出生과 家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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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年
(純祖 18年) 2月 3日,
漢城府
陽德房의 司祭에서 아버지
민치구
(閔致久)와 어머니
全州 李氏
(全州 李氏)의 3男 2女中 長女로 태어났다.
[1]
本貫은
餘興
이며,
肅宗
의 繼妃인
인현왕후
의 아버지
민유중
의 6代孫이다. 어머니 李氏는
宣祖
의 아버지
덕흥大院君
의 後孫으로,
哲宗
臺에 역모죄로 社史당한
이하전
의 고某이다.
男동생인
민승호
는 11寸 아저씨인
민치록
의 養子로 入籍되었는데, 민치록의 딸이
高宗
의 王妃인
명성황후
이다. 閔升鎬는 高宗의 外叔父인 同時에 明成皇后의 養오빠가 되어 興宣大院君 下野 以後 閔氏 戚族의 首長이 되었으나
1874年
(高宗 11年), 疑問의 爆彈 테러로 死亡하였다.(→
민승호 一家 暗殺 事件
)
막내 男동생인
민겸호
는
宣惠廳
堂上으로 不淨腐敗를 일삼다
壬午軍亂
當時 軍人들에게 被殺되었다.
흥선군과의 婚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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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年
(純祖 31年), 14歲의 나이로
남연군
의 넷째 아들인
흥선군
李昰應과 婚姻하였다.
[1]
男便 李昰應이 흥선不正과 興選定에 봉해지면서 新人(?人, 情3品 宗親의 妻)과 新婦인(?夫人, 情3品 堂上 宗親의 妻)으로 封爵되었고,
1843年
(憲宗 9年), 李昰應이 흥선군으로 進封되면서 閔氏 亦是 現婦人으로 進封되었다. 흥선군과의 사이에서 2男 2女를 두었다.
府大夫人에 封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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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年
(哲宗 14年) 12月,
哲宗
이 後嗣 없이 昇遐하자 王位 繼承權은 哲宗의 4寸인
익평群
의 아들과 哲宗의 戶籍上 6寸인
흥선군
의 아들들로 壓縮되었다. 흥선군은
신정왕후
를 자주 찾아 親分을 쌓고 自身의 아들 中 한 名을
翼宗
의 養子로 삼는다는 條件으로 王位 繼承에 對한 同意를 얻어냈다.
[2]
신정왕후
는 흥선군과 閔氏의 둘째 아들 再黃(載晃,
高宗
)을
翼宗
의 養子로 삼아 翼城軍(益成君)의 軍號를 내리고 王으로 卽位시켰다.
[3]
흥선군이 王의 私親으로
大院君
에 封爵되면서 閔氏 또한 大院君의 夫人에게 附與하는
府大夫人
의 綽號를 下賜받고
여흥부大夫人
(驪興府大夫人)에 封爵되었다.
[4]
天主敎 信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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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부大夫人은
天主敎
信者로, 日課門(日課文)을 읽었으며, 아들 再荒夷 임금이 되자
雲峴宮
에서 監査
미사
를 올리기도 하였다.
흥선大院君
은 天主敎에 별다른 反感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表面的으로는 反對하면서도 아내의 天主敎 信仰을 默認하였다.
[5]
[6]
베이징 條約
으로
淸나라
가
러시아 帝國
에
沿海州
를 割讓하면서, 朝鮮과 러시아는
豆滿江
河流를 境界로 國境을 接하게 되었다. 淸나라에서는 베이징 條約으로 인해 天主敎의 布敎가 許容되었다.
1864年
(高宗 1年), 러시아人이
咸鏡道
慶興
을 통해 朝鮮과의 通商을 要求하자 朝鮮 政府는 이를 拒否하였다.
한便 러시아의 通商 要求에 危機感을 느낀 興宣大院君은 朝鮮에 入國한 프랑스 主敎
베르뇌
를 통해
프랑스
政府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帝國
을 牽制하려 하였다. 府大夫人은 아들
高宗
의 乳母이자 天主敎 信者인 朴(朴)마르타를 통해 베르뇌 主敎와 接觸하려 하였으나, 베르뇌 主敎는 政治 보다 信仰의 布敎에 重點을 두었다. 이들에게서 政治的 利點을 얻을 수 없게 되고, 代身들 또한
東學
과 天主敎를 惑世誣民의 邪敎로 敎勢擴張에 對해 反撥하였다. 大院君은 天主敎 彈壓에 對한 敎令을 發表하고 베르뇌를 비롯한 프랑스人 宣敎師들과 朝鮮人 天主敎徒 數千名을 處刑하였다.
丙寅迫害
를 口實로 프랑스軍이
江華島
를 侵犯하였다.(→
丙寅洋擾
)
1886年
(高宗 23年),
造佛 修好 通商 條約
으로 朝鮮 內에서
天主敎
의 布敎의 自由가 許容되었다. 府大夫人은
1896年
파리 外方傳敎會
의
뮈텔
主敎
의 집電荷에
洗禮
를 받았다.
洗禮名
은 마리아이다.
壬午軍亂 前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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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年
(高宗 19年) 6月, 新式 軍隊인
別技軍
과의 差別 待遇와 밀린 月給을 제때 받지 못한 軍人들의 不滿이 暴發하였다. 軍人들은 밀린 月給을 쌀로 받아가라는 指示에
宣惠廳
에 몰려들었는데, 모래와 겨가 섞인 쌀을 받자 不滿이 暴發하였고 勢를 모아 軍亂을 일으켰다.
壬午軍亂
이 發生하자 성난 軍人들이 軍亂의 原因으로
명성황후
를 指目하였고, 王妃를 索出하기 위해 宮闕에 闌入하였다. 한便 軍人들의 推戴를 받아 政界에서 물러난
흥선大院君
이 再執權하였다. 部隊夫人 閔氏 또한 入闕하여 自身이 타고 온 四人轎에 明成皇后를 숨겨주었다. 明成皇后는 府大夫人의 가마를 타고 宮闕을 빠져나와
장호원
으로 避身하였다. 府大夫人의 동생이자 大院君의 妻男인
민겸호
는
宣惠廳
堂上으로 있으면서 不淨腐敗를 저질렀고, 明成皇后와 더불어 閔氏 戚族의 元兇으로 指目되어 亂兵들에 依해 난자당했다.
[7]
흥선大院君
은 壬午軍亂을 鎭壓하기 위해 出兵한
淸나라
軍隊에 依해
톈진
으로 押送되었다.
1898年
(光武 2年) 1月 8日, 死亡하였다.
[8]
1907年
,
흥선大院君
을 獻議大院王(獻懿大院王)으로 推尊할 때 여흥부大夫人 또한
순목隊員非
(純穆大院妃)로 追尊되었다. 墓所는
京畿道
南楊州市
에 位置한
흥원
(興園)으로 興宣大院君과 合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