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刑
(吳?,
1242年
~
1314年
)은
高麗
의 文身이다. 本貫은
海州
(海州). 初名은 오한경(吳漢卿), 者는 月收(月?), 號는 快癌(快菴)이며,
海州
(海州) 出身이다.
五刑
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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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生
| 1242年
高麗
西海도
海州
(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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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亡
| 1314年
4月 1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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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別
| 男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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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籍
|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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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館
| 海州
(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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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稱
| 初名 오한경(吳漢卿)
者 月收(月?)
號 快癌(快菴)
시호
門온(文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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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歷
| 1260年(元宗 1年) 國子監試 壯元 及第
1261年(元宗 2年) 文科 及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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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歷
| 僉議贊成事(僉議贊成事)
감
春秋館
社(監春秋館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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職業
| 文官, 政治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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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母
| 誤克定(吳克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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配偶者
| 橫城 조氏
(橫城趙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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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女
| 3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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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年
(
元宗
1年) 國子監試(國子監試)에 壯元 及第해 東宮詩學(東宮侍學)으로 選拔되었다.
[1]
1261年
(元宗 2年) 乙과(乙科) 4位로 文科에 及第한 後 南警査錄(南京司錄)과 中書注書(中書注書)를 歷任하였다.
忠烈王 때 僉議舍人(僉議舍人)을 지내고,
금녕部
(金寧府?: 現
慶尙南道
金海市
) 守令으로 나갔다가, 任期가 차자 軍部摠郞(軍簿摠郞)으로 任命되었는데 任命狀이 到着하기 前에 吳兄은 任期가 다 찼으니 더 以上 머물 수 없다며 떠나버렸다. 얼마 後 按廉使(按廉使) 幽玄(劉顯)李 금녕(金寧)에 있다가 盜賊의 칼에 찔려 죽자 모든 富(府)가 國文을 當하였으나 吳兄만은 면할 수 있었다.
1297年
(
충렬왕
23年) 左司議大夫(左司議大夫)·密直副使(密直副使)에 올랐고,
1308年
(
충선왕
卽位年) 詞林院學士(詞林院學事)·三司右使(三司右使)가 되었다.
충선왕
이 처음 情事(政事)를 始作하였을 때 詞林院(詞林院)에 史學史(四學士)를 두어 함께 整理(政理)를 圖謀하는데, 吳兄은 그 中의 한 사람이었다.
[2]
帝弓(諸宮) 및 內僚(內僚)의 이름을 고치고, 弓奏(宮主)를 翁主(翁主)로 고치는 等의 일을 主管하였다.
重要 官職을 두루 거쳐 첨의
贊成事
(僉議贊成事), 감
春秋館
社(監春秋館事), 지선부社(知選部事)로 致死(致仕)하였다.
1314年
(
충숙왕
元年)
陰曆 4月 10日
(陽曆 5月 24日) 僉議贊成事(僉議贊成事)로 致死(致仕)韓 吳兄이 졸하니 나이 일흔 셋이었다.
시호
는 門온(文溫)이다.
《高麗史 列傳》에 五刑은 學問이 높고 剝蝕하며 마음이 너그럽고 윗사람[長子]으로서의 風貌가 있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3]
- 祖父?: 오종윤(吳宗尹)
- 部?: 誤克定(吳克正)
- 妻父?: 藻抃(趙?)
- 否認?:
橫城 조氏
(橫城趙氏)
- 아들?: 汚水(吳璲)
- 아들?: 梧亭(吳珽)
- 아들?: 午餐(吳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