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安北道
義州
出生이다. 本貫은 冬服이다.
안창호
가 세운
平壤
의
大成學校
를 卒業한 뒤 故鄕으로 내려와 民族主義 私學
一身學校
를 設立하여 敎育 啓蒙 運動을 벌였다.
1919年
3·1 運動
때는 一身學校 設立者인
유여대
가
民族代表 33人
中 한 사람으로 參加하면서 義州 地域에서
京城府
와 同時에 萬歲 示威가 일어났다. 그는 이 運動에 參加했다가 逮捕令을 被害
滿洲
로 亡命했다.
滿洲에서의 抗日鬪爭
編輯
以後 滿洲에서
윤하진
,
장덕진
,
박태열
等과 함께
光霽靑年團
(1919.6)을,
안병찬
,
김찬성
,
김승만
等과 함께
大寒靑年團聯合會
(1919.11)를 結成하였고, 이듬해 光復團(1920.3)을 組織하고, 以後
光復軍總營
(1920.7)으로 改編하여 吳東振은 總靈將을 맡았다. 그 해에
美國
의 議員團이 視察團으로 國內에 入國할 때에는 이들에게 獨立 意志를 보여주기 위하여
박희광
,
김광추
,
김병현
,
安敬信
,
鄭仁福
,
任用일
等을 國內 各地에 派遣하여 機關 破壞 테러를 祈禱했다. 이 事件으로 그는 闕席裁判을 통해 懲役 10年型을 宣告 받았다.
한便, 大韓民國臨時政府는 1920年 7月 26日 「大韓光復軍參理部規定」, 「大寒光復軍司令部規定」, 「大韓光復軍靈規定」를 制定하고 8月 1日을 施行日로 삼아 光復軍司令部를 組織하였다.
하지만 傘下 武裝獨立軍과 疏通이 원활하지 못한 光復軍總營은 臨時政府 組織改編을 따르지 않고 獨自的으로 繼續 活動하였다.
1922年
頃부터는 滿洲 地域에 흩어져 있던 獨立 運動 團體들의 團體 統合 움직임이 있었다. 吳東振은
양기탁
의 統合 提案에 贊成하여 聯合 獨立 運動 團體인
대한통의부
를 組織하여 交通部長·財務部長을 맡았으며, 1924年 臨時政府의 特命으로 統義府 5中隊 所屬 3人組 暗殺團으로 알려진
박희광
,
김광추
,
김병현
에게 諜者이며
旅順朝鮮人回
(旅順朝鮮人會)書記인 惡質 親日派 정갑주(鄭甲周)를 暗殺하라는 指令을 내렸고, 1924年6月 一進會(一進會)원으로 國權侵奪에 앞장섰던 親日派 巨頭 최정규(崔晶奎)와
伊藤博文
의
收養女
利子 賣國女人
배정자
(裵貞子) 暗殺指令을 내린것으로 알려졌다. 1924年 7月 22日頃 臨時政府와 公募로
日本領事館
破壞 命令을 내렸으나,
박희광
이 投擲한 爆彈이 不發로 失敗했다.
[3]
1925年
에는 統義府를 中心으로 獨立運動團體들이 聯合 結成한
正義府
에서 軍事副委員長 兼 辭令狀으로 活動했다.
1926年
에는 梁起鐸과
天道敎
革新派,
蘇聯
地域의 獨立 運動家들이 糾合,
高麗革命黨
을 組織하였다. 日帝 警察의 統計에 따르면,
1927年
까지 吳東振은 延人員 1萬名이 넘는 部下를 이끌었고 日帝 官公署를 百餘次例 襲擊하여 殺傷한 사람이 900餘名에 達한다. 이런 前科로 인해 그는
김좌진
,
김동삼
과
3代 盲腸
으로 불리기도 했다.
[4]
그러나
1927年
12月
에 옛 同志인 김종원의 密告로
新義州
의 朝鮮人 刑事
김덕기
에게 逮捕되어 押送되었고, 以後 精神病 診斷과 함께 武器 懲役刑을 宣告 받아 精神病者들을 受容하는
公州 刑務所
에서 服役했다.
法廷 鬪爭과 斷食 鬪爭을 하던 中 顧問으로 精神病 診斷을 받고 公州 刑務所에서 獄死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死亡 時期에는 異說이 있다. 1927年 12月
[5]
,
1930年
[6]
,
1936年
[7]
,
1944年
5月 20日
警
[1]
[2]
으로 다양하게 記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