[1]
1923年
10月
그가 日本에서 美國으로 건너가기 全
新韓民報
에 그가
織造學
을 배울 目的으로 美國으로 留學한다는 것이 新韓民報의
10月 4日
者,
10月 11日
者,
10月 18日
者에 話題로 報道되기도 했다. 그해 누나
윤용희
(美國名 헬렌)과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를 經由, 美國으로 건너가 칼라이니 스파틴벡 中學校 短期 課程에 入學했다.
1924年
칼리아니 스파틴벡 中學校를 卒業하고,
에모리 大學
農科에 入學했다.
1924年
2月 28日
에는 인디아나 州 基督敎 大會에 누나 윤용희와 함께 參與하였다.
1925年
에모리 大學
文科를 卒業하고
링컨 大學校
에 編入했다.
1926年
初
링컨 大學校
農科를 卒業하고
1926年
6月 24日
歸國하였다.
[2]
美國
滯留 中에 아버지
윤치호
와 親分이 있던
李承晩
과
서재필
,
안창호
를 찾아 朝鮮의 狀況을 傳하고 이들과 아버지 윤치호 사이의 連絡을 周旋하였다.
歸國 後
開城
에서 送稿牧場(松高牧?), 松高織(松高織)의 代表理事로 農場과 牧場을 運營하며 酪農業과 牛乳를 生産하였고, 漁場도 經營하였다. 또한
牙山
에도 牧草地를 마련하여 農場과 牧場을 經營하였다.
1925年
7月
부터 윤광선은
8月 17日
~
8月 27日
하와이
에서 開催되는
汎太平洋大會
에 朝鮮人 代表로 參席하는 아버지
윤치호
를 遂行하여
하와이
에 다녀왔고,
1929年
初 日本 도쿄(東京)에서 열린 第3回
汎太平洋大會
에 朝鮮人 代表로 參席하는 아버지
윤치호
, 백관수(白寬洙), 송진우, 유억겸(兪億兼), 金活蘭 等을 遂行하여
日本
을 訪問, 교토를 거쳐 그해
10月
도쿄의 第3次 汎太平洋會議에 다녀왔다.
鑛工業 活動
編輯
1934年
洪城郡
결성면
,
서부면
의 48萬 坪의 光山乙 우세형(禹世亨)과 共同으로 運營하였다.
[3]
그 해
居昌郡
고제면
의 58萬 5700坪을 홍인석(洪仁石), 민영태(閔泳台)와 共同으로 經營하였다.
[4]
1935年
3月 14日
昌城郡
신창면
의 光山乙 開城 사람 김황식(金晃植), 김동순(金東淳),
平安北道
朔州郡 남서면 송평동 사람 이태정(李泰鼎) 等과 共同으로 名義 移轉, 登錄하였다.
[5]
1935年
7月
黃海道
平山郡
용산면
의 鑛山 79萬坪을 經營하였다.
[6]
1935年
10月 4日
黃海道
昌城郡
山窓面
頑風桐 鑛山에 申玩錦山(新完金山)을 設立, 運營하였다.
[7]
또한
해주군
운산면
의 鑛山을 運營하였다.
[8]
그해
12月 16日
에는
洪川郡
서석면
의 光山乙 오순만(吳順萬), 박용현(朴用鉉)과 共同으로 登錄하였다.
[9]
體育團體 活動, 企業 活動
編輯
體育을 좋아한 그는
開城體育會
와
考慮靑年會
等에 加入하여 活動하였다.
1929年
7月 14日
에는
開城市
考慮靑年會館에서
開城體育會
(開城體育會) 創立 發起式에 參與하고, 個性體育會 理事에 選任되었다.
[10]
[11]
1933年
4月
에는
考慮靑年會
主催 開城市民臺運動會의 施賞部 部員으로서 行事에 參與하였다.
[12]
7月 13日
에는 그의 生鮮 加工品이
開城工産品
代表 中 하나로 選定되어
滿洲 博覽會
에 出品하였다.
[13]
1935年
7月 18日
에는
開城府
廳舍 內 水泳場에서 열린
考慮靑年會
主催 第1回 前朝鮮 水泳大會의 施賞部 部員으로
이선근
等과 함께 行事를 進行하였다.
[14]
또한 이 大會의 審判으로 活動했다.
[14]
1934年
3月 1日
洪川 基督敎團體 事件에 連累되어
西大門刑務所
에 收監 中인 丈人
남궁억
의 病保釋을 申請하였다.
[15]
여러番의 病保釋 申請 끝에 그해
7月
받아들여져 南宮檍은
7月 31日
에 釋放된다.
1931年
부터 윤광선은 鑛産業과 漁業에 投資했다가 失敗, 28萬 엔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는 兄
윤영선
이 傳해듣고
1938年
7月 29日
아버지
윤치호
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銀行, 金融機關과 個人에게 빚을 졌는데, 松島에서 惡名 높은 高利貸金業者에게 진 빚이 12萬엔인데 年利가 24% 以上이었다. 이 빚은 아버지
윤치호
와 兄
윤영선
이 代身 蕩減해주었다.
1942年
當時
江原道
洪川郡
서석면
7-21番地 山에서
鑛山
을 運營하였다. 當時 代表者 名義를 윤광선에서 이토 미쓰요視(創氏名)로 改名하여 代表者 名義를 變更한 것이
朝鮮總督府
官報 第4669號(쇼와17년 8月 20日子) 9面 1段에서 確認된다.
[16]
1944年
현제명
의 對話樂團에 參與하여 活動했다.
[17]
光復 以後
編輯
1945年
光復 後
開城自衛隊
를 組織, 開城自衛隊 大將으로 治安 混亂을 收拾하였다. 그해
9月
美軍政
이 駐屯하자
英語
實力을 인정받아
美軍政廳
通譯官
이 되었다. 光復 直後 아버지 尹致昊가 親日派로 몰려 糾彈받다가 그해 12月에 죽었지만 그는 連坐되지 않았다.
美軍政廳
輸送部 通譯官으로 勤務했다.
1946年
11月
까지 開城自衛隊 部隊長으로 開城自衛隊 特別警備大將 현종대(玄鍾大) 外 4名과
平壤
旅行 中인
이관술
(李觀述)을 追跡했으나 찾지 못했다.
[18]
1947年
4月 26日
부터는
홍문大學
(現,
弘益大學校
) 講師의 한 사람으로 兼任 出講하였다.
[19]
1947年
에는
開城
軍政
裁判所
通譯官
으로 赴任하였고
1948年
8月
政府樹立 後 辭退하였다.
1948年
開城軍政裁判所 通譯官으로 在職 中 生고무 暴利問題로
軍政廳
警務部
刑事隊員에 逮捕되어 調査를 받기도 했다.
[20]
4月 21日
逮捕되어
서울
로 押送되고, 嫌疑는 重要 物資의 不法 月頃이었다.
[21]
[22]
1948年
4月 25日
서울鍾路삼영무역 社長 김성균(金成均), 開城貿易 社長 洪원혁(洪元赫),
中國
人 上인 養母(楊某)를 통해
生고무
,
自動車
等 物資 數千萬원을
3.8線
너머로 販賣한 嫌疑로
美軍政
警務部 搜査局 刑事課 刑事들에게 문초받았다.
[23]
4月 26日
生고무 큰 通過 乘用自動車 4臺를
3.8線
以北으로 팔고, 數千萬원의 돈을 받은 嫌疑로 送廳되었다.
[24]
美軍政廳
輸送部 通譯官으로 在職할 때부터 北韓으로 密貿易을 했다
[24]
한다.
以後 個性과 牙山을 오가며 農場과 牧場, 漁場을 經營하던 中
1950年
8月
6.25 戰爭
中 拉北되었다.
6.25 戰爭
이 터지자 夫人
남궁자頃
과 아들들 몇名은 避難했지만,
開城
에 있던 그의 누나 윤봉희 一族, 윤광선과 그 家族, 六寸 누나인 尹視線 一族 等은 그대로
1950年
8月
말 退却하던
朝鮮人民軍
內務署員에 依해 被拉되었다.
8月 15日
或은
8月 25日
에 拉北됐는데 以後의 行方은 알 수 없다. 그가 拉致된 場所는
서울
鍾路區
권농동
179番地인지
中區
新堂洞
路上인지 不分明하다.
윤광선의 딸 中 1名인 윤자희는
日本
에 音樂 工夫를 하러
도쿄
留學을 다녀왔다.
[25]
윤자희가 만나서 사귄 김명호는
開城府
고려동 出身이었다.
[26]
김명호는 富裕한 家庭 出身이지만 東京留學 때부터 左翼思想에 共感하고 共産主義 理念을 實現하기 위하여 한생을 바칠 覺悟를 다진 知識靑年이였다. 윤자희는 김명호와 愛情關係를 맺고 그의 思想을 따랐으며 온갖 苦難과 試鍊을 꿋꿋이 견뎌내면서 共産主義를 信奉했다.
[27]
아들
윤정구
(尹鼎求)는 1950年代에 船長으로 活動하다 後日 考慮遠洋 專務, 常務를 지냈고, 사위
채동규
(蔡東圭)는 약학자로
서울大學校
藥學 敎授와
서울大學校
藥大 學長을 지냈으며,
원석연
(元錫淵) 畫伯은 鉛筆畫家로 有名하였다. 사위 김명호는
開城市
人民委員會
委員長을 지냈다.
以後의 行跡은 알려진 것이 없다.
忠淸南道
牙山市
둔포면
석곡리 先塋 近處에 家廟가 造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