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 第25代 王인 哲宗(在位 1849∼1863)李 王位에 오르기 前에 살던 집으로 哲宗이 王位에 오르자 江華留守 정기세가 建物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面이 여덟 팔(八)字 模樣인 八作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裝飾을 겸하는 恐怖가 기둥 위에만 있는 柱心包 樣式이다. 용흥궁은 淸德宮의 延慶堂, 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類型을 따라 지어져 素朴하고 純粹한 느낌이 든다. 境內에는 哲宗이 살았던 옛 집임을 標示하는 碑石과 비각이 있다.
元來는 江華島에서 農事를 지으며 살고있던 農事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곳으로 보잘것없는 초라한 草家집으로 알려졌으나 이원범이 朝鮮王朝 25代 임금인
朝鮮 哲宗
으로 卽位하게 되고 身分이 平民에서 王族으로 格上됨에 따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草家집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기와집의 潛邸를 지으면서 용흥궁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元來 哲宗은
電界大院君
의 아들로서 實質的으로는 王族이었지만 그의 家族들은 王族 地位를 가지지 못하여 平民으로 身分地位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江華島에서 平民 身分으로 農事를 지으며 江華島의 草家집에서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朝鮮 哲宗(哲宗, 1849~1863)李 王位에 오르기 前에 거쳐하였던 潛邸(暫邸)로 江華留守 정기세가 哲宗 4年(1853)에 只今과 같은 建物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大門을 세우고 行廊채를 두고 있어 昌德宮 樂善齋와 같이 素朴한 雰圍氣를 풍긴다. 宮 안에는 哲宗 潛邸임을 記錄한 碑石과 비각이 있다. 只今 남아 있는 建物은 內戰 1棟, 外傳 1棟, 罰錢 1洞 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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