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이름
編輯
過去 量量(陽良), 量産(陽山), 推計(秋溪) 等으로 불렸다.
- 統一新羅
~
高麗
?:
量量
부곡
(陽良部曲)이었고,
처인部曲
(處仁部曲)과 함께 受注(
水原
)의 管轄이었다.
- 1362年
(
高麗 恭讓王
11年)?:
安城
으로 管轄 官廳이 變更되었다.
- 1399年
(
定宗 (朝鮮)
元年)?: 安城에서 分離돼
양지현
(陽智縣)李 되고,
監務
가 派遣되었다.
- 1413年
(
朝鮮 太宗
13年)?: 양지현에
縣監
을 두게 되고, 치소를
광주목
(廣州)의 推計香으로 移轉하였다. 安城 等의 隣近 고을과 함께 忠淸道에서 京畿道에 編入되었고, 光州 管內의 考案(高安)·대곡(大谷)·목惡(木岳)·제村(蹄村)의 4個
부곡
을 倂合하였다.
[1]
- 陽地郡邑誌(1899)에는 다른 記錄이 傳해져 온다. 高麗 時代에 읍내면 등촌(現 양지면 陽地4里)에 登院郡守(藤原郡守)가 터를 열었고, 朝鮮 太祖 臺 個國 初期에 치소를 고서면 주곡리(現 고삼면 신창리)에 移轉했다가 1470年(成宗 1年) 주동면 金箔産 아래로 移轉해 邑號를 推計라 하고 縣監을 두게 되었으며, 1面이 5, 6洞에 不過하여 管轄이 좁다는 理由로
죽산군
의 4部曲을 編入하고 10個 面을 두었다고 한다.
[2]
- 1500年
(
朝鮮 燕山君
6年)?:
利川
과 合倂하였다가 4年 後인
1504年
에 復舊되었다. 이때 정수산 아래에 치소를 두고 近方의 5個 마을을 統合하여 邑內面을 設置했다. 當時 管轄 面은 11個였다고 한다.
- 1895年
6月 23日
(陰曆 尹
5月 1日
)?:
23部制
로 行政區域이 再編되면서
軍
(郡)으로 昇格되어
충주부
管轄의
양지군
이 되었다가, 이듬해
13道制
로 다시
京畿道
에 屬하였다.
- 1906年 9月 24日: 南東部의 월경지 제촌면이
죽산군
에 編入되었다.
[3]
- 1914年
4月 1日
?: 一齊
朝鮮總督府
의 行政區域 統廢合으로
龍仁郡
에 合倂되고,
面
이 大擧 合倂되었다.
[4]
- 읍내면, 주동면, 주북면, 朱書면 一部 → 龍仁郡
內斜面
- 朱書면 一部 → 龍仁郡 容認면
마평리
- 고동면, 고서면, 고북면 → 龍仁郡
고삼면
- 1915年
6月 1日
?: 고삼면의 19個里 中 3개리가
安城郡
양성면
에 編入되었고, 나머지 16개리度 統廢合되어 7개리가 되었다.
[5]
- 1963年
1月 1日
?:
고삼면
이
龍仁郡
에서
安城郡
으로 移管되었다.
[6]
- 1995年
?:
龍仁郡
內斜面이 日帝 殘滓 淸算 및 地域 正統性 復元의 一環으로 옛 이름인
양지면
으로 改稱하였다.
[7]
區域 大棗
編輯
舊韓末
|
1914年
|
現在
|
양지군 읍내면
|
龍仁郡 內斜面
|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
양지리, 남곡리
|
양지군 주동면
|
제일리, 평창리, 職金利, 추계리
|
양지군 주북면
|
頂수리, 對代理, 주북리
|
양지군 주서면
|
송문리
|
龍仁郡 授與面
|
용인시 처인구
|
마평동, 운학동, 해곡동
|
양지군 고동면
|
龍仁郡 고삼면
|
安城市 고삼면
|
쌍지리, 월향리, 봉산리, 삼은리
|
양지군 고서면
|
신창리, 대갈리
|
양지군 고북면
|
가유리
|
안성시 양성면
|
미산리·노곡리 各 一部 (1915年 移管)
|
양지군 목惡面
|
龍仁郡 원삼면
|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
학일리, 목신리
|
양지군 朴曲面
|
龍仁郡 外斜面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
박곡리
|
양지군 고안면
|
백봉리, 고안리
|
양지군→죽산군 제村면
|
安城郡 粥일面
|
안성시 일죽면
|
능국리, 당촌리
|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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